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9화 수상한 왕 (1)
황제가 르아 카르테를 언급하는 순간 자동으로 몸이 반응하며 허리춤에 손이 갔다.
허전한 감각.
조심한다고 했지만, 인벤에 있는 것까지 알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것이 황제의 능력인가?
황제의 능력이 아니더라도, 게임 시스템이 그렇게 짜여 있다면 그러려니 해야 한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들었다고 한다면…….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혹시 르아 카르테를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알려진다면?
이곳에 들어와서 단 한 번도 르아 카르테를 꺼내지 않았지만 필드나 거점, 제국 내에서는 몇 번이나 들고 다녔다.
그걸 NPC가 자연스럽게 인식한다는 전제라면 르아 카르테를 인벤 속에 넣어두는 방법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그런데 제국에서 르아 카르테를 알아볼 만한 NPC는 대장장이밖에 없는데…….
대장장이를 의심해야 하나?
생각이 엉킨 실타래처럼 점점 꼬여갔다.
어디서부터, 어떤 것을 의심을 해야 하는 거지?
아니, 의심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 상황엔.
황제가 ‘르아 카르테’를 알고 있다는 게 중요했지.
그리고 지금이 굉장히 위태로운 상황이라는 것도.
황제와 주변에 대한 경계를 낮추지 않은 채 재중이 형에게 낮게 속삭였다.
“형, 이거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아아, 아무래도 그런 것 같네.”
그러면서 재중이 형은 주변부터 빠르게 살피는 눈치였다.
병력을 파악하는 건가?
우리 좌우로 쭉 정렬해 있는 풀 플레이트를 착용한 기사들.
당장 전투가 일어나면 가장 먼저 우리를 덮칠 것이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압력을 주는 마법을 쓴 궁정 마법사.
좀 전에 사용한 마법을 다시 맞으면 정말 속수무책으로 당할지도 모른다.
거리는….
본능적으로 상단에 있는 마법사와의 거리부터 눈에 새겼다.
헤이스트와 대쉬를 동시에 쓰면 한 번에 도달할 수 있으려나?
아무래도 조금 모자를 것 같은데…….
르아 카르테와 드래곤 슬레이어의 관통 능력과 치명타 능력을 합치면 마법사 정도는 한 방에 보낼 수 있지 않을까?
가장 거슬리는 마법사를 치고, 다음으로 황제.
아니면 차라리 바로 황제를?
머리부터 잡으면…….
문제는 황제 옆에 있는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더 눈에 거슬렸다.
레벨이 꽤 높다는 전제하에 한 번쯤은 내 공격을 막을지도….
계속해서 머리에 상황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언제라도 튀어 나갈 수 있도록.
전사 형도 분위기를 읽고는 나보다 반보 앞쪽으로 나서서 자세를 낮췄다.
그러고는 전사 형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내게 말했다.
“여차하면 문으로 뛰어나가. 우린 죽어도 되는데 넌 아니다. 그거 절대로 잊지 말고.”
전사 형의 낮게 깔린 음성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잘 알고 있어요.”
냉정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내 쪽은 목숨이 하나밖에 없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것과 동일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전사 형이 앞으로 나서자 우리 팀 모두 긴장을 풀지 않고 뒤로 모여들었다.
어쩌다 상항이 이렇게 됐지?
원래라면 레비아탄을 잡은 공로로 제국에서 보상을 받기로 되어 있는 건데…….
그보다 더 상위의 뭔가가 발동되어 버린 것 같았다.
바로 르아 카르테와 연관된.
지금 생각해 보면 레비아탄을 잡았다고 제국으로 보상을 받으러 오라는 것 자체가 함정인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제국에서 보상을 준다는 것에서부터 의심을 했어야 했다.
그때, 황제가 단상 위에 느긋하게 앉아 읊조렸다.
『 르아 카르테, 탐식 혹은 영웅의 검. 어떤 것으로 불러야 할까? 』
역시.
저 황제는 전부 다 알고 있다.
아니,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한 건가?
갑작스럽게 분위기가 일변한 황제가 말을 이었다.
『 어디서 얻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원래 우리 가르시아 제국의 상징이다. 백 년 전 성마 전쟁 사이에 사라진. 』
뭐?
르아 카르테가 이곳 물건이라고?
우리가 들은 것과 완전 다른데?
분명히 로가슈 왕성에서는 자기들의 성물이라고 했었고, 가르시아 노인 대장장이도 거기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었다.
심지어 드워프 왕 역시 마찬가지.
거기에 대해 일언반구의 표현도 하지 않았었다.
여기에 대한 답은 하나다.
로가슈 왕, 대장장이, 드워프 왕 셋 다 거짓말을 했거나…….
아니면.
지금 저 황제가 거짓을 말하고 있는 중이다.
그걸 들은 전사 형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지금 르아 카르테 내놓으라는 소리 같은데, 내가 제대로 들은 것 맞냐?”
“저도 그렇게 들었어요.”
“이건 뭐 칼만 안 들었지, 순 날강도야.”
“칼도 잔뜩 들었죠. 양옆으로 쭉.”
내 말에 전사 형의 눈빛이 날카롭게 바뀌었다.
“황제가 이딴 짓을 하다니… 이 동네도 참 볼만하네.”
전사 형의 말에 재중이 형도 긴장한 눈빛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차분한 걸음으로 내 옆에 와서 섰다.
그런 재중이 형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형, 먼저 갈까요? 이미 보상은 물 건너간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저 황제라는 놈이 보상을 줄 것 같진 않았다.
아니, 지금은 보상이 문제가 아니라 르아 카르테를 내놓으라고 강짜를 놓고 있는 중이라…….
그런 우리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는지 황제가 곧장 말을 꺼냈다.
『 상징을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돌려놓는 일은 선제에게 받은 내 사명이다. 르아 카르테를 내게 넘겨라. 그럼, 그에 합당한 보상을 주도록 하지. 』
황제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나를 주시하면서 르아 카르테를 요구해왔다.
날 강도의 왕인가?
《 가르시아 제국 황제가 르아 카르테를 요구합니다. 》
《 르아 카르테를 넘겨줄 시, 가르시아 제국 황제와의 친밀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
《 르아 카르테를 넘겨줄 시, 가르시아 제국의 귀족 칭호가 한 단계 상승하고, 황제에게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
《 르아 카르테를 황제에게 넘기시겠습니까? 》
이미 레비아탄에 대한 보상은 저 지하 속에 처박혔네.
그리고 시스템까지 대놓고 르아 카르테를 요구하는 것을 보고는 어이가 없었다.
이건 꼭 어떻게든 르아 카르테를 회수하겠다는 그런 의미로만 보이잖아?
드래곤 슬레이어를 달라고 하면 보상 여부에 따라 고려할 여지라도 있지.
뭐, 이것도 쉽게 넘겨주진 않겠지만….
그래도 제국 황제라면 정말 진귀한 아이템을 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르아 카르테는 불가능.
르아 카르테가 없어지면 당장 브랜디슈 블레이드로 검의 비를 쓰지 못한다.
아니, 웨폰 다발부터 시작해서 지금껏 마력 흡수로 누려오던 거의 대부분의 스킬이 강제 봉인 당한다.
절대로 줄 수 없는 것을 달라고 하는 상대에게 할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거절한다면?”
일단은 떠본다.
여기에서 또 다른 분기점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 거절이라… 재밌군. 』
그런 내 거절을 담은 메시지를 잘 알아들었는지 황제의 표정이 확 가라앉았다.
순간 보였다.
황제의 가라앉은 눈에 서린 찐득한 욕망을.
그리고 이어지는 시스템 음성.
《 가르시아 제국궁이 전투 지역으로 변경됩니다. 》
딱 한 줄의 시스템.
그것만으로 상황을 바로 읽을 수 있었다.
바로 인벤에서 르아 카르테와 드래곤 슬레이어를 꺼내 들었다.
일단, 저 걸리적거리는 마법사부터.
【 헤이스트! 】
【 대쉬! 】
순간 몸이 쭈욱 빨려들 듯 밀려 나가며 순식간에 궁정 마법사와의 간격을 좁혀 들어갔다.
이렇게 빠르게 움직여야 마법을 쓰지 못할 터.
어설프게 자리를 유지하다가 마법에 당하기라도 하면 답도 없다.
궁정 마법사의 캐스팅보다 내 스타트가 더 빨랐다.
그 덕분에 캐스팅이 끝나기 전에 바로 앞까지 도달해서 르아 카르테와 드래곤 슬레이어를 동시에 휘둘렀다.
그런데 그때.
바로 옆에서 튀어나온 검은 갑옷을 입고 있던 기사가 긴 창을 내질러 내 검격을 정면에서 막아냈다.
카강!
키기긱!
르아 카르테를 쳐내고 드래곤 슬레이어는 아슬아슬하게 마법사의 눈앞에서 창날로 막아내는 녀석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손에서 느껴지는 반탄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내 쪽 무기가 유일 템에다가 강화가 잘 되어 있다는 것을 감안해 보면 저 검은 기사가 나보다 레벨이 훨씬 높다는 사실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움직임도 재빨랐고.
다시 한 번 검은 기사의 품을 비집고 들어가 궁정 마법사의 목을 노렸는데 이번엔 또 다른 검은 기사가 나타나서 커다란 방패로 앞을 완전히 막아서 버렸다.
칫, 역시 폼으로 세워둔 녀석들이 아니었어.
하나 같이 레벨이 높고 강하다.
조금 더 붙어보면 잡을 수 있을 거란 예감이 들긴 했지만, 일단 검은 기사들에게서 떨어져 살짝 거리를 벌렸다.
그러자 녀석들의 경계가 풀어지는 것이 보였다.
따라오진 않는다, 이건가?
그렇다고 이쪽에서 손을 놓고 있을 순 없지.
칼을 뽑아 무라도 베는 게 아닌 무조건 끝장내야 하는 상황.
뒤로 빠지면서 인벤에서 브랜디슈 블레이드를 차례대로 끌어냈다.
【 비검! 】
【 비검! 】
【 비검! 】
:
많은 수는 필요 없다.
딱 한 번.
제대로 들어가기만 한다면…….
그리고 손을 뻗어 소환된 브랜디슈 블레이드 중 몇 자루를 황제에게 향해 겨누었다.
“가라!”
내 손짓에 따라 공중에 뜬 브랜디슈 블레이드들이 황제에게 쏘아져 내렸다.
쐐애액!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쇄도하는 브랜디슈 블레이드를 본 검은 기사들이 일제히 황제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렇게 달려가는 검은 기사들을 보고는 씨익 웃었다.
만약 황제와 궁정 마법사 중 하나를 방어하라면 뭘 해야 할까?
내가 검은 기사라도 당연히 황제를 방어할 것이다.
그렇게 검은 기사들이 죄다 황제에게 뛰어가자 자연스럽게 궁정 마법사의 앞이 비어버렸다.
빙고.
그대로 공중에 남은 브랜디슈 블레이드를 쏘아 내리자 궁정 마법사의 몸 곳곳이 블레이드의 날에 관통되어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시간이 좀 더 있으면 확실히 마무리하고 싶은데…….
관통 대미지에 잠시 쓰러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궁정 마법사가 죽은 것은 아니었다.
조금 있으면 다시 일어날 터.
그리고 황제를 보호하러 간 검은 기사들도 다시 활개 칠 것이다.
뒤를 돌아보자 아까 대전을 따라 양옆으로 쭉 서 있던 플레이트를 입은 기사들이 우리 팀과의 간격을 점점 좁히면서 접근하고 있었다.
거기다 대전 바깥에 대기 중이던 마법사들도 빠르게 뛰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전력이 이게 끝이 아니었어?
어느 정도 쪽수가 맞아야 해볼 만하지 지금은 완전히 함정에 갇혀 버린 기분이 들었다.
대전이 아니었다면 하나씩 상대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완전히 포위된 형국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확실히 잡을 수 있는 대가리를 노린다.
스킬을 아낄 때도 아닌 것 같고.
바로 드래곤 슬레이어를 들어서 미리 저장해두었던 스킬을 황제를 향해 시전했다.
【 용격! 】
그 커다란 덩치를 가진 레비아탄도 괴로워했던 용격이라면 아무리 황제라도!
무려 용을 잡는데 쓰는 용격이 드래곤 슬레이어에서 뿜어져 나오자 대전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그렇게 일자로 발사된 용격이 황제를 덮치려는데 검은 기사들이 앞다투어 몸으로 막으면서 용격에 쓸려나가기 시작했다.
역시 아무리 제국의 기사라도 용격을 막는 것은 무리지.
검은 갑옷이 통째로 녹아나가면서 검은 기사들이 튕겨 나갔고 결국 용격이 황제를 덮쳐갔다.
그런데 황제의 한쪽 팔이 시커멓게 변형되더니 앉은 자세 그대로 팔을 휘둘러 용격을 그대로 올려쳤다.
용격을 맨몸으로 쳐낸다고?!
보고도 믿지 못할 광경.
갑작스러운 황제의 방어에 용격 전체가 틀어지면서 꺾여 올라가더니 바로 대전의 전창을 뚫어버렸다.
쿠구궁!!
“꺄아악!”
용격의 충격에 대전 전체가 울리면서 궁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런 소란 속에서도 황제는 여전히 앉아서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거 인간은 맞는 건가?
어떻게 용격을 팔로만 쳐낼 수 있지?
순간 드워프의 왕이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조심하라는 뜻이 이거였었나…….
용격에 뚫린 궁이 무너져 내리면서 대전도 엉망진창으로 변해갔다.
바로 황제와 거리를 벌리면서 우리 팀에게 돌아갔다.
“형! 빠지죠.”
“그래, 지금은 아닌 것 같으니까.”
그러면서 황제를 노려보는 모습.
재중이 형도 내심 용격이 먹힐 거라고 생각했는데 통하지 않자 생각을 바꾼 것 같았다.
“어쩌면 저놈이 드래곤보다 더 무서운 놈일 수도 있어.”
재중이 형의 가라앉은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대륙의 진짜 괴물은 남들의 시선 속에 묻혀서 여기 따로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궁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기사와 마법사들이 죄다 우리를 포위해 들어왔다.
할 수 없나?
손을 뻗어 브랜디슈 블레이드를 회수한 뒤.
【 미치광이 리치 소환! 】
【 전이문 오픈! 】
사방이 막혀서 도망갈 수 없다면 못 쫓아오는 곳으로 가버릴 수밖에.
전이문이 열리자 다들 재빠르게 전이문을 넘어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전이문에 들어가기 전 고개를 돌려 황제를 보자 여전히 황제는 자리에 앉아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곧 다시 보자는 듯.
얼마 후, 전이문이 닫히자 완전히 암흑 세계로 돌아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황제라…….
“제대로 한 건 했네요.”
내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을 대표하는 제국 황제와 치고받았으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렇게 전이문이 닫힌 방향을 잠시 쳐다보다가 뭔가를 생각한 뒤 하고 싶은 말을 이어갔다.
황제고 뭐고.
우릴 건드린 이상.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제국을 한 번 제대로 털어보죠.”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