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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541화 (534/1,404)

#541화 마지막 요새 (2)

흑장로 타리안을 잡고 나온 스킬북 중 계속 눈이 갔던 녀석을 꺼내 들었다.

『 인펙션 』

요새 하나를 무너뜨리는 것도 부족해 이곳에서도 무지막지하게 써댄 그 스킬.

내 생각, 아니 스킬북의 이름이 ‘사전’ 그대로의 뜻이라면 이건 상황을 완벽하게 반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히든카드가 될 것이다.

묘하게 들뜬 나에게 이슬두잔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 스킬이 답인가요?”

“아마도!”

스칼렛도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고작 스킬 하나로 지금 이 상황을 뒤집는다고요? 아무리 네임드 스킬이라지만…… 저 밖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몬스터가 있는데… 스킬 하나로 어떻게 할 수 있을 규모가 한참 지났다고요.”

살짝 열이 오르고, 당황한 스칼렛의 표정을 보는 건 처음이려나?

항상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스칼렛에게 이런 상황은 이해하기 힘들지 모른다.

저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요새 방어전은 이른바 물량 싸움이다.

규모와 규모가 만나는 전투의 연속.

예전부터 전해져 오지 않았던가.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보급이라고.

현재 바이탄 요새는 그런 보급이 막 끝난 상황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지금부턴 아무것도 없이 전투를 치를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누가 보더라도 지금은 승산이 없다.

물약이 떨어졌다는 소식은 곧 요새 전체로 퍼져나갔다.

-물약 다 떨어졌다!

-미친, 벌써?!

-벌써는 무슨 벌써야. 아까부터 간당간당했어.

-그러게, 그만큼 사다 쓰는데 남아 있는 것이 이상하지.

-이렇게 오래 싸운 적도 없잖아.

-아, 젠장. 네임드 잡혀서 분위기 좋았는데 빠져야 한다고?

-진짜 어쩌지? 다른 요새에서 조달하면 안 됨?!

-후, 말이 되는 소리 좀 하고… 망했네…….

반응은 역시나.

그간 물약과 성벽, 그리고 힐로 버티면서 죽으면 부활해서 빠르게 메꾸는 식으로 견뎠는데 이젠 그것조차 힘들어졌다.

가장 기본이 되었던 물약이 떨어졌고, 그것을 조달할 곳은 너무 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부 짐을 싸서 도망을 가야 할 판.

그렇게 시작된 동요는 요새 내부 전체로 좀 더 크고 빠르게 퍼졌다.

이슬두잔이 그런 분위기를 읽고 고개를 저었다.

“정말 분위기가 안 좋네요. 이래서야 끝까지 버틸 수 있을까…….”

스칼렛은 답지 않게 골똘히 생각하더니 말을 꺼냈다.

“여차하면 빠질 수 있게 준비 좀 할게요. 여기서 템 떨구면 정말 손해가 커지거든요. 죄송해요.”

“괜찮아요. 이게 통하지 않으면 저희도 빠르게 빼야죠.”

내 말에 스칼렛과 이슬두잔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길드원들에게 뭔가를 전달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직 스킬을 써보고 전이라 확실하게 된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이렇게 하는 것이 맞겠지.

무작정 버텨달라고 하는 것은 당연히 무리였다.

그렇게 둘을 보내고 바로 우리 팀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곳엔 전사 형과 재중이 형, 이쁜소녀가 힘겹게 잿빛의 듀라한을 막아내고 있었고.

“버틸 만해요?”

“그럭저럭, 이라고 말하기엔 형편이 좋진 않지?”

내 말에 재중이 형이 피식 웃으면서도 자리는 뜨지 못했다.

그만큼 여유가 없다는 뜻.

단 셋이서 지금까지 버텨온 것만 해도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거의 테인 공작에게 버티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었으니까.

그런 셋 사이로 들어가 공격에 가세했다.

르아 카르테와 하이딩 블레이드로 잠시 듀라한의 시선을 끌어주자 전사 형과 이쁜소녀가 겨우 숨통이 트이는 모습이었다.

확실히 한계에 가까웠구나.

만약 방어구에 관련된 옵션이 있었다면 이 정도까지 무리를 하진 않았을 텐데…… 지금은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평소 막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집중해서 전투를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전사 형이 가장 빨리 퍼지고 그 뒤로 이쁜소녀도 부하가 걸린 모양이었다.

중간에 재중이 형이 없었으면 무너져도 벌써 무너졌을 터.

재중이 형도 알게 모르게 숨을 내쉬는 것을 봐서는 피곤이 많이 쌓인 것 같았고.

그래도 재중이 형은 여유가 있는지 내게 물었다.

“어떻게 녀석을 잡긴 했네?”

“네, 정말 화력으로 찍어 눌렀어요. 생각보다 방어가 약하더라고요.”

“그나마 좋은 소식인가. 물약은 어떻게 된 거야?”

“이슬두잔 님이 확인하고 왔는데 다 떨어졌다네요.”

“벌써 마지막인가. 대략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다만.”

그러면서 재중이 형이 멀리 있는 성벽을 슬쩍 올려다보더니 곧장 시선을 거두었다.

“이거 참… 피곤해지겠는데.”

이건 보급품이 다 떨어진 장수의 그런 눈빛이려나.

그리곤 눈앞에 있는 잿빛의 듀라한을 바라보았다.

“이 녀석도 운이 좋군. 여기서는 못 잡겠어.”

그런 재중이 형을 보면서 말했다.

“아뇨, 잡을 수 있어요.”

내 단호한 말에 전사 형을 비롯한 우리 팀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재중이 형도 마찬가지.

“방법이 있어?”

“확실하진 않아요. 하지만 시도할 만한 방법은 있어요. 좀 무리를 하긴 해야겠지만.”

“오키, 너무 늦기 전에 하자. 겁나 힘들다.”

“예, 그럼 챠밍 좀 빌려 갈게요.”

“뭐 그 정도야. 막내별도 있… 고.”

“그럼.”

재중이 형이 잿빛의 듀라한의 어글을 빠르게 잡자 곧장 전투 지역을 벗어났다.

그리고 멀리서 힐을 주던 챠밍과 막내별에게 다가갔다.

“챠밍 좀 빌려 갈게요.”

“네?”

어리둥절한 챠밍과 달리 막내별은 고개를 끄덕이며 좀 더 힐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챠밍을 옆으로 빼서 흑장로에게서 얻은 스킬북을 건네주었다.

“일단 배워.”

“이건?”

“흑장로에게서 나온 거야. 분배는 뭐. 나중에 어떻게든 되겠지.”

“네, 그럼 일단 익힐게요.”

보통 같이 레이드한 템을 일방적으로 사용하면 안 되겠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스칼렛과 이슬두잔에게 양해를 구했다.

챠밍이 인펙션 스킬북을 익히자 금빛이 둘러진 자주색 책자가 분해되더니 자줏빛 기운이 스물스물 챠밍 주위를 감싸기 시작했다.

“자, 그럼 이것도 받고.”

곧장 축복받은 페가수스까지 넘겨주었다.

“이것도 받아요?”

“응, 지금부터는 네가 타고 다녀야 하니까.”

“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챠밍을 보면서 미소지었다.

확실히 내가 타는 것보다 잘 어울리기는 하겠네.

다행히 탈것의 소유를 넘겨주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다.

“그리고 워프 스킬 있지?”

“아, 네. 있어요.”

“그거 시간의 서로 초기화시켜. 그리고 성벽 너머 좌표 대략적으로 찍을 수 있지?”

내 말에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챠밍의 표정이 급격히 변했다.

정말 놀란 표정으로.

역시 눈치 하나는 빠르다니까.

“설마, 아니죠?”

“아마, 네가 생각하는 게 맞을걸?”

내가 쥐여준 감염 마법과 축복받은 페가수스.

그리고 성벽 밖 좌표.

세 가지를 생각해 보면 한 가지 조합이 떠오르게 된다.

물론, 거의 미친 짓에 가깝겠지만.

챠밍도 그걸 아는지 저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것을 알면서도 바로 내가 하라는 대로 준비를 해줬다.

“자, 시간이 없어서 실례.”

내가 축복받은 페가수스에 챠밍의 허리를 잡아 위로 올려주자 챠밍이 귀여운 비명을 질렀다.

“꺅!”

그다음 챠밍의 뒤에 바로 올라탔다.

“그럼 가볼까?”

그대로 둘을 태운 페가수스가 우리 팀과 싸우고 있는 잿빛의 듀라한에게 달려 나갔다.

전사 형과 재중이 형, 이쁜소녀 할 것 없이 모두 고개를 돌려 우리를 바라보았고.

“이 녀석 좀 빌려 갈게요.”

내 말에 다들 황당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옆으로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 순간 듀라한에게 파고들어 르아 카르테로 휘둘러지는 창격을 막아내면서 다른 한 팔을 뻗어 잠시 멈춰 있던 창을 억지로 꽉 쥐고는 챠밍에게 외쳤다.

“지금!”

“네!”

【 워프! 】

미리 저장해두었던 위치로 워프가 되면서 나와 챠밍, 페가수스, 그리고 잿빛의 듀라한까지 동시에 성벽 바깥으로 워프가 되었다.

시야가 확 바뀌고 발밑에 우글거리는 몬스터들을 보자마자 바로 듀라한의 창을 손에서 놓아버렸다.

뭐, 놓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듀라한의 무게 때문에 알아서 떨어지겠지.

쿠웅!

그렇게 듀라한이 몬스터가 떼로 뭉쳐 있는 장소에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성벽을 지키던 유저들에게서 소란이 일어났고.

갑자기 공중에서 듀라한이 뚝 떨어지니까 당연한 건가?

“우왁! 뭐야?”

“어떻게 듀라한이 성벽 밖으로 이동함?”

“안에서 잡고 있던 것 아니었어?”

“어어? 주호도 바깥으로 나왔잖아?”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냐?”

성벽을 지키던 유저 대부분 성벽 바깥으로 시선을 두고 있었으니 변화를 빠르게 확인할 수 있었다.

“좀 더 높은 곳에서 떨어뜨릴 걸 그랬나?”

잠시 그런 생각을 했는데 딱히 듀라한에게 큰 피해는 주지 못했을 것 같아 바로 생각을 접었다.

곧장 페가수스를 챠밍에게 넘기고 르아 카르테와 하이딩 블레이드를 꺼내 들었다.

“정말 할 거예요?”

“응, 난 절대 저 녀석 안 놓쳐. 이 요새도 마찬가지고.”

“하아, 진짜.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걱정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신호하면 데리러 와. 나도 오래는 못 버티니까.”

“정말 못 말린다니까.”

챠밍이 포기하는 눈빛으로 잠시 한숨을 쉬다가 곧장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자, 그럼 시작한다. 내가 내려가면 바로 감염을 걸어.”

그리고 날아다니던 페가수스에서 곧장 아래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무려 몬스터가 가득한 전장 한가운데로.

【 은신! 】

내 모습이 사라짐과 동시에 페가수스 위에서 챠밍이 잿빛의 듀라한에게 스킬을 시전했다.

【 인펙션! 】

그러자 듀라한에게 감염이 걸리면서 갑자기 주변으로 몬스터들에게 감염이 싹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감염이 무서운 점.

주변에 아군이 많으면 많을수록.

서로가 서로를 감염시키면서 체력이 깎이는 속도가 빨라진다.

다른 말로 체력이 넘쳐나는 듀라한은 주변에 있는 몬스터들에게 전부 감염을 옮길 수 있고 이는 반대로 듀라한 역시 주변 몬스터들 때문에 피해를 보게 된다는 뜻이었다.

쿠론 요새의 성벽을 지키던 유저들이 속절없이 샤르르 녹아버렸던 이유이기도 하고.

지금 그 스킬이 듀라한에게 걸려 있다 보니까 듀라한은 죽지도 않고 계속 주변으로 감염을 옮겨버렸다.

일단 듀라한을 공격한 것은 챠밍이고 그렇기에 어글이 바로 페가수스에 있는 챠밍으로 옮겨가 버렸다.

그런데 챠밍을 공격할 수가 없으니 듀라한의 어글이 바로 풀리면서 성벽 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원래는 감염만 걸면 되는데 굳이 내가 이 몬스터 숲으로 뛰어내린 이유가 이것이다.

절대 저 듀라한이 요새 안으로 넘어가게 하면 안 되니까.

은신을 걸고 뛰어내리면서 곧장 르아 카르테와 하이딩 블레이드로 듀라한의 목을 찍었다.

카갸갹!

캬각!

두 번의 강력한 타격이 먹히자 듀라한이 휘청거리면서 곧바로 은신이 풀렸다.

하지만 나 역시 감염이 걸려서 체력이 깎여나가는 것이 보였고.

역시 힘든 싸움이다.

사실 그것도 그것이지만, 감염 때문에 은신이 통하지 않을 수 있어 바로 옆에 있는 가고일을 공격해 크리티컬을 띄우자 은신이 자연스럽게 초기화되었다.

이렇게 된다면 내게는 지금 은신을 초기화시킬 수없이 많은 몬스터가 주위에 존재한다.

또한 르아 카르테가 체력을 한껏 빨아들이면서 떨어지는 체력을 원상복구 해주었다.

공격을 받은 듀라한과 가고일이 동시에 나를 쳐다보자 씨익 웃어 보이고는 바로 초기화된 은신 스킬을 시전했다.

【 은신! 】

이제 확신한다.

충분히 이 감염 속에서도 버틸 수 있다는 것을.

“듀라한, 너하고 나. 누가 먼저 쓰러지나 한번 해보자고!”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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