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1화 제물 준비 (3)
갑작스러운 드래곤의 등장은 많은 유저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거점과 주변 필드에서 드래곤을 손쉽게 목격할 수 있었으니까.
거기다 BJ들 역시 신난다는 듯 드래곤 쪽으로 포커스를 맞추고 방송각을 잡았다.
거점이 날아가든 말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고.
이들에게는 제대로 된 그림이 나오느냐 안 나오냐가 더 중요했다.
그리고 그 방송들을 지켜보는 유저들의 반응도 다양했다.
-누가 이길 것인가!
-당연히 드래곤이 이기지. 말이라고.
-이거 전에 데자뷰 아니냐? 해원은 전에도 드래곤에게 깨졌잖아.
-그때야 해원 단독으로 버틴 거고. 지금은 다른 연합 유저들도 개떼처럼 있는데?
-그러네. 정말 드래곤을 잡을 수 있을까?
-못 잡아도 저기서 버텨야 할걸?
-그건 왜?
-제국에 찍혀서 그럼. 이대로 거점 날아가면 갈 데도 없음.
-아, 그러네. 진짜 죽자 살자 버텨야 하는구나.
-왜 저렇게 버티나 했더니 이유가 있었네.
-아니면 뭐… 해체하든가.
-크큭, 완전 꿀잼이죠?!
-근데 드래곤 한 번 잡히지 않음? 저거 레벨업하고 있었나 봄.
-아 해원 저놈 오늘 죽었다. 드래곤 절대 못 잡음.
-미친. 진짜네. 주호가 제국에서 한 번 잡았잖아.
-그럼 저기 몰린 애들 다 드래곤 밥임?
-ㅇㅇ. 드래곤 오버 끝날 때까지. 죽었다 깨어나도 못 잡아.
-와씨, 나 같으면 벌써 튀었다.
-이젠 돌이킬 수 없지. 전투 중이라 도망도 못 감.
-쟤들 끝난 듯.
-아, 꼴 좋다. 그동안 짜증 나는 일만 벌이드만. 드래곤이 철퇴를 놓네.
-오우야, 드래곤 멋지다! 완전 부숴 버려!
전사 형이 방송과 채팅창 등을 지켜보면서 말했다.
“반응이 나쁘지 않네.”
“어느 쪽이요? 드래곤? 해원?”
“아, 드래곤! 거참, 칭송받는 몬스터라…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인데? 이건 흡사 유저들을 대신해서 혼내주는 분위기라.”
“재밌게 됐네요.”
“저놈이 워낙에 많이 괴롭혀서 말이지. 유저들이 쌓인 게 많았나 봐.”
“덕분에 드래곤을 꺼냈어도 욕도 안 먹고 좋죠.”
해원이 불법 점거한 거점을 전투로 되찾으려면 우리도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물론, 하려고 하면 깨버릴 수 있겠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마리아 가르시아에게 제국의 병력을 빌려달라고 했던 거고.
제국의 병력을 쓰면 우리 쪽 부담이 한층 완화된다.
문제는 제국의 병력을 그렇게 쓰게 되면 제국에서도 상당수의 병력을 잃게 될 테니까.
그럼 자연스럽게 귀족들이 반발하게 될 테고 후에 마리아 가르시아가 발목을 잡힐 수도 있었다.
그래서 방법을 바꾸었다.
마리아 가르시아의 손을 빌리지 않더라도 해원의 거점을 박살 낼 수 있는 방향으로.
그 결과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드래곤이었고.
해원의 거점을 우리 쪽 피해가 없이 완전히 부숴 버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거기다 좋은 기회잖아요. 드래곤을 오버시킬 수 있는.”
이번 전투는 대놓고 드래곤을 빠르게 키울 유일한 기회였다.
만약 거점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없다면 해원 쪽도 거점을 포기해 버리고 바로 내뺐을 테니까.
유저들이 잔뜩 모여 있는 순간을 만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리아 가르시아의 상황.
제국과 귀족.
드래곤의 레벨업.
거점을 지켜야 하는 유저들.
이 모든 것이 모여 이 그림이 만들어졌다.
그때, 재중이 형이 만족한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물론, 이걸로 끝이 아니겠지?”
“네, 아직 황녀 시절에 2황녀를 노린 대규모 반역자들을 우리 손으로 처리했다는 전공이 있겠죠. 이건 귀족들도 절대 무시할 수 없을 겁니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확실한 전공이니까.”
그렇다.
공작의 위치를 확고히 다지기 위해 전공이 필요했다.
NPC가 아닌 유저가 공작을 달았다는 것을 해소하기 위한.
“NPC가 조금만 멍청했어도 이 정도 액션은 필요 없었을 건데 말이야.”
“뭐 그렇죠.”
그냥 마리아 가르시아가 황제라서 달아주었다, 로 끝나면 베스트인데 귀족들의 반발이 너무 심했다.
“거기다 드래곤까지 척! 하고 들이대면 게임 끝이겠군.”
재중이 형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딱 거기까지가 미리 그려둔 그림이었다.
새 영지로 떠나기 전에 드래곤을 확실히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그런데 오버된 드래곤, 잡을 수 있겠어?”
“해봐야죠. 원래는 테이밍 쪽으로 가닥을 잡았는데 레벨업 된 드래곤을 그냥 테이밍하긴 아깝잖아요.”
“그렇긴 하지.”
옆에서 전사 형이 어이없다는 듯 웃어버렸다.
“너 지금 드래곤을 무슨 잡몹 대하듯 말하는 건 알고 있냐?”
“아, 그랬나요?”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기겁하겠다. 진짜. 언제 한 번 방송으로 싹 내보내면 난리가 날거야.”
“하하, 게임 그만두고 나면 한 번 생각해 보죠.”
라떼는 말야…, 라는 에피소드로 싹 다 방송에 내보내면 아마 재밌지 않을까?
유저들은 전혀 알지 못하는 비하인드 스토리로.
“발리스타는 준비됐어요?”
“어, 일단 대기 중. 이게 설치를 하면 이동을 못 해서 말이지.”
“제한이 너무 많네요.”
우리 팀이 따로 거점을 설치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
“정말 이걸로 드래곤을 떨어뜨릴 수 있나 모르겠네. 믿음이 가지 않아.”
전사 형이 산맥 사이에 설치한 발리스타를 보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잠시 멈칫거리게 만들어도 괜찮아요.”
전투 중 딱 그 정도의 도움이어도 충분하다.
내가 생각하는 발리스타의 기대치는 거기까지.
나머지는 알아서 몸으로 때워야 한다.
“자, 그럼 다시 상황을 볼까?”
전사 형의 말에 방송으로 눈을 돌렸다.
그런 우리를 보는 막내별이 헛웃음 지었다.
“막상 남의 집에 불을 질러놓고 이 정도로 관심이 없다니… 무서운 사람들!”
막내별의 말에 다들 똑같이 웃었다.
이건 어차피 결과가 정해져 있는 일이라.
그렇게 지켜본 영상 속에서는 정말 처절할 정도의 난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드래곤 하나를 두고 비공정들이 벌떼처럼 달라붙어서 몸을 불사르는 모습.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드래곤 주변의 비공정과 탈것들이 계속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거점의 성벽에서도 수많은 포가 솟아올랐는데 몇 발은 드래곤을 맞추기도 했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레벨업을 하면서 몸의 상처가 싹 사라져 버렸다.
이건 흡사 드래곤 수십 마리를 상대하는 것과 동일하지 않을까?
아무리 죽여도 다시 살아나는.
그리고 마력이 온전히 찬 드래곤의 입에서는 브레스가 끊임없이 쏟아져 비공정과 탈것. 단단하게 설치된 성벽 할 것 없이 전부 파괴하고 무너뜨렸다.
이건 단 하나의 네임드가 얼마나 무서울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괜히 끝판왕이 아니네요. 이 정도면 차라리 레비아탄이 쉬워 보여요.”
챠밍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껏 해야 구경하는 맛이 날 텐데.
지금은 그냥 학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 물론.
유저들은 굉장히 재미있게 구경하는 중이었다.
어차피 자기들 집에 불나는 게 아니니.
그리고 그만큼 고통에 쌓인 해원의 거점 쪽에서 이탈자가 슬슬 나오기 시작했다.
-ㅅㅍ. 나 안 해! 저걸 무슨 수로 잡아!
-대체 날린 비공정이 몇 대야!
-이렇게 드래곤 잡는다고 아이템이라도 주냐? 어차피 간부들이 다 해먹을 거잖아.
-거점 지켜봐야 해원 저놈 좋은 일인데. 우리한테 떨어지는 것도 별로 없고.
-솔직히 우리가 드랍한 템들이 더 비싸겠다.
-차라리 제국에 항복하자. 거점 지키려다가 우리가 먼저 망하겠어.
-이번에도 봐. 우리만 밀어놓고 간부들은 다 뒤에 숨었잖아.
-해원 이 새끼는 한 번도 지가 나서서 싸우는 걸 본 적이 없네.
-대체 우리 쪽 연합은 왜 해원하고 손잡은 거야?
-뒷돈 받았겠지. 한두 번도 아니고.
-어쩐지 막나가더라.
-난 솔직히 그때부터 맘에 안 들었음.
-해원이 주호한테 까인 일을 복수하는 걸 왜 우리가 도와줘야 하냐.
-이번에도 주호가 보상 못 받게 방해하려고 시작한 거였지?
-덕분에 우리만 개피 보는 중.
-아, 난 몰라. 이제 연합 탈퇴 할련다.
-우리 길마한테도 좀 따져야겠음. 이건 아니라고.
“엉망진창이네요.”
내 말에 재중이 형이 피식 웃었다.
“원래 잘 안되는 집은 저래. 그냥 묻고 넘어갈 수 있는 일도 다 따지게 되고. 작은 불만도 다 터져 나오는 거지. 거기다 여러 연합을 마구잡이로 이어 붙여서 만든 거대 연합이니까. 한 번 무너지면 순식간에 폭삭이다. 폭삭.”
그걸 시작으로 점점 많은 유저가 거점을 빠져나와 상황이 걷잡을 수 없게 변해 버렸다.
해원의 영향력이 더 이상은 먹히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했고.
도망가는 유저 반.
남아 있는 유저 반.
아니, 그냥 전체적으로 드래곤에 학살당해 워낙 수가 줄어들다 보니 따로 숫자를 셀 필요도 없어졌다.
이미 하늘의 비공정도 죄다 떨어져 내렸고 그사이 이탈한 비공정들은 아주 멀리 사라져 점처럼 변했다.
걸리적거리는 비공정과 탈것이 사라지자 드래곤이 성벽 위를 따라 날아가면서 성벽 위로 화염 브레스를 잔뜩 쏟아 부었다.
그러자 성벽 위의 방어포들이 차례대로 녹아내리고 성벽이 화염의 위력에 터져나가며 형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폭발해 버렸다.
그걸 본 전사 형의 감탄.
“휘유, 방어포에 몇 대 맞은 걸 기억하나 봐. 아주 걸레짝을 만들어놨네.”
성벽이 일자로 쭉 터져나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리고 드래곤이 시가지를 날아다니면서 계속 화염 브레스를 뿜어내자 거리고 건물이고 할 것 없이 전부 화염에 휩싸여 지옥도를 연상케 했다.
아직 남아 있던 유저들 역시 브레스에 녹아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거기다 수십 발의 화염 마법을 동시에 영창해 사방으로 날려 일대를 한꺼번에 날려 버렸다.
마지막으로 메테오 스트라이크.
검은 하늘이 크게 열리며 그 사이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거대한 운석이 떨어지는 광경이란…….
챠밍이 쓰는 더블 메테오 스트라이크도 확실히 위협적이지만, 드래곤이 쓰는 메테오는 일단 그 크기부터가 달랐다.
그냥 압도적.
거점에 거대한 메테오가 내려 찍히는 순간 광장이고 건물이고 할 것 없이 삭제되듯 크레이터가 생기면서 그대로 사라졌다.
당연히 겨우 거점에서 버티던 유저들도 동시에 삭제되었고.
이미 거점 자체가 폐허나 마찬가지였다.
유저가 더 이상 남아 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애초에 유저가 서 있을 땅 자체가 없는데…….
해원도 저기에서 절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찍, 소리도 내지 못하고 녹았을 테니.
드래곤이 거점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곳 한가운데로 내려앉더니 사방을 둘러보면서 크게 포효했다.
캬아아아악!!
마치 승자의 그것을 보는 것 같은 광대한 포효에 절로 소름이 돋았다.
그와 동시에 거점이 파괴되었다는 시스템 메시지가 울려 퍼졌다.
《 크루아 대륙에서 거점 『 천상 』 이 사라집니다. 》
《 부활 포인트가 리셋됩니다. 》
일체 자비가 없는 드래곤의 위엄에 절로 침이 넘어가는 듯했다.
예전에 저걸 무슨 수로 잡은 거지?
드래곤의 입안에서 버티기만 해서 그런지 이 정도로 드래곤이 강력하다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아니, 레벨이 올라서 더 강해진 것일 수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력에 다들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저걸 진짜 잡겠다고여?”
“오버시키는 게 아니었나 봐요.”
막내별과 이쁜소녀의 놀란 표정이 그걸 잘 보여주고 있었고.
“잡아야지. 지금을 위해서 오버시킨 거니까.”
그리고 우리 팀을 돌아보며 외쳤다.
“다들 가죠! 저 드래곤을 떨어뜨리러!”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