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7화 강 건너 불구경 (3)
재중이 형이 상위 길드들을 불러 모으는 동안 바이탄 요새로 가르시아 제국 귀족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거리상 북서쪽의 바이탄 요새가 가르시아 제국에서 가장 먼 편에 속했다.
그리고 경계를 넘어가 레릭 왕국에 도달하는 거리도 마찬가지.
빠른 보급만을 생각하면 딱히 바이탄 요새가 다른 요새들에 비해 그다지 좋지 못 했다.
그런데도 이곳을 찾는 귀족들이라…….
재중이 형을 바라보자 재중이 형도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파겠지.”
“역시 그렇죠?”
“다른 녀석들 움직이는 걸 보고 난 뒤에 움직일 생각일 테니.”
“잠시 연락 좀 해 볼게요.”
바로 쿠론 요새에 머물고 있는 챠밍에게 연락을 넣었다.
챠밍이 이곳에 오지 않은 것은 쿠론 요새에서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주호> 쿠론 요새에 귀족들 도착했어?
<챠밍> 네, 방금 도착했어요.
<주호> 지금 들어온 귀족들이 어디 쪽 진영이야?
<챠밍> 으음, 오빠가 알려 준 목록을 보면 대부분 중립파예요.
쿠론 요새 쪽은 중립파인가?
<주호> 알았어. 일단 귀족들 어디 못 가게 묶어 둬.
<챠밍> 시간만 벌면 돼요?
<주호> 응, 그럼 좀 부탁해.
<챠밍> 걱정 말아요. 잘 묶어 둘게요.
“형, 챠밍 쪽은 중립파라네요.”
“호오, 아예 세 갈래로 나눠서 올 모양이군.”
이곳은 귀족파.
챠밍 쪽은 중립파.
그리고 남은 한 곳은 안 봐도 뻔하겠는데.
“화련 쪽 레티어스 요새에는 황실파가 갔겠네요?”
“아마도. 이놈들이 서로 친하진 않으니까.”
“뭐 잘 됐어요. 일일이 찾아다니지 않아도 되고요.”
이번에 정리를 해야 할 녀석들이 알아서 무덤으로 걸어 들어와 준 셈이라.
화려하게 휘날리는 각 귀족들의 깃발을 앞세우고 바이탄 요새로 입성하는 귀족파들.
대규모의 병사와 함께 기사와 마법사로 보이는 NPC들도 꽤나 많이 보였다.
서로 숨기고 있던 전력이 이 정도라.
모든 전력을 데리고 나온 것은 아니겠지만 이 정도 병력만 정리해 줘도 마리아 가르시아가 제국을 휘어잡기에는 충분히 도움이 될 것이다.
바로 마리아 가르시아가 넘겨준 귀족 명단을 꺼내 보았다.
후작 가문 2곳.
백작 가문 5곳.
자작 가문 13곳.
남작 가문 21곳.
총 41 가문.
“귀족들이 정말 많긴 많네요.”
내 말에 재중이 형이 씨익 웃었다.
“다 정리해야 할 녀석들이지. 그러면 그만큼 유저들로 채워 넣을 수 있어.”
“또 한 번 작위 장사를 해야겠어요.”
“나쁘지 않지.”
우리가 노리는 것들 중 하나.
귀족파 귀족들을 정리하고 나면 공백이 생기게 된다.
그럼 그 자리를 우리가 원하거나 마리아 가르시아가 원하는 인물들로 채워 넣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우리 둘이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귀족들의 긴 행렬이 바이탄 요새로 계속 들어섰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수용하지 못해 바깥에 진형을 만들어 주둔하는 모습이 보였고.
많은 귀족들이 한자리에 입성하자 그들을 보기 위한 유저들도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특히 상위 길드의 수장들이 꽤나 바빠졌다.
귀족들과 친분을 쌓아 둘 좋은 기회라.
“자, 그럼 우리도 손님맞이를 해 볼까? 곧 죽을 놈들이라도 인사는 해 줘야지.”
일단 난 공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고, 재중이 형도 백작위에 올라 있는 상황.
귀족파들이 단순히 작위만 믿고 나대기에는 이쪽의 작위가 더 높은 편이라.
특히 공작위의 귀족이 한 명도 없다는 점이 저들에게는 불리한 점이었다.
기사들의 정점인 테인 공작과 마법사의 지원을 받는 루젠 공작은 일단은 중립파니까.
이 둘이 만약 황제파였으면 진작에 한번 갈아엎을 수 있었는데.
유저들의 인사를 제치고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는 귀족이 있었다.
론도 후작와 메트 후작.
<주호> 론도 후작이 2기사단 단장이었죠?
<불멸> 어, 실력으로 치면 테인 공작 바로 아래라고 보면 돼.
테인 공작만큼이 묵직하고 주변을 내리누르는 기세가 있다면, 이 사내는 풍채만으로 이미 자신의 존재감을 한껏 드러내었다.
온몸이 근육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의 사내.
거의 2M에 달하는 신체에서 나오는 강력한 힘으로 싸운다고 하던가.
짙고 붉은 눈썹과 머리에서부터 이미 어딜 가나 눈에 띌 것 같기도 하고.
강인한 눈매도 마찬가지.
딱 전형적인 전사의 그런 모습이었다.
그리고 내게 악수를 청해 왔다.
『 주호 공작님. 반갑습니다. 론도 후작이라고 합니다. 』
얼굴은 웃고 있지만 정말 저게 웃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론도 후작은 일단 귀족파의 수장이니까.
황제파에 가까운 내가 기껍게 보일 리가 없지.
그래도 청해 온 악수를 받아 주면서 마주 웃어 주었다.
“오신다고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 제국을 위한 일인데 당연히 참여해야겠지요. 』
그런 놈이 이때까지 코빼기도 안 비쳤냐.
일이 다 끝나고 난 뒤에야 온 것을 보면 이놈도 속에 뭘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주변을 쓱 둘러본 론도 후작이 마치 나를 떠보기 위한 말을 걸어왔다.
『 제국의 검이라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기회가 되면 한번 자리를 마련해 주시지요. 』
이건 한판 붙겠다는 소린가?
<주호> 저와 붙자는 말이죠?
<불멸> 어, 나도 그렇게 들리네.
잠시 생각을 하다가 이내 말을 꺼냈다.
“저야 언제든지 가능합니다만. 귀족파의 수장이신데 이런 자리에서 싸우셔도 되겠습니까?”
『 저야 괜찮습니다. 제국을 수호하려면 이 정도 패기는 보여 드려야겠죠. 』
한 마디로 지금 붙지 않으면 넌 겁쟁이다.
이런 건가?
재중이 형에게 바로 연락이 들어왔다.
<불멸> 시작부터 꽤 무리수를 두는군. 아마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널 한 번 눌러 줄 생각인가 본데? 아무래도 자신은 후작이고 넌 공작이니 이렇게 눌러 놔야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주호> 어떻게 할까요?
<불멸> 자신 있어?
재중이 형 말에 바로 씨익 웃어 보였다.
<주호> 저야 늘 있죠.
<불멸> 크큭, 그럼 한번 눌러 줘라. 앞으로 찍소리도 못 하게.
재중이 형은 내가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하는 모습이었다.
나 역시 지고 싶은 생각이 없었고.
“그럼 자리를 만들죠.”
곧바로 옆에서 대기하던 원래 바이탄 요새의 주인이었던 후엘 백작에게 명령했다.
“지금 중앙에 자리를 만드세요.”
『 괜찮으시겠습니까? 상대는 론도 후작. 가르시아 제국 무력 서열 2위입니다. 』
내가 잘 모를까 봐 친히 후엘 백작이 설명까지 곁들여 주었다.
걱정을 한껏 담아서.
후엘 백작도 무인이기는 한데 아마 저 론도 후작과는 급수에서 차이가 제법 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말하는 거겠지.
“괜찮습니다. 어차피 한 번은 붙어야 할 상대에요.”
유저들도 나와 론도 후작이 붙는다는 소리를 듣자 난리가 났다.
이런 상위 NPC의 전투를 볼 기회가 흔한 것도 아니고.
“들었어? 주호가 저 후작하고 한판 뜬다는데?”
“후작이라니. 엄청 센 거 아닐까?”
“방금 들었는데 가르시아 제국 서열 2위란다.”
“대박. 그럼 제일 센 놈 바로 밑이잖아.”
“와, 기대됨. 주호 싸우는 것도 눈앞에서 보기는 처음이잖아.”
“유저 랭킹 1위와 제국 서열 2위의 싸움이라니!”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자동으로 유저들이 뒤로 물러나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전신과 다른 프로 유저들도 주의 깊게 바라보았고.
다른 상위급 유저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전력을 보여 주는 일이 좀 그렇긴 하지만.
여기서 발을 빼 저 론도 후작에게 기세에서 밀리면 앞으로 귀족파를 움직이기 굉장히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광장 가운데가 싹 비워지자 중앙에 나와 론도 후작만이 자리를 잡고 섰다.
『 한 수 부탁드리죠, 주호 공작님. 』
“붙어 보죠.”
상대는 거구에 그만큼이나 큰 대검을 사용하는 검사.
온통 붉은빛이 나는 특이한 대검이라 더 눈이 갔다.
이쪽도 상대하려면 최선을 다해야겠지.
곧장 르아 카르테와 발루딘을 꺼내 들었다.
두 개 모두 15강의 괴물급 무기.
유저들도 이게 15강이라는 것을 아는지 웅성거렸다.
“오, 15강 무기 세트!”
“유일 템인 것도 부러운데 둘 다 15강이라니.”
“무기는 주호가 앞서는 거 아냐?”
“저 후작 무기도 만만찮은데? 처음 봐.”
“어디서 저런 무기 못 구하나?”
예전에 분명 테인 공작을 상대할 때는 수룡화까지 써야 상대가 되었다.
물론 지금은 레벨과 장비가 더 좋아졌으니 거기까진 쓰지 않아도 될지도.
여기서 은신으로 쉽게 제압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귀족들이 보는 환경에서 은신으로 이기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 같았다.
결국은 정면 대결.
후엘 백작의 신호로 대결이 시작되자 론도 후작이 대검에 붉은빛의 오러 블레이드를 씌웠다.
거기다 몸 전체로 붉은 기운이 잔뜩 퍼져 나왔다.
전력으로 간다는 건가?
대련이고 뭐고 그런 건 염두에도 없군.
이렇게 된 이상 확실히 눌러 버린다.
【 오러 블레이드! 】
【 헤이스트! 】
먼저 론도 후작이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빠른 속도로 내게 치고 들어왔다.
오러 블레이드가 실린 대검을 크게 휘두르며.
생각 이상으로 너무 민첩한데?
거리를 좁혀 오는 속도가 상상 이상이었다.
덩치만 보고 느릴 것이라 생각했던 점을 머릿속에서 싹 지웠다.
저건 기억 속의 테인 공작과 비교해도 그렇게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아.
신체를 둘러싼 붉은빛 오러가 아마도 그런 속도를 내게 해 주는 것 같기도 하고.
대검을 휘두르는 속도 역시 굉장히 빨라 마치 태풍이 밀려오듯 주변을 압박해 왔다.
위력은 어느 정도인지 한번 부딪혀 볼까?
이쪽에서도 몸을 날렸다.
혹시라도 피격당하더라도 암흑 드래곤 플레이트가 있으니까.
이전과는 달리 방어력도 충분히 버틸 만했다.
내가 정면에서 맞상대를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지 론도 후작의 눈썹이 꿈틀했지만, 곧 광소를 내면 즐거워했다.
그렇게 휘두른 론도 후작의 대검과 르아 카르테, 발루딘이 정면에서 직격으로 부딪혔다.
콰앙!
쾅!
스탯에서 나오는 힘은 내 쪽이 좀 밀릴지 모르겠지만 무기 강화가 워낙 좋다 보니 전혀 내게 대미지가 들어오지 않았다.
다른 말로 론도 후작이 휘두른 저 대검의 위력을 두 개의 검들이 전부 상쇄할 수 있다는 소리였고.
아예 제자리에 발을 붙이고 론도 후작의 대검을 계속 막아 내자 주변에서 탄성이 흘러 나왔다.
“와! 저 큰 대검을 상대로 타격에서 안 밀려?”
“장난 아니네. 저 덩치의 론도 후작한테 버티다니.”
“미쳤다.”
거기다 아직 내 쪽은 제대로 시작도 안 했어.
【 용병왕의 분노! 】
내가 한 치의 밀림도 없이 버티자 론도 후작의 눈썹이 다시 꿈틀했다.
당연히 밀릴 거라 생각한 건가?
그럼 큰 착각이야.
용병왕의 분노를 쓰자 검은 기운이 오러 블레이드에 중복되게 퍼져 나갔다.
그리고 연속공격이 성공하면서 다음 추가 대미지가 점점 올라갔다.
크리티컬이 아니더라도 일반 연속공격만 성공해도 추가 대미지가 170%나 쌓인다.
거기다 두 검의 관통 확률을 합치면 무려 95%고.
대인 피해 추가도 역시 110%.
심지어 르아 카르테에는 회복 불가와 뇌전 효과까지 달려 있었다.
르아 카르테와 맞닿을 때마다 론도 후작의 팔이 움찔거리는 것이 뇌전이 관통을 타고 계속 론도 후작에게 대미지를 누적시켰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딱히 마력 관리를 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마력이 부족하지가 않았다.
마력 흡수가 있다고 해도 이건 이상한데?
평소보다 마력이 줄어드는 속도가 훨씬 느렸다.
아니, 이건 오히려 마력 회복이 더 빠른 건가?
빠르게 다시 차오르는 모습을 보고는 의아함이 가득했다.
이건 마치 뭔가가 보조를 하는 것처럼…….
순간 눈에 들어오는 스탯 하나.
원천마력.
이 스탯 하나로 이 정도까지 차이가 난다고?
마력이 철철 넘쳐흘러 계속 대미지가 끌어올려지자 결국 론도 후작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 큭! 』
결국 론도 후작이 오히려 한 차례 크게 대검을 휘둘러 내 검들을 쳐낸 뒤, 몸을 빼냈다.
완전히 낭패한 것 같은 모습.
저 론도 후작.
실력은 확실히 있어.
르아 카르테와 발루딘으로 계속 빈틈을 찾아 찔러 넣었는데 대검으로 계속 틀어막는 실력을 보여 주었다.
테인 공작과 비교하면 테인 공작이 한 수 위이기는 한데 론도 후작 역시 어디 가서 꿀릴 인물은 절대 아니었다.
그리고 분명히 론도 후작도 숨겨둔 패가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
수룡화는 아직 꺼내지도 않았으니까.
스킬 역시 거의 쓰지도 않았다.
단순히 평타로 치고받은 정도.
여기서 더 싸우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저들의 눈이 너무 많아.
특히 전신.
저 사람에게 내가 싸우는 모습을 전부 보여 줄 수 없었다.
“어떻게 더 하실 생각인가요?”
적당히 끝내자는 말을 에둘러서 말하자 론도 후작의 눈썹이 잠시 꿈틀거렸다.
저쪽도 한 단체의 수장이다.
여기서 패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론도 후작에게도 썩 좋지 않을 터.
잠시 뭔가 고민을 하던 론도 후작이 결국 대검을 내렸다.
『 주호 공작, 소문이 과장된 것이 아니군요. 실력은 충분히 납득했습니다. 』
그리고는 곧장 붉은 기운을 풀어 보였다.
계속 싸우자고 했으면 어쩌나 했네.
누구도 이기지도 않고, 지지도 않은 애매한 결과였지만.
나쁘지 않네.
“그럼, 다들 모여 주시죠.”
* * * * *
얼마 뒤 귀족파의 귀족들과 상위 길드의 유저들을 전부 회의실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아까의 전투 때문인지 귀족파의 귀족들이 날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
제국 무력 순위 2위에게 밀리지 않는 전투를 보여 줬으니까.
론도 후작을 앞세워 공작인 날 압박하려는 시도는 이미 물 건너갔다.
당연히 회의에서의 발언도 약해질 수밖에 없었고.
론도 후작이 내게 먼저 말을 했다.
『 주호 공작을 인정하기는 하나, 귀족파의 탐사대 병력을 주호 공작에게 전부 맡길 수는 없습니다. 』
만약 론도 후작이 이겼다면 대놓고 마음대로 하겠다고 나왔겠지.
그러지 못해 분한 모습도 좀 보였다.
그런데 오히려 내가 전혀 의외의 말을 해 버렸다.
“전혀,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내 말에 귀족파의 귀족뿐만 아니라 상위 길드의 길마들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귀족들의 탐사대를 쥐고 흔들 거라 생각했을 테니.
요새의 주인이자 공작이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 설마 지휘를 하지 않겠다는 말입니까? 』
그런 론도 후작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네, 정확합니다. 전 여러분들의 지휘권에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탐사대를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이셔도 좋습니다.”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