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5화 신성 제국 (6)
고르곤과 듀라한, 그리고 땅속으로 이동 중인 정체 모를 녀석들까지 한꺼번에 내 뒤를 따라 유저들을 향해 이동했다.
어차피 고르곤이나 땅에 있는 녀석은 안 보이겠지만 듀라한은 달랐다.
대지를 쿵쿵거리면서 달려오는 듀라한을 본 유저들의 표정이 바로 죽은 듯이 일그러져서는 크게 외쳤다.
“듀라한이다!”
“미친, 저게 대체 몇 마리야?”
“다들 튀어!”
“아놔, 주호 저놈 미쳤나!”
혼비백산.
아무렇지도 않게 내 뒤를 밟았던 녀석들에게는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큰 재앙이나 마찬가지.
애초에 이렇게 직접 네임드를 마주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테니까.
언덕과 수풀 속에서 불쑥불쑥 일어나는 녀석들의 숫자를 보니 한두 녀석도 아니었다.
이거…….
단순히 날 찍으려고 따라붙은 녀석들만 있는 것도 아닌데?
아까 멀리서는 확인하지 못한 정체를 완전히 숨기고 있던 길드들도 보였다.
촬영만 하려는 개인이 아닌.
또 다른 길드들.
<주호> 형. 이놈들, 단체로 숨어 있었는데요?
<불멸> 뭐?
<주호> 가까이 가니까 벌 떼처럼 일어나네요. 아무래도 뒷걸음치다가 쥐까지 잡을 것 같아요.
<불멸> 흐음, 그래? 겸사겸사 잘됐네. 확 던져 주고 와.
<주호> 네네, 얼른 합류하죠.
재중이 형은 딱히 내 걱정은 하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숫자가 많고 적음의 문제는 아니었으니.
딱히 저들을 상대할 생각도 없었고.
일단 유저들의 이동속도보다 내 쪽이 월등히 빨랐고, 네임드들 역시 이동속도가 굉장히 빠른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결국 나와 네임드, 유저들이 한곳에서 뒤엉키는 상황이 오게 되었다.
크아악!
카아악!
“그럼 잘들 즐겨 보라고.”
완전히 유저들 사이로 뛰어들어 간 뒤, 곧장 하이딩 블레이드를 꺼내서 스킬을 시전했다.
【 은신! 】
스르륵 사라지는 내 모습에 유저들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사라져?”
“로그아웃?”
“아냐! 은신이다!”
아직 은신 스킬을 쓸 수 있는 유저가 없을 텐데?
흐음, 아니지.
예전에 10강을 하면서 은신이 되는 하이딩 블레이드를 유저들이 시스템을 통해 봤으니까.
하이딩 블레이드는 네임드 템이다 보니 정보가 숨겨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유저들이 은신을 알고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아놔, 엿됐다.”
그리고 내가 사라지는 순간.
듀라한과 고르곤들의 시선이 전부 주변에 있던 유저들에게 옮겨갔다.
거기다 땅속에서 움직이던 정체 모를 녀석까지.
쿠르릉!
“으악! 뭐야. 땅에서……!”
“악! 빨려 들어간다!”
“크악! 내 다리!”
갑자기 유저들이 밟고 있던 지대가 모래처럼 무너져 내리며 먼가가 확 튀어나오더니 유저들의 다리와 허리를 한꺼번에 꿰뚫어 버렸다.
그리고는 꼬치처럼 엮인 유저들을 바로 땅속을 끌고 들어가 버렸다.
계속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면 확인조차 못 할 신속함.
어떻게 땅속에서 저런 움직임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봤다.
땅이 무너지며 그 속에서 튀어나온 날카롭고 뾰족한 날들을.
빠른 속도로 정확하게 목표물을 조준해 유저들의 방어구를 관통하는 것이 첫 번째.
그다음 유저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고는 그대로 땅속으로 끌고 가는 것이 두 번째.
이 일련의 과정이 눈 깜빡하는 사이에 일어나기에, 미리 아래를 보고 있지 않았다면 그냥 당할 수밖에 없었다.
어지간히 감각에 예민한 사람들이 아니면…….
저건 무조건 당한다.
그런 녀석들이 한둘이 아니라서 곳곳에 유저들을 끌고 들어가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주변에서 늦게나마 땅속에 들어간 유저들을 살려 주려고 했지만 속수무책.
눈치챈 순간.
이미 땅속에 파묻혀서 사라지는데 어떻게 도와줄 건가.
흐음.
만약 우리 원정대가 저걸 만났다면?
아마도 몇몇 감각이 좋은 유저들을 빼고는 죄다 저것에 당했을지도 모른다.
감지 마법?
혹은 뭔가 녀석들을 찾아낼 방법이 있을 텐데.
물론 잡으려고 하면 방법이 아예 없진 않았다.
아주 광범위하게 땅을 뒤엎을 마법을 구사한다든지.
하지만 지금은 그걸 가능하게 할 유저들은 딱히 보이진 않았다.
듀라한과 고르곤이 동시에 날뛰는 마당에 저 땅속의 몬스터에게 일일이 신경을 쓸 수는 없을 테니.
<주호> 형, 땅속 몬스터 정체 파악했어요.
<불멸> 그래?
<주호> 끌려 들어가면 그냥 죽어요.
<불멸> 흐음, 그거 골치 아픈데?
<주호> 일단 느껴지는 녀석들은 다 끌고 왔으니까 그쪽은 크게 문제없을 거예요.
<불멸> 오케이, 알았다.
재중이 형도 집중을 하면 이 녀석들을 포착할 수 있을 테니 딱히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한 번에 땅을 뒤엎을 만한 위력을 가진 챠밍도 옆에 있었고.
그밖에도 능력 좋은 사람들이 많으니까.
은신한 상태로 옆으로 빠져나와 전장을 살펴보니 도망가는 유저들과 그를 따라가는 듀라한, 고르곤으로 이미 개판이 되어 있었다.
저 유저들을 다 죽일 때까지는 시간이 제법 있으려나.
일부러 네임드들을 힘들게 여기까지 끌고 온 이유는 딱 하나였다.
저렇게 유저들을 먹이 삼아 시간을 벌기 위해서.
만약 네임드에게 아무것도 던져 주지 않았다면 나조차 돌아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흐음, 저들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덕분에 일일이 잡고 지나가야 하는 시간을 엄청나게 단축했으니.
그렇게 난장판이 된 전투 현장을 놔두고 유유히 다시 암흑 지대로 돌아왔다.
여긴 한산하네.
그럼, 쭉 달려 볼까나?
재중이 형에게 물어 좌표를 확인한 후 최대의 속도로 빠르게 달려 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앞서 달리고 있던 우리 원정대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역시 드워프들이 함께 움직여서 이동속도가 느리네.
거기다 유저들 중에도 이동속도가 느린 유저들이 꽤 있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많이 이동하지는 못했다.
이동 행렬을 유심히 바라보니 진실의 눈을 가진 유저들이 진로를 열고 그 뒤를 쭉 따라가는 모양새였다.
“왔냐?”
내가 옆에 따라붙자 재중이 형이 이동 행렬에서 옆으로 빠져나왔다.
“상황은요?”
“별거 없네. 네가 다 쓸어가 준 덕분에.”
“네, 다행이에요. 당분간은 따라오지 못할 겁니다. 녀석들을 먹이로 넘겨줘서.”
“그래도 안심은 금물이야.”
“알겠어요. 시간을 더 벌 필요는 없겠죠?”
“뭐 이 정도면.”
그렇게 행렬과 함께 한참을 움직였는데도 딱히 문제가 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괜히 걱정했나?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점점 암흑 지대가 옅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희미하지만 확실히 옅어지는 그런 느낌.
“주변이 좀 밝아진 것 같지 않냐?”
역시 형도 느낀 건가.
아주 미세하지만.
확실히 변화가 보였다.
“네, 옅어지는 느낌이네요.”
그리고 조금 더 가자 계속 시야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이젠 진실의 눈이 없어도 암흑 지대가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러자 이동 행렬의 속도가 점점 더 올라갔다.
전혀 보이지 않다가 앞이 잘 보이니 당연히 속도가 올라갈 수밖에.
그렇게 한참을 더 가던 중 갑자기 재중이 형이 외쳤다.
“정지.”
재중이 형의 외침에 앞서가던 행렬이 일제히 멈추고는 우리를 바라봤다.
사장님도 급하게 달려왔고.
“뭔가 발견한 거냐?”
“아마 더 전진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사장님은 재중이 형의 말에 단 한순간의 고민도 없이 바로 오더를 내렸다.
“흐음, 알았다. 전 원정대 정지!”
그렇게 사장님의 오더에 모든 행렬이 멈추자 길마들이 전부 우리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고 눈으로 물으면서.
그런 길마들에게 재중이 형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아까부터 같은 장소를 계속 돌고 있는 것 같군요.”
그 말에 길마들이 모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런 앞이 탁 트인 곳에서 같은 나무를 볼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것도 세 번이나 말이지.”
재중이 형의 말에 나 역시 놀랐다.
설마 같은 곳을 세 번이나 돌았다고?
그러자 같이 있던 엔느가 급하게 주변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그러고 보니 기억에 있어요. 아까 저 큰 나무. 그냥 새로운 지형이라고 생각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듣고 나니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고개를 돌려 나르샤 누나를 보니 제3의 눈을 열어 멀리 바라보던 나르샤 누나가 한숨을 쉬었다.
“지금 보고 있는 풍경이 전부 왜곡된 거네?”
“아마 그런 모양이에요.”
“정찰이 의미가 없겠어. 이러면.”
그러고는 나르샤 누나가 시야 스킬을 풀어 버렸다.
“다행인 건 몬스터가 없다는 정도겠네.”
“그나마 다행이죠.”
만약 이 상태에서 네임드의 공격을 계속 받는다면 심각한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
“증표는 어때요?”
재중이 형을 보면서 물어보자 재중이 형이 고개를 저었다.
“이걸 따라가서 계속 돌았잖아.”
“함정으로 유도된 건가요?”
“아마도?”
재중이 형이 주변을 바라보고는 한 마디를 더 꺼냈다.
“주변을 돌게 만드는 인위적인 함정이라……. 일단 적은 아닌 모양인데?”
“적이 아니라면?”
“그래, 여기만 넘기면 바로 신성 제국을 확률이 높아. 이건 일종의 방어 지대일 수도 있고.”
그 말을 듣고 나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럴 때도 통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단순히 돌기만 하는 함정이라면 시도해볼 만은 하겠지.
“형, 잠시만 주변 좀 물려 주시겠어요? 이왕이면 소리가 안 들렸으면 좋겠어요.”
“길을 찾을 생각이냐?”
역시 척하면 척.
내가 하려는 것을 눈치채고는 바로 주변에 있는 원정대 유저들을 물렸다.
일체의 소리가 나지 않게.
그렇게 완전히 유저들이 멀어지자 곧장 눈을 감았다.
길은…….
어차피 정해져 있어.
지금은 현혹하는 시야가 방해가 될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눈을 감으면 다른 감각들이 더 활성화되니까.
한참을 눈을 감고 집중을 하다가 르아 카르테를 들어서 한쪽 방향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르아 카르테의 날을 따라 바람이 밀려 나가며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잔잔하게 불어나가던 바람의 결에 주변의 느낌이 계속 전달되어와 마치 주변의 사물들의 움직임이 하나의 그림이라도 되는 것처럼 머릿속에서 점점 형체를 이루어 갔다.
제대로 되는 듯하자 연속으로 르아 카르테를 각기 다른 방향으로 계속 휘둘렀다.
여기는…….
아니야.
저기도…….
아니고.
뭔가 왜곡된 길이라면.
반드시 흔적이 있을 터.
바람이 머물지 않는.
딱 한 곳.
인위적으로 비틀어 놓았다면 반드시 흔적이 남는다.
그렇게 허공에 칼춤을 추면서 계속 바람을 날리다가 어느 순간.
몸이 움찔했다.
바람이 제자리에서 맴돌아?
분명히 계속 흘러가야 하는 바람이 어느 장소에서 멈추듯이 흘러나가다가 곧 사라져버렸다.
자연적인 소멸이 아닌.
인위적인 소멸.
그것을 느끼자마자 바로 눈을 떴다.
“형, 찾았어요.”
“좋아.”
내가 길을 찾았다는 말에 주변에서 지켜보던 길마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곁에서 보면 가만히 서서 눈을 감고 칼춤을 추듯 검만 휘둘렀을 뿐인데 길을 찾았다고 하니 저런 표정을 지을 수밖에.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길마 중에 황룡이 옆에 있던 챠밍에게 물었다.
“정말 저걸로 찾을 수 있다는 겁니까?”
그 물음에 챠밍이 확고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으음, 오빠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거든요. 이번에도 될 거예요.”
“정말 완전히 믿으시네요.”
“네, 전 믿고 있어요.”
그런 길마들의 시선을 뒤로한 채 걸어가 그 바람이 머물던 지점에 도착하자 내 몸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마치 어디론가 사라지듯이.
확실하네.
“여기입니다. 신성 제국으로 가는 길은.”
그리고 그런 나를 본 챠밍이 더없이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 말이 맞죠?”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