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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823화 (813/1,404)

#823화 파편의 시험 (4)

길고 긴 어둠의 터널.

예전에 한 번 와 봤던 그때의 그 기억 속 어딘가.

정처 없이 그 길을 한참 걷다 보니 어느새 저 멀리 환한 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계속 가야 해……!

빛이 있는 저곳으로.

누군가 나를 부르는 저곳으로.

‘제발…… 일어……!!’

그리고 언제부터 모르겠지만.

귓가에 계속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정신이 흐릿해지려고 할 때마다 나의 무너지는 혼을 잡아 주는…….

조금만 더 힘을 내면.

갈 수 있어.

그렇게 무한히 걷고 걸어 결국 빛이 있는 곳에 도착한 순간.

더없이 무겁게 느껴지는 눈꺼풀이 떠지며 시린 빛이 내 눈으로 따갑게 밀려들어 왔다.

“으음…….”

마치 한참을 자고 일어난 듯 힘이 하나도 없이 나른한 상태라고 해야 할까.

눈꺼풀 하나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았다.

그와는 달리 귓가에는 주변의 소리들이 한꺼번에 밀어왔다.

“오빠!! 정신 들어요?!!”

아.

귀가 울리네.

이건 은하의 목소리인가?

은하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여기서 왜 들리는지.

집에서 일어날 때 이런 소리가 들릴 리가 없는데.

혹시 꿈?

다시 자야 하려나.

일어나자마자 네가 반겨 주는 건 좋긴 하지만.

아무래도 현실은 아닌 모양이야.

다시 잠들려고 눈을 감았는데 이번에는 잔뜩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잠들면 안 돼요!”

아…….

눈이 감기는데…….

잠들면 안 되는 거니?

그때 내 손을 누군가 꽉 쥐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주 따뜻하면서도.

부드러운 피부 너머로 온기가 전달되는.

거기다 뜨거운 뭔가의 물방울이 내 손목 위에 마구 떨어져 흘러내렸다.

어…….

꿈이라기에는.

너무 감각이 따뜻한데.

으음.

아무래도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려 힘겹게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커다란 두 눈망울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은하가 보였다.

이미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어 엉망이네.

아마도 내 손목에 떨어져 내린 게 저 눈물이려나.

하아.

뭔지 몰라도 내가 울릴 일을 해 버린 모양이네.

“왜 그렇게 울어…….”

“흐극, 진짜……! 멍청이! 바보!”

겨우 말을 걸었더니 은하가 아예 펑펑 울어 버렸다.

아.

미치겠네.

갑자기 왜…….

그때 갑자기 머릿속으로 마지막 기억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

설마 정말로 쓰러졌던 거였나?

그땐 VRS 안이라서 밖에서 그냥 깨겠거니 했는데.

지금 은하의 격한 반응을 봐서는 아마도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여기 내가 누워 있는 것도 그렇고.

마치 필름이 끊긴 것처럼 기억이 아예 없어.

대체 얼마나 이렇게 있었던 거지?

“은하야, 내가 쓰러진 지 얼마나 됐어?”

“흑, 오늘이 이 주째에요.”

“아…….”

은하의 저 반응이 이해가 되네.

멀쩡하게 플레이하던 내가 갑자기 쓰러져서 무려 2주나 누워있었다니.

몸이 이렇게나 무거운 것도.

어쨌든 일단 우는 얘부터 좀 달래야겠는데.

은하가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자 어떻게 힘이 들어가기는 했다.

그리고 힘겹게 손을 들어 올려 은하의 볼에 흐르는 눈물이 닦아 주었다.

정확하게는 손으로 쓸어내린 수준이지만.

“미안. 많이 걱정했지?”

“흐윽! 진짜아! 또 쓰러지면 확 죽여 버릴 거야!!”

“하하…… 죽이지는 말아 주라.”

“끄윽!! 정말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끙.

걱정 두 번 시켰다가는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어.

그리고 격렬하게 울던 은하를 달래자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울음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이제야 날 보고는 부끄러운지 고개를 돌렸다.

“지금 쳐다보지 말아요. 엉망일 거예요.”

“아아, 눈 감고 있을게.”

“눈은 감지 말고!!”

“그래, 알았어. 나 어디 안 가니까…….”

“하아, 조금만 기다려요. 의사 선생님 데리고 올게요. 절대 잠들면 안 돼요!”

내가 다시 잠들면 또 못 깰 거라고 생각하는 거려나.

걱정하는 눈빛 가득하게 날 보던 은하가 어렵게 발을 떼서 밖으로 나갔다.

“뭐가 잘못된 걸까…….”

분명 마신의 파편의 환영과 싸울 때는 별 이상이 없었는데 말이지.

그때 좀 다른 형식의 감각 속으로 빠져들긴 했지만.

그 가만히 있었으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감각이 문제였나.

생각해 보니 걸릴 만한 게 그것밖에 없었다.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이전에는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는 감각이기도 했고.

사실 이건 누군가에게 설명 자체가 불가능한 영역이라.

얼마 뒤 의사 선생님을 데려온 은하와 함께 재중이 형과 아라 역시도 병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살아 있냐?”

“아, 보시다시피요.”

그리고 아라는 아예 내게 달려와 몸을 날려 내 몸 위에 쓰러졌다.

윽, 난 환자인데.

“으앙, 걱정했잖아요!”

“아, 미안해.”

“정말 못 일어나는 줄 알았어요.”

아라 얘도 눈이 퉁퉁 부어있는 걸 보면.

정말 내가 심각하긴 심각했던 모양이었다.

곧장 재중이 형을 보면서 물었다.

“형, 혹시 제 상태가? 문제가 많았어요?”

“어, 너 지금 상태가 제일 문제다. 일단 여기 의사 선생님이 먼저 좀 보고 이야기해 줄게.”

그러자 옆에서 대기 중이던 의사 선생님이 간호사들을 대동해 내 상태를 진단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긴 1인실인가요? 다른 사람들은 안 보이네요.”

“어, 아라네 회사 직속 병원이다.”

“아, DS?”

아라를 보면서 물어보자 아라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가 바로 손을 써 줬어요.”

DS사는 규모가 큰 만큼 거느리고 있는 계열사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전에 예전에 유혜선 팀장에게 듣기로 이런 종합 병원 역시도 가지고 있다고 했고.

아까 전에는 눈에 안 들어왔지만.

지금은 듣고 보니 확실히 이 병실이 다른 일반 병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설의 고급스러움은 말도 못 하고.

마치 최신 호텔 룸 같네.

그러자 옆에 있던 의사 선생님이 내게 말해 주었다.

“여기는 저희 병원 VIP룸입니다. 각계각층의 정말 유명한 사람들만 쓰는 곳이고요.”

“그럼 VIP 담당 전문의시겠네요.”

“하하, 그럼 셈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젊은 분이 이곳에 머무르는 경우도 흔치 않습니다만. 회장님께서 직접 최선을 다해 모시라고 했습니다.”

이 의사분과 간호사들이 정말 깍듯하게 진찰하는 이유가 있었구나.

그 말에 아라를 보면서 말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해 줘.”

“네, 할아버지도 좋아하실 거예요.”

플레이하다 쓰러졌는데 이런 곳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재중이 형이 한숨을 쉬며 내게 말을 꺼냈다.

“너 그대로 로그아웃되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그래요?”

“어, 그렇게 안에서 강제로 끊기는 경우는 잘 없으니까.”

옆에서 은하도 거들었다.

“재중이 오빠하고 다 같이 가서 문을 강제로 부쉈어요. 유혜선 팀장님하고 DS사 직원들 다 몰려가서요.”

“어? 문을 부셔?”

“네, 아무리 문을 두들겨도 안 돼서요. 전화도 전혀 안 받고…….”

재중이 형이 그때의 심각함이 다시 생각나는지 바로 혀를 찼다.

“진짜, 경찰도 못 부르고 말이야.”

아쉽다는 표정으로 재중이 형이 말하자 곧장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경찰을 못 부른다라…….

그러다가 몇 가지 일들이 떠오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 확실히 그렇겠네요.”

119나 경찰을 부르게 되면.

아마 문제가 심각해질 수도 있었겠지.

다름 아닌 요즘 핫한 VRS로 인한 사건이었다.

그것도 DS사의 VRS.

DS는 우리나라 VRS 점유율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회사이기도 하고.

거기다 그걸 사용하고 있는 유저 중에 랭킹 1위가 나였으니까.

이쪽 계열의 VRS를 대표하고 있는 사람이 나인데.

그런 내 VRS가 플레이 도중에 강제로 접속 불량이 되고, 유저가 기절해서 못 일어난다?

이게 만약 언론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엄청난 후폭풍이 불게 된다.

안정성 문제가 바로 불거질 테니까.

그리고 이건 바로 뉴스 정도가 아니라 국내 전체가 뒤집힐 정도의 사건이었다.

심하면 외국까지 난리가 날지도 모르고.

전 세계로 수출을 하고 있으니.

“뉴스로 나갔으면 난리가 났겠죠?”

“어, 딱히 내가 걱정할 건 아니지만 DS사 주가가 미친 듯이 떨어져 내렸을걸? 뭐 당장 망하지야 않겠지만.”

“망하진 않아도 엄청나게 흔들리겠죠.”

“어, 그리고 PV사에서 대놓고 이쪽을 물어뜯었을 거다. 최대의 경쟁 업체니까. 그 녀석들이 대놓고 DS사의 VRS 전체의 안정성을 파고들면 언론의 집중포화를 막아 내지도 못해. 절대 불이 꺼지게 놔두지도 않을 테고. 아마도 만신창이가 되겠지.”

그러면서 재중이 형이 아라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라가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오빠 다치는 게 더 문제잖아요. 그냥 경찰 불렀어도 됐는데.”

불만 가득한 볼멘 표정으로 아라가 툴툴거렸지만 자신도 그러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아는 모양이었다.

“제가 여기 있는 것 자체가 알려지면 안 되겠네요.”

“어, 지금 여기는 완전히 통제되어 있어. 아무나 들어오지도 못하고.”

“서로 입장이 난처하게 됐네요.”

DS사 VRS의 안정성을 보여 준다고 날 메인 모델로 세웠는데, 정작 그런 내가 여기서 병원 신세를 지고 있으니.

지금 상황이 조금이라도 새어 나가는 날에는.

정말 답도 없다.

“만약에 너 못 깨어났기라도 하면…….”

“DS사가 망했겠네요.”

“그것보단 네가 더 문제지.”

“하하…… 그렇죠.”

이거 웃을 일이 아닌데.

다음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까.

당시 상황이 생각나는지 은하 역시도 말을 잊지 못하고 얼굴이 파랗게 질려 버렸다.

그 모습을 본 재중이 형이 손으로 이마를 짚더니 또 한숨을 쉬었다.

“그때 너 VRS 위에 정말 시체처럼 누워 있더라. 하얗게 피가 빠져나간 것처럼.”

사용자가 위험에 빠지면 바로 경고가 가던가 할 텐데?

거기다 평소에도 체온이라던가 건강이나 신경 쪽은 항상 시스템으로 체크해 주는 걸로 알고 있었다.

“으음. VRS에도 유지 장치가 있지 않아요? 어째서 그렇게까지…….”

생각해 보면 이것도 이상해.

내가 기절이라도 하면 바로 신호가 가서 알려 주게 되어 있었다.

“들어 보니까 네 전용 VRS 시스템 모듈이 완전히 타 버렸더라고 하던데. 유혜선 팀장이 곧바로 사람을 불러서 망정이지. VRS가 열리지도 않더라.”

“진짜 심각했었네요.”

VRS 모듈이 탔다는 건 뭔가 심각하게 잘못됐다는 말이었다.

내가 유혜선 팀장과 같이 연구할 때도 멀쩡했었던 물건인데.

“어, 유혜선 팀장도 얼마나 놀랐는지 파랗게 질렸더라고. 자기 잘못이라고 얼마나 자책을 하던지.”

“으음…… 아마 꼭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대충 원인은 알 것 같기도 한데.

그렇다고 VRS 모듈이 완전히 타 버릴 줄이야.

나중에 이건 유혜선 팀장하고 이야기해 봐야겠어.

“안 그래도 너 깼다는 소식 듣고 지금 총알처럼 날아오는 중이다. 깨면 알려 달라고 얼마나 자주 전화하던지 귀가 아플 지경이야.”

“오면 한 소리 듣겠네요.”

아마 내게 있었던 일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여기 의사 선생님은 절대로 아니었다.

확실히 원인을 알아낼 만한 사람은 유혜선 팀장 정도겠지.

얼마 뒤 유혜선 팀장이 병원실 문을 박차고 달려 들어왔다.

그리고 곧장 내 앞에 대놓고 무릎을 꿇고 빌었다.

“제 잘못이에요! 정말 미안해요!”

아. 이거 참.

이렇게까지…….

그런 유혜선 팀장을 보면서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 해야 할 말이 참 많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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