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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527화 (520/1,404)

#527 무너지는 요새 (2)

“확실하게, 저 녀석이랑 다르게 생겼어요?”

그러면서 재중이 형이 상대 중인 고르곤을 가리켰다.

정확하게는 고르곤이 있을 만한 허공을 향해.

“확실히! 저딴 식으로 안 보이진 않아.”

“진짜라는 거죠? 그 말이.”

“당장 방송만 켜 봐도 아는데?”

화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빠르게 방송을 띄워보았다.

그러자 요새마다 참여한 BJ 목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건 아니고.

북서쪽은 우리가 있으니까 볼 필요가 없고.

동쪽 요새에 참가한 BJ 방송 중 하나를 켰다.

그리고 방송에는 온통 부서지고 불타오르는 쿠론 요새의 모습이 잡혔다.

진짜 무너진 건가?

이렇게 빨리?

믿기 힘들지만 생방송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일부러 이런 영상을 만들어 낼 수도 없을뿐더러, 그런 수고를 할 이유도 전혀 없고.

그런데 우리 쪽 요새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 보였다.

“저건?”

“기가 차는 장면이지?”

“네, 공성전에서는 정말 무서운 기술이죠.”

대체 저걸 무슨 수로 막으라고 만든 거지?

처음엔 성벽 위에 있는 한 명.

그 한 명의 유저가 성벽 위의 유저 전부를 전염시킬 것이라 상상이나 했을까?

단순한 감염으로 끝나는 거라면 괜찮다.

이것은 전염이 가능해, 감염이 된 유저 곁에 있으면 중복 전염으로 체력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맛볼 수 있다.

만약 백 명이 성벽 위에 모여 있다면?

“아무것도 모르고 가만히 서 있다가 녹은 유저가 태반이네요.”

“그래, 싹 다 녹아. 저 마법에 걸려서. 또 성벽 위에 유저들이 좀 많아? 그러잖아도 후작의 요새라고 우글우글 몰려갔는데 말이야. 발 디딜 틈도 없어.”

“컨퓨즈보다 이쪽이 더 무섭네요.”

미치광이 리치가 쓰던 컨퓨즈는 그나마 싸우기라도 하면 되지만 저건 다르다.

가만히 옆에 서 있다가 눈치채는 순간 이미 죽어 있다.

“나도 저걸 보고는 미쳤다고 생각했거든. 누가 집어넣었는지 몰라도 공성전 한정으로 최강이야.”

“마법형이죠?”

“응, 아직 정체도 몰라. 성벽 밖 몬스터들 사이에 숨어 있는 것 같거든.”

무슨 네임드인지도 확인도 못 하고 쿠론 요새가 무너진 건가?

도대체 후작은 뭘 한 거지?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저 정도 마법이라면 작스터 후작이 있다고 해도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워낙 많은 유저가 성벽에 다닥다닥 붙어 있으니.

뭔가 손을 쓰려고 해도 늦었을 것이다.

“거기다 컨퓨즈까지…….”

전염 마법에 이어 혼란 마법까지.

그나마 남아 있던 유저들끼리 서로 칼부림하는 모습은 최악에 가까웠다.

혼란 해제 마법이 있지만, 그걸 써줄 유저가 이미 녹아버려서 별 의미도 없었다.

심지어 유저들이 부활하는 부활석 근처가 감염되면서 사태는 극악으로 변해 버렸다.

저건 아무리 부활해도 소용이 없다.

살아나서 다시 전장에 복귀할 수 없는 상황.

쿠론 요새가 순식간에 무너진 게 이제야 이해가 갔다.

“이쪽이 아닌 게 천만다행이네요.”

내 말에 화련이 어이없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아니, 이쪽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저 고르곤. 너희 말고 다른 유저들이 막을 수 있었을 것 같아? 이 밤에?”

고르곤?

화련의 말에 잠시 상상을 했는데 결과는 처참했다.

나와 재중이 형이 빠진 상황에서 고르곤을 유저들이 상대하는 모습은 도저히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참패.

혹은 전멸.

그리고 고르곤이 날뛰기 시작하면 부활석이 점령당했을 것이다.

“……할 말이 없네요.”

“너희 없었으면 여기도 끝이었어. 끝!”

그러다가 갑자기 다른 곳이 생각났다.

“북쪽은……?”

“거긴 내가 알기로 장난 없다더라, 거기 네임드도 다른 종류야.”

“심각하네요.”

“아마 북쪽 레티어스 요새도 시간문제일 거야. 그나마 조금 나은 정도겠지.”

그렇게 나와 화련이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재중이 형의 시선이 잠시 우리에게 돌아왔다.

“다른 요새 정말 무너졌어?”

“형, 앞발!”

내 말과 동시에 고르곤의 거대한 앞발이 허공에서 튀어나와 재중이 형의 창을 심하게 긁고 지나갔다.

까강!

아니, 정확하게는 재중이 형이 빠르게 반응해 급하게 틀어막은 쪽에 가까웠다.

그렇게 창과 앞발의 발톱에 긁힌 스파크가 일어나며 고르곤의 형체가 잠시 나타났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칫, 이놈 봐라. 한숨 돌릴 시간을 안 주네.”

그러면서 다시 재중이 형이 집중하자 다시 사방으로 스파크가 튀면서 재중이 형과 고르곤의 난전이 이어져갔다.

“정말 이 길드엔 괴물 천지구나. 저게 진짜 보여?”

눈을 찌푸리면서 고르곤을 보려고 노력하던 화련이 나를 돌아보고 답을 구하는데 그저 웃으면서 어깨만 으쓱했다.

어떻게 보이냐고 물어보면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그냥 보인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보인다는 표현보다 느껴진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녀석이 움직일 때마다 생성되는 미묘한 공기의 파동이 피부로 전달되니까.

그리고 발을 박차거나 공격을 올 때 들리는 특유의 소리도 감각을 타고 전해져왔다.

그렇게 녀석의 형체가 파악되면 그때부터는 마치 그림을 그리듯 머릿속에 저장이 되었다.

이걸 말로 설명하기는 힘들지.

실제로 느껴보지 않으면.

화련이 의심쩍은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너희 특수 아이템이나 버그 쓰고 있는 것 아냐? 안 보이는 몬스터가 보인다거나…….”

“사실 저도 그런 거 엄청 찾아다니는 중이에요.”

솔직히 그런 아이템이나 버그가 있다면 이렇게 고생할 이유가 없다.

감각을 과도하게 쓴다고 누구에게 구박받지 않아도 되고.

그러고 보니 재중이 형은 생각 이상으로 무리를 하지 않으면서 고르곤을 막고 있었다.

저 정도로 감각을 써대면 분명히 이상이 올 텐데.

“형 머리 괜찮아요?”

바쁜 와중에도 내 걱정에 재중이 형이 피식 웃었다.

“이게 다 경험치 아니겠냐. 필요할 때만 적절하게 배분해야지. 너처럼 무식하게 전체를 다 파악하려고 하면 금방 퍼져.”

배분이라…….

확실히 내겐 고르곤 뿐만 아니라 주변 모든 감각이 통째로 느껴진다.

눈을 감더라도 주변이 다 보일 정도로 아득한 감각.

이걸 재중이 형은 필요한 만큼만 딱 꺼내서 반드시 써야 하는 부분에 쓴다는 말이고.

“뭐, 이건 임시방편이니까. 궁극적으로 너처럼 되는 게 맞아.”

“그런가요….”

“그래, 중간 과정 다 뛰어넘고 최고급 스킬을 써대는 것도 웃긴 일이다만.”

재중이 형이 그 말을 끝으로 다시 고르곤과의 싸움에 열중했다.

말을 하면서 싸우기엔 부담스럽지.

화련은 우리말을 듣더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둘이?”

“뭐, 그냥 조언 좀 받은 거예요. 보시다시피 제가 배우는 입장이라서.”

“네가 배울 게 더 있어?”

“이쪽 계열은 햇병아리죠.”

무식하게 욱여넣는 수준이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내 말에 화련이 납득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불멸이라면.”

“그럼,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죠. 지금은 저 고르곤을 막아야 하니까.”

“알았어.”

화련도 더 이상은 방해하고 싶지 않았는지 곧장 성벽 위로 뛰어 올라갔다.

뒤에 헤라 길드원들을 이끌고.

그러다 순간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저 사람은…?

그리고 그 사람도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가 곧 고개를 돌리고는 화련을 따라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본 재중이 형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아는 사람이야?”

“뭐 안다면 아는 사람이겠죠. 전에 해원 비공정 생각나요?”

“아, 그 사람?”

“네, 아무래도 화련이 스카우트 했나 보네요.”

“으음, 아까운데? 너 그 사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잖아.”

“그 정도는 아니고요. 뭐 먼저 찾아냈으니 어쩔 수 없죠.”

그 당시 정말 빈 깡통 같은 무기로 내 검격을 몇 번이나 막아냈었다.

내 쪽에서 사정을 봐주었다고 해도 분명히 놀라운 일이었고.

재중이 형조차 놀라워했으니.

아쉬운 마음을 접고 재중이 형과 다시 고르곤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그쪽으로 간다!”

내 접근을 눈치챘는지 고르곤이 고개를 돌리더니 그 거대한 덩치가 마치 덤프트럭처럼 거세게 돌진했다.

그 순간 옆으로 빠르게 몸을 빼면서 녀석의 돌진을 피해냈다.

그런데 갑자기 지나가야 할 녀석의 신형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어?

전혀 느껴지지 않아?

분명히 고르곤이 달려가는 바닥의 진동과 거대한 몸이 공기를 가르면서 나오는 풍압, 달리는 소리 등이 느껴져야 하는데 정말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재중이 형도 마찬가지인지 바로 눈살을 찌푸렸고.

“사라졌어?”

“……없어졌어요.”

“이 녀석 블링크 쓴 건가?”

“아마도 그런 것 같아요.”

갑자기 모습이 사라지려면 우리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블링크밖에 없었다.

물론, 네임드가 블링크를 쓰는 게 이상한 것은 아니지만 이 녀석 같은 타입은 굉장히 곤란했다.

원래도 안 보이는 녀석이 블링크로 자리를 바꾼다는 것 자체가 악몽과도 같은 일이라.

유저들에게는 사방에서 동시에 공격이 들어오는 느낌이 들지도 모른다.

재중이 형이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빨리 찾아내야 해.”

그런데 대체 어디로?

시선을 돌려 사방을 둘러보는데 단순한 시야만으로는 어둠에 녹아든 녀석을 잡아낼 수 없었다.

특히 멀면 멀수록 더.

“칫, 난 안 되겠다. 찾아낼 수 있겠어?”

재중이 형이 감각을 최대한 퍼뜨리라는 식으로 말을 하자 곧 집중에 들어갔다.

이건 재중이 형이 할 수 없는 영역이기도 하고.

그렇게 집중을 하는데 퍼뜨리면 퍼뜨릴수록 집중이 계속 깨졌다.

“……방해가 너무 많아요.”

평소 같으면 어떻게든 찾아낼 수 있겠지만 현재 성벽 위와 성벽 바깥으로 너무 많은 유저와 몬스터가 치고받고 있었다.

고르곤의 특유의 느낌이 있다고는 해도 이런 소란 속에서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아냐, 됐다. 너한테 안 잡힌다면 이미 성 바깥으로 튀었겠지.”

그런데 그때 갑자기 성벽 위의 한 곳에서 유저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으아악!”

“뭐야! 갑자기!”

“살려줘!”

유저들이 있던 성벽 위로 고르곤이 나타나 유저들을 깔아뭉개더니 곧 암흑 구와 광역기를 날려대면서 성벽 일대를 마비시켜 버렸다.

나와 재중이 형이 고르곤을 막는 것까지는 가능해 어떻게든 묶어둘 수 있지만, 저런 식으로 블링크를 사용해 성벽을 넘어 다니면 그때부터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사라질 때마다 쫓아가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기도 하고.

그 사이 성벽 위의 유저들이 쓸려나가면 그것도 답이 없고.

또한, 고르곤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유저도 많아 더욱 상황은 악화되었다.

그 모습을 본 재중이 형이 한숨을 쉬었다.

“저래서야… 답도 안 보이네.”

성벽 위를 막아내던 유저들이 증발하자 곧 그 성벽 위로 악마형 몬스터들이 잔뜩 모습을 드러냈다.

한 번 성벽이 뚫리자 연쇄적으로 주변 성벽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유저들도 성벽을 사수하는 것을 포기하고는 죄다 성 내부로 뛰어내렸다.

마치 이렇게 되라고 짜여 있던 것 같은 최악의 상황에 고개를 저었다.

하아, 저걸 이제 어쩐다?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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