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0
#380화 한 번 같이 죽어 봐? (3)
해원이 있던 자리를 바라봤지만, 아이템 드랍은 없었다.
한 연합의 장이니 뭔가 떨어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쉽네.
드랍 됐다면 꽤 돈이 되는 녀석이 나왔을 텐데…….
그런 아쉬움을 뒤로 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해원의 죽음.
천상 연합 입장에서는 머리가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데스 나이트에 쫓기던 녀석들은 계속 쫓기고 싸울 녀석은 싸우고.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 다른데?
해원이 죽자마자 천상 연합 전체가 날 공격하기 위해 움직일 거라 생각하고 잔뜩 긴장하던 내가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물론, 변화가 있기는 했다.
해원을 보좌하다가 오버된 데스 나이트를 상대하기 위해 잠시 떨어져 나간 녀석들.
그 녀석들이 오버된 데스 나이트를 그대로 두고 다 뒤로 빠져 버렸다.
잠시나마 중심을 잡아주던 놈들이 슬쩍 빠져나가자 오버된 데스 나이트가 다시 날뛰면서 천상 연합을 휩쓸기 시작했다.
저 녀석들.
왜 저렇게 연계가 안 되지?
위나 아래나 할 것 없이 서로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해원을 보좌하던 녀석들까지도 나를 향해 공격을 해오는 것도 아니고 잠시 나를 흘깃 보더니 그대로 전장에서 사라져 버렸다.
마치 자기들 일을 다 했다는 것처럼.
그 모습을 보다가 바로 뒤로 빠져나왔다.
상황이 개판이긴 했지만, 이곳은 천상 연합 진영 한복판이다.
굳이 상대방 진영에서 오래 머물 필요는 없었다.
천상 연합의 영역을 빠져나오자 재중이 형이 외곽에서 우리 팀과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다들 무사하구나.
숫자가 월등히 많은 천상 연합을 상대로 시간을 끌어준다고 싸웠는데도 불구하고 죽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뭘 그렇게 멍하니 보고 있었어? 인사 끝났으면 빠져나와야지.”
“아, 반격할 줄 알았는데 너무 반응이 없어서…….”
“확실히 그렇지? 우리도 너 빼오려고 했는데…….”
“해원을 모르는 것 같았어요.”
내가 느낀 단 하나.
천상 연합의 꼭대기에 해원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르는 것 같았다.
“그게 핵심이지. 우두머리가 누군지 모르는 것. 아마, 명령 같은 것도 다 중간에 거쳐서 내려갈걸?”
중간에 해원을 보좌하던 녀석들이 그대로 빠진 것도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아서였나.
“저쪽도 참 콩가루네요.”
“크큭,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
내 말에 재중이 형이 웃기 시작했다.
“우리 쪽은 다 괜찮아요?”
신화나 최강 쪽은 보면 바로 확인되지만 달 길드나 치맥 길드는 알 수 없었다.
“뭐, 저쪽은 나름 선방한 것 같고. 크게 전력이 줄어들진 않았어.”
“다행이네요.”
오버된 데스 나이트가 천상 연합과 놀아주는 사이 빠르게 리치를 해결하려면 스칼렛과 이슬두잔의 전력이 필요했다.
방어전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이 안 되는 지금 상황에서는 더욱더.
“리치는 어떻게 됐어요?”
생각보다 빠르게 해원을 잡아냈고, 천상 연합이 정신을 못 차리는 덕분에 꽤 시간을 벌었다.
이제 슬슬 마침표를 찍어야 할 시간.
내 물음에 재중이 형이 아주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에 보일 듯 말 듯 미치광이 리치가 온갖 마법을 사용하면서 주변 유저와 싸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유저들을 학살하는 그림이.
데스 나이트가 없다고 한들 미치광이 리치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강하다.
또 체력과 마력을 가득 채웠겠는데.
하늘 위에 떠 있는 검은 구를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겨우 깎아놓아도 잠시만 한눈을 팔면 제자리.
그때 나와 재중이 형의 데스 나이트 변신이 풀려 버렸다.
그러자 재중이 형이 바로 품속에서 데스 나이트 변신 주문서를 꺼냈다.
“시간 없다. 달리자.”
그 순간 인벤에 있던 스킬 쿨타임 초기화를 떠올렸다.
데스 나이트 하트를 되돌려도 되지만 변신 주문서가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까진 느끼지 못해 일단 그대로 두는 쪽을 선택했다.
마법서라 일단 한 번 익히면 끝.
사용은 신중하게 하는 편이 좋았다.
시간의 서는 묻어두고 인벤에서 데스 나이트 변신 주문서를 꺼냈다.
그런데 그 순간 의외의 현상이 일어났다.
하늘이…….
우르릉거리는 소리와 함께 검은 구름이 옆으로 갈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도 미치광이 리치가 있는 장소 위로.
그렇게 구름이 갈라지더니 그 사이로 한 줄기 새하얀 번개가 미치광이 리치가 있는 위치에 그대로 떨어졌다.
멀리서도 눈이 부실 정도의 번개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콰앙!
“크에엑!”
그리고 터져 나오는 강력한 폭발.
심지어 주변을 환하게 만들면서 근처에 있던 언데드가 한꺼번에 싹 증발해 버렸다.
거기에 새하얀 번개를 맞은 미치광이 리치의 검은 방어막은 한 번에 찢겨나가 너덜너덜한 모습을 보여줬다.
단 한 방에 다운이라고?
위력이 얼마나 세기에.
이 정도 위력이 나오려면 진(眞) 썬더볼트 소환 정도가 아니면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는 딱 한 사람밖에 없었다.
“……챠밍?”
순간 챠밍이 쓴 마법인 줄 알고 시선을 돌려서 챠밍을 봤다.
그런데 챠밍 역시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아니에요.”
“그럼 저 마법은 대체 뭐지?”
그렇게 하얀 낙뢰가 떨어진 곳을 멍하게 바라보는데 그 위로 한 번 더 새하얀 번개가 쏟아져 미치광이 리치를 타격했다.
한 방도 저렇게 강한데.
두 발씩이나?
고개를 돌려 재중이 형을 봤는데 재중이 형 역시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리 말고 이 정도의 위력을 낼 수 있는 유저라…….”
혼란스럽기는 매한가지.
어딘가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큰 유저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간 겪어왔던 상황에 비추어보면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그때 챠밍이 뭔가 생각난 듯 말을 꺼냈다.
“음, NPC 아닐까요?”
“NPC? 아!”
지금 시점에서 저 정도의 위력을 내려면 챠밍이 생각한 것이 맞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바로 생각나는 NPC.
쉴라.
하지만 쉴라는 우리가 죽였는데…….
다른 NPC도 있나?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중앙성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마치 바다가 갈라지듯 유저들이 양쪽으로 쭉 갈라졌다.
“쳇, 시간 오버네.”
재중이 형이 그 모습을 보자마자 한숨을 쉬었다.
시간 오버.
예전에 베네아 방어전을 할 때, 유저들이 해결을 하지 못하자 결국 NPC가 나서서 몬스터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지금도 아마 같은 맥락으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쉴라의 빛 버프를 받아서 해결이 가능하면 유저들이 처리하고, 아니면 지금처럼 후속 조치를 하는 식으로.
유저들이 갈라진 사이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새하얀 갑주를 입은 기사 한 명이 위풍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한 손에는 마치 번개를 잘 벼려놓은 것 같은 형상의 긴 창을 들고서.
창…? 창병인가?
아니, 이 경우에는 창기사라고 하는 편이 맞을지도.
온몸에서 피어오르는 강렬한 하얀 기운을 보면 누가 봐도 NPC였다.
그것도 리치를 스킬 한 번에 눌러 버릴 수 있을 정도의 아주 강력한.
네임이 한켈인가.
한켈?
어디서 많이 본 것 같기도 하고…….
그때 이쁜소녀가 기억나는지 말을 해줬다.
“국왕 옆에 있던 기사 NPC?”
“아, 분명 그런 이름이었지.”
쉴라와 더불어 이 왕국의 최대 전력이려나.
빛 속성을 쓰는 것도 똑같고.
국왕을 지키는 NPC가 직접 나섰다는 것 자체가 이 방어전의 끝을 이야기했다.
애초에 방해를 받지 않고 계속 레이드를 했으면 이 녀석이 나타나기 전에 충분히 미치광이 리치를 잡았을지도 모른다.
이제 저 NPC가 나선 이상 우리에게 남겨진 선택지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형, 전처럼 막타… 아, 이건 안 되겠죠.”
예전 NPC에게 피해를 입고 도망가던 오우거 로드를 잡아서 템을 먹은 적이 있는데 지금은 그게 불가능했다.
우리 덕분에.
“그러게. 아쉽네.”
새하얀 갑주를 입은 한켈이 유저들을 지나 걸어 나오다가 잠시 우리를 바라봤다.
움찔.
분명히.
우린 쉴라를 잡아서 현재 왕국과는 적대 상태다.
당연히 저 NPC와도 적대 관계일 테고.
한켈이 잠시 우리를 노려보더니 창을 거두고 다시 정면을 향해 달려나갔다.
일단은 이벤트가 먼저라는 거네.
아니면 지금 바로 싸웠을지도.
그렇게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 정체 모를 창을 휘두르며 미치광이 리치를 사정없이 후려치기 시작했다.
한 방, 한 방이 터질 때마다 북 치는 소리가 나면서 미치광이 리치의 검은 방어벽이 눈에 띄게 사라졌다.
그리고 그 사이로 검은 기운이 계속 흩어졌고.
쉴라와 다른 순수한 전투형 NPC.
단순하지만 빠르고 강하다.
특히 저 번개무늬가 잔뜩 새겨진 창.
저 창이 휘둘러지는 공간에 닿은 미치광이 리치의 모든 마법이 부서지고 캔슬당했다.
“와, 저건 좀 가지고 싶네.”
재중이 형이 감탄을 하면서 눈을 빛냈다.
가지고 싶다는 표정을 전혀 숨기지 않은 채.
“……한 번 붙어볼까요?”
솔직히 나도 미치광이 리치보다 저 이벤트 NPC에 더 눈이 갔다.
리치를 잡아봐야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은 대략적으로 예상이 되었다.
물론, 오버된 리치를 잡으면 좀 더 좋은 것을 주기야 하겠지만…….
하지만 그것만큼이나 저 한켈이라는 창기사의 아이템들이 탐나는 것도 사실이다.
“크큭, 방어전을 아주 개판으로 만들어 보자고?”
재중이 형이나 나나 방어전에서 1등을 해서 얻을 이득을 잊은 지 오래다.
NPC를 잡으면 아이템이 떨어진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저 한켈이라는 창기사 역시 우리에게는 그저 아이템 덩어리로 보였다.
이벤트고 뭐고 관심도 없는 우리 모습을 보더니 스칼렛이 한숨을 쉬었다.
“아! 정말 이 남자들이!”
그러고 보니 이쪽도 우리를 위해 사활을 걸었지.
생각해 보면 우리도 넉넉한 상황은 아니기도 하고.
일단, 어떻게든 미치광이 리치는 우리 손으로 잡아야 했다.
그걸 위한 최후의 보루 정도는 준비해 놨다.
워낙 압도적으로 한켈이 미치광이 리치를 밀어붙이자 페이즈가 빠르게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상황이 되자 사방에 떨어져 있던 오버된 데스 나이트들이 동시에 한켈에게 달려들었다.
그걸 본 재중이 형이 흥미로운 눈빛을 보냈다.
“한켈이 질 수도 있으려나?”
강 건너 불구경.
열 기의 시커먼 데스 나이트 사이에서 하얀 갑주를 입은 한켈이 단독으로 싸우는 것을 보는 것도 진풍경이었다.
“이벤트 NPC면 당연히 이길 줄 알았는데…….”
의외로 한켈이 데스 나이트와 미치광이 리치에게 고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방어전 끝이 왜 이렇지?
전에는 그냥 끝나는 분위기였다면 지금은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우리가 쉴라를 잡았잖아.”
“아!”
원래는 한켈이 쉴라의 버프를 받아서 더 강력하게 몰아붙여야 하는데 지금은 그게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이거 우리가 방어전을 완전 엉망으로 만들었는데?”
의외의 상황에 선택지가 두 개로 늘어나기는 했다.
한켈을 도와 리치를 잡는 것.
리치를 도와 한켈을 잡는 것.
한쪽은 완전히 왕국과 척을 지자는 거고.
다른 한쪽은 아무래도 아쉬움이 남았다.
어쩌면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일 수도 있다.
고민하던 찰나, 재중이 형과 내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리고 동시에 한마디씩 했다.
“다 먹자.”
“다 먹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