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6화 지금 필요한 것은 스피드 (5)
내가 내뱉은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정신없이 싸우던 유저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몬스터를 살려두라는 말.
어이없고 정신이 나간 소리라는 건 안다.
당연하게도 유저들 역시 황당함을 감추지 못해 어리둥절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몬스터를 왜 살려?”
“미쳤냐?”
“지랄도 정도껏 해야지. 당장 무너지게 생겼구만.”
“…우리가 죽는다고.”
졸지에 미친 놈 소리를 정말 많이 듣겠는데?
뭐, 각설하고 내겐 저 몬스터들이 정말 필요하다.
사실 이럴 땐 말보다는 행동을 보여야 한다.
유저 한 명, 한 명에게 설명할 여유가 없으니까.
게다가 은신은 만능 치트키가 아니다.
만능에 가깝게 쓸 수 있다, 정도지 만능은 아니다.
그것을 확인한 뒤, 바로 제일 가까운 몬스터를 물색했다.
그중 눈에 들어오는 몬스터 하나.
회색빛의 가고일에게 빠르게 달려갔다.
유저들은 이미 떨어진 몬스터를 상대로 두세 명씩 모여 주변을 포위하는 중이라 미리 양해를 구했다.
“잠시 실례!”
그리고 유저들 사이로 넘어가 지체 없이 녀석의 목덜미를 하이딩 블레이드로 찔러 넣었다.
푸욱!
확실히 일반 몬스터는 방어력 자체가 낮아 공격이 제대로 들어갔다.
악마형 피해가 높은 것도 한몫했고.
또한, 한 번에 줄 수 있는 대미지가 폭발하면서 가고일의 어글이 바로 내게 넘어왔다.
“키에엑!”
《 은신의 쿨타임이 초기화되었습니다. 》
그리고 나오는 시스템 메시지.
생각한 대로!
듀라한을 상대로 힘들게 크리티컬을 먹일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보다 방어가 낮은 일반 몬스터를 상대로 크리티컬을 넣는 편이 훨씬 수월했다.
이거라면 충분해!
고개를 돌려 잿빛의 듀라한을 바라보았다.
현재 듀라한은 유저들과 싸운다고 시선이 완전히 돌아가 있는 중이고.
시간을 더 끌면 안 되겠어.
<주호> 전사 형, 이제 제대로 부탁드립니다.
<방패전사> 방법을 찾았어?
<주호> 보면 아실 겁니다.
<방패전사> 오케이. 정면으로 나선다.
전사 형의 방어라면 듀라한을 상대로 어느 정도까지 버텨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어글이 안정적으로 돌아가게 되겠지.
귓속말이 가자마자 전사 형이 다른 유저들을 밀어낸 뒤, 잿빛의 듀라한을 상대로 바로 어글 스킬을 사용해 듀라한의 시선을 잡았다.
챠밍과 막내별은 공격을 잠시 멈춘 채, 바로 전사 형의 주변을 맴돌면서 힐을 넣어주었고.
지금부터 중요한 것은 전사 형이 얼마나 잘 버티느냐의 싸움이니까.
그걸 보자마자 바로 나르샤 누나에게 연락을 했다.
<주호> 나르샤 누나! 성벽 아래로 떨어지는 몬스터들 이쪽으로 데리고 와줄 수 있어요?
<나르샤> 응, 가능해. 그런데 그렇게 해도 되겠어?
<주호> 네, 최대한 끊어지지 않게 해주세요.
<나르샤> 뭘 하려는지 몰라도 알았어.
나르샤 누나가 제대로 몬스터를 수급해 준다면 굳이 성벽을 오가면서 몬스터를 끌어올 필요가 없어진다.
우리 팀을 제외한 유저들은 이해를 못하겠지만.
<주호> 소녀는 잠시 내 주변에 대기. 좀 도와줘.
<이쁜소녀> 알았어요!
그리고 마지막.
<주호> 형은 제가 자리를 비울 때마다 최대한 듀라한을 묶어주세요. 전사 형 혼자서는 힘들 거예요.
<불멸> 저 녀석을 잡을 방법이 있나 보네.
<주호> 네, 아마 이번엔 확실하게 잡을 수 있을 겁니다.
<불멸> 좋아. 최선을 다하지.
전사 형에 이어 재중이 형 역시 잿빛의 듀라한에게 달려들어서 주변을 맴돌았다.
아이템과 실력을 자부하는 탱커들조차 제대로 막지 못했던 듀라한의 공격을 전사 형은 비장의 한 수를 꺼내 수월하게 막고 있었다.
그간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던 웨폰 중첩을 사용한 것.
전사 형의 검에 세 개의 웨폰 기술이 쌓이고 그대로 잿빛의 듀라한의 보랏빛 창과 정면에서 부딪쳤다.
카앙!
듀라한의 공격에 다 튕겨 나가거나 썰렸던 다른 유저들과 달리 전사 형은 삼색 웨폰으로 듀라한의 창을 멈춰 세웠다.
전사 형의 몸이 뒤로 쭉 밀리면서도 절대 한 번에 썰리지 않고 버텨냈다.
“우와! 듀라한을 멈췄어!”
“저 기술을 방패전사도 쓰는 거야?”
“아씨, 부럽네. 나도 저렇게 탱 하고 싶은데!”
트리플 캐스팅은 이미 네임드를 잡으면서 꽤 많이 비축한 상태.
어차피 한 번만 익히면 그 뒤부터는 더 필요가 없기에 전사 형 역시 하나를 가지고 있었고.
다만, 이 스킬은 소모 마력이 기존의 세 배이기에 아마 끝까지 듀라한을 막아내진 못할 것이다.
중간에 마력이 떨어지면 탱커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그동안 전사 형이 사용하길 꺼려했지만, 상황이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꺼내 들었다.
전사 형이 제대로 버텨주자 주변에 있는 유저들 전체가 안정을 찾아갔다.
우왕좌왕하는 모습도 거의 사라졌고.
당분간은 괜찮겠네.
내가 듀라한을 향해 움직이자 따라붙었던 가고일도 자연스럽게 나를 따라왔다.
그리고 그간 가고일을 공격했던 유저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일단은 녀석을 그냥 보내주었다.
이건 좀 고마운데?
잠시 고개를 끄덕여 감사 표시를 하고 가고일을 뒤에 달고 듀라한의 뒤쪽으로 도착했다.
“소녀! 내 어글 풀리면 바로 가고일 붙들어놔 줘!”
미리 대기 중이던 이쁜소녀가 알았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간다.”
【 은신! 】
내 모습이 사라지자 자연스럽게 가고일의 어글이 풀리면서 녀석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바로 이쁜소녀가 달려들어서 가고일을 자신에게 붙들어놓았다.
좋아.
그걸 본 뒤 바로 듀라한의 후방으로 돌아들어가 르아 카르테와 하이딩 블레이드를 강하게 박아 넣었다.
카칵!
캉!
보랏빛 방어막에 위력이 감쇄되기는 했지만 완전히 무방비인 상태에서 딜을 넣었기에 생각보다 강력한 공격이 들어갔다.
그런 공격이 들어가자 잿빛의 듀라한의 어글이 바로 내게로 넘어왔다.
녀석이 뒤로 고개를 돌리는 찰나.
이쁜소녀가 잡고 있던 가고일에게 다가가 빠르게 목을 후려쳤다.
키엑!
《 은신의 쿨타임이 초기화되었습니다. 》
그렇게 크리티컬과 함께 은신의 쿨이 돌아오자 다시 은신을 걸었다.
【 은신! 】
내 모습이 사라지는 순간 듀라한이 멈칫하면서 자세를 멈춰버렸다.
그사이 다시 전사 형이 달려들어서 듀라한의 어글을 가지고 왔고.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재중이 형이 바로 혀를 찼다.
“와, 그거 완전 사기잖아?”
내 모습이 보일 리 없지만 재중이 형을 보면서 씨익, 웃어줬다.
맞다.
사기.
이런 식으로 하면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은신이 가능해지니까.
물론, 주변에 일반 몬스터가 있다는 가정하에.
그리고 그 몬스터 수급은 나르샤 누나가 맡고 있었다.
“데리고 왔어!”
나르샤 누나가 스펙터 한 마리를 끌고 와 주변에 떨어뜨려 주었고 이걸 이쁜소녀가 바로 달려들어서 자신에게 붙여 놨다.
“붙들었어요!”
완벽한 역할 분담.
나르샤 누나가 끌고 오면 소녀가 잡아두고 난 그걸 쳐서 은신을 계속 건다.
은신이 있을 때는 프리로 듀라한에게 크리티컬을 넣고.
그런 삼박자가 딱딱 들어맞으면서 레이드의 방향이 묘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전사 형을 보다가 내게 한 대를 맞아 나를 보다가 사라진 나를 보고 멈추고.
다시 전사 형이 자신에게 붙이는 것의 반복.
그 사이 모자란 마력은 내 쪽에서 전사 형에게 보내주었다.
【 마력 전이! 】
일반 몬스터들에게서 얻은 마력과 잿빛의 듀라한을 공격하면서 얻은 마력으로 항상 마력은 풀로 차 있었으니 삼색 웨폰을 쓴다고 마력이 부족한 전사 형에게 넘겨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전사 형도 어이가 없는지 웃음을 감추지 못했고.
“흐흐흐, 아주 네임드를 가지고 노는구나.”
순간 듀라한의 몸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면서 창에 강력한 기운이 모이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엄청난 스킬을 쏘기 전의 모션.
“조심해요!”
“알아!”
잠시 동안, 듀라한의 창에 보랏빛 기운이 잔뜩 모이더니 창을 상단으로 올렸다가 바닥을 향해 아주 빠르게 내려쳤다.
콰아아!!
그러자 대기가 출렁이는 파동과 함께 듀라한의 앞을 막고 있던 모든 것을 반으로 갈라 버렸다.
그것도 엄청나게 멀리까지.
“전사 형!”
“아! 살아 있어!”
전사 형의 상태를 보자 팔 한쪽이 심하게 그을린 채 축 늘어져 있었다.
거의 스치지도 않았는데 저런 위력이라니.
거기다 그 일격에 성벽 한 곳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유저들 수십과 다수의 NPC가 동시에 증발해 버렸다.
이 녀석…!
드래곤하고 거의 맞먹을 정도잖아?
아니, 응집된 위력이라면 이쪽이 한 수 위다.
“젠장! 성벽이 무너졌다!”
“다들 내려와서 틀어막아!”
“무슨 네임드가 저렇게…!”
그동안 유저들이 똘똘 뭉쳐 성벽을 잘 막고 있었는데 또 한순간에 역전이 되어버렸다.
전사 형이 다운이 되어버려서 재중이 형이 바로 대타로 들어갔다.
재중이 형이 전사 형을 대신하자 두 개의 창이 정신없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방패로 막는 것과는 또 다른 탱킹.
다만 재중이 형의 레벨이 꽤 됨에도 스탯이 밀려서 그런지 다소 고전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몇 번을 부딪치고 나자 재중이 형이 눈을 살짝 찌푸렸다.
“이놈 유저들 패턴하고 너무 비슷한데? 어지간한 건 다 막아내잖아?”
전사 형은 철저히 막아내는 수준이었는데 재중이 형은 오히려 듀라한의 창격을 파고들어가 계속 반격을 하고 있었다.
완벽하게 먹히는 것 같진 않지만.
“버틸 수 있겠어요?”
“뭐 버티는 것은 괜찮아. 반격까지는 좀 애매하고. 생각 외로 지능이 높아. 패턴이 너무 많아서 곤란할 정도야.”
재중이 형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어지간한 유저들은 손도 못 대보고 당할 지도 모르겠는데.
정말 이번에 작정하고 준비한 녀석이 아닐까 싶은 기분도 들고.
“쉽게는 안 주겠다 이거지.”
재중이 형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안 주면 알아서 찾아가죠.”
다시 은신을 걸어가면서 끊임없이 듀라한의 뒤를 쳤다.
적어도.
뭔가 조치를 취하기 하기 전에.
이 녀석은 확실히 잡아낸다!
그러다 갑자기 녀석의 모션이 크게 변했다.
또 아까만큼 강한 광역기를 날리는 건가?
이번엔 안 되지.
바로 하이딩 블레이드를 드래곤 슬레이어로 바꿔서 듀라한의 뒤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허리의 이음새 뒤에 르아 카르테와 드래곤 슬레이어를 박아 넣은 채 스킬을 시전했다.
【 용격! 】
콰아앙!!
순간 듀라한의 허리가 크게 뒤틀리면서 듀라한의 몸 전체가 격하게 튕겨 날아갔다.
그리고 성벽을 방어하면서도 간간히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유저들에게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나이스!”
“휴, 주호가 한 건함!!”
“잘한다!”
솔직히 나도 이렇게까지 통할 줄은 몰랐는데?
무방비 상태에서 근접 거리의 용격은 더할 나위 없이 최강의 위력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잿빛의 듀라한이 튕겨 나가며 굉장히 묘한 상황이 발생해 버렸다.
이쁜소녀가 그걸 발견하고는 바로 소리쳤고.
“오빠, 듀라한 타고 있던 말! 혼자 됐어요!”
“응?”
이쁜소녀의 말에 빠르게 듀라한이 타고 있던 이상한 말을 눈으로 쫓았다.
단순히 듀라한의 스킬이 캔슬되면서 듀라한만 용격에 튕겨 나간 것이 아니라 듀라한이 타고 있던 말도 같이 튕겨 나간 모양이었다.
그것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설마 저거 두 개가 분리가 되는 거였나?
당연히 한 세트라 생각해서 신경도 안 쓰고 있었는데.
무의식적으로 몸을 날려서 쓰러져 있는 정체 모를 검은 말에 도달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시스템 메시지가 울리기 시작했다.
《 암흑 기운에 오염된 페가수스가 발견되었습니다. 》
《 잿빛의 듀라한과 떨어져 있을수록 암흑의 기운이 빠져나갑니다. 》
페가수스…?
이건 또 무슨 경우야?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