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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688화 (678/1,404)

#688화 버려진 나라 (3)

챠밍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무너진 건물 사이의 어두운 골목에서 누군가가 살짝 고개만 내밀고 우리를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

기존에 여기에서 전투를 하던 기사나 마법사 같은 NPC들이라면 굳이 저렇게 숨어서 우리를 볼 필요가 없을 텐데, 지금 모습을 드러낸 NPC는 확실히 다른 존재였다.

그냥 길을 지나가는 신성 제국의 NPC라고 보기에는 거동이 너무 수상해.

굳이 저렇게 벽 뒤에 숨어서 우리를 보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

바로 재중이 형과 시선이 마주쳤다.

<주호> 잡을까요?

<불멸> 아니, 그냥 놔둬 봐. 만약 필요하다면 먼저 접근을 하겠지.

<주호> 만약 그게 아니라면요?

<불멸> 너 잘하는 거 있잖아. 모습을 숨기도 따라 붙어.

하긴.

저 건물 사이로 숨은 NPC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필요하면 은신을 하고 따라가도 되는 일이었다.

<주호> 적어도 좀 전의 올렌드 추기경하고는 좋은 사이는 아니겠네요.

같은 편이었다면 우리가 올렌드 추기경과 이야기를 나누던 아까 전에 모습을 드러냈어야 말이 된다.

<불멸> 그것도 지켜봐야지. 일단 모르는 척 움직여 줘.

<주호> 네, 그러죠.

그리고는 곧장 재중이 형이 우리 팀 모두에게 지시를 내렸다.

<불멸> 다들 하던 대로 움직이라고.

그 말에 모두들 살짝 고개만 끄덕인 뒤 할 일이 있는 것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불멸> 나도 잠시 떨어져 있지.

<주호> 네, 조금 있다 보죠.

재중이 형까지 내게서 멀어지자 일부러 유저가 없는 으슥한 방향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자 예의 그 NPC가 나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역시…….

나를 따라 오는 거였나?

혹시나 싶어서 움직여 봤는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는 웃음이 나왔다.

그래.

한번 따라와 봐.

누군지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주변을 보자 베히모스와의 전투 때문인지 온전한 건물들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그중 그나마 시야가 막혀 있는 한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잠시 멈칫거렸던 녀석이 조심스럽게 나를 따라 건물로 들어왔다.

검은 후드를 완전히 뒤집어쓰고 있어서 얼굴은 전혀 파악이 되지 않았지만 대략적인 체형은 드러나 보였다.

여성?

그것도 생각보다 꽤 왜소한 모습이라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흐음.

일단 나를 미행해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 아닌 모양인데.

물론 이 세계에서 단순히 외형만을 보고 판단하는 일은 절대 금물이었다.

당장 아스티아만 봐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존재니까.

그런데 건물의 입구에서 더 이상 들어오지 않고 멈춰서 잠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생각보다 조심성이 많잖아?

결국 내 쪽에서 먼저 말을 걸었다.

“제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여기로는 부족할까요?”

내가 먼저 말을 걸자 깜짝 놀란 듯 후드가 순간 흔들거렸다.

이거 참.

미행하고는 영 안 어울리는 사람이네.

잠시 주저하던 여성이 곧 후드를 한 손으로 잡아 뒤로 넘기는 순간 찰랑이는 하얀 머릿결이 흘러내렸다.

흐음.

건물의 어둠 사이로 살짝 들어오는 빛에 비친 얼굴은 새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고 동시에 붉은 빛의 눈빛이 흘러나왔다.

마족인가?

아냐.

마족이면 베히모스와 함께 여기서 난장판을 쳤어도 벌써 쳤어야 정상이었다.

그리고 마족이 이 정도로 조신하게 움직일 리도 없고.

『 뒤를 밟아서 놀라셨나요? 』

조심스럽게 말하는 그 말을 듣고는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렸다.

자신이 제대로 뒤를 밟았다고 생각하는 모습을 보고도 경계를 한다면 내가 이상하겠지.

이 정도로 나를 방심시킬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놀라지는 않았습니다만, 저와 따로 이야기해야 하는 건가 봅니다. 이렇게 조심히 따라오시는 걸 보면요.”

내가 호응해 주자 자신감이 좀 생겼는지 조금 더 편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좀 많이 어설프긴 한데.

이것도 나쁘지는 않네.

『 주호 공작이라고 들었습니다. 가르시아 제국에서 온……. 』

물론 이건 좀 의외의 말이었다.

설마 올렌드 추기경과 한편이었나?

“제가 가르시아 제국의 공작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군요. 마주치는 사람마다 다 알고 있으니.”

경계하는 듯한 말투로 말을 하자 여인 쪽이 잠시 한숨을 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 일부 상위 귀족들을 제외하고는 몰라요. 당신이 가르시아 제국의 귀족이라는 것을요. 』

그럼 눈앞에 있는 이 여인도 상위 귀족 중에 하나라는 뜻인데…….

적어도 올렌드 추기경과 비슷한 정도의 직위인 건가?

아니면 누군가의 세력 중 하나?

“당신도 그중 하나겠군요.”

내 질문에 여인이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여기서 조금 더 떠볼까?

“방금 돌아간 올렌드 추기경과는 그렇게 좋은 사이는 아닌가 봅니다.”

그 말에는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거 반응이 너무 쉬우니까 김이 빠지기도 하는데?

왠지 물어보면 물어보는 대로 다 알려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너무 티 나게 따라왔나요? 』

“뭐 좀 그렇죠.”

매번 거짓말만 하는 NPC들만 보다가 이런 NPC를 보니 신선하기까지 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 제 정체가 궁금하시나요? 』

“아니라고는 못하겠습니다만.”

여인이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뭔가 결심한 듯 말을 꺼냈다.

『 만나서 반가워요. 전 신성 제국 제넨샤의 성녀를 맡고 있는 조슈아라고 해요. 』

성녀라고?

지금 쓰고 있는 새까만 후드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직위인데?

그리고 성녀라는 높은 직책이 이렇게 혼자 돌아다녀도 되는 건가?

적어도 주변에 성녀를 호위해야 할 호위병 정도는 있어야 정상 아냐?

그런 내 생각들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성녀라는 여인이 한숨을 푹 쉬었다.

『 지금 모습이 좀 성녀 같지는 않죠? 』

“아니라고는 못 하겠군요. 누군가 보자마자 성녀라고 하면 보통은 그럴 겁니다. 이렇게 혼자 돌아다니는 것도.”

사실 성녀라는 직책이 정말 있는 건지도 의문이라…….

추기경이라는 기사는 직접 베히모스와 맞짱 뜨는 실력을 보여 줬으니 당연히 믿겠지만 성녀는 또 다른 문제였다.

NPC들이 사기를 치지 말라는 법도 없고.

『 잠시 실례 좀 할게요. 』

그러더니 여인이 두 손을 모아서 내게 향하게 했다.

그 순간 여인의 주변으로 하얀 마법진이 생성되어 여인의 몸 전체에서 환한 빛을 뻗어 내었다.

한꺼번에 네 개나 되는 마법진을 동시에 쓰면서.

이건?

그렇게 한참 동안을 여인의 주변을 돌면서 마법진이 완성되자 여인이 스킬을 시전했다.

【 성녀의 가호! 】

낭랑한 외침과 함께 내 몸에 뭔가의 시스템 메시지들이 잔뜩 올라왔다.

《 성녀의 가호를 받습니다. 》

《 성녀의 가호에 따라 근력이……. 》

《 성녀의 가호에 따라 체력이……. 》

《 성녀의 가호에 따라 민첩이……. 》

.

.

그리고 쭉 이어지는 스탯의 상승.

동시에 여러 가지 상태 이상에 대한 저항까지도 한꺼번에 올려 주었다.

대략 걸리는 패시브만 해도 이미 열 개가 넘어갔다.

이거면 예전에 쉴라가 썼던 썬라이트보다 이쪽이 스탯 상승량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버프의 능력으로만 치면 방금 쓴 성녀의 가호가 월등해.

거기다 시야도 더 맑아지는 기분까지 들 정도니 더 말해 뭐할까.

만약 상대방과 스펙이 똑같다는 가정하에 이 버프를 받는 쪽과 못 받는 쪽은 이미 게임부터가 되지 않을 것이다.

『 이 정도면 증명이 되었나요? 』

성녀 조슈아의 자신 있는 표정에 미소를 지어보였다.

“확실히 성녀가 맞군요.”

스킬 자체에 성녀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이상 더 확인해 볼 필요도 없었다.

아무리 속이려고 들어도 스킬 이름까지는 속이진 못해.

“그런데 왜 이렇게 전투 장소에 혼자 오신 겁니까? 주변에서 말렸을 텐데요.”

『 음, 사실 몰래 나왔어요. 』

혹시나 했는데 역시인가.

진짜 성녀인데 주변 호위병들이 그냥 돌아다니게 두진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해서 지금 절 만나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이미 올렌드 추기경에게는 파티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대로 기다리고 있었어도 금방 보게 됐을 텐데요.”

이 여인이 정말 성녀이다 보니 이젠 문제가 좀 복잡해졌다.

재중이 형 말대로 생각해 보면 성녀와 추기경이 서로 사이가 안 좋을 확률이 아주 높았으니까.

그 예측을 확인시켜 주기라도 하듯 성녀가 말을 이었다.

『 추기경은 절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

이래서 재중이 형이 반대편 말을 다 들어봐야 한다고 했구나.

그대로 추기경을 따라갔다가는 뭔가 문제가 생겨도 생겼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 성녀의 말을 다 믿는 것도 아니었지만.

“아니, 그보다 제가 여기 온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습니까?”

오면서 주변에 NPC는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었다.

그럼, 애초에 미리 누군가에서 이야기를 들었다는 말이 되는데.

그리고 그 답을 듣기 위해 지금의 질문을 했다.

『 주호 공작 님이 오시기 전에 이미 다른 가르시아 제국 귀족분들이 도착했었어요. 』

성녀의 대답은 내가 원하던 딱 그 대답이었고.

역시 먼저 도착했었네.

그리고는 성녀 조슈아가 말을 이어 갔다.

『 그 가르시아 제국 귀족들이 추기경과 면담을 하고 난 뒤부터 많은 일들이 벌어졌어요. 일어나면 안 되는 일까지도요.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해요. 』

그러면서 성녀가 고개를 돌려 바깥을 바라보았다.

불타고 부서져서 난장판이 되어 있는.

“베히모스?”

『 네, 베히모스. 고대의 마수죠. 봉인을 해서 나와서는 안 되는 존재이기도 하고요. 』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이건 좀 들어야겠다.

대충 상황은 예상이 되지만 추측하는 것과 성녀의 입에서 직접 듣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그런데 성녀는 좀 다른 이야기를 했다.

『 이백 년 만에 신성 제국에 처음 사람이 찾아온 것은 아시나요? 』

뭐……?

이백 년?

이건 또 무슨 말이지?

『 신성 제국을 둘러싸고 있는 결계는 이미 보셨죠? 』

“네, 오면서 봤죠.”

『 사실 신성 제국에서는 아무도 바깥으로 나갈 수 없게 되어 있어요. 』

“설마 갇혀 있다는 뜻입니까?”

『 표현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신성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결계를 구축하는 일밖에는. 』

이건 전혀 생각도 못 했는데?

“그동안 신성 제국을 발견할 수 없었던 이유가…….”

『 누구든 들어오면 못 나가거든요. 우리도 나갈 수 없고요. 』

제국에서 신성 제국이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이제 알게 되었다.

애초에 연락이 안 되는데 알 수 있을 리가.

그리고 이건 문제가 되겠는데?

당장 나갈 수 없는 문제라면 우리도 해당되니까.

아니 유저들에게 해당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말만 들어서는 그럴 확률이 아주 높았다.

“지금도 나갈 수 없는 건가요?”

『 아뇨, 지금은 나갈 수 있게 되었어요. 』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말이 좀 이상한데?

마치 누군가…….

『 결계가 부서졌어요. 누군가 결계에 손을 써서요. 』

그러더니 조슈아가 곧 눈빛을 가라앉히며 말을 꺼냈다.

『 주호 공작, 부탁을 하나 해도 될까요? 』

이거, 왠지 좀 큰 건일 것 같은데?

흐음.

못 먹어도 일단 고인가?

“일단 들어 보죠.”

내가 허락을 하자 이어지는 조슈아의 말은 나를 놀라게 하였다.

『 올렌드 추기경. 그자를 죽여 주세요. 』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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