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3화 어둠에 찬 레릭 왕국 (4)
로스트 스카이의 시스템은 마냥 단순하게 돌아가진 않았다.
일종의 보급 시스템이 존재했으니까.
유저들이 사냥터를 아무렇게나 늘릴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고.
보급지와 너무 멀어지면 물약 보급이 힘들어진다.
아이템의 처분이라던지 수리, 보수와 같은 일들도 어려워지고.
거기다 단순하게 한 자리에서 몬스터가 리젠 되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돌아다니는 몬스터들이 많았기에 비전투 시에 머물 안전한 장소는 반드시 필요했다.
이런 이유로 현재 레릭 왕국에 많은 유저들이 머물고 있는 것이다.
물약 보급과 정비를 할 수 있으니까.
드워프들이 지켜주기에 안전한 장소이기도 하고.
심지어 안에 지하 무덤이라는 훌륭한 고랩 던전까지 존재했다.
하지만 이렇게 훌륭한 레릭 왕국에 딱 하나.
단점이 존재했다.
바로 물약 보급.
장비만 고수하는 드워프들 특성 때문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레릭 왕국은 특이할 정도로 물약이 부족했다.
우리가 레릭 왕국이 세워지고 처음 방문했을 때.
드워프들이 일정량의 물약만 팔고 재고가 부족하다고 바로 문을 닫아 버렸으니까.
물론 이건 비단 레릭 왕국뿐만 아니라 다른 거점이나 요새들도 마찬가지였다.
물약을 어느 정도 사게 되면 물약이 부족해지는 시스템이 존재하니까.
요새 방어전 때도 물약이 부족해 방어할 수 없는 상황이 종종 연출되었고.
상점에서 무한대로 물약이 솟아나는 마법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말은 어디선가 물약을 계속 보급받는다는 소리.
그래서 유저들이 요새, 거점 등의 NPC들에게 물었더니, 가르시아 제국에서부터 물약을 보급 받는다는 대답을 듣게 되었다.
정확히는 물약의 재료를 넘겨받아 제작을 하거나, 물약을 지원 받는 그런 시스템이었다.
특히 경계를 넘어가야 나오는 레릭 왕국은 그 물약을 보급 받을 수 있는 장소가 딱 정해져 있었다.
가르시아 제국에서 경계를 넘어가기 전 거쳐야 하는 관문 세 곳.
레티어스 요새.
쿠론 요새.
바이탄 요새.
그중 레티어스 요새는 현재 화련의 소유였고.
바이탄과 쿠론 요새는 나와 챠밍이 가지고 있었다.
이건 NPC나 운영에 대해서 직접 관여할 수 있는 요새의 주인이 전부 우리 편이라는 말이지.
다른 말로 우리가 마음만 먹는다면 레릭 왕국의 물약 시장을 통째로 쥐어틀 수 있다는 말이었다.
“챠밍, 너도 물약을 전부 막아 버려.”
“정말 괜찮아요?”
챠밍이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물어오자 잠시 생각을 하다가 이내 괜찮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사실 안 괜찮더라도 그다지 상관없어.”
이제부터 욕이란 욕은 우리가 아니라 초월 길드가 다 들어먹을 테니까.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이전에 양념을 친 것이었다.
밑그림.
이미 던전 통제를 하는 초월 길드에 대항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두었다.
그리고 이런 이미지는 이후에 반드시 영향을 미치겠지.
그것도 아주 좋은 방향으로.
옆에서 우리말을 듣고 있던 화련이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야?”
“으음, 네. 지금은요. 아마 조만간 입질이 올 거예요.”
이게 효과가 드러나려면 아마 조금 시간이 필요할 터.
그리고 그때가 되면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이다.
* * * * *
- 어? 레릭 왕국에서 물약을 안 파는데?
- 아냐, 아까 잠시 팔았어. 근데 바로 문 닫더라.
- 사람들이 너무 많이 사갔나?
- 에이, 그 짧은 시간에?
- 갑자기 왜 이러지? 상점 NPC들이 전부 물약이 없데.
- 아놔, 지하 무덤에 사냥 가야 하는데.
- 아, 지하 무덤 하니까 짜증 나네. 거기 통제 다시 하지?
- ㅇㅇ. 입장료 더 쳐올렸더라.
- 와, 초월 이 새끼들 무슨 빌딩이라도 세우려고 그러냐.
- 그런 듯. 제대로 돈독이 올랐어.
- 주호가 레릭 왕국 잡고 있을 때는 안 이랬는데.
- 새삼 주호가 얼마나 대단한지 이제 알겠다. 저렇게 할 수 있는데도 안 한 거 아냐.
- 맞아, 이때까지 거점, 요새, 유적지 먹으면서 한 번도 통제한 적이 없음.
- 하, 꽃이 지고 나서야 봄인 줄 알았습니다. 주호 형님 좀 돌아오십쇼.
아마도 우리에게 받은 손해를 메우려고 그 돈 관리를 한다는 작자가 돈을 더 올려버린 모양이었다.
당연하게도 욕을 먹는 중이고.
그걸 옆에서 같이 보고 있던 재중이 형이 전사 형을 보면서 말했다.
“이제 슬슬 효과가 나오는 건가?”
“네, 물약 부족한 걸 유저들이 몸으로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호오, 좋아 좋아.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되겠군.”
“아무래도 시장에 돌고 있는 물약들이 꽤 남아 있을 테니까요. 개인적으로 가진 것도 있을 테고. 레릭 왕국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물약도 적지 않습니다만…….”
“그래, 곧 동난다 이거지?”
재중이 형이 미소 지으면서 물어보자 전사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 하루. 한 사이클이 돌아가는 정도면 정말 바닥까지 떨어질 겁니다.”
전사 형이 대략적으로 계산해 본 결과, 하루면 된다고 한다.
그만큼 물약이 사냥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말이었고.
특히 지하 무덤 던전처럼 레벨 대가 높은 던전에서의 물약 소비는 더욱 빨랐다.
당장 인벤에 가득 채워서 사냥을 가야 하는데 물약이 없으면?
이건 볼 것도 없었다.
그냥 올 스톱이다.
나처럼 체력과 마력을 흡수해서 버티는 수준이 아니라면.
정말 사냥에서 손을 놓아야 한다.
“심심한데 드래곤이나 한번 잡고 올까?”
재중이 형이 몸을 풀고 싶다는 식으로 움직이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사냥터가 멀어지기 시작하면 이전의 네임드를 잡으러 가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이런 현상은 더 했고.
탈것이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오가는 시간을 생각하면 둘 중에 하나는 포기해야 했다.
고렙 사냥터에서의 사냥이냐 네임드 아이템이냐.
그리고 네임드를 찾아간다고 반드시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거기서도 서로 먼저 잡으려는 여러 길드들과 경쟁해야 하니까.
네임드 하나를 두고 서로 치고받는 길드가 나오는 일은 별로 논할만할 일도 아니었다.
다들 그렇게 하고 있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아직도 다른 유저들은 드래곤을 잡기 버겁지만, 우리는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사냥이 가능했다.
현재 드래곤을 독점적으로 잡는 유일한 팀이기도 했고.
거기다 원하는 지점으로 함께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인 황실 비공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제 거리는 우리에게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볍게(?) 드래곤을 쥐어패 주고 드랍된 아이템을 챙겨서 바이탄 요새로 돌아오자, 사장님과 우리 탐사대의 중요 인사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스칼렛.
이슬두잔.
리더.
황룡.
폭군.
엔느까지.
화련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툴툴거리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워낙 독고다이라…….
이런 자리는 익숙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고개를 돌려 살펴보는데 아스티아는 어디로 간지 당최 알 수 없었다.
대체 요즘 어디를 다니는 거지?
이전에는 내 옆에 붙어 있더니 어느 순간부터 사라져서 나타나질 않았다.
혹시나 싶어 재중이 형에게 물었다.
“어디 간 걸까요?”
“흐음, 어디 가서 죽지는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걱정은요, 무슨.”
재중이 형 말대로 누굴 죽이면 죽였지 죽을 수준은 아니니까.
“그냥 아스티아에게 확 엎어 달라고 할 걸 그랬나?”
“하하…….”
정말 그게 가능했다면 이런 절차고 뭐고 힘으로 다 때려눕힐 수도 있겠지.
“그럼 시작하자고.”
우리 쪽 탐사대의 길마들은 이미 사장님에게 사정을 들어서 전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미리 레릭 왕국에서 빠진 거였고.
지금이야 어쩔 수 없이 이 근처에서 사냥 중이지만.
황룡이 먼저 물었다.
“세 요새에서 물약을 막은 일은 이미 들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막을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지만요. 그래서 이제 레릭 왕국을 치는 겁니까?”
황룡은 물약을 다 막아 버린 것을 레릭 왕국과 한판 붙겠다는 뜻으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물약이 없으면 유저나 NPC나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당연히 전쟁 이전에 레릭 왕국의 목을 먼저 졸라 놓는다고 생각했을지도.
사실 저들은 우리가 고대 드워프 왕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까지는 모른다.
알아서도 안 되고.
사장님도 입단속을 하는 중이라.
레릭 왕국이 곧 망할 것이라고는 아마 상상도 못 하고 있겠지.
그러니까 이런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재중이 형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우리가 먼저 쳐들어가진 않을 겁니다.”
초월 길드와 레릭 왕국의 드워프들과 싸우지 않는다는 말에 황룡이 의구심이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그럼?”
재중이 형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말을 꺼냈다.
“이제 곧 레릭 왕국에서 연락이 올 겁니다.”
그리고 게시판을 열어서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 아, 젠장. 사냥을 갈 수가 없잖아.
- 물약 대체 언제 다시 차는 거야?
- 방금 누가 싹 쓸어감.
- 와, 지금 시장에 물약값 봐라. 미쳤다.
- 50배? 돌았네.
- 야, 누가 레티어스 요새에 가서 물약 좀 사와.
- 안 그래도 갔다 왔는데 거기도 똑같음.
- 뭐?
- 거기도 물약 하나도 없다고.
-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 물약값 너무 올라서 물약 퍼다 날라 수익 좀 챙겨 볼까 했는데 거기도 없어.
- 바이탄, 쿠론 요새도 마찬가지임. 물약이 씨가 마름.
- 지금 던전도 텅텅 빔. 아무도 사냥 못 감.
- 자리도 유지 못 해서 다 나오는 판에 무슨 사냥이냐.
- 뭐야 대체. 갑자기 왜 이래?
- 어디서 물약을 구하라는 말이야.
- 운영자 불러. 진짜, 장난하나.
이른바 물약 대란.
완전히 마른 물약의 줄기를 찾아보려 애쓰겠지만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가르시아 제국까지 가서 가져온다면 또 모를까.
하지만 거기도 마찬가지였다.
마리아 가르시아에게도 미리 말해 두었거든.
물약을 풀지 말라고.
이러면 진짜 서버가 전부 마비될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너무 오래는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물약 대란과 함께 잠시 탐사대의 앞으로의 일정을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재중이 형에게 연락이 들어왔다.
“입질이 왔네요.”
재중이 형이 화상으로 돌려놓는 우리 쪽 탐사대 사람들에게 손가락으로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한 뒤 떡밥에 걸려든 전신을 맞이했다.
“여, 선물은 잘 받았고?”
“대체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응? 뭐하기는. 우리도 가진 패를 좀 다 써 보려고.”
“하아, 쉽게 물러날 것 같지 않더라니…….”
재중이 형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천진난만하게 웃자 전신이 피로가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어디 가서 이런 걸 당해 본 적도 없을 테니.
지금 물약 대란으로 서버가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레릭 왕국의 횡포로 우리가 쫓겨났다. 그래서 통제를 막기 위해 우리가 나섰다고 하면 이야기가 되려나?”
“당신이 그런 캐릭터도 아니지 않습니까.”
“어, 좀 그렇긴 해. 그런데 정말 상황이 그렇잖아? 이대로 있으면 유저들이 들고일어날 거라고? 물약을 틀어막은 우리가 아니라 너희한테 말이야.”
결국 전신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왔다.
“원하는 게 뭡니까?”
“입장료 그만 받고, 던전을 완전 개방해. 우리를 포함해서.”
“하아, 그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뒷일 감당되겠어?”
재중이 형의 엄포에 잠시 생각에 잠긴 전신이 결국 악수를 꺼내들었다.
“할 수 없군요. 그 요새들을 뺏어 올 수밖에.”
“호오, 그래? 자신 있으면 해보시던가.”
그 말을 끝으로 재중이 형이 화상을 끊어 버렸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면서 재밌다는 듯 웃어 보였다.
“늪에 걸려들면…… 알지?”
“네, 완전히 집어넣어 버릴게요.”
다시는 올라오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