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9화 버려진 나라 (4)
뭐지?
이 뜬금없는 제안은?
혹시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다시 물어 보았다.
다짜고짜 올렌드 추기경을 죽이라고 하다니.
이 여자, 대체 뭐지?
왠지 어리버리하게 다가왔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제안이라 좀 얼떨떨하기도 했다.
“방금 올렌드 추기경을 죽여 달라고 했습니까?”
확인을 위한 질문에 성녀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 네, 정확해요. 주호 공작께서 올렌드 추기경을 죽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신성 제국 내에서요. 』
《 메인 퀘스트 : 신성 제국 제넨샤 성녀 조슈아의 부탁 / 암살 의뢰. 》
- 신성 제국 제넨샤의 추기경 올렌드 암살 의뢰.
- 신성 제국 내에서 추기경 올렌드
- 퀘스트 보상.
성녀 조슈아와의 친밀도 상승.
의뢰 성공 시 추가 보상.
- 거절 시 페널티 존재.
그리고 바로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설마 메인 퀘스트인가?
메인 퀘스트라고 하면 정해진 뭔가의 조건을 내가 만족했다는 뜻인데…….
확실한 조건이 성립되었을 경우에만 발동하는.
아마도 돌발 상황이 생겼고, 그 상황에서 성녀가 유저에게 줄 수 있는 그런 제안 중에 하나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이렇게 뜬금없이 앞도 뒤도 없는 메인 퀘스트가 뜰 리가 없었다.
대체 무슨 조건을 건드린 거지?
지금까지 신성 제국으로 와서 한 일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결계는 시간이 넉넉했으면 어떻게든 지나올 순 있었을 것이다.
그건 그냥 내 능력을 써서 빠르게 돌파를 했기 때문에 지금 생각해 보면 크게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결계야 지나가는 통로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결계를 지났다고 해서 뭔가 굉장한 조건이 붙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신성 제국을 도착해서인데.
흠.
이건 아냐.
어차피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유저들이 있는데 굳이 내게 이런 제안을 할 필요는 없어보였다.
단순히 도착을 먼저 한 것이 조건이라고 하면 먼저 그들에게 추기경을 죽여 달라는 제안을 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흘러가는 정황은 오히려 그들과 추기경 사이에 어떤 커넥션이 형성된 상황으로 보였다.
만약 성녀인 조슈아가 추기경을 죽여 달라는 제안을 그들에게 했다면 이미 어떤 일이 일어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추기경에 의해 오히려 성녀가 죽어 버렸다던가 하는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을 테고.
하지만 지금 눈앞에 성녀는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다.
최소한 그들에게 추기경을 죽여 달라는 제안을 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 순간 떠오르는 녀석이 있었다.
설마.
베히모스의 퇴치인가?
먼저 도착한 유저들과 나의 차이.
그건 딱 하나라고 생각이 들었다.
베히모스를 잡았느냐.
잡지 못했으냐.
그리고 이건 굉장한 차이가 있었다.
단순히 퀘스트를 받았다는 사실 보다는...
방금의 제안이 지금 나올 만한 퀘스트가 아닐 수도 있으니까.
베히모스의 강함을 생각해보면.
절대 유저들이 초기에 베히모스를 잡아내진 못할 것이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성녀가 유저들에게 주는 퀘스트일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유저들이 베히모스를 잡을 정도의 능력이 될 때쯤 발동하는.
딱 그런 퀘스트.
그럼 대체 지금 몇 단계의 퀘스트를 건너뛰고 지나간 걸까.
적어도 수십 단계의 퀘스트를 죄다 무시한 상태로 나중에 열리는 퀘스트가 열렸다고 생각이 되었다.
그리고 그만큼 이 퀘스트의 난이도는 쉽지 않을 것이다.
베히모스를 잡고 난 뒤에 나오는 메인 퀘스트일테니.
그리고 베히모스를 정면에서 막아섰던 추기경의 전투 능력을 생각해 보면…….
이런 가정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흠.
너무 단계를 뛰어넘었어.
그만큼 신성 제국에서의 위험도가 높아졌다.
베히모스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잡은 거라…….
우린 아직 준비가 제대로 되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성녀 조슈아와의 접촉.
이건 분명히 문제가 된다.
이 사실을 추기경 올렌드가 안다면 신성 제국에서 우리가 천천히 힘을 키우고 퀘스트를 진행하도록 내버려두진 않을 것이다.
“너무 뜬금없는 제안이라 좀 당황스럽습니다.”
내 대답에 성녀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졌다.
확실하게 답을 주는 대답은 아니었으니까.
곧 성녀 조슈아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 저도 잘 알고 있답니다. 하지만 꼭 해야 하는 일이에요. 그리고 고대의 마수를 죽인 주호 공작님이라면 해 주실 수 있을 것이라 제안을 했습니다. 』
베히모스를 죽인 나라면?
조건이 애매하게 붙는데?
하지만 방금 성녀 조슈아의 대답으로 어느 정도 상황이 유추가 되었다.
흠.
이 성녀라는 직위…….
의외로 힘이 없는 건가?
힘이라는 게 꼭 전투 능력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실질적인 전투 능력을 생각해 보면 성녀가 기사인 추기경보다 그렇게 잘 싸울 것이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의외로 성녀가 아스티아처럼 싸울 수도 있겠지만…….
그건 정말 얼마 없는 소수점 단위의 확률이고.
성녀라는 직위 특성상 전투 직위인 올렌드보다 잘 싸울 것이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그렇다면 성녀가 거느리고 있는 세력.
이쪽을 생각해 봐야 하는데...
성녀라면 당연히 따르는 무리가 있을 터.
그런데도 신성 제국에 처음 도착한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내게 부탁을 한다?
이건 두 가지 경우다.
하나는 자신들의 세력의 힘을 쓰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부탁을 하는 경우.
만약 이쪽이라면 성녀가 어느 정도 추기경과의 세력을 견제할 만한 세력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우리를 시험하기 위해서 이런 퀘스트를 줄 수도 있는 노릇이고.
하지만 반대라면 상황이 꽤 복잡해지게 된다.
이 성녀의 세력이 생각 이상으로 약하다면?
거기다 만약 추기경인 올렌드가 이 신성 제국에서 확고한 입지를 가지고 있다면?
성녀를 누를 정도로 압도적일 수도 있고.
내게 올렌드의 암살 의뢰를 하는 이유가 이런 상황에서 기인된 것이라면 이쪽의 부담이 엄청나게 커지게 될 터.
“처음 보는 제게 이런 의뢰를 하는 정확한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이쪽에서도 이건 문제가 되니까.
지금 신성 제국의 확실한 상황을 알아야만 한다.
아니면 발을 들였다가 낭패를 볼 수 있었다.
단순히 나 하나의 문제를 떠나.
우리 원정대 인원들 모두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는 노릇이라.
까닥 잘못했다가 신성 제국 자체에서 발을 떼야 할 상황까지 올 지도 모르고.
내 물음에 성녀가 다시 한 번 한숨을 쉬면서 말을 꺼냈다.
굉장히 곤란해 보이는 표정으로.
『 사실... 신성 제국은 이미 버려진 지 오래되었어요. 』
응?
버려진 지 오래 되었다고?
그게 대체 무슨 말이지?
『 현재 교황님께서도 손을 쓰지 못할 정도로. 지금의 신성 제국은…… 몰락을 하고 있는 중이에요. 』
“자세히 들어봐도 될까요?”
어쩌면 이 신성 제국이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었다.
그게 언제였냐면…….
베히모스를 공격하기 위해 공중으로 올라갔을 때부터.
가르시아 제국과는 확연히 다른.
신성 제국의 풍경들.
계속 마음에 걸렸는데 방금 성녀 조슈아의 입에서 나온 몰락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이상할 정도로 퍼즐이 맞아가는 것 같았다.
『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계속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
“사람들이 사라진다고요?”
『 네, 죽었는지, 사라졌는지 아무도 몰라요. 교황님께서 특별 정찰단을 만들어서 조사를 했지만 대부분 성과를 내지 못했고, 오히려 정찰단마저 죽거나 실종되어 버렸어요. 』
“실종이라…….”
『 이백 년 전부터 신성 제국이 결계를 써서 제국을 지켜온 사실은 이미 이야기했었죠? 당시 힘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신성 제국을 악마들에게서 보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답니다. 』
폐쇄된 신성 제국.
이건 이미 들어서 아는 이야기였다.
결계도 그렇고.
『 결계 덕분에 겨우 상황을 추스르고 힘을 기를 수가 있었어요. 그러기 위해 저 악마들에게 대항하기 위한, 그리고 현재의 결계를 유지하고 있는 세 가지 물건이 있었어요. 』
그런 조슈아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머리에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다.
묘한 말의 늬앙스.
“있었다는 말은 현재는 없다는 말로 들리네요?”
내가 그 점을 지적하자마자 성녀 조슈아의 표정이 확 어둡게 변해 버렸다.
『 네, 이전에는 존재했었죠. 하지만 지금은 그중 하나가 사라져 버렸어요. 그것도 얼마 전에. 』
“세 개 중 하나가 사라졌다는 말이죠?”
내 물음에 성녀 조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 결계를 지탱하도록 봉인되어 있던 세 가지 중 마검, 정확하게는 베히모스와 함께 봉인되어 있던 마검이 사라졌어요. 』
역시.
재중이 형과 생각했던 것이 틀리지 않았다.
가르시아 제국에서부터 알아온 정보와도 어느 정도 일치했고.
마검과 함께 봉인된 베히모스가 버젓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는 그렇다고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성녀의 말로 모든 퍼즐이 들어맞았다.
『 사실 그 봉인은 우리는 절대 건드릴 수 없는 종류의 봉인이었답니다. 신성 제국의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
신성 제국의 사람들은 건드릴 수 없다라…….
그러면 답은 정해져 있었다.
본인들이 할 수는 없는데.
다른 누군가의 손을 빌려서 봉인을 부셨다는 말이니까.
“설마 누군가 일부러?”
『 네, 신성 제국 내의 누군가가 가르시아 제국의 귀족들과 접촉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자신들 대신 봉인을 깰 수 있도록요. 』
이것이었나?
성녀가 추기경을 죽여 달라고 했던 이유가.
“올렌드 추기경이 그랬다고 말하고 싶은 겁니까?”
『 우리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어요. 하지만 올렌드 추기경은 우리 손으로 처단할 수가 없어요. 』
가정이 대충 들어맞네.
확신을 가지고 있고, 사실을 다 아는데도 건드릴 수가 없다.
이건.
딱 하나의 경우.
“세력이 강하다는 뜻이겠죠?”
『 네, 아쉽지만 추기경을 따르는 세력이 너무 커졌어요. 그리고 이미 신성 제국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분리가 되어 버렸어요. 마검을 봉인에서 푼 이상. 더 이상 올렌드 추기경은 신성 제국의 사람이 아닙니다. 』
어쩌면이라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양쪽의 세력으로 갈라져 버린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도 베팅을 다시 해야겠는데.
『 세상을 구할 영웅의 검을 가진 주호 님이라면 신성 제국을 도와주실 거라 생각하고 있어요. 』
흠.
말은 좋다만 이거 잘못하다가 정말 빼도 박도 못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겠는데.
세력이 적은 쪽에서 역전을 해야 하는 상황이니까.
그리고 아직 올렌드의 말은 제대로 들어보지도 못했다.
“생각보다 조건이 힘들어 보입니다만…….”
내 말을 들은 성녀 조슈아가 결정을 기다리는 듯 두 손을 꼬옥 쥐고 나를 바라보았다.
“만약 정말 올렌드 추기경을 죽여 주면 제게 뭘 해 주실 수가 있죠? ”
잠시 고민하던 성녀에게서 대답이 나왔다.
『 ……를 드리겠습니다. 』
호오?
그렇단 말이지?
* * * * *
조슈아 성녀가 돌아간 뒤 재중이 형과 따로 이야기를 나눴다.
이전에 했던 이야기들을 전부 해 주자 재중이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이거 오자마자 세력 싸움인가. 여기도 개판이군.”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성녀가 조건으로 건 게 마음에 걸리기는 한데…… 너무 무게 추가 엉망이라.”
잠시 고민을 하던 재중이 형이 씨익 웃으면서 말을 꺼냈다.
“오케이, 무게 추를 맞춰 보자.”
“그럼?”
“올렌드 추기경하고 한번 약속 잡아.”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