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7
#427화 좋은 그림 (2)
이제껏 종류가 다른 몬스터끼리 친한(?) 경우는 본 적이 없었다.
예전에 미스트 윙의 구역에 라이덴이 들어가서 개판 친 적도 있었고.
서로의 영역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친하지 않은 것은 사실.
그런 생각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맞아 들었다.
용의 대지.
이 구역은 용종들이 자리를 꽉 잡고 있었다.
반면에 그들에게 악마형 케르베로스는 완벽하게 이질적인 존재 중 하나였다.
원래라면 이렇게 다른 종이 한자리에서 부딪칠 일이 거의 없겠지만.
전이문은 그걸 가능하게 만들 수 있지.
악마형 케르베로스가 등장하면서 용종들의 시선이 아예 악마형 케르베로스에게 집중되었다.
악마형 케르베로스도 미칠 지경이 아닐까?
또다시 전이문이 생겨 신나게 나와 보니 처음 보는 친구들이 잔뜩 자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것도 전혀 우호적이지 않은 녀석들로만.
거기다 이놈들은 절대 약하지 않았다.
개별적으로는 자기보다 약하겠지만, 그런 녀석들이 백 단위가 넘어간다.
지금 상황은 악마형 케르베로스에게도 엄청나게 부담되는 상황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은 내게 더 없는 즐거움을 줬다.
【 전이문 해제! 】
용종들과 악마형 케르베로스가 싸운다고 정신이 팔렸을 때 시스템을 불러와 전이문을 해제시켰다.
물론, 시간이 좀 걸리기야 하겠다만.
워낙 옹기종기 엉켜서 싸우고 있는 판이라 악마형 케르베로스가 몸을 뺄 여유가 전혀 없었다.
웃긴 건 전이문을 통해 저쪽 편으로 넘어가는 녀석도 몇 보였고.
싸우다 밀려서 넘어간 건지 자의로 넘어간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살긴 글렀다.
반대편에 무시무시한 녀석이 있으니.
그렇게 전이문이 완전히 닫히자 저쪽과 이쪽이 완전히 단절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악마형 케르베로스가 돌아갈 길이 없어졌다는 뜻이기도 하고.
이제는 도망치려고 해도 도망갈 수가 없었다.
재중이 형이 그걸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림 좋네.”
“나쁘지 않죠?”
“어, 지금 상황에선 확실히.”
일단 목표는 악마형 케르베로스의 부위 파괴.
전에 녀석의 손날을 부수면서 부위 파괴에 대해 의문을 가진 점이 있었다.
과연 손날 하나하나가 다른 내구도를 가질 것인가?
아니면 하나씩만 순서대로 파괴가 되는 것일까?
그렇게 부위 파괴에만 집중했던 나만이 알 수 있던 사실 하나.
“손날 하나마다 각기 다른 내구도를 가졌었어요.”
“그래?”
“네, 전에 부위 파괴를 하려고 계속 손날 하나만 쳤었거든요. 그러니까 그쪽만 계속 금이 가고 다른 쪽은 멀쩡했어요. 두 번째 부술 때도 마찬가지고. 완전히 다 부수려면 정확하게 원하는 부위만 때려야 깨질 거예요.”
“흐음, 열 개나 되는 걸 다 부시려면 고생 좀 하겠는데.”
“그래서 준비했죠. 저 상황을.”
그냥 무작위로 손날의 내구도가 깎여나가는 상황을.
우리가 일일이 하려면 지금 인원으로는 다소 부족한 감이 있었다.
혹은 주변에서 물약을 끊임없이 지원해줘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야 했고.
전에 가르시아 제국에서는 워낙 사람이 많고 그러다 보니 물약 제공에 대해선 큰 문제가 없었다.
여차하면 물약을 사서 바로 제공하면 되니까.
하지만 사람들이 끼어드는 통에 발목을 잡혔다.
그때 얻은 손날도 유저들이 끼어들기 전에 얻은 것이 전부일 정도로.
반대로 여기선 물약 수급이 어려웠다.
물약을 가지러 가려면 드워프 왕국으로 가는 길을 다시 뚫고 동굴을 지나 지하로 내려가 물약을 사서 다시 들고 올라와야 한다.
그나마 괜찮은 방법이 악마형 케르베로스를 드워프 왕국 코앞에서 소환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잘못하다가 드워프 왕국이 통째로 날아갈 위험이 있어서 이것도 패스.
그래서 생각한 대안이 녀석들이다.
저 용종들.
“우리 대신 내구도를 좀 깎아줄 녀석들이 필요했어요.”
어쩌면 악마형 케르베로스의 체력이 먼저 다해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물론, 이 상황은 건질 것이 없긴 하지만 그렇다고 손해는 전혀 보지 않는다.
어차피 지금 산 건너 불구경 중이라.
“최대한 내구도를 깎아놓고 마무리만 하겠다?”
“네, 저렇게 치고받다 보면 알아서 깎이겠죠.”
유저들과 다르게 용종들은 검과 같은 무기를 들고 있지 않으니까.
검으로 같은 부위를 일일이 치는 것은 어렵지만 용종들은 반대다.
그냥 몸으로 치고받다 보면 알아서 내구도를 깎아줄 것이다.
여기까지가 첫 번째 이유.
“그리고 저거요.”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챠밍, 이쁜소녀, 막내별이 내가 가리킨 곳을 보고는 깜짝 놀란 듯 말했다.
“어머? 왜 아직도?”
“와! 아직도 그대로 있어요.”
“아, 그러고 보니 부서졌다는 메시지도 안 떴죠?”
바로 거점.
아직도 거점이 무사했다.
아니.
무사하다기 보다는 신경을 안 쓰고 있다는 쪽에 가까우려나.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가장 적대적인 악마형 케르베로스에 집중하는 모양새였다.
제자리에 있는 거점과 실제로 자신들을 죽일 수 있는 악마형 케르베로스는 위협도 면에서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압도적으로 악마형 케르베로스가 위협적이지.
반대로 악마형 케르베로스 입장에서도 용종들이 적이나 마찬가지였다.
나오자마자 죽어라 덤벼드는데 가만히 목 빼고 죽어줄 수는 없는 노릇.
이런 상황이 겹쳐지니 아주 웃긴 그림이 나왔다.
우리 거점을 악마형 케르베로스가 지켜주고 있는 아주 좋은 그림이.
전사 형이 내 머리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누르고 감탄했다.
“대체 뭘 해야 저런 생각이 튀어나오냐?”
전사 형을 바라보면서 그저 웃어 보였다.
적의 적을 이용해서 거점을 지키고, 적의 적을 이용해서 원하는 이득을 뽑아낸다.
“하나 더 있어요.”
“또?”
“네, 여기 몬스터들이 어떻게 돌아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 악마형 케르베로스가 저 상황을 이겨내면 꽤 재밌어질 수도 있어요.”
이건 나만의 생각.
거점을 설치했을 때 주변 몬스터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이건 이미 두 번이나 해봐서 잘 알고 있는 사실.
만약 거점을 설치해놓은 상태인데 주변 몬스터가 없다면, 새로 생성된 몬스터들도 이전처럼 우르르 모여들까?
이건 좀 더 지켜봐야 알겠지.
그리고 그건 악마형 케르베로스가 앞으로 잘 보여줄 것이다.
재중이 형이 거점 주변에서 벌어지는 몬스터 대전을 흥미롭게 바라보면서 웃었다.
“진짜 잘 싸우네.”
확실히 재중이 형 말대로 악마형 케르베로스는 잘 싸우고 있었다.
드레이크, 바실리스크, 레서 드래곤 할 것 없이 악마형 케르베로스의 무력시위에는 당하지 못하는 것 같았고.
악마형 케르베로스가 달려드는 용종들을 파죽지세로 제거해나갔다.
물론, 그만큼 악마형 케르베로스가 입는 피해도 점점 늘어났고.
점점 악마형 케르베로스의 신체를 감싸고 있는 검은 기운이 너덜너덜한 누더기가 되어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져갔다.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피해.
그리고 손날도 곳곳이 부서져 금이 간 상태가 되었다.
죄다 금이 가거나 혹은 반파되어 흔들리는 것까지 보였고.
악마형 케르베로스가 죽어서 레벨이라도 오르는 상태였다면 절대 이 짓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용종들을 죽일 때마다 레벨을 올려 몸을 회복해 버리면 지금 하고 있는 작전은 실패고, 만약 오버라도 되면 정말 감당이 안 될 테니까.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주변을 살펴보던 챠밍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오빠, 몬스터들이 얼마 안 나타나요.”
“역시…….”
몬스터들이 거점을 처음 설치한 순간처럼 우르르 몰려들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아마도 이건 리젠의 문제.
당분간 소수의 용종만 상대하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상황은 우리에게 나쁘지 않았고.
“형, 이쯤에서 회수할까요?”
“그래, 때가 됐네.”
재중이 형이 동의하자 바로 시스템 창을 열었다.
그리고.
“거점 해체.”
《 거점 【 신화 】를 정말 해체하시겠습니까? 》
그런 시스템 음이 울리자 지체 없이 해체를 수락했다.
《 거점 【 신화 】가 해체됩니다. 》
《 거점 【 신화 】에 등록된 모든 시설물이 삭제됩니다. 》
《 거점 【 신화 】에 등록된 모든 NPC가 해산합니다. 》
《 크루아 대륙에서 거점 【 신화 】 가 사라집니다. 》
《 부활 포인트가 리셋됩니다. 》
거점 신화가 해체되자 또다시 시스템 음이 전 서버로 흘러나왔다.
-또 신화야?
-쟤들은 거점 가지고 뭐하는 거지?
-저놈들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
-모름, PVP 대전 땐 보였는데 갑자기 사라짐. 어디에서 사냥하는지도 모르겠다.
-거점 얻으려면 빨리 작위를 얻어야 할 텐데.
-작위 얻는 방법 아시는 분, 삽니다.
-알면 내가 하지 그걸 왜 파냐.
또 주목받는군.
시끌벅적한 채팅창을 옆으로 밀어두고 정면을 주시했다.
거점을 해체하자마자 부활 포인트가 있던 마법진이 사라지면서 빛을 잃었다.
그리고 바로 나르샤 누나에게 물었다.
“나르샤 누나 몹들은요?”
내 말에 제3의 눈으로 멀리 있는 장소들을 쭉 살펴본 나르샤 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아.”
“좋네요.”
리젠된 용종이 계속 몰려들면 작업을 할 수 없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악마형 케르베로스가 남아 있던 용종들을 거의 대부분 제거해 사냥터가 한산해졌다.
내가 일어나자 재중이 형을 비롯한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따랐다.
재중이 형이 우리에게 말했다.
“전사는 최대한 붙잡고 늘어져. 어차피 단기전이니까 물약 아끼지 말고, 나르샤는 어글 좀 먹어주고, 주호를 프리로 두는 게 핵심이니까, 그리고 소녀는 다리만 노려서 자세를 무너뜨리는 데만 집중해. 챠밍하고 막내별은 회복만. 굳이 더 이상 체력을 깎을 필요는 없으니까.”
오더가 떨어지고 악마형 케르베로스의 근처까지 다가가자 남아 있던 마지막 용종이 악마형 케르베로스의 손날에 뚫려서 죽음을 맞이했다.
정말 이때를 위해 기다리고 기다렸다.
용종이 다 사라지고, 더 이상 날아오지 않으면서 악마형 케르베로스가 약화되어 있는 지금을.
그리고 녀석에게 회복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적이 붙어 있으면 자연회복을 할 수 없으니.
“갑니다.”
전사 형이 먼저 달려들어서 단번에 어글을 가져왔다.
물약 소비를 신경 쓰지 않으면 평소보다 훨씬 공격적으로 나갈 수 있다.
잠시 전사 형이 어글을 잡는 것을 지켜보다가 곧장 재중이 형과 이쁜소녀도 달려들었다.
둘의 역할은 최대한 녀석의 자세를 무너뜨리는 것.
다리에 하나씩 붙어서 라이데인과 데스 나이트 배틀 액스로 계속해서 자세를 흔들었다.
무리하게 치고 들어가도 챠밍과 막내별이 빠르게 회복을 걸어주었다.
시선이 조금만 돌아가려고 하면 나르샤 누나가 계속 화살을 날려 방해를 했고.
거기다 이전에 용종들과 싸우면서 검은 쉴드가 거의 다 날아갔는지 유독 공격이 잘 먹히는 것 같았다.
상황이 괜찮다.
【 트리플 캐스팅! 】
【 라이트 웨폰! 】
【 라이트닝 웨폰! 】
【 아쿠아 웨폰! 】
웨폰을 연속으로 불러낸 다음.
【 시간의 서! 】
【 트리플 캐스팅! 】
【 다크 웨폰! 】
【 포이즌 웨폰! 】
추가로 웨폰을 더 불러냈다.
그리고 우리 팀이 악마형 케르베로스의 자세를 한 번씩 무너뜨릴 때마다 치고 들어가 녀석의 손날을 강력하게 후려쳤다.
이전보다 훨씬 강력한 조합에 녀석의 손날이 위로 튕겨 나가는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확실히 르아 카르테와 이 조합은 파괴적이었다.
그만큼 우리 팀도 견제하기 쉬워졌고.
거기다 크리티컬이 워낙 자주 들어가니 케르베로스의 스킬 캐스팅이 중간에 계속 끊겨나갔다.
캐스팅을 하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그 틈을 절대 주지 않았다.
헬 라이팅 같은 기술이 한 번 터지면 우리도 쉽게 갈 수 없으니까 아예 초장부터 막는 것은 필수였다.
툭!
『 악마형 케르베로스의 검은 손날 / 제작 재료 』
『 악마형 케르베로스의 검은 손날 / 제작 재료 』
워낙 손상이 많이 되어 있어서 그런지 르아 카르테로 강격을 넣자 크리티컬이 터지면서 균열이 쫙 생겨났다.
그렇게 반쯤 부서져 있던 녀석의 검은 손날들이 떨어지자 잽싸게 품에 챙겨 넣었다.
전사 형이 그걸 보더니 한껏 웃었다.
“빙고!”
“더 바싹 붙어주세요. 속도 낼게요.”
“오케이!”
툭!
『 악마형 케르베로스의 검은 손날 / 제작 재료 』
툭!
『 악마형 케르베로스의 검은 손날 / 제작 재료 』
좋아!
생각 이상으로 내구도가 훨씬 많이 떨어졌어.
용종들이 너무 잘해줘서 고마울 정도.
부위 파괴 작업을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어렵지 않게 손날들을 죄다 떨어뜨리자 악마형 케르베로스의 위력이 상당히 많이 떨어졌다.
그리고 더 이상 부위 파괴할 손날이 없자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즉흥적으로 미치광이 리치를 꺼냈다.
내가 미치광이 리치를 꺼내자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재중이 형은 뭔가를 눈치챘는지 바로 재밌다는 듯 입가를 올렸고.
【 전이문 소환! 】
전이문을 소환시켜놓고 잠시 기다렸다.
과연 이것도 될지.
그러자 넝마가 된 악마형 케르베로스에게 거친 음성이 터져 나왔다.
『 네 이 녀석들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
으음, 역시 이것까지는 안 되나?
하긴 이것도 되면…….
그러데 갑자기 악마형 케르베로스가 우리 팀을 떨쳐내고는 전이문을 향해 달리더니 그대로 전이문을 타고 사라져 버렸다.
한참 긴장해서 전투 중인 이쁜소녀와 챠밍이 넋 빠진 표정으로 악마형 케르베로스가 사라진 전이문을 바라봤다.
“어라?”
“도망… 가네요?”
그리고 바로 전이문을 닫아버렸다.
몬스터들로 북적이던 사냥터에 우리 팀만이 남아버렸다.
케르베로스가 남긴 손날과 함께.
전방에서 상대한다고 상당히 지친 전사 형이 내게 물었다.
“잡을 수 있지 않았어?”
전사 형 말이 맞다.
좀 무리했으면 분명히 잡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아, 원래 잡을 생각이었는데… 중간에 생각이 바뀌었어요.”
“그래?”
손날을 다 얻고는 생각했다.
굳이 이 녀석을 죽일 필요가 있을까 하고.
그러자 그다음은 명확했다.
녀석을 놓아주기로.
잡는다면 다음부터는 이걸 써먹을 수 없으니까.
“다들, 한 번 더 고생 좀 하죠. 이번 기회에 한 번 탈탈 털어 봐요.”
한번으로 부족해?
그럼, 또 불러내면 된다.
과연 어디까지 뱉어낼지 한 번 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