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5화 다시 한 번 깽판 (3)
은신 상태로 잿빛의 듀라한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이제부터 여기는 전쟁터가 될 테니까.
괜히 어설프게 근처에서 서성이다가 말려드는 것은 사양이다.
눈먼 공격에 실수로 스치기라도 하면 은신이 바로 풀려 버리니 이럴 때는 정말 조심하는 것이 좋다.
레티어스 요새 안으로 들어온 잿빛의 듀라한이 처음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 이내 유저들을 발견했는지 곧장 피어를 사방으로 퍼뜨렸다.
크아아아!
현 최강의 네임드란 이름에 걸맞은 강렬한 피어가 주변을 울리자 아직 듀라한을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가던 몇몇 유저가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일정 이하의 방어력이면 단순한 피어에도 대부분 저런 현상이 일어난다.
혹은 레벨 차이가 극심하거나.
유저들이 아득바득 레벨을 올리려는 이유이기도 했고.
“크윽!”
“어?! 뭐야?”
“몸이 굳었어!”
“갑자기 무슨?”
현재 레티어스 요새를 소유한 연합은 성벽에 꽤 공을 많이 들인 상태다.
유저의 힘으로 네임드와 악마형 몬스터를 막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기에 무리하게 성벽을 높여 놓았다.
아마 라니에르 후작이 들인 정성보다 이쪽의 정성이 더 많이 들어갔을 것이다.
일단 성벽이 뚫리면 망한다는 것을 몸소 알고 있으니 무리를 해서라도 올릴 수밖에.
물론, 이 시도는 굉장히 좋은 대처다.
악마형 몬스터가 성벽을 넘지 못하고 성벽 위에서 쏟아내는 공격에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했으니까.
심지어 잿빛의 듀라한도 페가수스를 잃고 제대로 된 활약을 못 하는 중이었다.
뭐, 시간이 조금 지나면 듀라한이 성벽을 박살 냈을지도 모르지만.
유저들이 승리라고 서로 안심하는 와중에 갑자기 요새 한복판에 잿빛의 듀라한이 등장하자 요새 내부가 난리가 났다.
“듀라한?!”
“저놈이 왜 안에 들어와 있어?”
“방금 성벽 바깥에 있지 않았어?”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야?”
“듀라한이 블링크도 쓸 수 있음?”
“아놔, 나도 몰라. 멍 때리지 말고 일단 붙어!”
당연하겠지만, 우리가 예전에 했던 것처럼 대부분의 유저가 성벽 위에 올라가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상황이었다.
요새 내부에 남아 있는 유저라고는 교대를 위해 남아 있거나 딱히 지금 나설 필요가 없는 유저들밖에 없었다.
그런 유저들에게 듀라한이라는 존재는 엄청난 벽에 가까웠다.
잿빛의 듀라한의 길다란 스피어에 보라색 빛이 덧씌워지자 그때부터는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오러 블레이드.
아니, 저건 오러 스피어라고 불러야 하려나?
설명엔 무기 제한이 없어 아마 모든 무기에 써진다고 보면 되겠지.
그런 보랏빛 오러 스피어를 탱커로 보이는 유저가 막아섰는데 방패와 함께 그 자리에서 반으로 갈라져 죽음의 빛으로 변해 버렸다.
두 방도 아닌 딱 한 방.
그것도 크리티컬도 아닌 일반 공격에 체력이 녹아 사라졌다.
여기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상위권에 있는 유저일 텐데… 이번에는 상대가 좋지 않았다.
적어도 악마형 방어구나 웨폰을 중첩시켜서 버티는 것이 아니면 그냥 썰리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이쁜소녀> 우와, 한 방!
<방패전사> 오오, 잘한다!! 듀라한!
<불멸> 오러가 역시 최고야.
은신으로 모습을 숨기는 내 쪽의 영상을 본 우리 팀이 다 같이 환호를 보내왔다.
그 모습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이거 참, 다들 너무 좋아하는데?
<주호> 아직 시작요. 조금 더 지켜보죠.
방비가 안 된 상황에서 생기는 문제라 아직은 더 봐야 했다.
그렇게 탱커 한 명을 썰고 난 뒤.
바로 가속을 붙여 유저가 보이는 족족 오러 스피어로 썰기 시작했다.
일단, 반응 속도는 둘째로 치고 듀라한의 오러 공격 자체를 전혀 막지 못했다.
심지어 웨폰 기술을 사용해 듀라한의 스피어에 맞부딪친 유저도 있었는데 무기가 갈려 나감과 동시에 죽음의 빛으로 사라졌다.
그나마 근접 유저들은 어떻게든 싸워보기라도 하는데 마법형 유저들은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표적이었다.
마법을 난사해봤자 듀라한의 거대한 해골 방패에 막혀 무용지물이 되기 일쑤였고.
광역 마법을 날려서 일대를 전부 태우거나 얼리는 유저도 있었지만, 그 역시 포스 쉴드에 중화가 되어 피해가 대부분 감소되어 버렸다.
듀라한이 어느 정도 피해를 입어 움찔거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라도 하면 의지가 타오르겠지만, 지금은 그냥 동네 앞마당 산책하듯 돌아다니며 유저란 유저는 모조리 썰어댔다.
역시.
상대가 안 돼.
요새 안쪽에서는 듀라한을 막을만한 유저가 없어…….
정말 단순한 근접 공격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듀라한의 공격을 막아내는 유저가 보이지 않았다.
더한 문제는 잿빛의 듀라한이 회복을 한다는 점.
레벨이 오르면서 잿빛의 듀라한의 몸 전체가 레벨업의 빛으로 번쩍거렸다.
“저게 레벨업 한다고?”
“아, 안 돼!”
“저거 누가 잡았…?”
“아! 바이탄 요새에서 잡혔다!”
“미친. 다들 물러서! 상대 못 하는 애들 그냥 떨어지라고!”
우왕좌왕.
이쪽 연합도 고레벨이 많이 포진된 연합이었고, 자금까지 상상을 초월할지도 모른다.
그 많은 유저를 누르고 요새를 차지했으니까.
그럼에도 잿빛의 듀라한에게는 한 끼의 식사에 불과했다.
이쯤 되면 나타날 법도 한데….
아직은 안 나오는 건가?
<주호> 생각했던 사람들이 안 보이네요.
<불멸> 아, 걔들?
<주호> 네, 전혀 안 보여요.
<불멸> 이번엔 못 볼 거야.
<주호> 그래요?
<불멸> 다들 레벨 올린다고 정신없다더라. 여기 참가도 안 했어.
<주호> 유일 아이템이 걸렸는데…….
<불멸> 아직 몇몇 빼고는 레벨이 정상 범위까지 못 올라왔어. 거의 몰아주기로 한두 명에게 집중하는 중이라. 순위 봤지? 아주 경험치를 싹 몰아줬드만. 그런 상황에서 여기 참가해 봐야 제대로 활약하지도 못해. 유일 아이템 하나 정도는 미련을 버렸을 거다. 준비가 덜 됐어. 아직은.
<주호> 그렇게 해도 되나요?
<불멸> 그 몇 명이 높은 레벨에서 낮은 애들 끌어줄 수 있으니… 그쪽이 레벨링에는 더 빨라. 한 명만 제대로 버텨주면 그쪽 사냥터를 금방 넘길 수 있고. 장비도 죄다 돈으로 사서 어려울 것도 없겠지. 중간에 네임드도 쉽게 잡을 테고.
<주호> 그건 꽤 피곤한 이야기네요.
<불멸> 만약, 걔들 이번에 끼어들었으면 이렇게 쉽게는 안 돼. 다 한 가닥 하는 놈들이라.
<주호> 일단 우리에게는 다행이네요.
이번에는 없다는 거군.
하긴 이쪽은 지금 없는 편이 좋겠지.
재중이 형만큼은 아니더라도 한 명, 한 명이 모두 실력자일 테니.
지금까지 상대한 어중이떠중이하고는 개념부터가 다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잿빛의 듀라한이 요새 내부를 헤집고 다니면서 상황이 급격하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우리가 상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성벽 위에 있던 연합 유저 중 꽤 다수가 성벽 수비를 포기하면서 요새 안쪽으로 뛰어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제대로 된 유저들인가?
딱 봐도 장비부터가 달랐다.
강화 역시 아주 잘 되어 있는 모습.
흔히 말하는 연합을 대표하는 유저들이 뛰어내리자 자연스럽게 다른 유저들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중 한 명의 유저에게 바로 눈이 갔다.
태양?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붉은 머리를 빳빳하게 세운 남성 유저.
거기다 온 장비를 시뻘겋게 칠해놓아 누가 봐도 저 사람의 성향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취향이 너무 한쪽으로 몰려 있는데?
눈이 아플 정도의 빨간색이라.
저 사람을 어디서 봤더라…….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분명히 아이디가 기억이….
그때, 내 화면을 보고 있던 전사 형이 알려주었다.
<방패전사> 저 사람 개인 랭킹 10위. 태양.
<주호> 아, 어디서 봤나 했어요.
분명히 10위권 랭킹 말미에 태양이 있었다.
불새 길드였나?
<주호> 저쪽은 프로 아니죠?
<방패전사> 어, 아니야.
<주호> 불새라고 길드 알아요?
<방패전사> 흐음, 전통의 강자쯤 되려나? 얼마 전부터 치고 올라오기 시작하던데… 아마 저 유저 덕분일걸. 비슷한 규모의 미르 길드하고는 완전 앙숙이고, 예전에 킹덤 길드하고도 쟁 한 적이 있어. 예전 동굴 막힐 때 드랍 아이템 때문에. 저쪽도 사방에 적이 좀 많긴 해.
단순히 물어보기만 했는데 전사 형이 불새 길드의 이력을 쫙 읊어주었다.
대체 저걸 어떻게 다 기억하는 건지.
아마 킹덤 길드나 미르 길드에 대해서 물어도 줄줄 다 말해주지 않을까?
이런 점에서는 정말 전사 형을 존경하는 편이었다.
난 절대로 저렇게 못 할 테니.
<주호> 자금이 꽤 되나 봐요.
<방패전사> 어, 불새 길드를 중심으로 많이 뭉쳤지. 그만큼 재력도 있고. 얼마 전부터 다른 길드 유저를 꽤 많이 포섭했더라. 심지어 본인이 잘하기도 해. 그리고 단순히 잘한다는 느낌 정도는 넘어섰을 거다. 어설프게 잘하는 정도로는 10위권을 절대로 못 찍을 테니.
본인이 돈도 많고 잘하기까지 한다라….
예전에 봤던 해원과는 느낌 자체가 달랐다.
해원은 돈은 많지만 실제 본인이 게임 자체를 너무 못 했다.
일단 조금 지켜볼까?
과연 다른 순위권 유저는 어떻게 게임을 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성벽에서 떨어지자마자 태양이 굳은 표정으로 오더를 내렸다.
“메인탱, 앞에 붙고. 2, 3, 4탱 대기. 마력 빠지면 바로 빠지고 보조 들어간다. 어글 승계 빗나가지 않게 잘 보고. 힐러 라인들 실수하지 마. 체력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질 거다. 딜러들 대기! 어글 잡히면 최소한의 딜로 시작해 점점 딜을 올린다. 절대 듀라한의 무기와 맞부딪치지 마라.”
다른 연합의 유저도 주변에 보였지만 듀라한을 상대하는 작업은 전부 불새 길드의 유저로 꾸렸다.
그만큼 자신 있다는 건가?
불새 길드에서 메인 탱커로 나선 유저가 바로 어글 스킬을 사용해 본인에게 듀라한을 붙였다.
랭킹이 몇 위인지 모르겠는데 듀라한을 직접 상대하는 모습을 보니 생각 이상으로 높을지도….
그런데 그때 그 유저가 세 가지 웨폰을 동시에 불러내 무기에 입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듀라한과 맞부딪쳤는데 무기가 부서지지 않았고.
저건.
트리플 캐스팅?
아니, 생각해 보면 전사 형이 싸우는 영상이 사방에 퍼졌으니 거기서 해법을 얻은 것일지도.
트리플 캐스팅을 얻을 수 있는 경로는 다양했다.
그중 미치광이 리치가 이벤트 형식으로 엄청나게 잡혔으니 저 스킬을 가지고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빨리 따라 할 줄이야.
마력 소모가 심해, 얼마 쓰지 못하고 탱들이 떨어져 나갔는데 그 틈을 바로 다른 탱이 붙어서 커버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일사불란하게 힐을 보조 탱에게 몰아주는 모습까지.
탱의 장비가 좋지 않아 체력이 엄청나게 빠지면 그걸 양으로 채워 버렸다.
최대한 힐로 버텨본다는 건가?
아주 연습이 잘 되어 있는 그런 느낌에 괜스레 혀를 찼다.
이건 생각 이상인데?
겨우 버티지만, 그게 또 쓰러지지는 않았다.
보고 있던 전사 형도 감탄한 듯 말했다.
<방패전사> 탱커 네 명 전부 다 반응이 좋아. 힐도 적재적소에 잘 들어오고. 쉽게 죽진 않겠어. 저런 식으로 탱들 마력 채우고 다시 들어가는 식이면 굉장히 오래 버티겠는데.
<주호> 무턱대고 요새를 먹은 게 아니었네요.
<방패전사> 저거 완전 듀라한 맞춤형이야. 아마 우릴 보고 따라 한 것 같다.
<주호> 이건 문제가 되겠네요.
철저하게 소수의 엘리트로 버티면서 주변에 유저들을 싹 치워 버렸다.
듀라한이 레벨업을 더 못하도록.
흐음.
어쩐다.
이대로 요새가 안정화가 되면 생각했던 일이 다 막히게 되는데…….
<주호> 안 되겠어요. 개입 좀 할게요.
<방패전사> 어떻게 하려고?
<주호> 깽판요.
듀라한이 페이즈가 넘어가서 더 강해지길 기다리다간 너무 늦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은신을 한 상태로 빡빡하게 레이드를 하는 전투 장소로 다가갔다.
보자.
이왕 하는 것 확실하게.
은신을 한 상태에서 바로 스킬을 하나 꺼내 들었다.
전에 듀라한을 죽이고 얻은 그 스킬.
차징이 다 되자 바로 현재 대기를 하던 탱들의 머리를 겨누고 스킬을 시전했다.
【 데스 버스트! 】
콰아아아!
거리가 충분히 떨어져 있어도 워낙 공격 범위가 좋아 일자로 쭉쭉 뻗어 나간 데스 버스트가 보조 탱들을 그대로 밀고 나가 순식간에 삭제시켜 버렸다.
파워 죽이는데?
짜릿한 손맛은 없지만 확연하게 크리티컬이 터지면서 바로 은신의 쿨이 돌아왔다.
【 은신! 】
내가 그 자리에서 다시 숨어버리자 유저들이 두리번거렸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보조 탱이 전부 죽었어!”
“대체 뭐에 죽은 거야?!”
“듀라한 스킬 아냐?”
“젠장! 전부 튀어!”
보조 탱들이 전부 죽자 메인을 보던 탱도 결국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듀라한에 썰려 죽음의 빛으로 변했다.
쿠아아아!
그리고 듀라한이 날뛰면서 요새 안이 다시 혼란에 빠져들었다.
심지어 성벽까지 뛰어 올라가 난동을 부리자 성벽 위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방패전사> 잘한다! 듀라한!
<이쁜소녀> 와, 오빠 진짜 사악해요!
<막내별> 악마가 울고 가겠네요. 정말.
그 말을 듣고는 그냥 웃기만 했다.
악마면 어때.
요새만 먹으면 되지.
<주호> 그럼, 레티어스 요새를 슬슬 접수해볼까요?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