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6화 강 건너 불구경 (2)
재중이 형과의 연락을 마치고 저 멀리 아지랑이처럼 흐린 형태의 레릭 왕국을 바라보았다.
일단 레릭 왕국을 중심으로 주변 땅바닥이 검붉게 변색되어 예전보다 훨씬 척박한 환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곳곳에 암흑혈과 용혈로 추정되는 줄기들이 거미줄처럼 쭉 뻗어 나와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할 딱 그런 장소로 변모했다.
레릭 왕국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조금씩 옅어지긴 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씩 암흑혈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대면서 주변으로 영향력을 넓혀 가는 중이었다.
조금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임시 부활지의 경계로 나오자 경고성 시스템 메시지가 울렸다.
《 어둠의 레릭 왕국 변경으로 들어오셨습니다. 》
《 임시 부활지를 벗어나면 어둠 지대의 영향을 받습니다. 》
어둠 지대라…….
예전의 한 치 앞도 보지 못할 완전 어두컴컴한 그런 종류의 암흑 지대는 아닌가?
그리고 연속해서 시스템 메시지가 더 울렸다.
《 암흑혈로 인한 변질된 용혈 디버프(체력 저하)가 적용됩니다. 》
《 변질된 용혈 디버프는 같은 장소에 오랜 시간 머무를수록 누적됩니다. 》
《 변질된 용혈 디버프가 누적되면 경직이 걸립니다. 》
《 변질된 용혈 디버프가 걸리면 체력 회복 속도가 저하됩니다. 》
《 변질된 용혈 디버프가 걸리면 이동 속도가 저하됩니다. 》
딱 임시 부활지의 경계를 넘어서자마자 바로 스탯창에 디버프가 표시되었다.
이건 예전의 그 디버프인가?
던전의 미로를 돌파할 때.
용혈에 닿으면 걸리던 디버프와 완전히 같은 형식이었다.
거기다 함정에 빠지는 것도 아닌 그냥 걸어 다녀도 걸릴 정도라면.
물약이 상상 이상으로 많이 소모되겠는데…….
그런데 그 순간.
바로 다른 시스템 메시지가 울렸다.
《 +10 암흑 드래곤 플레이트 상의의 어둠, 화속성 방어가 변질된 용혈의 저주에 저항합니다. 》
《 +10 암흑 드래곤 플레이트 하의의 어둠, 화속성 방어가 변질된 용혈의 저주에 저항합니다. 》
《 어둠, 화속성 방어력이 일정 수준 이상입니다. 》
《 주호 님이 변질된 용혈의 저주에 완전 저항합니다. 》
하.
이거 생각 이상인데?
암흑 드래곤 플레이트가 변질된 용혈의 저주에 저항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심지어 추가로 시스템 메시지가 더 올라왔다.
《 +4 암흑 드래곤 헬름이 어둠, 화염 경직에 저항합니다. 》
《 어둠과 화염이 동시에 적용되어 높은 확률로 변질된 용혈에 의한 경직을 방어합니다. 》
《 +4 암흑 드래곤 건틀렛이 어둠, 화염 속 체력을 회복시킵니다. 》
《 어둠과 화염이 동시에 적용되어 이중으로 체력을 추가 회복합니다. 》
《 +5 암흑 드래곤 부츠가 어둠, 화염 속 이동 속도를 증가시킵니다. 》
《 어둠과 화염이 동시에 적용되어 이중으로 이동 속도를 올립니다. 》
현재 착용하고 있는 암흑 드래곤 세트가 전부 이 어둠 지대 안에서 버프를 일으켰다.
게다가 어둠과 화염이 동시에 적용되는지 버프가 두 배의 증가량을 보였다.
반대로 디버프는 싹 제거해 버렸고.
암흑 드래곤 세트가 이렇게 유용할 줄은 몰랐는데?
이러면 다른 유저들보다 훨씬 유리한 입장에서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당장 임시 부활지의 경계에서 나온 유저들의 놀란 목소리가 그 사실을 대변했다.
“우왁! 체력 막 깎여!”
“아놔, 디버프 장난 아니네.”
“물약 떨어지는 속도 보소.”
“진짜 힐러 없으면 한 발자국도 못 가겠다.”
“심지어 느려졌어.”
흐음, 꽤 재밌게 됐는데.
이러면 암흑혈이 들어간 장비가 필수가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암흑 드래곤 플레이트는 이 환경에서 최상의 퍼포먼스를 보여 주니 부르는 게 값일지도.
다른 유저들은 경계도 빠져나오지 못해 허둥대는데 반해 난 유유히 경계 밖으로 나와 주변을 걸어 다녔다.
“어? 주호?”
“혼자? 힐러 없으면 물약도 못 따라갈 건데?”
그런 유저들의 반응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 변질된 용혈 저주는 내게 아무런 영향도 없었다.
오히려 이동속도가 빨라지고 가만히 있어도 체력 회복이 되는 상황이라.
속도를 더 낼 수도 있지만 일단은 모른 척 주변을 돌아다녔다.
“어라? 주호는 그냥 산책하듯 걸어가잖아?”
“레벨이 높아서 그런 건가?”
“아냐, 레벨이 높아도 체력 차이는 크게 안 나. 탱도 아니고.”
“와씨, 그럼 장비가 얼마나 좋길래…….”
“주호 입고 다니는 장비가 암흑 드래곤 플레이트였지?”
“맞음. 전에 강화할 때 본 적 있음.”
“현질을 해서 구해야 하나, 진짜.”
“아서라. 서버에 몇 벌 있지도 않는데 뭔 수로 구하냐.”
“진짜 부럽다.”
예전에 10강을 할 때 암흑 드래곤 플레이트를 본 적이 있는지 바로 유저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아마 스크린샷도 찍어 놨을 테니 모르는 게 이상한가.
그런 유저들을 뒤로하고 임시 부활지에서 점점 멀어졌다.
지나가는 도중 일부 유저들이 자리를 잡고 사냥을 하는 것을 봐서는 아예 사냥을 못 할 정도는 아닌 듯했고.
물론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사냥을 하기 힘들 테지만.
보자.
칼룬은 그렇다 치고 카르바할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 거지?
편한 이동을 위해 바로 하이딩 블레이드를 꺼내 스킬을 시전했다.
주변에 있는 드워프 악령들이 죄다 선제몹이다 보니 달라붙으면 골치 아플 테니.
【 은신! 】
그렇게 은신을 유지하면서 움직이자 드워프 악령들이 내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이건 일단 요긴하게 쓰이겠네.
더 안쪽은 어떻게 될지는 나중에 확인해볼 일이고.
그렇게 어둠 지대를 이동하는데 저 멀리서 누군가가 싸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흐음.
벌써 이 정도까지 들어올 유저들이 있나?
그런데 싸우는 있는 것은 유저가 아니라 카르바할과 그를 따라는 드워프 NPC들이었다.
『 정신 차려라! 』
“우어어어!”
어둠에 물든 드워프들.
카르바할과 NPC들 주변으로 계속 눈이 까맣게 변한 드워프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베고 지나가려면 충분히 가능하지만 그렇게는 못 하는 듯 안타까운 눈빛으로 변질된 드워프들을 바라봤다.
내가 가까이 가자 바로 퀘스트가 떴다.
《 메인 퀘스트 : 카르바할 구조. 》
- 변질된 드워프들에게서 카르바할 구조.
- 퀘스트 보상.
『 원정대 포인트 10000 P 』
『 카르바할의 우호도 상승 』
- 완료 시 카르바할의 부탁으로 이어집니다.
흐음.
아마 유저들 중 누군가가 지나가다가 카르바할을 구하는 퀘스트인 듯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카르바할을 도와 드워프 왕국을 재건하는 일을 할 테고.
가까이 가서 은신을 풀자 카르바할이 나를 돌아봤다.
『 주호 공작? 』
“지금 처리할 테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바로 르아 카르테와 드래곤 슬레이어를 꺼내 들었다.
【 오러 블레이드! 】
그대로 포위망으로 접근해 카르바할을 둘러싸고 있는 변질된 드워프들을 하나둘씩 베어 냈다.
외곽에 나오는 몬스터라 그런지 딱히 부담스럽지도 않았고.
특히 암흑 드래곤 부츠로 이속이 올라간 덕분에 느려터진 드워프들로는 내 발끝조차 따라오지 못했다.
얼마 뒤 주변을 포위하던 모든 변질된 드워프들을 죽이자 퀘스트가 완료되면서 내게 원정대 포인트가 축적되었다.
남들이 보면 놀랄 정도의 포인트지만 이제 이런 자잘한 포인트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 드워프의 왕 카르바할과의 친밀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
친밀도도 마찬가지.
이미 우호 수준을 넘어가 친밀에 닿아있었다.
어지간한 부탁은 다 들어줄 정도이려나?
『 아, 우리 드워프들이 이렇게……! 』
분노하는 카르바할에게 잠시 시간을 주고는 다시 말했다.
“도와드릴까요?”
그러자 카르바할의 눈빛이 굳게 변했다.
『 주호 공작. 내 부탁함세. 제발 우리 형제들을 원래대로 되돌려주게나. 』
《 메인 퀘스트 : 카르바할의 부탁 / 드워프 종족의 복구 》
- 카르바할을 도와 드워프 종족을 원래대로 돌려놓아라.
- 어둠의 레릭 왕국 멸망.
- 혹은 고대 드워프 왕 제거.
- 퀘스트 보상.
『 원정대 포인트 1000000 P 』
『 한계 돌파 강화석. 』
『 +1강 확정 정제 강화석. 』
『 10강 무기 정제 강화석. 』
『 10강 방어구 정제 강화석. 』
그래.
이렇게 한 방에 주는 게 좋지.
특히 한동안 볼 수 없었던 한계 돌파 강화석이 보상으로 나왔다.
15강 이상으로 갈 수 있게 도와주는.
지금 발루딘도 15강인데 이 녀석을 더 올리기 위해서는 저 한계 돌파 강화석이 필수였다.
거기다 원정대 포인트도 무려 100만을 쥐어 주었다.
이 포인트를 얻고 나면 정말 압도적으로 앞서나갈 수 있을 터.
좋아.
이제 진행하면 되겠어.
카르바할과 휘하 드워프들 옆으로 황실 비공정을 불러내고는 말했다.
“그럼 타시죠.”
『 어디로 가는 건가? 』
“고대 드워프 왕이라는 적을 이기려면 충분한 전력이 있어야겠죠. 전 그걸 제공할 겁니다.”
『 흠, 알았네. 』
간단한 설명과 함께 카르바할이 올라타자 나머지 드워프들도 같이 올라탔다.
그리고 곧장 우리 팀이 있는 바이탄 요새로 워프했다.
【 워프 - 바이탄 요새! 】
바이탄 요새의 상공에 워프해 아래를 보니 이미 수많은 유저들이 집결해서 북적거리고 있었다.
일전에 전신과의 전투를 위해 모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새로 생긴 레릭 왕국에서의 사냥을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현재 물약 보급이 가능한 곳은 여길 포함해 세 개의 요새뿐이니까.
전신과의 적대 관계도 재중이 형이 풀어 버린 상태라, 이제 물약을 원래대로 팔고 있어 수많은 유저들이 요새에서 물약을 사서 레릭 왕국 방향으로 움직였다.
나쁘지 않네.
물약 장사는 여전히 잘 될 테고.
카르바할을 데리고 바이탄 요새로 내려서자 재중이 형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여, 고생했다.”
“제가 뭐 한 게 있나요.”
가서 고대 드워프 왕을 협박한 것 하나밖에는 없지.
“크큭, 그래. 카르바할도 무사히 데리고 온 것 같고. 이제 시작해 볼까?”
“네, 미끼를 던져 줘야죠.”
미끼라는 말에 재중이 형이 웃음을 지었다.
사전에 다 이야기가 끝난 일이라.
곧장 재중이 형이 여러 사람들에게 연락을 넣었다.
그중에는 가장 거물인 전신.
그리고 프로게이머들이 포함된 길드뿐만 아니라 서버에서 좀 날고 긴다는 각 길드들의 수장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영원한 호구인 해원 역시 마찬가지고.
심지어 우리와 적대적인 길드 모두 포함이 되었다.
예전에 배신을 했던 제우스, 악마 등 껄끄럽게 여기던 길드나 유저들도 다수 연락을 받았고.
얼마 후, 그런 모든 유저들이 이곳 바이탄 요새로 입성했다.
대규모로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는 일이 잘 없어서인지 일반 유저들의 관심도 받았고.
아마도 서버 내에 소문이 쫙 나지 않았을까.
채팅창이 시끄럽게 올라가는 것을 보면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게 된 것 같았다.
거의 백여 개의 상위 길드가 모이자 서로 무슨 일인가 해서 눈치를 본다고 정신이 없어 보였다.
개중에는 벌써 멱살잡이를 하는 길드들도 보였고.
상위 길드들은 서로 사냥터나 네임드 경쟁 때문에 사이가 좋은 경우가 드물지.
“자자! 더 시끄럽게 하는 길드는 이번 일에 뺄 겁니다.”
재중이 형의 그 한 마디에 갑자기 좌중이 조용하게 변해 버렸다.
역시 재중이 형은 사람들을 주목하게 만드는 힘이 있어.
그중 아니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악마가 말을 꺼냈다.
“일단 오기는 했는데 시답잖은 이야기면…….”
“아, 됐고. 기다리는 사람들 많은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주호.”
재중이 형이 날 부르자 곧장 카르바할을 단상에 올려보냈다.
“가시죠. 저들이 당신의 병력이 되어 줄 겁니다.”
『 그런가? 알겠네. 』
어지간해서는 의문을 가질 법도 하지만 카르바할과 내 쪽은 친밀도가 상당하니까.
그리고 카르바할이 단상에 올라서자 주변에 모은 상위 길드 유저들이 깜짝 놀라워했다.
“카르바할? 드워프의 왕이잖아?!”
“어떻게 여기에 있지?”
카르바할을 알고 있는 유저들이 꽤 있네.
하긴 구 드워프 지하 왕국을 드나든 사람들도 이제는 꽤 있을 테니.
알 만한 사람들은 거의 알고 있다고 봐야 했다.
『 난 드워프의 왕, 카르바할이다. 그대들에게 나를 대신해서 저 고대 드워프 왕과 싸워 줄 것을 부탁하노라. 』
그리고 동시에 요새에 있는 모든 유저들에게 메인 퀘스트가 떠올랐다.
바로 내가 받았던.
그러자 유저들이 화들짝 놀라면서 카르바할을 바라봤다.
그래, 놀랍겠지.
갑자기 이 정도 보상을 주는 퀘스트를 받게 됐으니.
<불멸> 크큭, 놀라는 거 봐라.
<주호> 네, 생각보다 잘 됐어요. 카르바할이 직접적으로 퀘스트를 주는 덕분에.
<불멸> 오케이. 이제 한 발짝 내디뎠군.
재중이 형 말대로 이로써 모든 퍼즐이 완성되었다.
고대 드워프 왕의 목줄.
카르바할이라는 상징적인 존재.
마지막으로 가르시아 제국의 황제까지.
전부 내 손으로 움직일 수 있는 NPC들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전쟁.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었고.
그리고 남은 퍼즐 조각이 바이탄 요새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는 씨익 웃었다.
성벽을 지키던 경비병이 크게 외쳤다.
『 가르시아 제국 백작 탐사대 도착했습니다! 』
드디어 왔나.
엉덩이 무거운 귀족 나으리들?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