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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542화 (535/1,404)
  • #542화 마지막 요새 (3)

    재중이 형은 이 ‘감염’ 스킬을 처음 보자마자 주호에게는 최악이겠네, 라는 말을 했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감염이 걸리면 정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재중이 형의 예측이 확실히 옳다.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아군을 공격할 수 없는 노릇이고.

    이런 연유로 축복받은 페가수스를 얻기 전엔 최대한 피해 다녔다.

    다만, 지금은 다르다.

    내 주변엔 오직 몬스터뿐.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전부 몬스터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이야기는 많이 달라진다.

    체력을 끌어올 수 있는 아주 좋은 환경이 만들어지니까.

    아무 거리낌 없이 몬스터를 공격해 체력을 뽑아오면 그만이다.

    물론, 여차하면 내 쪽이 먼저 공격당해 죽을 순 있다.

    그래서 생각한 것.

    르아 카르테의 옵션.

    하이딩 블레이드의 옵션.

    그리고, 착용한 장비들의 옵션.

    이러한 옵션들이 이런 미친 짓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몬스터에게 크리티컬 공격을 해서 은신을 초기화시킨다.

    그다음 잿빛의 듀라한을 공격해 내게 시선을 끌어오는 것이 두 번째.

    그러면 다시 주변에 있는 몬스터를 공격해 체력과 함께 은신 초기화.

    어찌 보면 사기라 할 수 있는 조합이었다.

    아니, 사기가 맞긴 하네.

    전사 형과 재중이 형, 이쁜소녀가 동시에 달려들어서 묶어두었던 잿빛의 듀라한이 지금은 갈피를 못 잡고 허공에 창을 휘두를 뿐이었다.

    이제 상황은 매우 심플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듀라한이 먼저 죽느냐.

    내 쪽이 먼저 죽느냐.

    일종의 데스 매치.

    한쪽의 체력이 완벽히 사라지면 게임은 끝나게 된다.

    아마 꽤 오랜 시간을 이렇게 해야 할지도.

    그렇게 ‘감염’이 퍼지면서 잿빛의 듀라한과 주변 몬스터들 체력이 서서히 빠지기 시작했고, 체력이 적은 일반 몬스터들은 죽음의 빛으로 변하기까지 했다.

    예상대로 몬스터들 역시 이 감염 스킬에는 취약했다.

    딱히 힐을 걸어줄 아군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런데 작은 문제가 발생했다.

    당연히 들어올 줄 알았던 경험치가 전혀 들어오지 않는 것.

    챠밍과 파티를 맺고 있어서 분명히 경험치가 들어올 텐데?

    일단 챠밍이 ‘감염’ 스킬로 공격을 했고, 몬스터가 죽었기에 당연히 그렇게 생각을 했다.

    <주호> 경험치 들어왔어?

    <챠밍> 전혀요. 감염으로 죽은 몬스터는 경험치가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아요.

    감염 스킬에 이런 허점이 있다니…….

    거기다 몬스터를 죽였을 때, 얻을 수 있는 경계 수호자의 증표 역시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가 죽인 것으로 인정이 안 되는 상황이라고 보면 되려나.

    이거 영 밑지는 장사 아냐?

    이렇게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정작 중요한 경험치와 증표가 없다.

    왠지 악용하지 말라고 미리 설정한 것 같기도 하고…….

    감염 스킬은 사용하기에 따라 일대를 초토화시킬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 일반 몬스터에게 감염 스킬을 쓰기엔 단발성이란 문제가 존재했다.

    그렇기에 체력이 많은 듀라한에게 걸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건 이대로 가야 해.

    현재 바이탄 요새의 유저들에게 더 위협적인 것은 이 몬스터들이니까.

    그렇게 크리티컬과 은신을 반복하면서 잿빛의 듀라한 상태를 계속 살폈다.

    일단 감염 스킬은 무한이 아니다.

    한 번 걸어두었다고 계속 주변에 감염을 전파하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뭐, 일정 시간 파급력은 크겠으나 그것으로 끝이다.

    요새와는 전혀 다른 상황.

    얼마 뒤, 잿빛의 듀라한에게서 감염 상태가 사라지자 챠밍에게 바로 신호를 보냈다.

    <주호> 감염 쿨 돌아왔어?

    <챠밍> 네, 지금 다시 걸게요!

    위를 바라보자 쿨타임이 돌아왔는지 챠밍이 감염 마법을 다시 잿빛의 듀라한에게 걸었다.

    【 인펙션! 】

    또다시 듀라한에게 감염이 걸리고 다시 주변 몬스터들에게 전이되면서 몬스터들이 픽픽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누가 봐도 사기 같은 상황.

    그렇게 노력한 보람은 있는지 듀라한 근처의 악마형 몬스터들이 쓰러져 나가자 채팅창이 난리가 났다.

    -와, 저게 대체 뭐냐!

    -세상에! 듀라한 주변 녹는 거 봐.

    -미쳤네. 저거 뭐냐?

    -저거 혹시 그거 아님?

    -맞네. 아까 네임드 하나 잡드만.

    -그 와중에 주호 무쌍 찍네….

    -아놔, 저 새낀 정말 미쳤어ㅋㅋ.

    -혼자 저게 가능하다고??

    -난 쫄려서 못함. 스쳐도 사망인데 저렇게 어떻게 해….

    -진짜 우리 편이라서 개꿀.

    -어찌 됐건 주호 난 응원한다!

    -주호 가즈아아!

    바이탄 요새 성벽에서 유저들이 환호를 하는 것을 보고는 자연스럽게 입가에 웃음이 지어졌다.

    같이 역경을 이겨낸 전우애쯤 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주호> 이거 참, 환호가 과한데?

    <챠밍> 어때요. 가끔 이런 것도 좋잖아요. 다들 희망이 보이니까.

    챠밍 말대로 우리가 몬스터들을 녹이자 확실히 상황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아예 한 장소를 초토화시키고 있으니.

    위에서 바라보면 케이크 한 곳을 숟가락으로 푹, 퍼낸 것 같은 모습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그때 재중이 형에게서 연락이 왔다.

    <불멸> 이야, 그거 완전 사기잖아?

    <주호> 이러면 할 만하죠?

    <불멸> 그래, 그렇게만 녹여주면 충분해. 너희 덕분에 성벽으로 들어오는 압박이 확 줄어들었어.

    우리가 잿빛의 듀라한을 바이탄 요새 바깥으로 끌고 나오자 재중이 형뿐만 아니라 전사 형과 이쁜소녀, 나르샤 누나, 막내별까지 전부 성벽 위로 올라와 성벽을 사수하는 데 힘을 보태는 중이었다.

    <불멸> 잘하면 듀라한도 잡을 수 있겠는데?

    <주호> 네, 이 녀석은 오늘 여기서 못 살아나가요.

    전사 형도 옆에 있다가 말을 전달했다.

    <방패전사> 그렇게 개고생을 해서 묶어둔 듀라한이 이렇게 쉽게…….

    <주호> 에이, 형! 이것도 생각보다 어려워요. 실수하면 은신이 풀리니까.

    <방패전사> 그래, 조심하고. 여차하면 우리도 뛰어 내려간다.

    그렇게 전사 형과 대화를 마치고 다시 듀라한에게 집중하면서 계속 주변 몬스터들을 녹여갔다.

    마치 지우개로 지우듯.

    아주 깔끔하게.

    그 이후로는 동쪽 성벽부터 해서 북쪽까지 쭉 일자로 밀고 올라갔다.

    체력이 그나마 많은 블랙 맘모스나 암흑 골렘 같은 경우 잡는데 조금 오래 걸리긴 했으나 역시 감염 스킬에 녹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중대형 몬스터들까지 녹이자 바이탄 성벽에 대한 부담이 확 줄었고.

    그리고 수많은 유저와 NPC가 악을 쓰면서 최선을 다하자 어느덧 상황이 조금씩 역전되기 시작했다.

    휴. 드디어 밀어냈어.

    요새전은 한쪽이 압도적으로 강하면 다른 한쪽은 형편없이 밀리게 되어 있다.

    세력의 차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으니까.

    그런데 이 차이가 어느 정도 좁혀지더니 이젠 반대로 유저들의 세력이 더 많아지는 결과까지 변해 버렸다.

    그간 수세로 성벽에 의지해서 방어만 하던 유저와 NPC들도 이젠 온전히 공격에 나서는 모습.

    그때, 변화가 시작됐다.

    <챠밍> 오빠, 성벽에서 사람들이 내려와요!

    <주호> 아, 나도 보인다.

    몬스터 대군이 네임드를 끼고 압도적으로 밀어붙일 때야 막기가 힘들지, 일정 수준 이하로 숫자가 적어지면 그저 유저들의 경험치다.

    그리고 그런 남아 있는 몬스터들을 확실히 잡기 위해 아예 성문이 열리면서 유저들이 바깥으로 뛰쳐나오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감염 스킬을 사용하는 것은 슬슬 부담이었다.

    <주호> 일단 감염은 그만해도 될 것 같아.

    <챠밍> 네, 그럼 내려갈게요.

    고개를 돌려 듀라한을 보는데 신체를 감싸고 있던 검은색 갑옷이 거의 부서져 그 사이로 이전보다 훨씬 많은 기운이 흩어지는 중이고.

    듀라한은 거의 체력이 바닥난 건가?

    감염 스킬이 깎은 체력이 상상 이상이라는 증거.

    중간에 두 번 상태가 변해서 아마 지금이 마지막일 것이라 예측이 되었다.

    그동안 은신과 감염으로 편하게 딜을 했는데 이젠 정말 정면에서 붙어야 했다.

    그 사이 성벽에서 뛰어내린 재중이 형과 전사 형을 비롯한 우리 팀은 곧장 내 쪽으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중간에 몬스터들이 거의 없어서 큰 문제는 없었고.

    그때 갑자기 듀라한의 창에 엄청난 보랏빛 기운이 몰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패턴.

    마지막에 달한 순간 쓰는 스킬이라 그런지 듀라한의 덩치보다 거의 대여섯 배에 달하는 규모로 기운을 끌어모았다.

    설마 아마겟돈 같은 미친 스킬은 아니겠지?

    <챠밍> 오빠! 조심해요!

    챠밍도 이상한 것을 느꼈는지 내게 경고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겟돈 수준의 기술이라면 이 정도 거리에서는 이쪽이 당할 수 있었다.

    칫. 할 수 없나.

    <주호> 우리가 먼저 친다!

    <챠밍> 네! 준비 중이에요!

    챠밍은 페가수스 위에서 고르곤을 잡고 얻은 기가 라이트닝을 빠르게 영창했다.

    비록 풀-차징은 안 되어 위력은 떨어지겠지만…….

    같은 급 네임드의 스킬이라면!

    충분히 통할 것이다.

    【 기가 라이트닝! 】

    챠밍의 앞에 형성된 거대한 마법진에서 강력한 뇌전이 생성되더니 그대로 수백 발의 뇌전이 거침없이 쏘아지며 잿빛의 듀라한을 수도 없이 강타했다.

    콰지지지직!!

    차마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환한 뇌전이 듀라한의 몸을 계속 두드리면서 남아 있던 방어구를 깨부수기 시작했다.

    단순한 위력 면에서 아마겟돈에 절대 꿀리지 않을 터.

    그런데 그 뇌전 속에서도 잿빛의 듀라한의 기술은 그대로 완성되었다.

    그것도 챠밍이 타고 있는 페가수스를 향해.

    칫, 이 정도로는 캔슬이 안 되는 건가.

    아마 용격을 사용하더라도 캔슬시킬 수 없을 것 같아 준비하고 있던 용격을 바로 취소시킨 뒤, 빠르게 듀라한에게 달려 나갔다.

    무슨 스킬인지 몰라도 챠밍이 맞으면 아마 한 번에 끝날 것이다.

    차징이 끝난 건지 듀라한이 챠밍을 향해 크게 창을 휘두르는 순간.

    【 수룡화! 】

    바로 수룡화로 신체를 바꾸고 듀라한의 정면으로 뛰어가 내장되어 있는 스킬 중 하나를 꺼내 들고는 녀석의 창을 향해 시전했다.

    【 스케일 미러! 】

    내 팔에 푸른색 투명한 비늘들이 생성되면서 듀라한이 쏘아낸 거대하게 응측된 보랏빛 기운을 그대로 듀라한에게 반사했다.

    다만, 전부 반사할 수 없었는지 절반은 반사되고 절반은 내 몸을 그대로 덮쳐 왔다.

    스케일 미러로도 전부 반사가 안 되는 건가?!

    《 황금의 아물렛이 적용됩니다. 》

    그 순간 착용하고 있던 목걸이가 작용하면서 내 몸을 강타한 기운은 그대로 소멸시켜 버렸다.

    절반인데도 이게 발동할 정도의 위력이었다고?

    놀란 마음을 누르면서 반사적으로 드래곤 슬레이어를 연달아 휘둘렀다.

    【 용격! 】

    그렇게 듀라한의 최종 기술과 연이어 날아간 용격이 동시에 듀라한의 몸을 강타하면서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어났다.

    콰아아아앙!!

    강력한 폭발에 내 몸이 튕겨 나가면서도 눈을 계속 듀라한을 쫓고 있었다.

    이제 좀 죽어!

    그런 마음이 통했을까.

    바로 시스템 메시지가 울리기 시작했다.

    《 원한의 기사, 잿빛의 듀라한이 사망했습니다. 》

    《 가르시아 제국 내의 모든 NPC가 이 소식을 듣습니다. 》

    《 세 요새의 NPC들의 친밀도가 상승합니다. 》

    됐어!

    체력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마지막 노림수가 제대로 통한 모양이었다.

    그때, 폭발에 튕겨 날아가는 내 몸이 덜컥하고 멈췄다.

    “잡았어요!”

    어느새 페가수스를 타고 날아온 챠밍이 내 몸을 붙들었다.

    “고생했어.”

    “오빠가 다 했죠. 진짜 수고했어요.”

    그렇게 듀라한까지 잡아내자 유저들의 격한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정말 끝인가.

    마지막 요새를 정말 지켜내 버렸다.

    그 순간 밀려오는 생각.

    우린 이렇게 개고생하면서 막았는데, 텅텅 빈 요새를 먹은 놈들은 도대체 뭐 하는 놈들일까, 라는 생각을 말이다.

    하아, 너무 억울해서 이대로는 못 넘어가지.

    그리고 챠밍을 바라보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아, 모르겠다. 그냥 다른 요새에 깽판 좀 칠래.”

    공짜로 요새를 먹겠다고?

    절대 그 꼴은 못 봐!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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