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7화 가짜 전쟁 (5)
일단 우리는 한 발짝 물러선 상태로 이 전쟁을 관망하기로 했다.
남쪽과 동서로 나누어진 세 진영 모두 전력은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유저들 역시 상당수 각 탐사대에 포함되어 레릭 왕국의 외곽 경계쯤에 걸쳐 진영을 준비하였고.
NPC들과 유저들의 숫자가 대략 수만은 가볍게 넘어가려나?
거기다 개별로 멀리 떨어져서 기다리는 길드들도 상당수 눈에 들어왔다.
“저건, 여차하면 뛰어들겠다는 거겠죠?”
“결과적으로 고대 드워프 왕만 깨면 이기는 싸움이니 레릭 왕국의 성벽이 무너지면 본격적으로 뛰어들겠지.”
굳이 탐사대가 아니라 거기 포함이 안 되는 길드들의 연합이라 해도 마지막 결과만 내면 된다.
고대 드워프 왕만 잡으면 레릭 왕국이 통째로 들어오니까.
그것만으로도 이 싸움에 임할 이유는 충분했다.
가장 거대한 덩치 셋.
그리고 귀족들의 탐사대에 들어가지 못한 길드들의 연합이 레릭 왕국을 주변으로 쭉 둘러치면서 정말 대규모의 전쟁이 준비되어 갔다.
원래 그 중간에는 드워프 악령 계열의 몬스터들이 있었는데 어느 사이엔가 완전히 레릭 왕국의 성안으로 들어가 성벽 위로 잔뜩 모습을 드러냈다.
흡사 유저들이 방어전을 하듯.
완전히 같은 방식으로.
몬스터들이 일종의 방어 NPC 역할을 하는 거려나.
인간 진영에 비해 다소 숫자가 부족한 드워프족의 단점을 저 드워프 악령들이 완전히 메워 주었다.
성벽을 빈틈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빽빽하게 채운 드워프 악령들을 보고는 채팅창이 순간 들썩거릴 정도였다.
- 숫자가 너무 많은데?
- 이거 이러면 진짜 방어전이잖아.
- 성벽 전체를 병력으로 둘러친 것 봐라. 빈틈이 없어.
- 올라가려면 고생 좀 하겠는데.
- 그리고 우리 오래 싸울 수도 없어. 가만히 서 있어도 저주 걸린다.
이러면 이야기가 완전 달라져.
단순히 필드 같은 평지에서 병력 대 병력으로 치고 박는 것과는 난이도 자체가 달랐다.
성벽을 끼고 방어하면 얼마나 까다로운지 이미 그간의 경험으로 유저들이 제일 잘 알고 있었으니까.
거기다 가장 큰 문제는.
레릭 왕국 주변의 모든 필드에서 걸리는 변질된 용혈의 저주.
이 저주에 걸리면 각종 상태 이상에 체력이 무섭게 빠져나가게 된다.
심지어 시간이 지날수록 중첩까지 되니까.
이게 한둘도 아니고 지금 공략을 하는 모든 유저와 NPC에게 들어간다는 점은 엄청난 부담이었다.
단시간에 저 레릭 왕국의 공략을 끝내지 못하면 오히려 변질된 용혈의 저주로 전부 죽어 버릴 수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경계로 들어가는 것을 다들 꺼려 하는 눈치였다.
한번 시작하면 정말 끝장을 봐야 할 테니.
난이도로 치면 이제껏 해왔던 그 어떤 방어전보다 난이도가 높았다.
일단 정찰을 위해 각 진영에서 탈것과 비공정을 띄워서 하늘로 올려보냈다.
기존의 탈것들과 비공정이 이 지역에서 효율은 낮긴 해도 아주 못 날고 그런 것은 아니니까.
이렇게 정찰 용도로만 쓰려면 나쁘지는 않았다.
그렇게 수백의 탈것들을 탄 NPC와 몇 대의 비공정이 레릭 왕국의 상공 위로 올라갔는데, 이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레릭 왕국 성벽 위에 설치되어 있는 검붉은 형태의 긴 포신이 그들을 가리키더니 굉음이 터졌다.
쿠웅!
쒜에에엑!!
그리고 포신으로부터 검은 탄환이 쏘아져 나와 비공정의 선체를 한 번에 꿰뚫더니 아예 반대편 하늘 멀리 날아가 버렸다.
완벽한 관통.
비공정의 강한 방어가 무색하게 그대로 통째로 뚫어 버리자 귀족들 진영이나 유저들이나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게도 공격 받은 비공정은 힘을 잃고 추락해 그대로 터져 버렸다.
콰아앙!
심지어 사거리까지 너무 좋았다.
완전히 관통하거나 혹은 스쳐도 반파되는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비공정에게 쏘아 대자, 얼마 뒤 비공정들이 모두 하늘에서 떨어졌다.
정말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일반적인 하르포보다 훨씬 강하네요.”
재중이 형도 저 포대의 위력을 본 후 바로 고개를 저었다.
“비공정으로 레릭 왕국에 떨어져 내리는 건 절대 무리겠는데.”
드워프들이 가지고 있는 지대공 무기의 위력이 너무 압도적이었다.
비공정의 수준에 비해.
좀 더 좋은 비공정이 나오면 몰라도.
기존의 비공정으로는 여기까지가 한계.
그리고 공중 탈것들은 더 했다.
성벽을 따라 쭉 배치되어 있는 자동 기계 기관들이 날리는 오러에 순식간에 벌집이 되어 하늘에서 존재 자체가 지워져 버렸다.
심지어 레서 드래곤인데도 딱 한 방.
그 한 방을 견디지 못하다니…….
저러면 정찰도 안 되겠군.
뭔가를 보기도 전에 떨어져 버리면 그냥 병력만 가져다 버리는 꼴이다.
아예 레릭 왕국의 공중으로는 날아오르지도 말라는 위력 시위에 유저들과 귀족들이 모두 굳어 버렸다.
“우리, 레릭 왕국을 너무 싸게 판 것 아닐까요?”
“나도 그 생각 중이다.”
전신도 저걸 보면서 아깝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러고 보니 전신은 어떻게 된 거지?
분명히 귀족파의 진영에 있었다면 눈에 띄었을 텐데.
“형, 전신은요?”
“아, 그 녀석? 이미 귀족파에서 나갔어.”
“그래요?”
“황실파와 중립파 모두 나서는 걸 보고는 굳이 귀족파에 붙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겠지. 귀족파만 단일로 싸웠다면 빨리 잡기 위해 선택지가 없으니까 협력했겠지만. 오히려 지금은 걸림돌이지. 공을 나눠 먹어야 하는 걸림돌.”
론도 후작 밑에서 잡기라도 하면 탐사대의 특성상 거의 대부분의 공을 양보해야 하는데 전신 같은 사람이 론도 후작과 고대 드워프 왕을 잡는 공을 나눠 먹을 리는 없었다.
능력만큼이나 야망도 큰 사람 같아 보였으니.
“론도 후작한테 실망도 했을 거고. 계속 같이 갈 NPC는 아니라고 판단했겠지.”
확실히 무력 능력이 1, 2위인 걸 떠나 테인 공작에 비하면 론도 후작은 부족한 점이 너무 많았다.
상황 판단력이나 개인 전투 능력 같은 부분들.
그리고 속을 알 수 없는 테인 공작에 비해 론도 후작은 속이 너무 들여다보였다.
전신에게 성이 차는 상대는 아니었을지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르샤 누나에게 연락이 들어왔다.
<나르샤> 드워프들이 후방에서 귀족들 보급을 다 끊고 있어.
<주호> 잘하고 있네요.
여기 오기 전에 대전사 칼룬에게 미리 알려 둔 것이 있었다.
귀족들의 원정길이 길어지면 보급 라인이 너무 늘어질 거라고.
그랬더니 지금 그 보급 라인을 오러를 쓰는 드워프들이 습격해 싹 끊고 다니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우리가 정보를 다 주고 있으니까.
아주 효율적으로 약한 곳만 치고 들어갔다.
이러면 미리 알아도 막을 수가 없지.
그리고 지금쯤 이 소식이 각 귀족들에게 들어갔을 터.
이 근처에서는 보급받을 곳이 전혀 없으니.
무한정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엉덩이 무거운 녀석들이 언제까지 죽치고 있게는 할 수 없으니까요.”
“그리고 너무 오래 죽치고 있으면 계획이 어긋나.”
재중이 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전쟁은 오래 이어지면 안 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아니나 다를까.
귀족 진영에서 큰 소란이 일더니 곧 전투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흘러나왔다.
본격적인 전투 시작과 함께 세 진영에서 거의 동시에 진격을 시작했다.
병장기를 든 수도 없이 많은 병력이 동시에 하나의 성을 향해 진격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흡사 영화에서나 볼 법한 딱 그런 장면들.
수만에 달하는 병력이 일제히 움직이자 주변의 땅이 쿵쿵 울리는 느낌까지 전달되었고.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더없이 즐거운 장면이려나?
시작은 전형적인 방어전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방어가 강한 NPC들이 앞으로 진격하고, 뒤에서는 궁병 부대가 하늘이 검게 보일 정도로 동시에 활을 쏴 올렸다. 동시에 색색의 수 없이 많은 광역 마법들이 하늘을 수놓았다.
반대로 레릭 왕국의 성벽에서는 자동 연사 기계가 동시에 오러를 뿜어 댔다. 한 번 길게 긁고 지나갈 때마다 죽음의 빛이 일자로 쭉 생겨나면서 병력들을 녹여 버렸다.
하늘 높이 검은 포탄 역시 날아들어 귀족들의 진영을 무너뜨렸고.
거기다 하르포와 비슷한 형태의 거대한 포탑에서 검붉은 빛이 번쩍이자 거대한 마법이 날아가 마치 아이스크림을 한 움큼 퍼낸 것처럼 귀족들의 병력이 통째로 녹아 버렸다.
저건 광역 마법 대용인가?
드워프들이 따로 마법을 사용하진 않았지만, 그에 대응하는 훌륭한 광역 포탑이 설치되어 있었다.
앞으로 얼마나 쏴댈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당장은 마법을 쓰지 않아도 화력 싸움에서도 결코 밀리지 않을 것이다.
그 증거로 지금 수만의 유저들, 제국 병력들과 마법 대결에서 거의 동등한 힘을 발휘했다.
부족한 화살 숫자는 오러를 쏴 대는 자동 기관이 대신했고.
오히려 이쪽은 오러를 쏘기 때문에 더 우위였다.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열세인 숫자는 성벽과 화력의 힘으로 비등한 수준까지 버텨 내었다.
어느새 다가온 전사 형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방송사에서 아주 좋아하겠어.”
“그림이 좋죠?”
“멋지지. 이런 대규모 전투는. 지금 정신없이 방송하고 있을 걸?”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방송용 탈것들이 꽤 날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회사에서 따로 제공해 주는 슬라임 탈것들.
지금은 방송을 하고 있다는 일종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손 한번 흔들어 줘.”
그런데 그중 한 슬라임에 탄 유저는 아예 우리만 찍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전에 그 유미라는 여성이었다.
여러 번 마주쳐서 그런지 꽤 친근한 느낌도 들었고.
방송 출연 건도 약속했었는데 그동안 그냥 까먹고 있었다.
이건 미안한데?
그사이 우리를 찍던 유저는 완전히 우리에게 내려와서는 아예 슬라임을 착륙시켰다.
표정이 조금 삐진 것 같기도 한데?
“저 정말 오래 기다렸다고요! 연락 오기를.”
“아, 그렇군요.”
“끝?!”
“하하…… 그건 다음에 이야기하죠.”
“네, 알았어요. 아쉬운 사람이 우물을 파야겠죠. 그런데 안 싸우세요? 한참 전투 중인데.”
“그러는 유미 씨는 이러고 있어도 됩니까?”
“으음, 저야 이쪽만 찍으면 특종이 나오잖아요. 특종 밭.”
당연하다는 듯 웃는 천진난만한 미소에 나도 모르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딱히 특종 드릴 게 없는데.”
“그럼 인터뷰 고고?”
“하하, 그건 사양하죠.”
“제 촉이 말해 주는데 분명히 뭔가 기다리고 계세요! 여기 가만히 있을 분이 아니니까! 설마 고대 드워프 왕을 잡으시려고 기다리는 건가요?!”
이거 약간 찔리긴 하네.
확실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큰.
고대 드워프 왕은 확실히 아니었고.
하지만 티를 낼 수는 없어 그냥 어깨만 으쓱했다.
내가 뭔가 안다는 표시를 내서는 절대 안 되니까.
그사이 화려한 전쟁은 계속 이어졌다.
회사에서 작심하고 준비한 메인이벤트라고 했던가.
방송사에서 침을 흘릴 만한.
그런 면에서는 정말 나쁘지 않았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그림이 확실하게 나왔다.
그래서 전에 운영자가 입에 거품을 물었었구나.
이런 이벤트를 통으로 날려 버렸으니까.
그런데 이걸 어쩌나.
말을 하지 않은 준비된 서프라이즈가 아직 남아 있었다.
레릭 왕국의 드워프들이 꽤 분발을 했지만, 고대 드워프 왕이 등장하지 않은 시점에서는 제국과 유저들이 결국 레릭 왕국을 밀기 시작했다.
특히 유저들의 힘이 정말 컸다.
떼쟁에는 장사가 없다고 하던가.
하나로 뭉친 유저들은 정말 무서운 위력을 발휘했다.
그렇게 얼마 후, 성문이 부서지며 수많은 제국 NPC들과 유저들이 레릭 왕국 성안으로 승리의 함성과 함께 들이닥쳤다.
“와! 드디어 뚫었다!”
“전부 쓸어버려!”
“고대 드워프 왕 어디에 있냐!”
“왕을 찾아!”
“녀석만 죽이면 돼!”
그런데 개떼처럼 레릭 성안에 들어간 유저들과 NPC들이 한참을 뛰어다니면서 고대 드워프 왕을 찾다가 뭔가 위화감을 느꼈는지 자리에서 다들 멈칫했다.
“뭐지?”
“왜 성안에 아무것도 없어?”
“병력으로 가득해야 하는 거 아냐?”
“드워프들 다 어디 갔어?”
“여기 너무 이상해. 마치…… 죽은 도시 같은…….”
“아놔, 뭔가 잘못됐어.”
이상함을 느낀 유저들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수만의 병력들이 꾸역꾸역 들어와서 등 떠밀리듯 계속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죽음의 냄새가 잔뜩 진동함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병력이 밀고 들어가자 확실히 이겼다고 생각했는지 귀족들 역시 성안으로 들어왔다.
그중에는 귀족파의 론도 후작과 메트 후작, 황실파의 포메른 후작 등도 모두 입성했다.
늦게 들어왔다가는 성과를 뺏길 수도 있으니.
부랴부랴 들어가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주호> 쥐가 쥐덫에 들어갔네요.
<불멸> 크큭, 이제 시작인가?
고개를 끄덕이고 얼마 후.
순간 바닥이 크게 진동하면서 뭔가가 출렁이는 느낌이 들었다.
드디어 왔네.
그리고 갑자기 눈이 뜨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대폭발이 레릭 왕국에서 연쇄적으로 터져 나왔다.
콰아아아앙!!
쿠아아앙!!
콰아아앙!!
마치 핵폭발이라도 터진 듯 성이 통째로 터져 나가는 진동에 모두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쓰러졌다.
심지어 한 번도 아닌 수십, 수백 번이 넘는 폭발이 동시에 터지자 유미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까아악!! 뭐야!!!”
후폭풍이 얼마나 강렬한지 이렇게 떨어져 있는 거리에서도 몸이 붕 뜰 정도라 몸도 가누지 못했다.
유미뿐만 아니라 엔느와 스칼렛, 이슬두잔 역시도 쓰러지면서 비명을 질렀다.
화련도 깜짝 놀랐는지 자리에 주저앉아 레릭 왕성을 보면서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리더와 황룡, 폭군은 쓰러지면서도 어이가 없는지 멍한 눈이 되었고.
지금 이게 무슨 일인가 이해가 안 된다는 딱 그런 표정.
한참 동안 폭발과 함께 하늘 높게 곳곳에서 불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레릭 성을 가득 채운 화염 폭풍에 다들 넋을 잃고 바라봤다.
아마도 화염지옥을 현실에 꺼내놓으면 이런 풍경이 될지도.
그 광경을 본 재중이 형이 킥킥거리면서 웃었다.
<불멸> 큭, 칼룬 이 친구 적당히라는 걸 모르는구만. 아주 싹 날려 버렸어!
나 역시 재중이 형을 바라보면서 웃어 보였다.
대전사 칼룬이 일을 아주 제대로 해 주었기에.
<주호> 저 다녀올게요.
<불멸> 그래, 남김없이 싹 쓸어 와.
【 은신! 】
은신을 걸고 뛰어가면서도 입가에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그럼, 어디 한번 수확을 하러 가 볼까나?
사상 초유의 대폭발 속으로.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