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7화 학살의 무덤 (2)
주위를 둘러보자 나를 중심으로 반경 몇 미터는 데스 버스트로 완전히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그 범위 안에 들어가 있던 적 유저들은 당연하게도 한 방에 녹아 사라져 버렸고.
드워프 대전사인 칼룬도 한 방에 눕힐 정도인데 유저들이 살아남을 수가 없지.
거기다 추가 대미지 누적이 이전보다 더 누적되었기에 위력 면에서 그때보다 훨씬 더 올라가 있었다.
현 유저들의 체력으로는 그냥 닿으면 녹을 정도.
이런 위력 시위는 데스 버스트의 범위 바깥에서 겨우 살아남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완전히 겁을 먹게 만들었다.
“으어어…….”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미쳤어!”
“다 녹았잖아?!”
“단 한 방에?!”
“주호가 무슨 마법사도 아니고.”
“이게 말이 돼?”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공동의 지면이 폭발에 함께 터져나가며 싹 녹아 버린 흔적들.
주변 땅이 전부 뒤집힐 정도의 위력은 유저들의 스킬에서는 경험해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지형까지 엎어 버리려면.
그만큼 위력이 나와야 하니까.
최소한 드래곤이 쓰는 브레스급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마법사도 아닌 근접 유저가 단일 스킬로 이런 미친 위력을 낸다?
그 자체로 상대하는 유저들에게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내 뒤에 있던 이쁜소녀 외 다른 아홉 명의 유저들 역시 입을 쩍 벌리고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쁜소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그런 반응이 마음에 드는지 내게 엄지를 척 하고 올려보였다.
이제 긴장이 다 풀린 모습이네.
좀 전까지만 해도 처절할 정도로 힘겹게 싸우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환하게 웃는 모습뿐.
그런 이쁜소녀에게 물었다.
“고생했어.”
“잉, 진짜. 혼자 여기서 죽는 줄 알았어요.”
처음 만나기 전에는 몰라도 그 이후에는 나나 챠밍, 이쁜소녀 모두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 다녔었다.
이렇게 강제로 떨어져 본 적도 이번이 처음이었고.
이쁜소녀 입장에서는 정말 어려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물약은?”
내 물음에 이쁜소녀가 잠시 인벤을 보더니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거의 바닥났어요.”
물약이 바닥난 것도 모를 정도로 싸웠었나?
아마 정신이 없었을지도.
이쁜소녀의 뒤를 보니 두 명을 제외하고는 다 마법사들만 남아 있었다.
상황이 이러니 이쁜소녀가 나섰겠지.
탱커도 없는 상황에서 이쁜소녀 혼자 부담이 엄청났을 것이다.
“일단 이거 받아.”
바로 내가 가진 물약의 절반을 덜어 이쁜소녀에게 넘겨주었다.
“갑옷은?”
“아, 아직은 버틸 만해요.”
버틸 만하다고는 했지만 이미 갑옷 상당 부분이 부서져 있었다.
수룡갑이 이 정도로 박살 나려면 얼마나 혼자 막아 냈던 걸까.
부위 파괴로 레비아탄의 비늘을 제법 구할 수 있어서 이쁜소녀가 틈이 날 때마다 용혈로 가 수룡갑을 부위별로 만들어 왔었다.
다만 문제는 강화.
수룡갑은 재료의 문제로 만들기가 어렵기 때문에 무작정 깡으로 강화해서는 그대로 날려 버릴 확률이 아주 높았다.
그래서 마음대로 강화를 할 수가 없었다.
방어력 자체는 드레이크 경갑보다야 월등히 좋기는 한데 강화가 낮으니 압도적인 방어력을 내기는 역부족.
정제 방어구 강화석이 있기야 하지만 날려 버릴 확률이 높은 것은 마찬가지라.
시장에 나온 고강 방어구 강화석은 돈이 있어도 못 사는 문제점 때문에 사장님이 백방으로 노력하고 계시지만 구하기가 어려웠고.
우리가 먹은 고강 방어구 강화석은 전사 형에게 몰아줬으니 이쁜소녀의 장비가 상대적으로 전사 형에 비해 많이 약한 편이었다.
아무래도 이번 일이 끝나면 팀원들 장비를 새로 다 맞춰야겠어.
드래곤과 레비아탄을 다시 잡든.
아님 더 상위의 뭔가를 구하든.
정 안 된다면 네임드 템으로 고강 강화석을 바꾸는 한이 있더라도.
확실하게 우리 팀의 장비를 상향시킬 필요가 있었다.
“미안, 끝나면 장비 새로 맞춰 줄게.”
“웅, 알았어요.”
드워프들과 관련된 무덤이니까 뭔가를 구할 수 있지도 않을까 하는 기대도 가지고 있었고.
“뒤에 분들은?”
“아, 저하고 같이 싸워 주신 분들이에요. 이분들 없었으면 진작에 다 죽었을 거예요.”
보니까 전부 다른 길드 소속인데?
그런데도 이쁜소녀를 도와줬단 말이지?
유저들을 향해 바로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소녀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자 대표로 여성 마법사 중 한 명이 인사를 받았다.
“이쁜소녀 님 덕분에 우리도 몇 번 살았거든요. 도저히 저버릴 수가 없어서. 지금 생각해 보면 최고의 판단이었던 것 같네요? 이렇게 구하러 오셨으니까.”
“나중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그렇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살았으니 됐죠.”
으음, 나쁘지 않네.
도움을 받았다고는 하나 이런 위기 상황에서 함께한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의리가 있다는 말이기도 하고.
바로 화면 저장을 해서 아이디를 남겨 두었다.
일단 이건 나가서 생각해 보자.
“포위는 풀었으니까. 슬슬 움직이죠.”
최단 거리로 뚫고 온 이유도 이쁜소녀를 구해 내기 위함이었고.
그리고 지금 보니 같이 구해도 충분히 좋을 것 같아.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이 사람들도 같이 구해서 나간다.
그렇게 내가 움직이자 자연스럽게 이쁜소녀와 아홉 명의 유저들이 나를 뒤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전과 다르게 적 유저들이 내게 덤벼들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리를 상당히 벌려 놓은 채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만 볼 뿐.
심지어 내가 걸어가자 딱 그만큼 거리를 벌리면서 뒤로 움직이는 모습도 보였고.
그런 적들을 보고는 뒤에 있던 유저들이 감탄하듯 한마디씩 했다.
“쟤들 다 쫄았나 봐요.”
“우리한테는 그렇게 달려들더니.”
“이게 랭킹 1위의 위엄 아니겠어?”
무슨 위엄씩이나…….
아무튼 내게 달려들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
달려들었다가 이전처럼 싹 녹아 버리면 이제는 답도 안 나온다.
거기다 여기서 죽으면 다시 무덤 안으로 들어올 수도 없으니 더 몸을 사릴 수밖에.
“야, 너희들 다 공격 안 해?”
“방금 그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아, 그럼 어떻게 할 거냐고! 계속 두고 볼 거야?”
“덤벼들었다가 다 녹았잖아! 어쩌라고!”
“마법이라도 쏴!”
“궁수들 뭐해? 계속 멍 때릴 거야?”
“공격해!”
서로 공격을 미루는 기묘한 상황.
그러다 원거리 유저들 사이에서 다시 공격을 준비하는 모습이 보였다.
접근은 하지 못해도 공격은 해보겠다는 건가.
저들 입장에서는 이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발악이었다.
그사이 멀리 있는 장소에서 계속 전투 소리가 들려왔다.
엔느가 시작했군.
쾅!
콰앙!
챙!!
카앙!
두 세력이 맞붙으면서 전투 소리가 들리자 잠시 뒤를 돌아보고는 이쁜소녀와 유저들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일자로 돌파합니다. 잘 따라오세요.”
여기서 시간이 끌리면 다시 포위될 수도 있었다.
그러기 전에 미르 길드와 합류해야 해.
뒤에 이렇게 유저들을 달고는 제대로 싸울 수가 없으니까.
내가 달리자 이쁜소녀와 함께 유저들이 나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어?! 쟤들 달린다.”
“젠장, 합류하게 두면 안 돼!”
“전부 달려들어서 막아!”
그래도 머리가 있는 놈들은 있는 모양이네.
합류하면 어떻게 될지 잘 아니까.
다만 생각과 달리 몸은 안 따라 주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계속 적 유저들이 몸을 사리자 결국 간부급의 유저가 악을 쓰듯 외쳤다.
“이 새끼들 장난해?! 안 막아?!”
“아, 젠장할. 저 새끼를 어떻게 막으라고.”
“짤리고 싶으면 계속 몸 사리던가. 지금 안 나가는 새끼들 다 기억해 둔다.”
“니들도 척살 당하고 싶으면 계속 버텨 봐.”
“에이, 씨…. 더러워서. 지들은 한 번도 안 나서는 게.”
“어휴, 죽을 것 같은데.”
“더러워도 까라면 까야지.”
결국 억지로 밀려 나온 적 유저들이 우리와 미르 길드 사이를 두텁게 막아서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화살과 마법 스킬이 날아들었고.
칫, 겁은 먹었지만 억지로라도 동원은 할 수 있다는 거군.
나 혼자라면 얼마든지 돌파가 가능하지만 지금은 뒤에 있는 유저들이 문제였다.
솔직히 이 사람들은 살리고 싶은데.
그럼 조금 아깝지만 여기서 스킬을 좀 써야겠어.
달려 나가면서 바로 발루딘을 집어넣고 드래곤 슬레이어를 꺼내들었다.
드래곤 슬레이어가 진화 과정에 들어갔지만 다행히 스킬은 쓸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정면을 막아서는 유저들을 향해 달려가면서 스킬을 계속 차징했다.
“어?! 저건!”
“미친! 저게 있었어!”
“젠장! 내가 말했잖아! 죽을 것 같다고!”
“…발! 전부 피해!”
“도망가!”
“흩어지라고!”
내가 드래곤 슬레이어를 꺼내들자마자 적 유저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더니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드래곤 슬레이어는 영상으로 노출이 제법 많이 됐으니까.
그래서 드래곤 슬레이어를 꺼내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저들도 뻔히 알고 있었다.
【 용격! 】
콰아아!!
한 마리 거대한 용이 뿜어져 나가듯 내가 휘두른 드래곤 슬레이어에서 강력한 화염이 쏟아져나갔다.
그런 용격이 우르르 우리 앞을 막아서던 적 유저들을 싹 휩쓸어 버렸고.
비록 용병왕의 분노로 충분히 위력이 펌핑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용격은 용격.
기본적인 위력만으로도 유저들을 녹여 버리거나 다운시키기에는 충분했다.
그렇게 용암이 긁어내듯 일자로 쭉 밀고 나간 자리에는 죽음의 빛으로 변하거나 체력의 거의 다 소진한 채 다운 된 유저들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용격은 강력한 화염을 동반하니까.
겨우 딸피로 죽지 않더라도 몸 전체를 화염이 뒤엎어 버리니 화염의 디버프 때문에 그대로 두면 싹 죽을 것이다.
“끄악!”
“악, 계속 체력이 깎여!”
“힐!!”
“젠장, 내가 이래서 하기 싫었다고!”
“살려 줘!”
“왜 맨날 우리만 이래!!”
“에이씨. 더러워서 진짜!”
아마 적 간부들을 욕하는 것 같기도 한데.
뭐 저건 저들 사정이고.
내분이 일어나면 이쪽이 고맙지.
용격이 일자로 쭉 밀고 나가 곧게 길이 만들어지자 바로 그 길을 달려 나갔다.
“시원하네요.”
“깔끔 그 자체.”
“이래서 주호, 주호 하는가 봐요.”
따라 달리는 유저들이 연신 감탄과 칭찬을 해 오자 부끄러움이 막 솟아났다.
으, 적응이 안 되네. 이건.
그렇게 방해를 받지 않고 쭉 달리다보니 어느새 미르 길드의 본진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예요!”
엔느가 나를 발견하더니 반가운 듯 손을 들어 외쳤다.
황룡 역시 길드원들을 시켜 적 유저들을 밀어내면서 길을 터 주었고.
마지막은 좀 고생할 것 같았는데 황룡이 길을 열어 주어 이쁜소녀와 아군을 모두 구해내 무사히 미르 길드와 합류했다.
미르 길드원들 역시 깜짝 놀라서 우리를 바라봤다.
“와, 정말 구해 왔어.”
“세상에, 저 많은 유저들을 뚫고.”
“주호 저게 인간이냐.”
“랭커 앞에서는 쪽수고 뭐고 없구만.”
합류하자마자 상황을 살폈는데, 황룡은 길드원들과 블록을 세워 싸우는 중이라 뒤에 있던 엔느를 보면서 물었다.
“상황은요?”
“덕분에 기세를 완전히 꺾었어요. 원래라면 우리가 압도적으로 밀렸어야 정상이거든요.”
엔느가 고개를 돌려 전장을 바라보았다.
정확하게는 우리가 뚫고 온 휑한 장소를.
그리고는 미르 길드원을 불러 말했다.
“준비한 것 넘겨드려.”
그러자 미르 길드원 중 한 명이 두 손 가득 물약을 잔뜩 넘겨주었다.
“이건?”
“제가 말했잖아요. 물약 걱정하지 말라고요. 모자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주호 님을 위한 물약은 잔뜩 있답니다.”
“확실하군요.”
“주호 님이 휘저어 줄수록 우리도 득을 보니까?”
“잔뜩 쥐어 줬으니 다시 휘젓고 오라는 소리로 들립니다만?”
“헤에, 속을 너무 들켰나요?”
이 여자도 참.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편이었다.
그게 딱히 나쁘다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내가 원하는 일이지.
엔느가 서늘한 눈을 하며 말했다.
“일단 여기서 잡을 수 있는 녀석들은 다 잡고 가야 해요. 이 녀석들이 이 무덤에서 만날 적의 끝은 아닐 테니까요.”
“부담을 최대한 줄여 놓자는 거군요.”
“네, 가능하다면 싹 전멸시켜야죠.”
엔느와 대화를 하다가 뒤를 돌아 잠시 쉬고 있는 이쁜소녀를 바라보았다.
“더 할 수 있겠어?”
내 질문에 갑자기 이쁜소녀의 눈에 화르르 불이 붙었다.
마치 당한 것을 그대로 돌려주기라도 하겠다는 활활 타오르는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래야 소녀답지.
“내 뒤를 좀 부탁해도 될까?”
“네! 할 수 있어요!”
“그럼, 가자. 저 녀석들을 완전히 쓸어버리러.”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