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6화 가짜 전쟁 (4)
상황이 급변하자 사장님이 모두를 레릭 왕국 방향으로 모이게 했다.
어차피 주력 사냥터가 레릭 왕국 주변의 필드다 보니 거의 대부분의 길드원들을 늦지 않게 레릭 왕국이 멀리 보이는 한 한적한 장소에 모여들었다.
신화 길드.
사장님의 최강 길드.
스칼렛의 달 길드.
이슬두잔의 치맥 길드.
화련의 헤라 길드.
황룡의 미르 길드.
리더의 퍼스트 클래스 길드까지 전부.
일단 길드원들이 모여서 장비를 정비하는 동안 길드장들은 따로 모여서 뭔가를 계속 의논 중이었는데 나와 챠밍, 화련은 뒤늦게 그 자리에 참석했다.
“제가 좀 늦은 건가요?”
내가 도착하자 재중이 형이 바로 나를 반겨 주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빼놓고 시작하려고 했지.”
“네, 기다려 줘서 고마워요. 그럼 어디까지 이야기가 됐어요?”
“각 귀족들의 진행 방향을 우리 쪽 애들이 따라다니면서 체크 중이다.”
그리고 바로 세 귀족파의 진행을 한눈에 보이게 알려 주었다.
“셋 다 엇비슷하게 움직이고 있네요?”
“아직은 저들끼리 눈치를 보는 모양이지. 그리고 서로 협력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이고.”
재중이 형 말대로 세 귀족파들이 전혀 서로를 간섭하지도, 협력하지도 않은 채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다.
마리아 가르시아가 보면 슬퍼하겠군.
마족이라는 대적을 두고도 이렇게 힘을 합치지 않는 것을 본다면.
아마도 한숨부터 쉬지 않을까.
그리고 세 세력들 모두 약속이나 한 것처럼 아주 천천히, 아주 조금씩 진형을 움직였다.
도착하려면…….
거의 하루는 꼬박 걸리겠네.
중간에 쉰다는 가정을 하면 더 걸릴 수도 있을 테고.
나와 재중이 형이 대화를 하는 사이, 스칼렛이 다가와 말했다.
“세 곳 귀족들이 전력은 엇비슷해요.”
비슷하다고?
의문을 가진 채 설명을 요구하니 스칼렛이 설명을 해주었다.
“론도 후작이 세력을 많이 잃기는 했어도 애초에 유저 길드들을 많이 받아들여서 덩치가 제법 커요. 단순히 숫자만 따지면 아마 이쪽이 제일 많을 거예요.”
총 귀족 수 32.
원래 41이었는데 산불로 7이 죽어 버렸다.
그만큼 세력이 줄었고.
그 상황에서 론도 후작을 꼬드겨 유저들을 받게 한 일 덕분에 겨우 귀족파가 체면치레를 한 건가.
그리고 여기를 잡으면 엄청난 드랍템이 떨어질 것이다.
현실적으로 가장 돈이 많은 집단이라고 생각하면 되려나?
그만큼 매력적인 집단이었다.
“그리고 중립파. 이쪽은 가장 강한 NPC인 테인 공작과 루젠 공작이 빠져 있어서 좀 김이 샐 거예요. 그래도 워낙 여러 귀족 가문들이 모여 있어서 귀족들 수는 엄청 많아요.”
“대신 세력이 약하죠?”
내 물음에 스칼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리고 온 병력 자체가 적으니까 아마도 그럴 거예요.”
단순히 귀족들 수가 많다라…….
스칼렛이 보여 준 총 귀족 수가 무려 87명이나 됐다.
대부분 하위 귀족이라고는 하지만 여기를 털면 그만큼 가용할 수 있는 귀족들 자리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중립파가 이번 일에서 더 중요할 수도 있고.
“마지막은 황실파. 숫자가 생각 이하로 적어요.”
황실파 귀족은 모두 25.
다른 곳보다는 숫자는 적지만 확실히 작위 수준이 높은 편이었다.
“대신……!”
“대신?”
“완전 정예예요. 기사단, 마법사단을 구성하던 귀족들이 대거 빠져나와서 참여했거든요.”
“공식적으로는 나올 수 없지만 개인으로는 가능하다?”
“네, 그런 셈이에요. 황제가 머리를 썼겠죠. 아, 그렇다고 다른 귀족파나 중립파에 기사단이나 마법사단이 없는 건 아니에요. 조금 수가 적을 뿐이죠.”
마리아 가르시아는 명색이 황제라 세 집단 중 어느 한쪽에 제국의 기사단과 마법사단을 전부 밀어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런 그림이 나오게 되었다.
“스칼렛이 보기엔 어느 쪽이 이길 것 같아요?”
“정면으로 붙으면 말이죠?”
“네, 진짜 병력 대 병력으로요.”
“흐음, 지금 상태로 그냥 붙으면 제국이 필패죠.”
“그런가요?”
제국이 반드시 진다는 건가?
그 정도로 차이가 난다고?
이건 나뿐만 아니라 여기 모여 있던 모든 길드장들이 궁금해했다.
“황실의 기사단, 마법사단 중 절반 정도가 빠졌고, 그중 핵심인 테인 공작과 루젠 공작도 빠졌으니까요. 제국을 지킨다고 모든 병력을 끌고 나오지도 못했죠.”
정말 주요한 병력이 빠진 상태로 붙으면 귀족들이 진다는 말이었다.
“반대로 제국을 방어하는 입장이라면 드워프들이 질 가능성이 높아요. 성벽도 있고.”
“지금은 공격하는 쪽이죠.”
“네, 무조건 귀족들이 지는 게임이에요. 하지만 이쪽은 하나의 변수가 있어요.”
“변수라 함은…… 유저?”
“그래요, 유저들. 사실 유저들까지 포함되면 귀족들이 억지로 지려고 해도 질 수가 없어져요. NPC들과 다르게 유저들은 죽어도 다시 살아나서 전쟁에 참여하니까요. 거기다 그 숫자도 엄청나고.”
확실히 NPC들 입장에서 보면 유저가 진짜 좀비처럼 보이지 않을까?
죽여도 죽여도 또 살아나서 덤벼올 테니.
이보다 무서운 건 없었다.
심지어 시간대별로 다른 유저들이 접속해 바통 터치를 해가면서 공격하니까.
“그럼 고대 드워프 왕이 얼마나 강하냐가 문제겠네요.”
“아마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서면 엄청나게 강할 거예요. 유저들이 개떼처럼 달라붙어도 이길 수 있을 정도겠죠.”
확실히 스칼렛 말이 맞다.
유저들까지 합세한 상황에서도 쉽지 죽지 않으려면 그 정도로 강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고대 드워프 왕을 개구리로 만들어 죽여 버렸으니 운영자가 그렇게 기겁을 했겠지.
당연히 이 말은 스칼렛에게는 하지 않았다.
알아봐야 좋을 것도 없고.
드워프들이 일으킨 산불 역시도 여기 있는 길드장들은 전혀 모른다.
적을 속이려면 아군까지 속여야 하는 판이라.
내가 드워프들을 조절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기에 스칼렛의 표정이 사뭇 심각해졌다.
“이대로 세 귀족파가 레릭 왕국에 접근하면 대규모의 전쟁이 일어날 거예요. 그럼, 확실히 우리 쪽 탐사대가 1등을 한다는 보장이 없어져요.”
스칼렛은 귀족들의 탐사대가 워낙 수가 많고 강세이기 때문에 우리가 전력에서 밀린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이슬두잔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 심각한 표정이었고.
리더나 황룡, 폭군도 말을 하진 않았지만 썩 좋은 얼굴은 아니었다.
그때 엔느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귀족들이 이동하는 경로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이렇게 귀족들이 따로 움직이면 각개격파를 하긴 좋을 듯해요.”
그 말에 다들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스칼렛 역시 마찬가지.
“설마 우리가 귀족들을 치자는 건가요?”
“아뇨. 그랬다가는 우리만 욕먹겠죠. 아군이 아군을 치는 셈이 되니까요.”
그러면서 엔느가 나를 쭉 바라보았다.
아주 부담스러운 눈빛을 가득 담아.
설마 엔느가?
아니, 이건 말해 주지 않으면 알 수가 없을 텐데…….
엔느의 저 말은 제3의 세력을 시켜서 싸우게 만들자는 말과 다름없었다.
그때 재중이 형에게서 귓말이 왔다.
<불멸> 쟤가 눈치 백단이다. 확실히는 몰라도 어느 정도 감은 잡은 것 같은데?
그런 재중이 형을 잠시 봤다가 다시 엔느를 바라보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시다시피 제가 공작이라, 대놓고 귀족들의 탐사대를 공격하진 못하죠. 그럼 다른 귀족들이 바로 들고일어날 겁니다.”
그러자 엔느가 말을 이었다.
“네, 알아요. 그냥 저 같으면 그렇게 견제를 했을 거라고요. 아군이라고는 하나 경쟁자잖아요.”
“그건 나중을 위해 남겨둬 보죠.”
그렇게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어가자 엔느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결국 보다 못한 화련이 한숨을 쉬고는 내게 물었다.
“그래서 좋은 생각 있는 거야? 내게 황실파를 묶어 두라고 한 걸 보면 무슨 생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 그건 귀족파의 세력을 좀 줄여 놓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 말대로 각개격파인 셈이죠. 결과적으로 생각보다는 잘 안 됐어요. 사실 귀족파가 싹 죽었어야 했는데.”
“그럼 지금은 더 안 되겠네? 죄다 레릭 왕국으로 몰려가는 중이니까.”
“뭐 그렇죠. 그냥 건드리기에는 사실 덩치도 크고요.”
현재 귀족들의 탐사대뿐만 아니라 유저들도 합세해서 움직이는 중이었다.
거기다 레릭 왕국 근처의 필드에서 사냥 중인 수많은 유저들이 있었다.
그들까지 한몫 잡아보겠다고 합류를 하면 그 숫자는 더욱 많아지게 될 터.
그렇게 귀족들이 유저들을 더 받아들이게 될 경우, 숫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다.
반면 내 쪽은 공작이긴 해도 정해진 숫자가 있으니 숫자 싸움은 애초에 고려해볼 만한 일도 아니었고.
<불멸> 그럼 이쯤에서 마무리하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재중이 형이 정리를 했다.
“어차피 마지막 승패는 고대 드워프 왕을 잡느냐 못 잡느냐에 있습니다. 어설프게 쫄따구들 잡아 봐야 결국은 제일 큰 걸 잡는 자가 이기는 게임이죠.”
그 말에 모두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 우리는 마지막까지 전력을 보존할 겁니다.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재중이 형은 충분히 모두에게 납득이 갈 만한 말을 해 주었다.
그리고 이건 내가 원하는 일이기도 했다.
지금 우리 쪽 탐사대 인원이 갈려 나가면 곤란하거든.
내가 만들어둔 시나리오대로 가면 우리가 이 싸움에 나서서는 절대 안 된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마지막 순간까지 정말 구경만 해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재중이 형의 말이 끝나자 이슬두잔이 물었다.
“그럼 이제 정말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건가요? 일부러 길드원들까지 다 끌고 왔는데…….”
“어차피 이제 사냥도 못 하지. 저길 봐.”
재중이 형이 손가락으로 레릭 왕국 쪽을 가리키자 필드에 돌아다니고 있던 드워프 악령 몬스터들이 하나둘 레릭 왕국을 향해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동안 자리 잡고 있던 장소를 떠나서.
“아, 레릭 왕국을 지키러 몰려가는가 보네요.”
한참 사냥을 하던 유저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는 멀어져가는 몬스터들을 멍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더 잡아보겠다고 안쪽으로 들어갔다가는 점점 모여드는 몬스터들에게 둘러싸여 빠져나오지도 못할 테니.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레릭 왕국 주변의 몬스터 밀도가 높아져 갔다.
중간중간 오러를 쓰는 녀석들도 섞여 있는 것을 보면 이제 어지간한 병력으로는 저 라인을 뚫기도 힘들 것이다.
대전사 칼룬이 준비를 잘 하고 있나 본데?
이미 세 귀족 연합이 몰려가는 사실을 알려줬었다.
언제쯤 도착하는지, 어디로 들어가는지.
그래서 레릭 왕국 주변의 방어를 더욱 견고히 하는 중이었다.
세 귀족 연합이 도착할 때쯤 되면.
이미 방어 라인은 모두 구축되어 있겠지.
그렇게 한참 시간이 흘러 세 귀족 연합이 하나둘 레릭 왕국의 외곽 경계에 도착했다.
잠시 지켜본 세 귀족 연합의 움직임은 상당히 독특했다.
이건…….
설마 그런 건가?
“마치 레릭 왕국을 둘러싸려고 하는 것 같네요.”
“잘 봤다. 셋 다 서로 협력을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방해를 할 생각은 아닌 것 같거든.”
총 세 방향.
남쪽에서는 레티어스에 있던 황실파가 그대로 밀고 올라와 진지를 구축했다.
그리고 서쪽은 바이탄 요새에서 쭉 올라온 귀족파가 한 방위를 잡고 대기 중이고.
마지막으로 동쪽은 쿠론 요새에서 움직인 중립파가 역시 진형을 만들어 계속 움직이는 중이었다.
“마치 경쟁이라도 하는 모양새네요.”
“먼저 먹는 쪽이 임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리고 포위를 하면 아무래도 자신들이 유리할 테니까.”
실제로 세 방향에서 포위를 해서 들어가면 레릭 왕국에서는 병력 운영을 하기가 꽤 난해해진다.
한쪽에 많은 병력을 몰았다가 다른 방향이 뚫려 버리면 결국 레릭 왕국이 뚫리는 거니까.
그리고 유저들이 어느 방향으로 몰리느냐에 따라 계속 수비 위치를 바꿔야 한다.
칼룬이 꽤 골치가 아프겠는데?
그런데 그때 우리 탐사대가 모여 있는 구역으로 누군가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저건.
유저는 아니고…….
NPC이려나?
그것도 복장이 황실파 쪽에서 나온 NPC였다.
딱 봐도 귀족 같은데.
기억에는 없는 것을 보면 그다지 중요한 귀족은 아닌 모양이고.
그렇게 내게 도달한 녀석이 자기소개를 했다.
『 주호 공작님을 뵙습니다. 에런 남작이라고 합니다. 』
“무슨 일이지?”
『 포메른 후작님께서 드워프와의 전쟁에 도움을 줄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
그 말에 피식 웃었다.
내가 대기하라는 말을 씹은 녀석이 누군가 했더니 아무래도 저 포메른 후작인 것 같았다.
“됐고, 가서 전해.”
『 무슨 말을 전할까요? 』
“공작인 내 말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움직인 책임을 물어 와서 머리 박고 사죄하라고 해. 아주 자근자근 밟아 준다고.”
『 헉! 하지만……. 』
“싫으면 알아서 싸우라고 하고. 일은 지가 벌려놓고 어디 와서 손을 벌려?”
『 알겠습니다……. 』
그러자 전사 형이 내게 말했다.
“저렇게 돌려보내도 되는 거냐?”
“뭐 어때요? 마지막 유언인데.”
마지막 말 정도는 들어줄 수 있는 것 아니겠어?
녀석들은 전부 내 손에 죽을 거니까.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