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6화 다시 한 번 깽판 (4)
은신 상태로 스킬을 시전할 때 ‘일부러’ 듀라한의 스킬인 데스 버스트를 시전했다.
잿빛의 듀라한이 사용한 것처럼 보이도록.
그리고 제대로 먹혔다.
내가 쓴 줄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니까.
그저 녀석이 사용한 스킬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다.
분명히 네임드의 스킬과 내가 쓰는 스킬의 차이는 크지만, 그것을 알아볼 만큼 녀석을 상대한 적이 없다는 게 문제다.
또한, 듀라한이 ‘데스 버스트’를 사용한 적이 있어 속이는 데 큰 어려움이 없기도 했고..
특히 어두운 지역에선 분간하기 더 어려울 것이다.
이건 종종 써먹어야겠다.
우리가 이득을 볼 수 있게.
그렇게 상황을 지켜보기로 마음을 먹었을 무렵, 듀라한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성벽 위에 올라가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막앗! 듀라한이 성벽 위에서 날뛰게 하지 마!”
“억지로 물고 늘어지라고!”
“거기로 간다! 목숨 걸고 저지해!”
“젠장, 듀라한은 역시 못 막는 거였나.”
“불새 길드, 니들은 도대체 뭐하냐?”
잿빛의 듀라한이 성벽 위에 올라가고부터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나 다름없었다.
성벽을 따라 오러가 담긴 스피어로 쭉 밀고 나가자 그 경로에 있던 유저들이 죄다 죽음의 빛으로 사라졌다.
거기에 듀라한의 레벨이 올라가면서 모든 피해를 원점으로 돌려 버렸고.
개판인데?
저런 이유 때문에 불새 길드가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억지로 듀라한을 격리시켜놨는데…….
은신을 한 상태로 불새 길드의 길드장인 태양을 돌아보자 태양이 이를 으득 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섭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새빨간 유저가 저렇게 이를 갈면서 눈을 시퍼렇게 부라리고 있으니.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온 태양이 성벽 위에서 난동을 부리는 듀라한을 한참 노려보다가 곧 숨을 크게 들여 마셨다.
“…정말 쉽진 않군.”
그새 평정을 되찾은 건가?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꽤 빠르게 화를 누그러뜨리더니 곧장 주변 길드원들에게 지시했다.
“탱커들 빨리 정비해서 달려오라고 해. 다시 한 번 녀석을 묶는다. 아직 기회는 있어.”
그러자 바로 불새 길드원들이 분주하게 재정비에 나서면서 준비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생각 이상으로 괜찮은데?
길드장의 말에 동요가 꽤 많이 사라졌다.
흐음, 무슨 수로 성벽에서 난리를 치는 듀라한을 끌어내릴 생각이지?
일단 지켜볼까?
그때, 유저들 사이로 눈에 익은 두 명의 유저가 보였다.
리더와 폭군.
퍼스트클래스의 두 사람이 왜 이곳에?
그동안 딱히 연락할 이유가 없어서 어느 쪽으로 움직였는지 제대로 확인을 못 했다.
몇 번 행동을 같이 했지만, 저쪽이나 이쪽이나 같은 노선을 걷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굳이 저쪽에서 손을 내밀지 않으면 우리가 나설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모종의 이유로 불새 길드와 연합을 했던 모양인데…….
퍼스트클래스를 이끄는 두 사람을 보고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같은 연합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도 같은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전장에서 양보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니까.
그 외에도 익숙한 몇몇 유저가 보였는데… 생각 이상으로 불새 길드에서 이번 연합에 공을 많이 들인 모양이다.
하긴 내가 알바는 아니지.
현재 이 연합을 박살 내러 온 입장이라 신경을 끄기로 했다.
지금은 듀라한에 집중하자.
녀석이 날뛸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놔야 해.
<불멸> 상황은 어때?
<주호> 예상대로예요. 불새 길드가 변수였지만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아요.
<불멸> 흐음, 그렇단 말이지. 적당히 해결되면 바로 넘어와. 아직 쿠론 요새도 남아 있어.
<주호> 쿠론 요새가 버텼어요?
<불멸> 영상을 보는 중인데 쿠론 요새도 방비가 좋아. 생각 이상으로 쉽게 안 뚫리겠어.
쿠론 요새는 자연스럽게 무너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예상 밖인데?
흑장로 타리안이 나타나는 구역이라 감염 스킬 하나만으로도 유저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정상이었다.
<주호> 그래요? 감염 스킬이 있는데도 버틴단 말이죠?
<불멸> 보면 깜짝 놀랄 거다. 나도 저런 식으로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야. 쿠론 요새 쪽에 미친놈이 하나 있었어. 머리가 아주 획기적으로 돌아가는.
재중이 형이 미친놈이라 할 정도라고?
이건 꽤 궁금하네.
<주호> 돌아가서 볼게요. 지금은 이쪽에 집중해야 해서.
<불멸> 그래, 들키지 말고.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다.
<주호> 네, 저 돌아갈 때까지 고르곤 잘 붙들어주세요.
<불멸> 붙들기만 하겠냐. 이제 여차하면 잡아버리지.
<주호> 아, 뭐 그것도 그렇겠네요. 이제 확실히 보이죠.
<불멸> 우리 쪽 연합 애들 죄다 고르곤이 보이니까. 포인트를 아주 다 가져다 썼어.
<주호> 괜히 포인트를 원했던 게 아니군요.
스칼렛과 이슬두잔이 우리가 넘겨준 포인트로 진실의 눈을 대량으로 산 모양이었다.
이러면 고르곤이 잘 보이니까.
거기다 부활 포인트가 바로 옆에 있으니 좀 죽어 나간다고 해도 고르곤을 잡긴 잡을 것이다.
사실 고르곤은 안 보이는 게 문제지.
보이는 순간부터 난이도가 대폭 내려간다.
재중이 형이 손을 놓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고.
<주호> 아, 그리고 미안한데 그 고르곤 제가 좀 써먹어야겠어요.
<불멸> 그래? 알았다. 뭐, 스칼렛도 크게 반대하진 않을 거야. 미리 말해두지.
쿠론 요새가 무너졌으면, 고르곤을 쓸 이유가 없었는데 지금은 사정이 좀 많이 바뀌었다.
안 무너진다면 억지로 무너뜨릴 수밖에.
그럴만한 방법은 내가 충분히 가지고 있었고.
곧 재중이 형과 연락을 끊고 성벽 위를 바라보자 여전히 듀라한이 활개를 치는 중이었다.
그 때문에 성벽을 지키던 유저들이 순삭되어 공백이 생겨나 버렸고.
당연히 이건 유저들이 죽은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성벽 아래로 점점 쌓이기 시작한 악마형 몬스터들이 잔뜩 몰려들어 중형 몬스터들을 밟고 성벽 위를 기어코 넘어와 버렸다.
“안 돼! 몬스터들 올라온다!”
“막아! 막으라고!”
“당장 지원해! 무너지기 시작하면 답 없어!”
“진짜 듀라한 한 마리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야.”
예상된 수순.
그렇게 무혈 입성한 몬스터들이 사방으로 퍼지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길드장 태양이 굳은 표정으로 빠르게 오더를 내렸다.
“더는 못 기다리겠군. 지금부터 녀석을 붙잡는다.”
역시 뭔가 방법이 있는 건가?
태양의 오더가 떨어지기 무섭게 불새 길드원들이 우르르 성벽 위로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마법형 유저들은 다 아래에서 대기할 뿐.
근접 유저만 올라가는 모습은 상당히 이색적이었다.
힐러 없이 올라가?
대체 무슨 생각이지?
저러면 순식간에 당할 텐데…….
그렇게 올라간 불새 길드원들이 성벽 위에서 날뛰는 듀라한의 사방으로 접근하더니 일제히 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저건…….
밧줄?
설마,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불새 길드원들이 밧줄을 동시에 꺼내 들고는 듀라한의 몸을 향해 던졌다.
반대편에서도 마찬가지.
그렇게 수없이 많은 밧줄을 던져 듀라한의 몸을 옭아매자 태양이 크게 외쳤다.
“다들 뛰어내려!”
그러자 밧줄을 잡고 있던 유저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우르르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한두 명이면 듀라한도 큰 문제가 없겠지만, 저렇게 수십이 넘어가는 유저가 자신들의 몸무게를 이용해서 성벽 아래로 떨어져 내리면…….
듀라한 자체는 대형 몬스터가 아니라서 무게는 그렇게 많이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럼 저런 방법으로 듀라한을 성벽 아래로 떨어뜨리는 방법은 분명히 먹힐만한 방법 중 하나였다.
제법 머리를 굴렸는데?
확실한 건 태양이라는 작자가 듀라한을 상대하기 위해 꽤 많은 준비를 했다는 점이다.
듀라한이 성벽에 올라갔을 때를 대비한 방법도 미리 준비한 것 같고.
단순히 돈과 숫자로 밀어붙이려는 해원과는 차이가 극심하게 났다.
최소한 자기들이 뭘 상대하는지 알고 움직이는 게 보였으니까.
그렇게 유저들이 뛰어내리자 잿빛의 듀라한이 밧줄에 묶여 조금씩 옆으로 밀려 나가기 시작했다.
“오오! 된다!”
“성벽에서 끌어내리기만 해!”
“잘한다!”
듀라한이 점점 성벽 끝으로 밀려 나가자 듀라한에게 형편없이 당하던 유저들이 함성으로 이를 응원했고 이는 곧 제대로 먹혀들 것처럼만 보였다.
그런 모습을 보다가 곧 고개를 저어버렸다.
시도는 좋지만.
저건 안 되겠지.
아마 다른 네임드였다면 저런 시도는 충분히 통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잿빛의 듀라한은 달랐다.
단순히 밧줄 몇 개 걸어서 떨어뜨리기엔 녀석의 가지고 있는 옵션이 너무 달랐다.
특히 저 듀라한의 스피어.
성벽 아래로 낙하한 유저들의 무게 때문에 점점 몸이 끌려나가자 잿빛의 듀라한이 한 발을 크게 구르면서 잠시 버텨냈다.
그러고는 자신의 몸에 걸리는 밧줄들을 모조리 끊어내 버렸다.
촤아악!
핑!
핑!
팽팽하게 걸려 있던 밧줄들이 듀라한의 몸에서 사라졌고.
성벽 아래로 낙하를 하던 유저들은 정말 말 그대로 땅에 그대로 처박혀 버렸다.
쿵!
쿵!
“으악!”
그렇게 떨어져 내리는 유저들을 보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른 네임드라면 정말 통했을지도…….
통하진 않았지만 정말 무시할 수 없네.
저 태양이라는 사람.
그 뒤로는 뻔했다.
불새 길드의 탱커들과 함께 전력으로 저지를 해보지만 성벽 위로 올라온 다른 악마형 몬스터들과 이리저리 얽히면서 제대로 된 레이드는 힘들어졌다.
연합의 다른 길드들도 합세해서 몬스터들을 저지하려 했지만 듀라한이 그들을 쉽게 두진 않았고.
죽어 나가는 유저가 많다 보니 듀라한의 레벨이 계속 오르는 것은 덤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 이어지자 결국 불새 길드나 연합 쪽 유저들도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개판인 상황에선 우리 쪽 연합이 나서도 답이 없겠지.
이미 첫 번째 전투에서 듀라한을 놓친 순간.
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만든 건 내가 한 일이고.
나쁘지 않아.
물론, 다른 연합들이 들어오긴 할 테지만 듀라한이 여기 있는 이상 제대로 요새를 차지하기는 힘들 것이다.
잿빛의 듀라한을 필두로 레티어스 요새 성벽 위를 악마형 몬스터들이 모조리 차지하는 순간 재중이 형에게 연락을 넣었다.
<주호> 이쪽은 끝났어요.
<불멸> 오케이. 수고했다. 그럼 돌아와.
바로 귀환을 써 바이탄 요새로 돌아갔다.
갈 때야 날아가야 해서 멀지만 돌아갈 때는 금방이지.
바이탄 요새로 돌아오자 한참 전사 형을 비롯한 연합 사람들이 고르곤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성벽은 안정된 상태로 올라오는 몬스터들을 학살 중이었고.
이렇게 되면 거의 포인트 밭이나 다름없다.
여긴 내버려 둬도 앞으로도 문제없겠네.
“어때요?”
전투 중이던 재중이 형 옆으로 가자 잠시 재중이 형이 옆으로 빠져나왔다.
“고생했다.”
“딱히 한 것도 없어요. 스킬 한 방 날린 것밖에는.”
그 스킬 한 방이 치명타였고.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내 말투에 재중이 형이 피식 웃어 보였다.
“그래, 레티어스 요새는 조만간 접수하러 가자고. 거품 싹 걷어지면. 일단, 듀라한도 좀 배불리 먹이고.”
“네, 그런데 쿠론 요새는 무슨 말이에요?”
“흐음, 직접 보는 게 빠르겠지.”
그러면서 재중이 형이 쿠론 요새의 방어전을 방송하고 있는 한 BJ의 영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정말 의외의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이거 진짜 이렇게 한 거예요?”
“좀 미쳤지?”
내 반응이 재밌는지 재중이 형이 다시 한 번 웃었다.
그런 형을 보면서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 같은 유저들을 죽인다고요?”
영상 속에서는 성벽 위로 상당히 거리를 두고 유저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뒤, 감염에 걸리는 순간.
곧장 주변에 있던 원거리 유저들이 감염에 걸린 유저들을 죄다 죽여 버렸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주 깔끔하게.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