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9화 마왕성의 집사로 취직했습니다 (5)
마왕 벨라의 중재로 암흑 상인과 직접적으로 거래를 할 수 있게 되자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
잠시 뭔가를 고민하던 암흑 상인이 내게 말을 걸었다.
“일단 하르를 좀 봤으면 합니다만…….”
“그거야 어렵지 않죠.”
보여 줄 하르야 차고 넘치니까.
인벤에서 곧장 하르를 몇 개 꺼내서 보여 주자 암흑 상인이 멀찍이서 눈으로만 확인을 하기 시작했다.
“가까이서 보진 않을 건가요?”
내 물음에 살짝 표정이 굳은 암흑 상인이 꽤 난처한 얼굴로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흠, 사실 그게 몸에 닿으면 꽤 아픕니다. 조그맣기는 해도 신성이 들어가 있는 물건이라서요. 정확히 말하면 따가운 바늘로 막 찌르는 그런 느낌이겠죠.”
아프다라…….
하르 자체가 암흑 상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이건가.
“아, 그렇다고 아예 못 만질 정도는 아닙니다만. 그리고 아마 마왕님 정도면 쥐자마자 부서질지도 모르겠군요.”
그런 암흑 상인의 말에 옆에서 구경 중이던 마왕 벨라에게 하르를 보여 주자 정말 아무 고민 없이 덥석 하르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르가 완전히 빛을 잃어버리면서 회색으로 변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짙은 어둠으로 점점 물들어 갔다.
음.
저런 식이었던가?
예전에 왕국에서 악마형 케르베로스가 하르 기둥을 오염시키는 것도 이것과 같은 방식으로 한 것 같았다.
“안 아프세요?”
“별로. 아무 느낌 없는걸.”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검게 변해 하르와는 전혀 다른 빛을 내는 타르를 위아래로 던져 보였다.
하르를 타르로 만드는 건 마왕 벨라가 해도 충분해 보이기는 한데…….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다.
만약 이게 가능하면 굳이 암흑 상인의 손을 거칠 필요가 없을지도.
“계속 만들 수 있는 건가요?”
“아니, 귀찮기도 하고…… 무엇보다 마력이 꽤 들어가는 일이니까.”
“공짜는 아니라는 거군요.”
내 말이 정답에 근접했다는 듯 마왕 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마왕 벨라가 베르테니아 마왕성의 전력 전부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데 마력을 하르를 타르로 바꾸는데 다 써 버리면?
아스티아가 있다고는 하지만 당장 베르테니아 마왕성이 곤란한 처지에 놓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굳이 그런 위험에 이 마왕성을 노출시킬 필요가 없겠지.
차선책이 아예 없다면 또 모를까.
고개를 돌려 암흑 상인을 바라보았다.
과연 하르를 얼마나 타르로 바꿀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암흑 상인이 자신만만했으니 아마 충분할지도.
하르를 타르로 바꾸는 방법이 이런 식으로 암흑의 존재들을 노가다시키는 거라면야…….
마왕성 주변으로 감각을 퍼트리자 곧 마왕성 주변에 암흑 상인이 데리고 온 듯한 부하들이 몇 감지가 되었다.
“그럼, 이쪽도 일하는 걸 좀 봤으면 하는데요? 혹시 저들에게 시키는 건가요?
마왕성 바깥을 바라보며 하는 그 말에 암흑 상인이 화들짝 놀라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이건 정말 깜짝 놀란 것 같은데?
그리고는 꽤 심각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흠, 어떻게 아셨습니까? 혹시 마왕님이 알려 주셨는지요?”
아니.
그냥 감각만 퍼트리면 알아서 감지가 되는데 굳이 귀찮게…….
그러다 뭔가를 떠올리고는 곧장 태도를 바꾸면서 웃음 지었다.
“아, 이런 곳에 혼자 다닐 분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물어본 겁니다. 정말 누가 있나 보네요.”
“하, 그런 겁니까. 전 또…….”
다소 안심한 듯한 뉘앙스로 암흑 상인이 말하자 이게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확실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쪽의 전력을 다 보일 필요가 없어.
내가 약하다고 계속 생각하고 있는 편이 나을지도.
<불멸> 방금 일부러 그런 거지?
<주호> 네, 여기서 경계심을 더 올릴 필요는 없겠죠.
물론 약하게 보여서 암흑 상인이 얕잡아볼 수도 있겠지만.
무력이야 마왕 벨라가 있으니까.
내 쪽은 집사의 역할만 보여 주면 된다.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또 모르는 일이라.
다소 안심했는지 암흑 상인이 내게 제안했다.
“흠, 그럼 한번 따라와 보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멀리 않은 곳에 우리가 운영하는 타르 광산이 있습니다.”
일단은 신뢰를 보여 준다는 거려나?
그러자 바로 고개를 돌려 아스티아를 바라보았다.
“같이 가 주실 거죠?”
그리고 내 말에 아스티아가 곧장 고개를 끄덕임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여차하면 아스티아가 있으니 뭐.
저쪽에서 마왕이라도 데리고 나오지 않는 이상은 무력에서 밀릴 일은 없다.
암흑 상인의 지금까지의 태도를 볼 때, 마왕에서 거래 정도는 제안할 수 있어도 마왕을 부릴 정도는 절대 아니라고 판단되었다.
마왕성이 이렇게 무너져 가는데도 불구하고 마왕 벨라에게 최대한 공손함을 보이는 걸 보면.
“그쪽은?”
“아, 호위…… 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군요.”
지금껏 아스티아가 힘을 보여 주지 않았으니까 암흑 상인도 그냥 그런가 하고 넘어가는 눈치였다.
혹시나 해서 마왕 벨라도 데려갈 수 있겠지만.
베르테니아 마왕성을 완전히 비워 둘 수는 없었다.
지하에 뭐가 있는지 확인한 이상.
이곳은 반드시 지켜야지.
“그럼, 한번 가 보죠.”
* * * * *
재중이 형이 아래로 멀어지는 지상을 보면서 말했다.
“흠. 이런 식으로 이동했던 건가.”
“네, 의외네요. 마계에서 비공정이라니.”
검은색 천으로 위장한 거대한 비공정을 봤을 때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여기도 사는 건 비슷하구나 하고.
총 세 대의 비공정이 동시에 떠서 서로 떨어지지 않게 대형을 유지하면서 날아갔다.
흐음.
형태는 무역선이려나.
짐을 싣는 공간이 더 많은 걸 보면 아마도 틀리지는 않을 터.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비공정은 꽤 상태가 좋아 보였다.
그렇다는 말은 주변에 비공정을 고칠 수 있을 만한 장소가 있단 뜻이었다.
“속도도 꽤 빠르네요.”
“나쁘지 않네. 이 정도 수준의 비공정이라……. 꽤 쓸모 있겠는데, 저 녀석?”
“그럼 하나 얻어 갈까요?”
“가능하다면.”
정말 생각 이상으로 속도가 좋았다.
이 정도 속도면 황실 비공정에 맞먹을 정도.
마왕도 아닌 상인이 이런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게 놀라울 법도 했지만 그만큼 저 암흑 상인의 능력이 좋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여기 대기에 영향을 안 받는 것 같단 말이야.”
예전의 비공정들은 전부 암흑 대기에서 디버프를 받아 속도가 떨어졌다.
하지만 이건 달랐다.
가질 수만 있다면 꽤 좋겠는데.
거기다 함포로 보이는 것도 다수 장착되어 있는 걸 보면 여기서도 공중전이 제법 빈번하게 일어나는 모양이고.
아무 일도 없는데 이 정도로 무장을 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가 함포를 유심하게 바라보자 암흑 상인이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괜찮네요. 이 녀석은 암흑 대기에 영향을 안 받는 겁니까?”
내 물음에 잠시 생각을 하던 암흑 상인이 곧 적절한 대답을 해주었다.
“그렇습니다. 이쪽은 타르를 연료로 쓰니까요.”
“중간계하고는 완전히 다르군요.”
“네, 듣기로는 그쪽에서는 하르를 연료로 쓴다지요.”
역시 그런 차이가 있어서 이랬군.
반대로 이쪽의 비공정이 저쪽으로 가면 느려진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이 함포들은……?”
“흠흠, 우리 같은 상인들을 꽤 위협을 받습니다. 이렇게 날아다니면 약탈하려는 자들이 많죠.”
역시.
예상했던 대로 무역선에 함포가 이렇게 많은 건 약탈자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마왕 상대로 무역을 하는 암흑 상인도 곤란할 정도인가?
그때 암흑 상인이 의외의 말을 했다.
“안 그래도 요즘 치안이 좋지 않아 더 날뛰고 있습니다. 특히 이 부근은요.”
“이 부근이라 함은?”
“마왕 벨라 님의 권역요. 관리를 안 해 주시니. 돈이 되니까 이렇게 제가 오가고 있지, 아니면 힘듭니다. 사실 지금까지야 별문제가 없었지만 이 부근은 꽤 위험합니다.”
이 녀석도 나름 목숨을 걸고 다니고 있는 거였나.
물론 녀석 말대로 돈이 되니까 하는 거겠지만.
한참 그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갑자기 비공정을 이끌던 부하 중 하나가 우리에게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크게 외쳤다.
“상단주님! 적입니다!”
“큭, 계속 잠잠하더니 하필……! 전 인원, 전투 준비!”
암흑 상인의 호령에 비공정 갑판은 각자 위치를 찾아 부산스럽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함포들 역시 전부 머리를 치켜들었고.
주변을 보니 암흑 대기들 사이를 타고 뭔가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꽤 전문적이네.
일부러 암흑 대기에 선체를 숨겨서 보이지 않게 비행하며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거기다 검은색으로 위장을 해서 주변 대기에 동화되는 것 같은 착각도 일으켰고.
저런 식으로 하면 함포로 맞추기도 힘들겠는데?
“적입니까?”
“네, 곧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숫자가 꽤 많아 보입니다만.”
이쪽은 무역선 세 대뿐이다.
반면 저쪽은 눈에 들어온 것만 해도 벌써 다섯 대가 넘어갔다.
숫자로 봤을 때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
그리고 상대 측은 오직 전투를 위해 무장했을 가능성이 있으니.
“속도도 빠르군요.”
“저건 약탈선입니다. 당연히 우리보다 빠릅니다. 그리고 이쪽은 적재한 물건도 적지 않아서…….”
적재한 물건이라.
타르를 말하는 거려나.
베르테니아 마왕성에서 타르를 꽤 내렸어도 아직 남은 양이 많다는 거겠지.
그건 곧 우리 외에도 다른 마왕성과도 거래를 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고.
재중이 형도 같은 생각인지 귓속말이 날아왔다.
<불멸> 호오, 생각보다 발이 넓잖아?
<주호> 네, 이러면 준비할 수 있는 물건이 많겠죠.
<불멸> 그래, 다른 마왕성이 베르테니아만큼 엉망은 아닐 테니까.
<주호> 아무래도 이 암흑 상인 살려야겠죠?
<불멸> 어, 당장은 이만한 중개인을 다시 구하긴 힘들어.
베르테니아 마왕성으로 직접 무역을 해줄 수 있는 암흑 상인은 지금으로써는 이 녀석이 유일했다.
그럼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녀석을 살려야 한다.
앞으로를 위해서.
“곧 따라잡힙니다.”
“그래 보이네요.”
아무리 봐도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분명히 따라잡힐 것이다.
흘깃 갑판을 봤는데 전투 선원보다는 갑판을 운영하는 선원들이 더 많아 보였다.
근접전이 되면 이길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쉽지 않을지도.
퍼엉!!
펑!!
그렇게 어느 정도 따라 잡히자 함포를 돌려 완전히 따라잡히지 못하게 계속 쏘고는 있는데 저쪽은 그보다 빠른 속도로 회피기동을 해 함포를 거의 다 피해 버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재중이 형이 감탄했다.
“호오, 저 약탈선 꽤 빠르잖아?”
아니, 정확히는 감탄보다는 가지고 싶다는 눈빛이 더 강해보였다.
“가지고 싶죠?”
“어, 뭐 내구성은 잘 모르겠지만 일단 빠르잖아.”
“확실히 여기서는 황실 비공정보다는 빠르겠네요.”
아스티아는 별 상관이 없다는 듯 그냥 멀뚱멀뚱 다가오는 비공정들을 구경만 했다.
뭐 저쪽에서 개떼로 덤벼들어도 이쪽은 아스티아가 있으니.
여차하면 우리만 살아남아도 되는 일이지만…….
아무래도 암흑 상인은 살려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지휘를 하던 암흑 상인이 나와 재중이 형에게로 다시 다가오더니 제안을 했다.
“지금은 손을 좀 빌려야겠습니다.”
우리가 약하다고 할 때는 언제고.
하긴, 이 정도면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하는 판인가.
그런데 바로 머리 위로 돌발 퀘스트가 떠올랐다.
“호오, 퀘스트잖아?”
“그러네요.”
재밌다는 듯 웃고 있는 재중이 형과 눈을 마주치자 재중이 형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여기서는 살리는 걸로.
하지만 아무래도 돌발 퀘스트의 보상이 너무 짰다.
기껏 살려 주겠다는데 이 정도 보상이라고?
누가 상인 아니랄까 봐.
하아…….
여기서는 판돈을 좀 키울 수밖에.
생각이 정리되자 시선을 돌려 암흑 상인에게 한껏 미소 지었다.
그리고 한 가지 딜을 추가로 넣었다.
“저 약탈정들, 싹 잡아 오면 우리가 전부 가지는 걸로. 딜?”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