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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828화 (818/1,404)

#828화 왕이 사라진 사이 (5)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유혜선 팀장이 다크서클이 가득한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몸도 흐느적흐느적 마치 좀비를 연상하는 모습으로.

거의 파김치네.

“오셨어요?”

“네, 그런데 요즘 잠은 제대로 자고 있어요?”

“으음, 하루에 세 시간 정도는……? 아닌가? 언제 잤더라?”

생각보다 상태가 더 심각하네.

“그러다 저보다 팀장님이 먼저 실려 가겠어요.”

“괜찮아요. 잠은 죽고 난 뒤에 많이 자면 돼요.”

듣기에 따라 정말 무서운 말인데?

“아! 마침 잘 왔어요. 안 그래도 보여 줄 게 있어요.”

그러면서 다시 흐느적거리는 몸을 이끌고 내 팔을 잡고는 어디론가 나를 끌고 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전에 내가 쓰던 것과 유사한 형태를 지닌 검은 빛깔의 VRS가 놓여 있었다.

밖에서도 언제든지 손댈 수 있도록.

상단의 커버가 싹 제거되어 있는 그런 형태.

크기는 꽤 많이 커진 건가?

대충 살펴봐도 이전의 것과 비교해서 거의 3배에 달하는 크기였다.

아마 이 녀석이 전 세계에서 가장 큰 VRS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때요?”

“꽤 크네요.”

“원래는 좀 더 소형화를 시켜야 하는데 급하게 커스텀한다고 이 정도 크기가 최선이었어요.”

“확실히 이 크기면 못 팔겠네요.”

좀 큰 집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또 모를까.

거의 큰 방 정도의 크기가 나오는데 이걸 일반적인 가정에서는 절대로 집 안에 들여놓을 수 없는 크기였다.

큰 방 하나를 완전히 포기하면 가능할지도.

“네, 이걸 그대로 팔면 우리 회사 망할걸요?”

그러면서 유혜선 팀장이 날 마주 보며 웃어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한 사람만 쓰면 되니까, 상관없잖아요.”

이번에도 역시 내 전용 커스텀 버전인가.

전에 내가 쓰던 것도 일반적인 VRS 보다 크기가 컸던 걸 생각해 보면 특별히 문제가 되거나 하진 않았다.

“이 녀석은 쓸 수 있는 건가요?”

“제 역량을 총동원해서 제작했어요. 아마 가능할지도 몰라요.”

이미 그 장담은 전에 몇 번 더 들었다는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나 하나 때문에 밤잠 설쳐가며 몇 달을 고생한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닐 테니.

그리고 이젠 기대보다는 좀 덤덤해졌다는 게 맞는 표현일 테고.

기대가 없으니 실망도 없는.

“흐음, 전에 녀석은 아예 거부를 했잖아요.”

“네, 그랬죠. 하지만 이 녀석은 다를 거예요.”

“이 녀석은 다른가요?”

커진 크기만큼이나 뭔가 있어 보이기는 한데…….

“제가 실수한 부분이 보여서 이번에 개선을 했어요. 아니, 아예 다른 방식으로 도전을 해봤죠.”

“어떤……?”

“예전에는 제가 기존의 VRS에서 계속 반응 속도만 올리면 된다고 판단해서 좀 더 좋은 코어를 만들어 달라고 코어 개발부에 닦달을 했어요. 하지만 이 코어라는 게 몇 달 만에 뚝딱 하고 나오는 물건이 아닌 데다가…… 새로 개발한 코어를 상용화하려면 그만큼 또 오래 걸리거든요. 대략 이 년 정도는 더 기다려야 해요. 완전히 플랫폼을 갈아엎어야 해서.”

“이 년…….”

“방금 욕하신 것 아니죠?”

“아, 아닙니다.”

“호호, 농담이에요.”

끙.

농담할 기운은 있어 보여서 다행이려나.

“음, 그리고 새로운 코어가 나온다고 해도 승호 씨의 RTP를 커버할 정도로는 개선이 안 될 거예요. 지금 개발 속도를 보면요.”

“그런가요.”

“네, 사실 승호 씨의 최대 RTP를 제어할 만큼의 물건은 몇 십 년이 지난다고 해도 만들기 힘들걸요. 단순히 반응 속도만 올린다고 되는 게 아니라 안정화를 시키고 반응 속도에 맞는 로직을 전부 새로 짜야 해서 아직까지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요.”

이건 꽤 실망인데.

이쪽 분야의 최고의 전문가가 하는 말인데 어지간해서는 틀리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실망은 금물!”

최대한 실망한 티를 내지 않으려 했으나 얼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는지 유혜선 팀장이 내 표정을 풀어주려 노력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을 보자 바로 표정이 풀어졌다.

“표가 많이 났나요?”

“승호 씨 의외로 표정 못 숨기는 거 알아요?”

“나름 잘 숨기다고 생각하는데요.”

“에이, 아닌걸. 암튼, 그래서 기본적인 접근 방식을 아예 바꿨어요.”

방식을 바꾼다라…….

뭔가의 방법을 생각해 낸 거려나.

“지금 승호 씨의 가장 큰 문제점이 뭔지 알아요?”

“VRS에 접속 자체를 못 하는 거죠. 아닌가요?”

사실 접속만 가능했어도.

어느 정도 감각을 죽여 가면서 플레이를 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그것조차 불가능.

접속을 해야 뭐라도 해보지.

“음, 제가 단언하기는 그렇지만 아마 무의식적으로 신체가 뇌를 보호하기 위해서 접속 자체를 거부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럼 방법이 없는 것 아닌가요?”

사람의 뇌라는 게 의식적으로 조절 가능한 그런 부위는 아니니까.

“안 되면 되게 해야죠?”

“그건 엄청 무서운 말인데요?”

“일단은요. 승호 씨의 감각이 자유롭게 뛰어다닐 수 있는 수준의 환경이 조성되지 않으면. 접속을 거들떠도 보지 않을 거예요.”

“그게 안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조금 꼼수를 부린다면요?”

“꼼수요?”

그와 함께 유혜선 팀장이 손가락으로 새로운 커스텀 VRS를 가리켰다.

“이 녀석 크기가 왜 이렇게 큰지 궁금하지 않아요?”

“궁금하기는 하죠.”

유저가 누울 공간이라고 해 봐야 어차피 어른 한 명 정도의 길이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건 그보다 세 배나 길고 넓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크게 만들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그럼 이것 한 대의 가격이 얼마 정도 할 것 같아요?”

“글쎄요?”

보통 VRS의 가격이 몇 백만 원 선에서 끝나니.

물론 고급형의 경우 천만 단위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유저를 관리하는 편의 사항의 문제였고.

세 배의 크기라면…….

가격도 최소 세 배이려나?

아니지.

단순히 그 정도 가격 때문에 물어본 것은 아닐 터.

“일이억쯤 하나요?”

최대로 많이 잡아 봐야 이억 정도?

VRS라는 게 접속을 유지시켜 주는 물건이라 그 이상은 큰 값어치를 낸다고 생각하긴 힘들었다.

그때 유혜선 팀장이 손가락을 다섯 개 펼쳐 보였다.

“오억요?”

“아뇨.”

음.

표정만 봐서는 오천은 아닐 건데…….

설마.

“오 십억은 아니겠죠?”

그러자 유혜선 팀장이 고개를 저었다.

진짜 오천이려나?

그럼 왜 물어본 거지?

“통이 작으시네요. 로스트 스카이에서는 수백억을 쓰시던 분이 말이죠?”

그런 유혜선 팀장의 말에 순간 표정이 굳어졌다.

진짜냐?

“오백 억……인가요?”

오백이라는 말을 듣자 그제야 유혜선 팀장이 미소 지었다.

“조금 더해야 하긴 하지만요.”

“미…….”

“방금 미쳤다고 하려고 했죠?”

“아, 아닙니다.”

이 VRS가 그렇게 비싸다고?

일반인은 손댈 수도 없겠는데.

아니.

근처에 가다가 흠집이라도 날까봐 멀리 돌아가야 할 판이다.

“대체 저 안에 뭘 집어넣은 겁니까?”

“으음, 대충 슈퍼 컴퓨터요?”

“……하.”

솔직히 할 말을 잃어버렸다.

뭘 집어넣어?

“너무 놀라지 말아요. 그리고 한 대가 아니라 세 대가 들어갔으니까요.”

“더 놀랄 것도 없겠네요.”

싼 것도 한 대당 억 소리가 나는 녀석들을 저렇게 집어넣어 놨으니 비쌀 수밖에.

“음, 솔직히 기존의 코어로는 승호 씨가 조금만 RTP를 올려버리면 그 자리에서 타 버려서 쓸 수가 없어요.”

“네, 전에 녀석도 그렇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생각한 건 몇 개의 코어를 연결해서 쓰면 어떨까 해서 생각한 게 멀티 코어죠.”

이것도 전에 들었다.

바로 이전의 실험이 그런 식이었으니까.

“아예 접속이 안 됐었죠.”

“네, 저희도 따로 실험해 보니까 코어들이 홀라당 타 버리더라고요. 몇 개를 연결해도요.”

“그래서 슈퍼 컴퓨터를 집어넣은 겁니까?”

“음, 꼭 그런 이유는 아니에요. 어차피 슈퍼 컴퓨터라고 해도 방식은 코어를 여러 개 연결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그럼?”

“음, 보통은 VRS라고 하면 접속기기로만 생각하지만 사실 유저와 게임 사이에 생기는 감각들의 완충 역할을 하는 녀석이 VRS에요.”

“네, 그렇죠.”

“방화벽이랄까. 만약 한쪽이 너무 상위라면 중간에서 제동이 걸려요. 승호 씨 같은 경우는…… 그 와중에 코어가 홀라당 타 버리겠죠. 감당이 안 되니까.”

원리는 이전부터 들어서 잘 알고 있는데.

슈퍼 컴퓨터를 쓰면 뭔가 방법이 있다는 거려나.

그때 유혜선 팀장이 의외의 말을 했다.

“여기서 생각을 완전히 바꿨어요.

그러면서 다시 VRS를 가리켰다.

“슈퍼 컴퓨터를 단순히 많은 코어로만 쓰려고 넣은 게 아니에요.”

“그럼?”

“인공지능.”

“인공지능요?”

“네, RTP가 치솟는 걸 그대로 유지한 채 그 충격을 전부 인공지능이 대신 받아 주게 만들었어요.”

“이해가 안 되는데요.”

“으음, 뭐랄까. 코어가 한계치를 넘어가면 타 버리잖아요.”

“그렇죠.”

“인공지능이 중간에 그 코어들을 계속 다른 코어로 바꿔 주면서 충격을 최대한으로 줄여 줄 거예요.”

“중간에 교체를 한다는 건가요?”

“네, 냉각을 아무리 잘해 봐야 답이 없으니까 코어가 한계까지 밀어붙이기 전에 새로운 코어로 데이터를 넘겨 버리는 거예요. 억지로 냉각을 하기보다.”

“꽤 복잡하네요.”

“음, 간단하게 말하자면요. 코어들을 전부 오버클럭해서 잠시라도 승호 씨의 높은 RTP를 받아 줄 수 있게 해놓고요. 나오는 열은 무시할 생각이죠. 다른 말로 냉각 시스템은 포기하는 셈이에요.”

“그래서…… 저 많은 코어들이 필요한 거군요.”

참.

카드를 돌려막는 것도 아니고.

다른 코어들로 돌려막다니.

“네, 그리고 정상적으로 냉각 시스템을 넣으려면 지금의 VRS보다 수백 배는 더 커져야 할 거예요.”

“그건 확실히 무리겠네요.”

집을 수백 배 넓은 곳을 사는 건 가능하나.

현실적으로 꽤 어려운 일이었다.

“네, 그리고 코어를 전부 쓸 정도로 감당이 안 되면 인공지능이 바로 알려줄 거예요.”

“인공지능의 존재 이유군요.”

“안전이 최선이니까요. 일종의 더미에요. 승호 씨에게 가는 충격을 완화시켜 줄 수 있는. 최후방의 안전장치.”

확실히.

아무리 게임이 좋다고는 해도 목숨을 내놓고 할 정도는 아니니까.

반대로 저런 안전장치가 있다면.

해볼 만하지.

“간단하게 부스터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부스터군요.”

“대신 너무 오래 쓰면 안 돼요. 돌려 막는 코어를 전부 써버리면 결국 타버리는 건 마찬가지니까요.”

“후. 알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인공지능이 고장 난다던가?”

“아, 그건 괜찮아요. 그래서 일부러 세 대의 슈퍼 컴퓨터를 집어넣었어요. 하나가 작동을 안 하면 다른 녀석들이 작동하게끔 서로 보완이 되어 있거든요. 거기다 동시에 셋 다 작동하지 않으면 바로 VRS의 전원이 내려오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된답니다.”

“이중, 삼중으로 해놨군요.”

“승호 씨를 위해서 이 정도는 해야죠.”

무려 오백 억짜리 VRS.

부스터와 안전장치라 이거지…….

이렇게 확실한 안전장치가 있다는 건.

심리적으로 굉장한 안도감을 주었다.

그때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혹시 이거 고장 나면 제가 물어야 하는 건가요?”

내 물음에 유혜선 팀장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뇨, 마음대로 쓰셔도 돼요. 회장님이 특별히 지시한 거라.”

흠.

이상하네.

“세상에 공짜는 없던데요?”

“당연한 걸 받는다고 생각하세요. 승호 씨가 DS에 얼마나 큰 이익을 주었는지 알면 깜짝 놀랄 거예요. 말만 하면 이런 건 몇 대라도 쓸 수 있어요.”

“뭐 그렇다면야. 잘 쓰도록 하죠.”

곧 몇 가지 검사를 하고는 새로운 커스텀 VRS에 누웠다.

그렇게 저 멀리 아득히 정신이 사라지기 전에 속으로 빌었다.

후.

제발 이번에는 잘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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