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6화 마계 경매장 (12)
마계 마왕 서열 1위 바이카르.
이유는 모르겠지만 가르시아 제국에서 가짜 황제 노릇을 하면서 오랫동안 지냈던 놈이다.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이 녀석은 속을 알 수가 없어.
전에 아스티아가 해 준 말들과 비교해 보면 아마 지금의 전력이 모두 한꺼번에 덤비더라도 이 녀석을 어떻게 할 수는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런 마왕이 굳이 중간계에서 힘이 약해진 채 인간들에 섞여 있었다니.
정체를 까발리기 전에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인간의 황제였지.
그렇다고 가르시아 제국의 NPC들을 이용해서 뭔가를 했던 것 같지도 않고.
보통 마왕이라고 하면 중간계를 뒤엎고 정복하겠다고 하는 것이 정석이지 않나?
아무리 봐도 이 서열 1위 마왕은 이상했다.
슬쩍 옆에 있는 재중이 형을 보고 물었다.
<주호> 어떻게 할까요?
<불멸> 먼저 접근해 왔는데 일단 지켜보자. 어차피 이 안에서는 녀석도 아무것도 못 한다니까.
<주호> 네, 한 번 대화해 볼께요.
만약 이곳이 마왕의 힘을 봉인하는 유적지 같은 장소가 아니었다면 녀석과 이미 싸워도 몇 번을 싸우지 않았을까.
저렇게 대화를 해 오는 것만 보면 확실히 마왕의 힘이 억제되는 것 같았다.
그때 아스티아가 내 옆으로 다가와서 섰다.
팔짱을 끼기라도 하면 연인처럼 보일 정도로 가까이.
아스티아가 직접 이렇게 붙는 경우는 없었는데……?
<주호> 아스티아?
<아스티아> 그냥 있어. 이보다 떨어지면 힘들어.
<주호> 저 녀석이 그 정도로 강한가요?
<아스티아> 응. 그리고 나도 약해져서.
그랬던가?
분명히 아스티아도 마왕급에 해당하니까 아마 천장의 결계에 영향을 받는 모양이었다.
꽤 곤란하네.
여차하면 제일 믿는 구석이었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외곽에 마왕 벨라까지 대기시켜놓는 건데.
살짝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눈앞의 마왕 바이카르를 바라보았다.
우리끼리 눈빛을 주고받는 동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기다려주는 걸 보면 아주 경우가 없는 건 또 아닌 모양이었고.
그런데 마왕 바이카르가 뜻밖의 말을 또 꺼냈다.
“작전 회의는 다 끝났나?”
“……그렇다고 해두죠.”
뭐지?
설마 이 녀석도 귓속말을 눈치채는 건가?
아니면 그냥 넘겨짚어 본?
대놓고 물어보기는 오히려 이쪽에서 어려운데.
할 수 없나.
더 이상 귓속말을 하다가는 이 녀석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여기서는 그냥 간다.
이리 저리 말을 돌려가면서 시간을 끄는 것도 의미가 없을 테고.
“거래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곧장 거래라는 말을 꺼내니 마왕 바이카르의 검은 눈동자가 이채를 띄었다.
그것도 꽤 흥미롭다는 표정을 해보이며.
“호오, 떠보지 않아서 좋군. 이 자리에서 그대의 목을 날려 버릴 수도 있었는데 마음에 들었다.”
이것 참.
저걸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
“감사 인사는 다음에 하도록.”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 같은 말에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괜히 한 대 치고 싶잖아?
그런 마음을 일단 누르면서 다시 마왕 바이카르에게 물었다.
“가능하면 바로 이야기가 되었으면 합니다만. 보시다시피 저기서 이쪽을 아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거든요.”
눈짓으로 멀리 있는 장소를 가리키자 마왕 바이카르의 시선이 따라서 돌아갔다.
“아아, 저 녀석들 말인가. 신경 끄게나.”
마계 경매장에 울리듯이 흘러나온 마왕 바이카르의 말에 마왕 올펠의 붉은 기운이 갑자기 터져 나왔다.
“이 새끼가!”
“꼬우면 덤비고.”
마왕 바이카르가 마치 당장 들어오라는 듯 손바닥을 마왕 올펠에게 보이면서 자신에게 까딱거렸다.
대놓고 저렇게 도발하다니.
자신감이 아주 하늘을 찌르는구만.
당연히 마왕 올펠의 기운이 더 끓어올랐다.
그런데 그때.
천장의 마법진이 크게 울리면서 하얀빛이 경매장 전체에 퍼져 나오자 마왕 올펠의 붉은 기운이 마치 연기가 공중으로 퍼져 나가듯 그대로 흩어지더니 곧 완전히 희석되어 사라져 버렸다.
마왕 올펠은 천장의 결계가 못마땅한 듯 흩어진 기운들을 어이없이 바라보며 외쳤다.
“쳇, 이놈의 썩을 결계 같으니.”
확실하네.
저 결계가 마왕의 힘을 억제해 준다는 사실이.
이 정도까지 억제해 준다면…….
그렇게 강하다는 마왕 바이카르가 지금 내게 대화를 해온 것이 이해가 갔다.
이 녀석이 여기서 날 어떻게 할 수는 없겠네.
나중은 나중이고.
지금은 조금 편하게 이야기를 해도 되겠어.
마왕 올펠을 그대로 무시한 채 마왕 바이카르가 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네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 『 피닉스의 알 』을 제대로 쓸 수는 없을 것이다.”
마치 자신이어야 가능하다는 듯 단적으로 말하는 모습에 속으로 머리가 팽팽하게 돌아갔다.
흐음.
마왕만 가능하다는 건지.
아니면 본인만 가능하다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녀석이 이걸 아주 열렬하게 원한다는 건 잘 알겠다.
그리고 경매에 끝까지 참여한 걸 보면.
거기다 마왕 올펠을 비롯해 다른 마왕들도 역시 이걸 원했으니까.
마왕이라면 아마 다 쓸 수 있을지도.
경매야 돈으로 움직이는 거니까 어떻게 할 수 없었어도.
내 손에 『 피닉스의 알 』이 들어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져.
일단 중요한 건.
녀석은 내가 누군지 모른다.
처음 들어올 때부터 복면과 로브를 쓰고 있었으니.
이 지역만 벗어나면.
따돌리는 게 가능할 것 같기도 한데.
물론 쉽진 않겠지만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거래라. 한 번 이야기나 들어 보죠.”
원래 『 피닉스의 알 』을 내가 그대로 쓰려는 생각도 있었지만.
마왕들에게 거래 용도로 쓰려는 생각 역시도 가지고 있었다.
저쪽에서 거래를 청해 온 이상.
선택지 중 뭐가 나을지는 한 번 재봐야겠지.
“『 피닉스의 알 』을 넘겨주면 그에 상응하는 물건을 주도록 하지.”
“상응하는 물건이라……. 『 피닉스의 알 』은 마왕들도 못 구해서 여기 마계 경매장에서 사려고 했던 게 아니었나요?”
제대로 알아들으려나?
이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돌려서 말한 것이었다.
『 피닉스의 알 』은 마왕인 너희가 나서도 구하지 못할 정도로 귀한 물건이니까 그에 상응하는 물건을 정말 가지고 있냐는 의문.
그리고 적당한 물건으로는 거래조차 응하지 않겠다라는 말 역시도 내포하고 있었다.
당연히 마왕 바이카르를 비롯해 다른 마왕들 역시 들으라는 듯 꽤 크게 이야기를 했고.
너희도 관심이 있으면 어디 끼어들어 보라고.
아무래도 판돈은 클수록 좋으니까.
단순히 마왕 바이카르만 두고 대화를 해봐야 이 녀석이 원하는 대로 끌려가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다른 마왕들까지 끼어들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져.
“꽤 재밌는 짓을 하는군.”
“『 피닉스의 알 』이 싸지는 않잖아요? 잘 아실 텐데?”
“흠.”
“보시다시피 경매에 들어간 돈이 한두 푼이 아니라서. 밑지고 거래하진 않을 겁니다.”
내게는 당장 필요하지 않아도.
이 녀석은 간절하다.
그럼 최대한 이용한다.
“여길 떠나서 널 죽이겠다고 하면?”
“뭐 몇 날 며칠을 여기서 죽치고 있어야죠. 그리고 마왕님이 그렇게까지 한가하진 않으실 텐데요? 무엇보다 제가 그냥 다른 마왕님에게 『 피닉스의 알 』을 줘 버리면?”
보아하니 다른 마왕들과 경쟁 관계에 있어 보이는데 마왕성을 그렇게 오래 비워둘 수 있을까?
아니라면 꽤 곤란하긴 하겠지만.
그냥 포기할 때까지 정말 여기서 누워 있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베르테니아 마왕성은 내가 없더라도 잘 돌아가고 있으니.
돈이야 계속 들어올 테고.
레벨을 못 올리는 게 좀 아쉽긴 해도 뭐.
그리고 지금 여기서 갑은 바이카르 네가 아니라 나다.
아주 느긋하게 드러누울 준비를 하자 마왕 바이카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저건 좋다는 반응인가?
아님 진짜 해보겠다는?
그리고 그 대답은 바로 나왔다.
“좋아. 죽이겠다는 말은 철회하지. 이 일로 인해 네가 어떠한 피해를 보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말로만?”
“마왕의 약속은 무겁다.”
그래 봐야 수틀리면 엎어 버릴 놈들이라 딱히 믿기진 않지만.
어차피 마계는 힘이 절대적이라.
일단 여기서는 못 이기는 척 넘어가 줘야겠지.
더 긁으면 뭔 짓을 할지 모른다.
“그럼 거래 품목을 한 번 보죠? 아, 그리고 거기 마왕님들도 원하시면 거래하셔도 좋습니다. 기회는 동등하게 드려야죠.”
이건 또 다른 경매였다.
온전히 내가 갑인.
그러자 마왕 올펠을 비롯해 마왕 아르곤, 그리고 또 다른 마왕 하나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아까 마왕 올펠을 말리던 녀석이지?
“그쪽은……?”
분위기만 보면 이쪽은 꽤 차분한 스타일로 보였다.
거기다 마왕 올펠을 말로 달랠 수 있을 정도로 능수능란하고.
오히려 밖으로 대놓고 싸우자는 표시를 내는 것보다 이 녀석이 더 까다로울지도 모르겠는데.
“마왕 데미안이라고 한다.”
“반갑습니다.”
옆에서 암흑 상인이 낮은 목소리로 슬쩍 찔러 주었다.
“마계 마왕 서열 2위십니다.”
“그런가요?”
그럼 마왕 올펠이 3위라는 뜻이겠고.
일단 마계에서 내로라하는 서열은 다 모였네.
당연히 이 이상의 좋은 판매처는 없었다.
이들보다 강한 이들이 없는 이상에야.
“방식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제가 이곳에서 자리를 벗어날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요.”
여기서 나갔다가 네들이 싸우자고 덤비면 어쩌나는 말을 다시 돌려서 말했다.
그러자 마왕 데미안이 중재를 했다.
“당신이 이대로 사라져 버리면 우리도 곤란합니다. 하여 마왕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물품들을 작성해서 보여드리도록 하죠.”
“그럼 거기서 제가 원하는 물품을 고르라?”
“공정하게 하기 위해서 딱히 마왕의 이름은 적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만. 만족하십니까?”
호오.
이 녀석 봐라?
진짜 침착한데?
일단 거래가 성사되면 누가 되든 『 피닉스의 알 』이 저들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그럼 누가 가져갔는지 역시도 알게 될 테고.
하지만 지금 방식대로 하면 누가 가져갔는지 전혀 모르게 된다.
본인만 아니라면.
그리고 내게도 좋은 점은.
어차피 난 목록에서 골라서 넘겼을 뿐이니.
내게 어떠한 피해도 오지 않게 될 테고.
물론 가지지 못한 마왕이 내게 분풀이를 할 경우도 생각해 볼 수는 있는데…….
어차피 내가 대놓고 넘겨주었을 경우에도 다른 마왕이 발끈하는 건 마찬가지라.
차라리 이렇게 명단을 숨겨 버리는 편이 훨씬 나았다.
“원한다면 마계 경매장의 공증으로 하죠.”
마왕들이 잠시 생각하더니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멀리 지켜보던 사회자가 부리나케 달려와서는 손을 비볐다.
“하하, 재밌는 일이 벌어지고 있군요. 그럼 제가 경매를 다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왕 데미안의 제안에 내 쪽의 일이 수월하게 되었다.
이 녀석은 꽤 마음에 드네.
그리고 다시 한 번 마왕들을 보면서 말을 꺼냈다.
“값어치가 맞지 않는다면 여러 개를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러자 마왕 바이카르가 흔쾌히 대답했다.
“원하는 대로 해라. 대신 세 개까지만 허용하겠다.”
“다른 분들은?”
마왕 올펠이 세 개라는 말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그놈 참. 빡빡하게도 하네. 알았다. 나도 허락하지. 저놈이 세 개를 걸었는데 내가 질 수가 있나.”
마왕 아르곤 역시도 고개를 끄덕여서 허락을 했고, 제안을 한 마왕 데미안도 마찬가지였다.
나쁘지 않아.
오히려 선택의 폭이 확연히 넓어졌다.
그렇게 마왕들을 뒤로 물리고 난 뒤.
아스티아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목록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죠?”
“응? 뭐가?”
“아스티아의 무기.”
내 말에 아스티아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럼 너 처음부터 노렸어?”
그런 아스티아를 보면서 씨익 웃어 보였다.
“제가 약속했잖아요. 무기 찾아드린다고.”
이제 그 약속.
지켜드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