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0화 마지막 요새 (1)
흑장로가 몬스터 사이에 숨어 있어야 하는 이유가 뭘까?
네임드라는 놈이 몬스터 사이에 숨는 건 지나가던 뭐가 웃을 일이다.
보통 네임드라 칭하는 녀석들은 본신의 능력이 강하기에 숨을 이유 자체가 없다.
오히려 자신을 뽐내려는 듯 더 날뛰기 마련이니까.
당장 잿빛의 듀라한만 봐도 몬스터보다 자신이 더 유저들을 썰어댄다.
지금까지 상대한 대다수의 네임드도 마찬가지고.
그걸 반대로 생각하면 이 흑장로란 녀석은 생각보다 약한 게 아닐까?
뭐, 네임드라 강할 순 있지만 그간 봐온 마법형 네임드들은 방어력과 체력만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약했다.
그것에 착안해 녀석을 잡아왔다.
헤아릴 수 없는 몬스터의 숲에서.
물론, 이것은 우연찮게 얻은 축복받은 페가수스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루에 한 번, 워프를 사용할 수 있으니까.
시간의 서를 돌려가면서까지 이용할 가치가 있는 엄청난 보물이라 말해도 입 아픈 녀석이다.
만약 축복받은 페가수스가 없었다면 이 작전을 아예 시작하지도 않았겠지.
거기다 흑장로의 감염 스킬을 중화할 수 있는 능력까지 보유하고 있었고.
지금 생각해 보면 페가수스 자체가 흑장로의 완벽한 카운터다.
그렇게 흑장로를 바이탄 요새 안쪽으로 옮겨오는 순간 기다리던 세 연합의 유저들이 일제히 공격을 퍼부었다.
각종 마법과 화살 공격의 폭발 이펙트가 사라지자 검은 로브가 곳곳이 찢긴 상태로 흑장로의 몸이 쓰러졌다.
온전히 다운된 상태.
예상했던 그대로 방어력과 체력이 약한 흑장로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준 것으로 보였다.
그걸 본 사장님이 바로 외쳤다.
“근접 다 달려들어! 원거리들은 다시 차징 시작하고!!”
사장님의 오더에 미리 대기하던 근접 공격수들이 일제히 흑장로에게 뛰어들었다.
보통 상황이라면 이렇게까지 앞뒤 가리지 않고 극딜을 하진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부족한 시간 때문에 극심한 무리를 해서라도 흑장로를 빠르게 잡아낼 필요가 있었다.
잿빛의 듀라한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공략을 하면 절대 안 된다.
무작위로 어글이 이리저리 튀기 시작하면 잿빛의 듀라한의 강력한 공격을 막아낼 만한 유저가 거의 없었으니까.
거기다 단단한 방어력과 체력 때문에 다운을 시키는 일도 쉽지 않고.
반대로 흑장로는 이런 점에서 꽤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다운되어 있는 흑장로에 최강, 달, 치맥 길드의 유저들이 개떼로 달라붙어서 폭딜을 넣자 다시 한 번 흑장로의 몸이 들썩거렸다.
그간 드래곤 구역에서 최상위급 아이템들을 구해놓았기에 깡딜 하나만은 우리 연합이 최고였다.
비록 옵션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해도 깡딜과 쪽수로 밀어붙이니 흑장로의 약한 방어를 제법 빠르게 깎아내릴 수 있었다.
달 길드 유저들에게 극딜을 맡기고 후방에서 마법을 차징하던 스칼렛이 눈빛을 빛내면서 내게 말했다.
“정말 방어가 엄청나게 약하네요. 네임드 답지 않게.”
이미 잿빛의 듀라한 같은 근접형 네임드를 옆에서 지켜본 스칼렛에게는 이 흑장로의 방어가 너무 약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네, 특히 물리 방어 쪽은 더.”
초반에 마법으로 다운시켰던 것 이상으로 현재 유저들의 공격이 잘 먹히는 중이었다.
게다가 요즘 제대로 레이드를 할 일이 없어서 그런지 반가운 얼굴이 너무나 잘 보였다.
프로인 수호, 최종병기 형을 비롯해 발키리 아주머니, 현역여대생, 천둥 할 것 없이 정신없이 극딜을 하고 있었다.
달 길드 쪽에서도 칼과 아로하가 길드원들의 도움을 받으며 혼신을 다한 빡딜을 넣었고.
그렇게 계속 당하다 보니 전신을 덮고 있던 검은 색 로브가 더욱 많이 찢어지면서 그 사이로 검은 기운이 넘실넘실 흘러나왔다.
온전히 몸을 감추던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
그때 로브 속에 감춰진 흑장로의 눈에서 새빨간 안광이 새어 나오자,
폭딜을 넣던 수호 형이 급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딜 중지! 뒤로 빠져!”
이건 근접 유저들에게 딜을 그만하라는 신호.
아니니 다를까.
흑장로가 서서히 몸을 들어 올리면서 두 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그러자 흑장로를 중심으로 자주색의 마법진이 바닥에 크게 생성되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뭔가를 쓰려는 건가?
그 모습을 본 사장님도 흑장로가 스킬을 온전히 쏘게끔 마냥 기다려주지는 않았다.
“지금 전부 쏴!”
근딜들이 공격하는 동안 차징을 하고 있던 원거리 유저들이 사장님의 신호에 일제히 차징하던 마법을 풀어냈다.
그렇게 수십 발에 달하는 풀 차징된 갖가지 마법과 공격이 동시에 흑장로를 향해 쏘아져 날아갔다.
콰앙!
콰콰앙!
쿠앙!
워낙 많은 종류의 마법이 터져 나가서 눈이 부실 정도라 순간 흑장로를 시야에서 놓쳐 버렸다.
캔슬이 된 건가?
여차하면 앞으로 뛰쳐나가기 위해 자세를 잡았는데 이내 폭발 이펙트가 사라지면서 흑장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본 유저들이 화들짝 놀라서 외쳤다.
“계속 시전하고 있잖아?!”
“다들 물러서!”
“근접들 들어가지 마!”
원거리 딜러들이 딜을 하고 난 뒤, 바로 뛰어들려던 유저들이 일제히 제자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흑장로의 모습을 보면 분명히 피해를 입긴 했다.
거의 무방비에서 맞은 공격이라 로브가 더욱 거칠게 찢어져 있었고.
그런데 캔슬조차 안 돼?
사장님의 신호에 같이 마법을 날렸던 스칼렛의 표정이 바로 구겨졌다.
“역시 마법 방어력은 상당하네요. 캔슬 될 줄 알았는데.”
캔슬조차 안 되는 일종의 필살기인가?
그간 경험으로 이런 형식의 마법은 정말 위력이 강하다.
스칼렛도 그걸 아는지 언제든지 몸을 뺄 수 있도록 다른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고.
바닥을 돌아가던 마법진의 기운들이 흑장로에게 모여들더니 들어 올렸던 흑장로가 두 팔을 바닥을 향해 크게 휘둘렀다.
그리고 흑장로의 전신에서 터져 나온 마법.
【 아마겟돈! 】
그 순간 엄청난 자주색의 파동이 빛을 발하더니 사방전후 할 것 없이 흑장로가 딛고 있던 땅까지 싹 녹이면서 주위로 터져나갔다.
콰아아아!!
특유의 거친 파동과 함께 바닥부터 녹여가며 마법이 뻗어 나오자 흑장로를 포위하듯 자리를 잡고 있던 세 길드의 유저들 모두 경악하면서 뒤로 도망쳤다.
“전부 피해!”
“뒤로 빠져!”
“움직이라고!”
하지만 마법이 뻗어 나오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건물들까지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사라지며 완전히 주변을 잠식했다.
워낙 빠르게 퍼져 가까이 있던 근접 딜러 중 다수가 몸이 녹으면서 그 자리에서 죽음의 빛으로 사라져 버렸다.
체력이 눈 녹듯이 녹아 사라지는 강력한 마법.
겨우 범위 바깥으로 빠져 나온 유저들이 다들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 위력에 이런 범위라고?
그동안의 경험으로 봤을 때 땅을 통째로 녹일 정로의 위력이라면 드래곤 브레스와 거의 동급의 위력이라고 보면 된다.
지형을 녹여버릴 정도의 공격력.
거기다 범위가 너무 넓었다.
일자로 쭉 밀고 나가는 브레스는 옆으로 피하기라도 하지.
이런 마법은 가까이 있다가 당하면 도저히 피하거나 튕겨낼 방법조차 없다.
이 광범위한 마법에 성벽 위에 있던 유저들도 고개를 돌려 돌아볼 만큼 깜짝 놀라 외쳤다.
“대체 저게 뭐야?”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듀라한?”
“아니, 좀 전에 다른 네임드 하나 나타났는데?”
“그럼 안쪽 다 당한 것 아냐?”
“아, 미치겠네. 겨우 막고 있구만.”
네임드가 하나 더 들어온 상황을 제대로 인지한 유저들도 있었고, 아닌 유저들도 있었는데 둘 다 황당해하기는 마찬가지.
요새 중앙의 건물 몇 개를 동시에 날려 버릴 정도의 위력이었으니.
“다들 살아 있어?!”
“죽은 사람 체크해!”
“와씨, 광역기 위력 미쳤네.”
“빨리 진형 다시 잡아!”
“죽은 애들 부활해서 튀어오라고 해!”
“어글부터 가져와!”
우리 쪽 연합도 잠시 멈칫했지만 다들 경험이 많아서 그런지 크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수호 형은 살아 있나?
가장 방어력이 좋은 전사 형을 빼면 그 다음이 수호 형이라 자연스럽게 수호 형부터 찾게 되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 눈치를 빨리 채고 빠져나와 다시 흑장로에게 달려들어 바로 어글을 붙들고 있었다.
이쪽은 어떻게든 됐나.
처음 보는 패턴이라 꽤 많이 당했음에도 진형은 무너지지 않고 잘 버텨주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다른 쪽도 살폈다.
멀리서 잿빛의 듀라한을 상대하던 전사 형과 재중이 형도 여차하면 달려올 생각으로 보였는데 진형이 유지가 되자 다시 잿빛의 듀라한 쪽에 집중하는 모양새였다.
역시 두 개의 네임드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
하나라도 빨리 정리를 해야 한다.
“지금부터는 전력으로 갈게요.”
그러면서 착용하고 있던 목걸이를 매만졌다.
한 번의 목숨은 여벌로 있으니 해볼 만해.
방금처럼 예상치 못한 패턴이 나온다고 해도 죽지는 않을 터.
거기다 믿는 구석도 하나 더 있었다.
다시 마법을 차징하는 스칼렛을 뒤로 한 채 메인 탱을 보고 있는 수호 형 옆으로 달려들었다.
“왔냐?”
“네, 이제부터는 제대로 할게요. 패턴도 볼 만큼 봤고.”
수호 형이 흑장로의 시선을 끄는 동안 바로 숨어들었다.
【 은신! 】
녀석도 인식하지 못하려나?
그렇게 잠시 옆을 서성이는데 흑장로 역시 은신을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건 좋은 소식인데.
바로 후방으로 들어가 흑장로의 목을 르아 카르테와 하이딩 블레이드로 베어냈다.
서걱!
푸욱!
손맛이 완전 다른데?
완벽한 크리티컬.
잿빛의 듀라한만큼 방어가 강하지 않아 한 방, 한 방이 아주 강력하게 들어갔다.
흑장로가 바로 휘청거리며 뒤를 보려는데 그 자리에서 다시 은신을 썼다.
그러자 내게 왔던 어글이 다시 수호 형에게 넘어갔고.
거기다 마법형 네임드다 보니 마력도 마력 흡수를 통해 엄청나게 빨려 들어왔다.
나쁘지 않아.
적어도 마력이 모자랄 일은 없겠어.
그렇게 다시 흑장로 주변을 돌면서 은신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한 번 사라질 때마다 흑장로의 로브가 찢겨나가는 건 보너스였고.
그걸 지켜본 최종병기 형이 어이가 없는 듯 혀를 찼다.
“하, 이건 뭐 땅 짚고 헤엄치기잖아? 무슨 네임드가 이렇게까지 힘을 못 쓴다고?”
“생각보다 어려워요.”
아마 다른 사람들은 똑같은 아이템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는 하지 못할 것이다.
매번 크리티컬을 넣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니까.
그렇게 흑장로가 마법을 쓰려다가 내게 크리티컬을 맞고는 움찔거리면서 마법이 계속 캔슬이 되었다.
덕분에 우리 쪽 연합 사람들이 편안하게 딜을 넣는 환경이 만들어졌고.
나라는 유저 단 한 명의 가세로 레이드의 난이도가 확 떨어져 버렸다.
그리고 이번엔 수호 형에게서 어글을 뺏어가지 않게끔 다들 조절하는 모양새였다.
이대로만 해도 안정적이니까.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어.
그러다 중간에 흑장로가 감염 마법을 시전했는데 이건 캔슬이 되지 않아 곧장 페가수스를 다시 불러내었다.
그러자 페가수스가 환한 빛을 뿜어내어 주변에 걸린 감염을 싹 걷어냈다.
“그 말 완전 사기네요?”
오랜만에 같이 레이드를 하게 된 현역여대생이 눈을 빛내며 감탄하자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정말 이 녀석이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감염 스킬이 봉인되자 흑장로가 할 만한 것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마법이 내게 캔슬당했으니까.
얼마 뒤 그나마 위협적인 마법인 아마겟돈을 시전하려고 하는 순간 바로 드래곤 슬레이어를 꺼내 들었다.
일반적인 크리티컬 공격으로 캔슬이 안 된다면!
흑장로가 두 팔을 들어 올려 마력을 모으면서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그런 흑장로의 후방으로 돌아가 르아 카르테와 드래곤 슬레이어를 미친 듯이 휘둘렀다.
공속이 허락하는 한에서 최대한 빠르게 휘둘렀는데 한참 동안 반응이 없다가 어느 순간 시스템 메시지가 울려댔다.
《 드래곤 슬레이어의 마력 봉인이 적용됩니다. 》
《 스킬 『 아마겟돈 』 이 봉인 됩니다. 》
마력 봉인이 적용되자 바쁘게 돌아가던 자주빛 마법진이 바로 깨져나가며 흑장로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역시 되는 건가?
예전에 드래곤 슬레이어의 마력 봉인을 보다가 의아한 점을 발견했었다.
특이하게도 드래곤형에 대한 옵션이 아니었다는 것.
그렇다는 말은 다른 몬스터에게도 통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흑장로의 아마겟돈을 봉인해버림으로써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것만 봉인된다면 정말 흑장로는 아무것도 아니야.
얼마 뒤, 나와 우리 연합의 집중포화를 받은 흑장로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고는 완전히 죽음의 빛으로 돌아가 버렸다.
《 감염의 왕, 흑장로 타리안이 사망했습니다. 》
《 가르시아 제국 내의 모든 NPC가 이 소식을 듣습니다. 》
《 세 요새의 NPC들의 친밀도가 상승합니다. 》
됐어!
《 레벨이 올랐습니다! 》
일단 한 단계인가?
나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모든 유저가 레벨이 오르면서 상태가 돌아왔다.
그리고 시스템 메시지가 울리자 바이탄 요새를 지키던 모든 유저들이 환호했다.
이길 수 있다는 희망.
그게 보였으니까.
일단 흑장로에게서 나온 아이템들을 모두 토글해서 품에 넣었다.
“분배는 나중에 하죠.”
다가온 스칼렛과 보면서 말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직 상황이 끝난 건 아니니까요.”
그러면서 잿빛의 듀라한과 싸우고 있는 우리 팀을 바라보았다.
전사 형은 이제 한계야.
그리고 성벽 쪽도 마찬가지.
빠르게 잡는다고 잡았지만 이미 시간이 너무 흘러버렸다.
그때 급하게 이슬두잔이 달려오더니 낭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떻게 하죠? 물약이 끝났어요!”
“네?”
“NPC가 더 이상 팔지를 않아요. 완전 바닥났어요.”
설마, 벌써?
하, 정말 쉽게 가는 일이 없네.
아직 한참을 더 싸워야 하는데.
성벽 밖에는 몬스터들이 엄청나게 몰려있었다.
그러다 문득 품에 넣은 드랍템 중 한 가지를 생각해냈다.
이거라면?
저 많은 몬스터를 단번에 녹여 버릴 수 있지 않을까.
표정이 굳은 스칼렛과 당황해하는 이슬두잔을 보면서 말했다.
“어쩌면, 답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