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1화 가면 벗기기 (1)
혼자 봤을 때는 확신이 없었는데 다 같이 슬로우 영상을 돌려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일단 인간이 아닌 것은 확실해요!”
내 말에 모두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잠시.
제국 황제의 팔이 검게 변하는 장면이 슬로우 영상에 잡혔다.
지금껏 수 없이 봐왔던 장면이기도 하고.
절대 모를 수 없는.
아마 다른 유저들이라면 그냥 스킬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갔을 수 있겠지만 우린 다르다.
수 없이 녀석과 부딪쳐봤기에.
“악마형 케르베로스의 팔이 이런 식으로 변했죠?”
“그랬지. 이러면 황제가 그놈 사촌쯤 되려나?”
재중이 형의 뼈 있는 농담.
빛의 기둥이 있는 가르시아 제국 한복판에 악마형 몬스터가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그것도 ‘황제’가 그 대상이라니…….
흑막의 중심으로 훌쩍 들어가 버린 기분이 들었다.
“뭔가 스토리가 잔뜩 꼬인 것 같네요.”
“아마도….”
그러면서 재중이 형이 내가 들고 있는 르아 카르테를 가리켰다.
원래라면 황제에게 엄청난 보상을 받고 나오는 스토리였을 텐데, 더 큰 스토리가 발생하면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가 틀어지게 되었다.
황제가 악마형이라는 사실.
이쪽이 더 핵심 스토리에 가깝지.
어쩌면, 한참 동안 다른 퀘스트를 해서 알아내야 하는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그런 일들은 중요하진 않았다.
일은 일어났고 결국 그걸 해결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껏 하지 않았던.
아니, 못 했던 것들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몇 가지 떠오르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치열하게 순위를 정해갔다.
이 상황에서 최대한 이득을 볼 수 있는 그림.
아니, 피해를 최대한으로 줄일 수 있는 그림이 필요하다.
시간이 부족하니까.
써먹을 수 있는 것은 써먹어야 한다.
“황제가 악마라는 것을 밝히면 어떨까요?”
적에게는 약점이 될 수 있는 카드.
이건 나쁘지 않는 카드다.
그리고 지금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카드이기도 하고.
내 의견에 재중이 형이 잠시 생각을 하다가 대답했다.
“NPC 대상으로는 괜찮지. 이왕이면 꽤 높은 직위의 NPC라면 더 좋겠지만…….”
재중이 형이 말을 흐리자 전사 형이 대답을 대신했다.
“친밀도가 높은 고위 NPC가 없으니 문제입니다.”
“그래. 당장 움직일 카드가 없어. 어느 수준까지 믿을 수 있는지도 전혀 알 수 없고. 정상적으로 밟고 올라갔다면 꽤 많은 NPC와 친밀도가 쌓였겠지만 지금 당장은 힘들지.”
시간의 문제.
급격한 스토리의 진행으로 우리에게 아군이 될 만한 NPC를 구할 시간적인 여유가 사라졌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증거. 이 영상을 보여줘 봐야 NPC는 인식을 못 해.”
시스템의 맹점.
우리가 아무리 보여줘도 NPC는 인식을 하지 못한다.
황제가 악마라는 사실을 담고 있는 이 가장 중요한 녹화 영상을 보여줄 수 없으면 그냥 증거가 없는 것과 동일했다.
우리만 알고 있을 뿐.
거기다 현재 가르시아 제국과 우리는 완전한 적대 상태.
“그럼 유저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어떻습니까?”
전사 형의 말에 재중이 형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흥미로운 사실로 치부할걸? 당장 퀘스트와 연관된 것도 아니고…. 아무런 이득 없이 제국하고 척을 지라고 하면 다들 고개부터 저을 거다. 제국이 없으면 당장 거점에 목을 매야 하는데 지금 거점이 어디에 있지?”
“용의 대지에 하나뿐이죠.”
“그런 이유다. 일반 유저는 이 일에 끼어들지 못해. 여차하면 오갈 데 없이 내쫓길 수 있으니까.”
“흐음, 그쪽도 문제군요.”
“뭐, 그런 거지.”
NPC들에게 알려도 아무 증거가 없고.
영상을 보고 판단할 수 있는 유저들에게 알린다고 해도 별 효과가 없었다.
그럼 이 카드는 쓸 수 없는 카드나 마찬가지였다.
쓸 수 없는 카드를 쓰려면 무슨 방법을 써야 하지?
챠밍이 그때 의견을 내놓았다.
“멀리 있는 친구에게 도움을 받으면 어때요?”
멀리 있는 친구?
챠밍의 의외의 말에 다들 고개를 갸웃했다.
“음, 그러니까 로가슈 왕국 같은. 적어도 거긴 우리 쪽과 친하잖아요.”
재중이 형이 이번엔 괜찮다는 듯 흥미로운 눈빛을 보냈다.
“괜찮네. 확실히 그쪽은 르아 카르테의 보관 장소이기도 하고. 주호가 아직 귀족 상태인 데다가 왕과의 친밀도도 높은 상태니까.”
재중이 형의 긍정적인 답변에 챠밍의 눈빛이 밝아졌다.
“그럼 로가슈 왕국으로 가는 거예요?”
하지만 재중이 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역시 그것도 힘들어. 이유는 마찬가지. 아무리 친밀도가 높다고 해도 증거가 없어. 주호가 귀족이니까 말이야 들어보겠지만 확실하지 않은 말을 듣고 제국과 전쟁을 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라고 하면 나 같아도 안 할걸?”
“아! 그렇네요!”
로가슈 왕국도 맹점이 있다.
국가와 국가가 마주치는 일인데 너무 쉽게 봤나…….
르아 카르테의 주인인 내 말을 듣기야 하겠지만, 상식적으로 로가슈 왕국이 나선다는 보장이 전혀 없었다.
“이야기야 할 수 있지만 아마 불가능할 거다. 퀘스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제국과 척을 지면서 로가슈 왕국에 가서 도움을 받으라는 퀘스트가 있었다면 총알 같이 날아갔을지도 모르지만 그쪽도 무리.
전사 형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결국 우리끼리 해결을 봐야 한다는 거군요.”
“그래, 이번에는 빠져나갈 구멍도 없게 만들어놨어.”
재중이 형도 딱히 좋은 생각이 나지 않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제국의 대군과 싸움이라…….
병사 NPC 숫자가 적지는 않을 터.
유저가 아무리 부활한다고 해도 압도적인 숫자 차이는 유저에게 불리했다.
레벨이나 장비가 한참 앞선다면 반대로 학살을 하겠지만.
거점이 활성화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니…….
이대로 제국과 전쟁이 일어나면 특별한 변수가 없는 이상 거점이 무너지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쪽 연합이 큰 손해를 보게 된다는 뜻이고.
비약이긴 하지만 연합까지 붕괴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절대 지면 안 되는 전쟁이다.
그동안 쌓아놓은 것이 한 번에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일은 막아야 했다.
그때, 사장님에게 연락이 왔다.
무슨 일이시지?
<카이저> 음, 안 좋은 소식이 있다.
<주호> 네? 어떤?
어느 정도 예상이 되는데 벌써?
<카이저> 우리 거점에 자금을 대던 길드들이 모두 손을 털었어. 제국과 전쟁 소식을 듣자마자.
사장님의 말에 다들 예상했다는 듯 안색을 조금 굳히기만 했다.
길드들의 이탈은 이미 예상했던 일이니까.
<주호> 화련과 이야기해 보세요.
<카이저> 화련?
<주호> 다른 길드들이 이탈하면 지분을 다 달라고 하던데요?
<카이저> 위기를 기회로 삼겠다는 건지… 다 같이 죽자는 건지 알 수가 없구나. 일단 연락을 해보마.
<주호> 그럼 그쪽은 맡길게요.
<카이저> 알았다. 이제 병력이 많이 부족한데 어쩔 생각이냐?
<주호> 좀 더 생각해야죠.
그렇게 사장님과 이야기를 마치고 연락을 끊었다.
“역시 이탈했나?”
“네, 예상대로네요.”
“귀찮게 계산 안 해도 되고 좋군.”
재중이 형이 딱히 기대는 안 했던 것 같은 표정으로 어깨만 으쓱했다.
위기에 나 몰라라 하는 녀석들은 동료가 아니라고 했던가.
그럼 화련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예전에 적이었던 화련이 지금은 최고의 우군이라니.
정말 이쪽 판은 알다가도 모르겠네.
전사 형이 그때 말을 꺼냈다.
“일단 아이템부터 찾죠. 상황이 더 복잡해지기 전에.”
“그래, 다들 이동하자.”
* * * * *
곧장 드워프 지하 왕국으로 이동을 해서 레비아탄 장비부터 찾았다.
『 +0 레비아탄 배틀 액스 / 출혈 30 타격 36
- 드래곤형 피해 250%
- 치명타 확률 10%
- 치명타 대미지 400%
- 드래곤형 대상 관통 확률 30%
- 수룡탄
『 +0 레비아탄 스피어 / 출혈 33 타격 33
- 드래곤형 피해 250%
- 치명타 확률 10%
- 치명타 대미지 300%
- 드래곤형 대상 관통 확률 40%
- 수룡탄
『 +0 레비아탄 롱보우 / 출혈 33 타격 33
- 드래곤형 피해 250%
- 치명타 확률 10%
- 치명타 대미지 200%
- 드래곤형 대상 관통 확률 50%
- 크리티컬시 추가 관통
- 수룡탄
레비아탄 장비는 날아다니지 못한다는 점만 빼면 브랜디슈 무기의 완벽한 상위 호환 아이템이었다.
공격력.
무기옵션 모두.
거기다 기존 브랜디슈 무기들에서 치명타 대미지 뿐만 아니라 무려 치명타 확률이 따로 붙어 있었다.
이제껏 두 가지 옵션이 동시에 붙은 경우는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레비아탄 무기에는 두 가지가 같이 붙어서 나왔다.
옵션 하나만 보면 다른 어떤 무기보다 좋은 수준이었다.
딱히 드래곤형 피해가 없더라도 쓸 수 있을 정도로.
“이 정도면 드래곤 슬레이어하고 맞먹는 것 아니에요?”
“좋긴 좋네.”
재중이 형이 레비아탄 스피어를 들어보더니 만족하는 모습을 보였다.
거기다.
【 수룡탄! 】
연습으로 레비아탄 스피어에 내장된 수룡탄을 쓰는데 무기의 날에서 푸른 물빛이 잔뜩 생성되더니 하나의 커다란 탄을 만들어내었다.
“이건……?”
딱 보기에 레비아탄이 쏘던 브레스를 잔뜩 압축시킨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한쪽으로 날려 보내자 순간 지하가 울릴 정도의 충격을 내면서 벽을 부쉈다.
“휘유, 거의 브레스 급인데?”
범위가 브레스보다 좁은 것만 제외하면 단발의 위력은 거의 비슷해 보였다.
확실히 네임드 무기네.
레비아탄의 비늘을 구하기 힘든 만큼 그 정도 위력은 가지고 있다는 건가.
이거라면 드래곤에게도 충분히 먹히겠지.
이쁜소녀와 나르샤 누나도 만족하는 것 같고.
다만 여러 개를 제작하기에는 비늘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무기 하나에 마흔 개씩 들어가는데 당분간 비늘을 이 정도로 얻기란 정말 요원한 일이니까.
“시간이 많진 않겠죠?”
“길어야 이틀?”
재중이 형이 이틀이라면 맞겠지.
사장님과 이미 이야기를 한 것 같으니까.
전력의 수준을 올리기엔 이틀은 너무 부족함 감이 있었다.
결국, 다른 수를 내야 한다는 말이고.
듣고 있던 전사 형이 한마디 했다.
“어쩔 수 없군요, 중간에 게릴라라도 하죠. 뒤를 잡는다던가. 보급을 습격해도 나쁘지 않고.”
전사 형의 말은 정석에 가까웠다.
숫자가 모자랄 때 쓸 수 있는.
“단순히 전투로만 이끌고 가긴 무리가 있겠네요. 우리끼리 수천 명을 죽이지 않는다면.”
적은 많고 우리는 적다.
뭔가 다른 방법으로 접근을 해야…….
그때, 이쁜소녀가 아쉬운 마음을 담아 스쳐 가듯 말을 했다.
“황제가 변하는 걸 다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응? 방금 뭐라고?”
“아! 음, 황제의 본 모습을 보면 NPC들이 우리 편이 되어주지 않을까 해서요.”
이쁜소녀의 말에 머리에 망치를 맞은 것처럼 번쩍 생각이 깨어났다.
왜 굳이 저장된 영상을 NPC들이 못 보는 것에만 집중했지?
그냥 NPC들에게 직접 보여주면…….
이야기가 쉽게 풀린다.
어쩌면 이게 해답이 될지도.
다만, 황제를 제국성 밖으로 끌어내야 하는데.
바로 전사 형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전사 형, 혹시 황제도 참가해요?”
“아니, 사장님께 그런 말은 못 들었어. 아마 그대로 있겠지. 제국에.”
“그래요?”
우리 거점을 치기 위해 상당한 수의 NPC가 제국성에서 나온다.
자연스럽게 제국이 비게 된다.
아니, 완전히 비지는 않더라도 방비가 상당히 약해질 것은 분명했다.
황제를 끌어내려면.
거기다가 황제가 변하는 것을 보여주려면 그만큼의 위협적인 뭔가가 제국을 뒤흔들어 놓아야…….
문득 드워프 지하 왕국을 둘러봤다.
하, 정답이 코앞에 있었는데 몰랐잖아?
바로 재중이 형을 바라보았다.
“형, 드래곤을 불러내죠.”
“그게 무슨……?”
악마형 케르베로스로는 안 된다.
강하고 약하고를 떠나 애초에 케르베로스나 제국 황제나 둘 다 한통속이라고 봐야 했다.
악마, 악마라면 제대로 싸우지 않겠지.
그러면 확실히 싸울 수 있는 녀석을 데려다 놓아야 한다.
어떻게든.
내가 아는 가장 강력한 녀석으로.
그리고 그건 딱 하나밖에 없었다.
“드래곤요. 제국 앞마당에 드래곤을 풀어두자고요.”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