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8화 가짜 전쟁 (6)
레릭 왕국처럼 하나의 거대한 왕국을 통째로 날려 버리려면 얼마나 많은 준비가 필요할까?
적어도 수천 개는 넘는 폭발물들을 동시에 터트려야만 왕국을 한 번에 날려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건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거의 준비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땅속에 대규모 폭발물이라도 미리 쌓아 두는 상황이 아니라면 어지간해서는 유저들이 눈치채고 말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레릭 왕국 자체가 베일에 싸여 있었고, 유저들 중 그 누구도 레릭 왕국에 출입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드워프들이 유저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마음대로 일을 꾸미기에는 최적의 조건이었다는 말.
또 하나 더.
레릭 왕국은 현재 고대 드워프 왕의 소유였다.
날려 버리든 말든 그건 전적으로 고대 드워프 왕이 결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는 고대 드워프 왕은 이 작전에 흔쾌히 동의를 했다.
제국의 귀족들과 병력들을 한꺼번에 날려 버릴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마다할 리는 없으니까.
그게 비록 레릭 왕국을 날려 버리는 일이 될지언정.
어차피 드워프들의 능력이면 왕국을 재건하는 일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테니 결정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결과물이 지금 이 사상 초유의 대폭발이었다.
살을 주고 뼈를 치는.
아니, 사실상 살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모든 드워프들은 폭발 전에 이미 빠져나가 버렸으니.
드워프들의 역할은 폭발물들을 설치하는 것으로 끝.
실제로 병력이라 할 만한 존재들은 전부 필드에서 몬스터로 존재하던 드워프 악령들뿐이었다.
그들을 불러들여서 병력이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이었다.
이것 역시도 대전사 칼룬과 미리 이야기가 끝났었고.
드워프 족답게 최상의 위력을 가진 폭발물들을 가지고 있었다.
유저들을 한 방에 죽을 수 있는, 지하 함정에나 쓰이는 물건들을 잔뜩 왕국 곳곳에 설치해 두고 한 번에 터트리면?
NPC 병사는 물론이거니와 체력이 높은 기사들도 생존을 장담하지 못한다.
유저들이야 뭐…….
그냥 한 방이지.
절대.
이 폭발 속에서는 살아남지 못한다.
혹시나 싶어서 드워프들에게 폭발물을 받아와 미리 사장님과 확인해 보았는데 결과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그냥 터지면 죽는다.
조금 거리가 있는 상황에서는 바로 체력이 바닥이 되지 않기에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는 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데 바로 옆에서 터진다?
그럼 죽는 거다.
물약을 먹을 틈도 없이.
당연히 그런 폭발물이 빼곡하게 쌓여 있던 레릭 왕국에서는 그 어떤 유저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레릭 왕국에 접근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검고 매캐한 폭발 구름으로 시야가 엉망인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는 촬영도 어려워.
화마와 폭발, 그리고 질식할 것 같은 연기로 인해 이미 레릭 왕국은 접근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레릭 왕국의 성벽에 가까이 가자 바로 시스템 메시지가 울렸다.
《 +10 암흑 드래곤 플레이트 상의의 화속성 방어가 화염 상태 이상 - 10단계에 저항합니다. 》
《 +10 암흑 드래곤 플레이트 하의의 화속성 방어가 화염 상태 이상 - 10단계에 저항합니다. 》
《 화염 상태 이상으로 체력이 소모되지 않습니다. 》
이전의 산불을 냈을 때는 화염 상태 이상이 5단계였는데 지금은 10단계였다.
그만큼 화력이 막강하다는 말이었고.
체력 소모도 최소 두 배 이상은 될 텐데 암흑 드래곤 플레이트는 이런 화염에도 충분히 버텨 내는 위엄을 보였다.
하지만 다른 부위에서는 문제가 생겨났다.
《 +4 암흑 드래곤 헬름이 화염 경직에 저항하지 못합니다. 》
《 체력이 일정 수준 이하로 내려가면 경직에 걸립니다. 》
《 +4 암흑 드래곤 건틀렛이 어둠, 화염 속에서 체력을 회복시키지 못합니다. 》
《 화염 속에서 자연 치유 효과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
《 +5 암흑 드래곤 부츠가 어둠, 화염 속 이동 속도를 증가시키지 못합니다. 》
《 화염 속에서 이동 속도가 둔화됩니다. 》
이건…….
암흑 드래곤 세트라고 해도 버틸 수가 없는 건가?
아니지.
10강인 상의, 하의는 저항을 하는데 다른 부위가 저항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화염 단계에 따라 버틸 수 있는 한도가 있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나.
체력 소모가 되지 않는 것만 해도 지금은 충분했다.
경직이야 물약으로 체력을 회복하면 일정 이하로 내려갈 일은 없을 테고.
체력 회복 효과 역시 물약으로 때우면 된다.
그리고 이동 속도 둔화는 스킬로 어느 정도 무마가 되니까.
여차하면 수룡화를 써서 화염 상태에 저항해도 되는 일.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아닌 다른 유저가 이 화염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몇 초도 버티지 못하고 죽어 버릴 것이다.
그래서 당분간은 아무도 접근하지도 못한다.
비록 긴 시간은 아니라고 해도.
원하는 일을 다 하고 나오기에는 충분하겠지.
채팅창을 보자 그 어느 때보다도 반응이 뜨거웠다.
이런 폭발은 듣도 보도 못 했을 테니.
- 미쳤다.
- 세상에, 드워프 새끼들 진짜 돌은 거 아냐?
- 이 미친 스케일 보소. 왕국을 날려 버리다니.
- 앞이 깜깜한 게 하나도 안 보이네.
- 멀리서도 보임. 저거 완전 핵폭발 아님?
- 대체 얼마나 폭발물을 터트린 거야?
- 와, 탐사대고 뭐고 다 녹았다.
- 지금 임시 부활지에 유저들 바글바글함.
- 전부 레릭 왕국 들어갔던 유저들인 듯.
- 고대 드워프 왕 먼저 잡을 거라고 좋다고 들어가더니 꼴 좋네.
- 니들 봤냐? 탐사대 죄다 해체됨.
- ㅇㅇ. 방금 확인했음. 귀족들 싹 죽었나 봄.
- 몇 놈 남아 있긴 한데…….
- 곧 죽겠지. 저 안에서 무슨 수로 살아남냐.
- 니들 지금 탐사대가 중요하냐. 무기 드랍 됐네…… 미치겠다.
- 아놔, 나도 들어갔다가 죽었는데 아이템 떨어뜨림.
- 아악!!! 내 8강!! 떨궜어.
- 젠장, 난 9강…… 떨어졌다. 하아, 진짜 접어야 하나.
- 고작 9강? 10강 무기 떨어졌어! 이벤트로 받은 10강 주문서로 지른 건데 떨어졌다고!
- 난 돈 주고 10강 블레이드 샀단 말이다. 그게 얼마짜린데에!!!! 빚 내서 샀단 말이야!!
- 나도 찾으러 들어가야 해. 그거 잃어버리면 진짜 집 날아감……!
- 휴, 난 안 떨어졌다. 지져스.
- 진짜 감사합니다. 저도 안 떨어뜨렸어요!
- 닥쳐! 안 떨어뜨린 놈들은!
- 게임사 미친 거 아냐? 이거 어떻게 수습하려고 그러냐.
- 수습하긴 뭘 수습해? 지들이 욕심내서 들어갔다 망한 거지.
- 꼬시다. 꼬셔. 다 접어라. 사냥터 독식하던 길드 놈들이라 불쌍하지도 않다.
- 아놔, 길마가 이거 해결해 주려나?
- 미쳤냐? 돈이 수억인데 잘도 해 주겠다.
- 이거 잘못하다 길드 해체되겠는데…….
- 그럼 난 안에 들어간다! 아이템 주어서 나오면 개꿀.
- 나도 한번 해볼까?
완전 곡소리 나네.
드워프가 일으킨 레릭 왕국 폭파 사건으로 탐사대가 전멸하고 유저들이 싹 다 녹아 버렸다.
그 와중에 채팅창에 올라오는 드랍된 아이템들도 상상을 초월하는 것 같았고.
상위 길드가 대거 포진되어 있었기에 아이템 강화 등급도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가는 모양이었다.
최정예만 데리고 들어갔으니 당연한 건가.
피해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감도 안 잡히는데?
채팅창을 잠시 봤다가 너무 많은 글이 올라와서 잠시 시선을 돌렸다.
일단 안에 10강도 있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
그럼 나야 감사하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보고는 혀를 찼다.
드랍된 아이템을 주우려고 성벽을 넘어 들어가려던 유저가 곧 화염에 휩싸여서 죽는 모습들이 보였다.
그런 유저들이 성벽을 따라 대거 보였는데 하나같이 성벽을 넘지 못하고 죽어 나갔다.
아직도 레릭 왕국 안은 불바다라 그냥은 못 들어간다.
일반 유저들의 화염 저항으로는 잠시도 버틸 수 없어.
이제 조금 더 기다리면 죽었던 유저들도 달려올 테고 화염도 점점 사그라들겠지.
그때부터는 이곳도 정말 복잡해질 것 같았다.
그 전에.
볼일을 다 마치고 나와야 해.
다시 시선을 돌려 성문 쪽을 확인했다.
흠.
성문은 무너져서 지나가긴 힘들겠고.
폭발이 터지면서 성문이 박살 나 도저히 지나갈 수가 없었다.
그럼 그냥 넘어가야겠네.
바로 품에서 로프를 꺼내서 성벽 위로 집어던졌다.
그리고 성벽 잔해를 튕기듯이 밟고 넘어가 바로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이제 이 정도 묘기는 어렵지도 않지.
그렇게 성벽을 넘어가 착지하자 바로 시야부터가 막혔다.
눈앞을 가득 메운 화염의 잔치.
거기다 매캐하게 퍼져 있는 시커먼 연기의 중첩으로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나.
바로 눈을 감고 감각을 끌어올리자 주변의 수많은 정보들이 빠르게 내게 전달되기 시작했다.
아직도 연쇄적으로 터지는 폭발과 화염으로 인해 좀 산만하기는 한데…….
발을 통해 올라오는 진동으로 봐서는 주변에 살아 움직이는 존재는 느껴지지 않았다.
전멸?
최소 수만은 레릭 왕국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 많은 숫자가 저항조차 해 보지 못하고 녹아내렸다.
바깥에 있는 누군가 또 곡소리를 내고 있겠는데……?
좀 미안한 마음이 잠시 생겼다가 이내 생각을 접었다.
뭐 알아서 하겠지.
앞으로 걸어가면서 다른 것에 더 신경을 쏟았다.
바로 아이템들.
보통은 유저가 죽으면 바닥에 떨어져서 돌아간다.
그리고 그런 아이템이 돌아가는 특유의 파장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많이도 흘렸네.
이 대규모 폭발이 드워프들이 일으킨 일이다 보니 드랍률이 평소보다 훨씬 올라간다.
그래서인지 정말 그동안은 볼 수 없었던 아이템들의 향연이 이곳에 펼쳐져 있었다.
아쉽군.
영상으로 찍어 두고 싶어도 어차피 이 화염 속에서는 하나도 나오지 않을 테니.
잠깐의 감상 후 바로 근처에 있는 터져 나간 건물 속으로 들어가 떨어져 있는 아이템들을 줍기 시작했다.
여기에 잔뜩 떨어져 있는 것을 보면 궁수 유저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 위치를 잡으려 했던 모양인데…….
덕분에 일일이 찾아다니는 수고를 줄여 주었다.
흠.
6강은 버리고.
7강도 버리고.
하나하나 주우면서 강화 단계를 보고는 낮은 강화는 그냥 다 버렸다.
인벤의 크기는 한계가 있으니까.
지금은 솔직히 7강도 싸구려였다.
내 인벤에 탑승할 녀석들은 최소 8강.
그 이상은 되어야 주워들 값어치가 있었다.
그렇게 줍고 버리기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흡족한 녀석이 하나 들어왔다.
『 +8 드워프 악령 롱보우 』
호오.
8강인가?
첫 수확인 8강을 손에 쥐고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걸 만들려면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가는지는 이미 잘 알고 있으니까.
6강, 7강 몇 개를 줍는 것보다 이쪽이 더 이득.
네임드만 아니라면.
지금 유저들이 들 수 있는 최강의 활이니까.
그리고 강화 단계가 이 정도면 오히려 네임드를 잡아먹을 수도 있는 활이었다.
네임드는 숫자가 적기 때문에 강화를 마음대로 못 하니까.
강화가 높은 이쪽이 사냥에는 더 좋았다.
이건 확실히 돈이 된다.
팔려고 내놓으면 바로 줄을 서겠지.
바로 무너진 건물을 나와 주변을 살폈다.
안으로 더 들어갈까.
외곽을 좀 돌까?
잠시 고민을 하는데 순간 내가 잘못 느꼈나 싶어 발을 멈춰버렸다.
최소 백여 개가 넘는 아이템이 한 장소에 떨어져서 진동하고 있었으니까.
아니다.
오히려 그것보다 더 많았다.
저건 성문 방향?
위치만 보면 아마도 유저들이 성문으로 빠져나가려다가 실패한 모양인데.
성문을 억지로 돌파하려다 망한 케이스로 보였다.
NPC들도 잔해 속에서 잔뜩 죽어 있는 걸 보면 이게 맞을지도.
흠, 저렇게 몰려서 죽어 주면 더 고맙지.
찾아다니는 수고도 줄어들고.
당연히 살아 있는 유저는 하나도 없었다.
빠르게 아이템들의 밭을 헤치면서 저강(?)은 내다 버리고 8강 이상만 걸러냈다.
그리고 나온 아이템들.
『 +9 암흑 브랜디슈 롱소드 』
『 +8 드워프 악령 스태프 』
『 +8 드워프 악령 건틀렛 』
휘유.
역시 죽은 숫자가 많다 보니 떨어진 아이템들도 많았다.
8강 건틀렛은 잠시 들어 올렸다가 다시 아이템들 사이로 던져 버렸다.
방어구를 저기까지 강화한 누군가가 대단하기는 한데…….
아쉽지만 방어구는 상대적으로 값어치를 못 받으니까.
돈이 덜 되는 물건을 굳이 그 무게를 짊어지면서 들고 나갈 필요는 없지.
지금 날 기다리는 아이템이 한둘이 아니라서 바로 우선순위에서 빼 버렸다.
오직 무기만.
그것도 고강만.
【 헤이스트! 】
【 대쉬! 】
시간이 무한정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화염과 연기가 걷히고 나면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유저들이 억지로 밀고 들어올 것이 뻔하니까.
그러다 건물들 사이에서 하나의 아이템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보여서 그냥 무시하고 달리려다가 순간 몸을 멈췄다.
한 개씩 떨어진 아이템은 시간이 아까우니 무시해야 정상이지만.
주변에 죽어 있는 NPC들이 많아 느낌이 싸해서 달려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NPC들의 잔해를 들어 올려 안에 묻힌 아이템을 꺼내 들었다.
『 +10 드워프 악령 블레이드 』
큭.
이 새끼 봐라?
누군지 몰라도 머리 좋네.
그 짧은 시간에 순간적인 판단으로 NPC들을 방패막이 삼아 버티려고 했던 것 같은데 결국은 죽어서 아이템을 남겼다.
아마 상위 길드의 누군가일 텐데.
그것도 최소 길드 간부 정도는 될 것이다.
무려 10강을 들고 있으려면.
감사합니다.
복 받으실 거예요.
바로 인벤에 챙기자 이것 하나만으로도 인벤이 빵빵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득템이 앞으로 계속 기다리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절로 발에 힘이 들어갔다.
하나도 놓칠 수 없어!
그렇게 파손된 도로를 따라 더 달려 들어가는데 순간 발이 멈칫했다.
감각에 뭔가 잡히자마자 바로 도로에서 벗어나 근처의 건물로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이건…….
누군가 살아 있다?
이 화염 속에서?
몰래 접근해 그게 누군지 확인을 하자마자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누군가가 붉은빛 대검에 의존해 겨우 살아 있는 모습.
그리고 주변의 화염을 흡수해 주인을 보호하고 있는 그 대검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손을 불끈 쥐었다.
큭.
이거 참.
이러면 안 죽일 수가 없잖아?!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