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9화 오염된 페가수스 (3)
아득히 먼 거리까지 찬 몬스터 대군.
페가수스를 타기 이전 보던 풍경과 전혀 다른 풍경에 살짝 색다른 감정을 느끼긴 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대략적으로 보이던 게 이제는 좀 더 자세히 보이는 것뿐이었으니까.
그러다 발견한 네임드.
흑장로 타리안.
전신을 검은 후드로 감싼 전형적인 마법사 형태의 네임드인데 녀석 주변으로 검은 기운이 넘실넘실 흘러나왔다.
공격을 당하자 다른 대형 몬스터 사이로 숨어들었는데, 아마 네임드 특유의 패턴인 것 같았다.
절대 정면에서는 안 싸우겠다는 건가?
동쪽의 쿠론 요새가 무너질 때도 녀석을 발견하지 못한 것만 봐도 녀석의 성향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흐음, 저 녀석을 어쩐다.
축복받은 페가수스만 있다면 일단 녀석에게 접근은 할 수 있다.
다만, 공격을 하면 녀석이 바로 숨어버리기에 장기적으로 볼 때 꽤 힘든 레이드가 되지 않을까 싶다.
특히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녀석을 보호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놈들까지 있어 더 어려워 보였고.
몬스터 무리 사이에 섞여 있는 네임드라…….
그동안 대부분의 네임드는 개별 개체에 가까웠다.
이런 식으로 주변 몬스터들을 이용하는 녀석은 이 녀석이 처음이었고.
이후, 축복받은 페가수스로 몬스터 무리 위를 날아다니는 동안 녀석을 공격할 타이밍을 몇 번이나 잡았지만, 그때마다 녀석은 몬스터 사이로 숨어들었다.
방심하지 않는 건가?
쉽지 않겠어.
축복받은 페가수스만 있다면 단숨에 녀석을 잡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건 아니었다.
일단, 저 수많은 몬스터 군단을 헤집고 들어가 녀석의 체력을 깎아내리는 것부터가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답이 나오는 상황이 아니라서 바로 재중이 형에게 연락을 넣었다.
<주호> 형, 네임드를 발견했는데 자꾸 몬스터들 사이로 파고들어서 잡기가 힘들어요.
<불멸> 특이한 놈이네.
<주호> 일단 복귀할게요. 당장 어떻게 할 수가 없네요.
<불멸> 알았다. 방법을 생각해 보자.
축복받은 페가수스를 돌려서 다시 바이탄 요새로 돌아가니 아까와는 다르게 유저와 NPC들이 힘을 합쳐서 북쪽과 동쪽 모두 잘 막아내는 중이었다.
당분간 괜찮겠는데?
쿠론 요새가 무너진 것은 순전히 감염 스킬 때문이었으니까.
그것만 없어도 충분히 할 만한 게임으로 변한다.
일단 버티기만 한다면 이 요새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냥터다.
거기다 성벽이 천혜의 방어막이 되어 유저들이 마음껏 공격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렇게 잘 막아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포인트도 빠르게 올라갔고.
경험치 역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쌓여가면서 곳곳에서 레벨업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끊임없이 몬스터가 몰려들면서 경험치를 가져다주니 강제로 레벨업을 하는 셈이었다.
나쁘지 않아.
유저들의 평균적인 레벨이 오른다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버텨내기 쉬워진다는 뜻이기도 했고.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하늘에서 요새 내부로 떨어져 내렸다.
중앙에선 전사 형을 비롯한 우리 팀이 잿빛의 듀라한을 막는다고 정신이 없었다.
이쪽에서 추가로 인원을 빼는 것은 아무래도 힘들겠는데…….
한참 전사 형과 재중이 형에게 힐을 넣어주고 있는 챠밍을 불렀다.
“상황은 어때?”
“아, 오빠. 아직까지는 괜찮아요. 오빠들이 잘 버텨주고 있어서.”
“확실히 그렇네.”
재중이 형이 옆에서 빈틈을 잘 커버해줘서 그런지 전사 형이 생각 이상으로 듀라한을 잘 막아내는 중이었다.
정말 주변 여건도 좋고 시간이 넘친다면 듀라한도 어떻게든 잡아낼 수 있을지도.
다만, 지금 내 쪽은 동쪽에 집중을 해야 했다.
한 번이라도 감염이 퍼지면 성벽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일 테니.
이쪽은 유지만 하는 걸로 만족해야 하려나?
그때, 재중이 형이 옆으로 빠져나와 내 쪽으로 달려왔다.
그 사이 이쁜소녀가 달려들어서 재중이 형의 빈틈을 매웠고.
아마 계속 이런 식으로 셋이 버텨낸 것 같았다.
“동쪽 네임드, 어때?”
“그냥 전형적인 마법사 네임드죠. 굳이 비슷한 네임드를 찾자면 호수의 여왕 정도나 미치광이 리치 정도겠죠.”
둘 다 물리적으로 약한데 마법이 강한 케이스.
그러나 둘 중 어떤 네임드와도 성질이 달랐다.
“그리고 생각보다 강하진 않아요. 방어력도 약하고.”
“그래? 흐음. 그렇단 말이지…….”
재중이 형이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이내 한 가지 작전을 제안했다.
생각해 보지도 않은 아주 전혀 의외의….
“그럼, 끌고 와.”
열심히 화살을 날리던 나르샤 누나, 힐을 주던 챠밍과 막내별까지 재중이 형을 보고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
“네?”
“아예 여기로 끌고 오라고.”
그러면서 바이탄 요새 한복판을 손가락을 가리켰다.
이 형, 지금 네임드를 죄다 여기로 끌고 올 생각인가?
아니.
생각해 보면 오히려 이쪽이 더 나을 수 있겠는데?
“숨을 공간을 없애잔 거죠?”
내 물음에 재중이 형이 나를 보고는 씨익 웃었다.
“빙고. 녀석이 계속 숨어버리면 아예 그 공간을 없애면 되는 거야.”
“신박하네요.”
“내가 이래 봬도 왕년에 잘 나갔다니까? 머리 굴리는 걸로. 요즘은 너 때문에 쓸 일이 별로 없다만.”
역시.
어려울 때는 재중이 형이라는 확실한 한 방이 있었다.
“그런데 데리고 오는 것까지는 어떻게 한다고 쳐도 그 뒤는요?”
생각보다 데리고 오는 방법 자체는 어렵지 않다.
다만 데리고 온 다음이 문제.
녀석을 잡으려면 그만큼 이쪽도 출혈을 각오해야 한다.
재중이 형이 잠시 고개를 돌리더니 누군가를 찾아냈다.
“우리 쪽 연합 애들 전부 다 오라고 해. 화력전으로 밀어붙인다.”
“성벽은요?”
“뭐 알아서들 버티라고 하고. 어차피 저 네임드를 잡아내지 못하면 장기전도 못 해. 결국 이쪽이 먼저 지쳐서 떨어져 나갈 거야. 아무리 부활을 계속한다고 해도. 물약이 부족할 거니까.”
물약이 문제였나…….
확실히 지금 바이탄 요새에 있는 수많은 유저가 수시로 물약 상점을 오가면서 물약을 사가지고 다시 성벽에 올라가는 일을 반복했다.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물약이 무한대가 아니라는 점.
유적지나 거점은 소모라는 개념이 있어서 어느 정도 물품을 가져다 쓰면 중간에 바닥이 난다.
물약 관련 NPC를 비싼 가격에 배치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고.
이 바이탄 요새 역시 마찬가지.
물약을 소모하면 일정 시간이 지나야 채워지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보통의 경우에는 물약이 떨어질 일은 전혀 없겠지만.
지금 같은 특수 상황에서는 이야기가 많이 달랐다.
애초에 네임드 두세 개체가 동시에 덤벼다는 경우가 드물고 거기다 이렇게 양방향에서 몬스터가 떼로 몰려오는 경우도 없었다.
정말 물약이 바닥날 수 있는 상황이라…….
그럼 유저들이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이 상황을 이겨내기 힘들게 된다.
“다른 지역에서 지원을 온다면 또 모르겠는데… 소모전으로 가면 결국 우리가 져.”
“시간이 그렇게 많지는 않겠네요.”
“그래, 결국 저 네임드들을 해결해야 뒤가 있단 소리지.”
“그럼 움직일게요. 더 늦기 전에.”
“또 네게 짐을 지워주네.”
재중이 형의 말에 그저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이기려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야겠죠.”
* * * * *
성벽 위로 올라가 감염에 걸린 유저들을 싹 제거해주고 다시 동쪽의 몬스터 떼로 날아올랐다.
녀석이 어디에 있지?
한참을 날아다니며 숨어 있는 녀석을 찾는데 시간이 꽤 걸렸지만 결국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수시로 몬스터들 사이로 나와 마법을 거는 모습이 보였으니까.
그리고 냅다 축복받은 페가수스를 녀석을 향해 돌진시켰다.
다시 숨어버리기 전에.
녀석을 잡아야 해.
그렇게 빠른 속도로 하강해 흑장로의 바로 앞까지 도달하자 녀석이 다시 몬스터들 사이로 숨기 위해 몸을 날렸다.
이번엔 그렇게 안 되지.
중간에 하늘을 향해 원거리 몹들이 공격을 했지만 기동력을 최대한 살려 어떻게든 흑장로에게 달라붙었다.
억지로 거리를 좁히다 보니 눈먼 공격에 몇 대 맞기는 했지만 다행히 드래곤 플레이트의 방어력이 충분히 버텨줘서 큰 피해는 입지 않았고.
내가 일직선으로 들이대자 흑장로의 앞에 몇 개의 마법진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러고는 몇 초 지나지도 않았는데 거의 즉발 형식으로 검은 마법들이 마법진에서부터 쏟아져 나왔다.
이건…….
손인가?
흡사 손 모양을 내는 마법들이 쭉 뻗어져 나왔다.
형태를 봐서 아마도 다가오는 뭔가를 저지하기 위한 마법 같기도 하고.
위력을 확실히 알 수 없기에 일단 페가수스를 더 빠르게 하강 시켜 검은 손 마법들을 모두 피해냈다.
그러자 등 뒤로 날아갔던 검은 손 마법이 마치 유도탄처럼 휘어져 다시 내게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그냥 피하는 것만으로는 안 끝난다는 거냐?
거기다 흑장로가 정면에서 또 다른 마법을 준비 중인 것이 보였다.
이번에는 커다랗고 붉은 마법진이 돌아가는 것을 봐서는 이쪽이 진짜였다.
검은 손 마법으로 저지를 한 뒤 한 방.
뒤로 빠지기도 힘들고 옆으로 빠지면 몬스터들이.
제대로 된 마법들을 동시에 시전하면서 꽤 피하기 힘든 콤비네이션을 보여주었다.
이번에 피하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이렇게 된 이상.
확실하게 붙는다!
페가수스를 아예 바싹 하강해 시전 중인 흑장로에게 완전히 붙여 버렸다.
이윽고 쐐기 형태로 된 화염 마법이 빠르게 회전하면서 내게 쏘아지자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을 해 르아 카르테로 화염 마법을 크게 쳐냈다.
대체로 이런 종류의 마법은 쳐내기가 가능하니까.
화아악!
쳐내는 순간 르아 카르테를 타고 열기가 후끈하게 넘어왔지만 이 정도는 예상했던 일.
마법을 통째로 쳐내버리자 이번엔 흑장로가 당황한 듯 몸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게 내 앞에서 이렇게 뻔히 예측할 수 있는 마법을 쏘면 안 되지.
준비한 마법이 이렇게 쉽게 튕겨 나갈지는 몰랐는지 흑장로가 도망가기 위해 뒤로 계속 움직였고, 그 순간이 내게는 기회였다.
【 시간의 서! 】
바로 시간의 서로 축복받은 페가수스의 스킬 중 하나인 워프를 초기화시켰다.
그리고 완전히 흑장로에게 날아가 녀석의 어깻죽지의 로브를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같이 좀 가자고?”
【 워프! 】
흑장로의 로브를 잡은 상태로 워프를 시전하자 이전에 저장해놓았던 바이탄 요새 내부의 좌표를 따라 워프가 발동했다.
순간 내 시야가 확 사라졌다 나타나더니 예의 바이탄 내부로 완전히 시야가 바뀌었다.
시야가 돌아오자 바로 고개를 돌려 내 손부터 확인하고는 씨익 웃었다.
역시.
되는구나.
아니나 다를까.
내 손에 로브가 붙들린 채로 흑장로 타리안이 이동되어 왔다.
이것은 블링크를 바탕으로 가능할 것이라 판단을 내린 것.
그렇다면 워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런 확신을 가지고 사용했는데 결과는 대만족.
드디어 녀석을 몬스터의 숲에서 끌어내 버렸다.
더 이상 몬스터들 사이에 숨을 수도 없다는 소리지.
녀석이 당황한 듯 움직임이 멈춘 사이 틈을 주지 않고 르아 카르테와 하이딩 블레이드로 녀석의 목을 빠르게 쳐냈다.
“케에엑!”
아직 멀었어!
다시 연속으로 두 검을 휘둘러 계속 공격을 하자 검은 로브 안에 넘실거리는 검은 기운이 급격하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너무 강한 공격을 연속으로 맞아 녀석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췄을 때.
바로 뒤로 빠지며 크게 외쳤다.
“지금요! 전부 퍼부어요!”
내 신호에 갑자기 사방에서 준비된 각종 마법과 화살이 미친 듯이 한 장소를 향해 쏟아졌다.
이곳에 뭔가가 나타나기를 기다린 듯 전부 풀 차징이 된 강력한 공격들이었고.
고개를 돌리자 최강, 달, 치맥 길드의 모든 원거리 유저가 흑장로를 향해 폭딜을 넣었다.
콰아앙!
쿠아앙!
퍼어엉!
너무 많은 공격이 쏟아져서 눈이 부실 정도.
그 광경을 보면서 환하게 웃어 보였다.
“죽을 자리에 찾아온 것을 환영한다. 흑장로.”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