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4
#354화 흔들리는 (2)
사장님께 연락을 받고 난 뒤 접속한 길드원 모두 로테의 길드 건물로 모였다.
다만, 그 규모는 시끌벅적했던 이전의 모습은 아니었다.
“허허…….”
1층 회의실 테이블과 주변에 서 있는 길드원들을 한 번씩 바라본 사장님 입에서 조금 허탈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길드원 팔십 명 중 오십 명에 가까운 사람이 사라졌으니까.
우리가 길드원들을 소집하는 도중에도 몇 명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재중이 형은 뭔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재밌네.”
“음, 그렇게 재밌진 않아.”
옆에 서 있던 수호 형은 재중이 형의 말을 지적하면서 표정을 굳혔다.
“넌 이 상황이 재밌어?”
최종병기 형도 역시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당연히! 재밌지, 그럼.”
재중이 형을 오래 봤다면 봤다고 할 수 있지만 지금의 저 표현은 이해를 못 하겠다.
현 상황은 길드원 절반 이상이 빠져나가면서 터지기 직전이라는 것.
가장 큰 타격은 사냥터를 지키지 못한다는 것.
기본적으로 로테이션을 돌려가면서 사냥터를 유지해야 하는데 일정 수 이하의 길드는 그런 일 자체가 벅차다.
아니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사냥터를 비워줘야 하는데 그러면 그만큼 길드 규모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아니, 이미 규모는 많이 줄어들었지.
아마 광산 던전 중앙 방을 온전히 차지하기는 힘들 것이다.
챠밍과 이쁜소녀도 확연히 줄어든 길드 상황을 보고는 깜짝 놀랐는지 말을 아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더라도 이 침체된 분위기를 되살리기는 힘들다는 걸 아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와 사장님만을 그저 번갈아 봤다.
“괜찮아.”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 정도.
자주 겪지 못하는 상황이라 그런지 솔직히 혼란스럽고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챠밍과 이쁜소녀가 무작정 걱정하도록 내버려두고 싶진 않았다.
“네, 오빠.”
챠밍은 내 말에 조금 굳은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이쁜소녀도 마찬가지.
그렇다고 완전히 침울하고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고.
어차피 길드원들과 우리가 플레이하는 방향 자체가 워낙 차이 나다 보니까 패닉 상태에 이르진 않았다.
아이꿍, 슬이아빠, 체리, 천둥, 현역여대생, 발키니 아주머니, 사탕 커플 등 우리와 연관이 있거나 대회 때 스카우트했던 유저들은 모두 이 자리에 참석했다.
그나마 다행인가.
저들이 떠났으면 좀 많이 섭섭했을 것 같았다.
현역 여대생이 오랜만에 길드 건물에서 날 봐서 그런지 눈을 반짝이면서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얼굴에 기쁜 티를 엄청나게 내면서.
얘는 지금 분위기가 안 느껴지나.
평소하고 똑같네.
이런 상황에서 같이 어울려줄 순 없기에 살짝 굳은 표정으로 바라봤더니, 현역 여대생이 새초롬한 표정으로 날 노려봤다.
쌓인 것이 많다는 그런 기분을 팍팍 내면서.
“오빠, 요즘 너무 보기 힘들어요!”
“아, 미안. 생각보다 바쁘네.”
솔직히 말하면 좀 부담스럽기도 하고.
볼 때마다 날 잡아먹을 것처럼 달라붙으니…….
그리고 옆에 있는 사람들이 그걸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고.
순전히 내 느낌이지만.
“사람이 많이 줄었네요?”
“휴, 이 상황 모르는 줄 알았어. 평소하고 너무 똑같아서.”
“뭐, 어때요. 떨어져 나갈 사람들 다 떨어져 나가니까 널널하니 좋은데. 그러잖아도 매번 추파 던지는 사람들 때문에 피곤해 죽을 것 같았어요.”
그러면서 현역 여대생이 갑옷 아래의 하얀 티셔츠를 바깥으로 쭉 늘려 보이는 모션을 취했다.
니가 그러니까…….
그럴 거라는 말은 차마 못 하고.
코스튬이야 자유에 가까워서 현대의 옷과 갑옷을 겹쳐 입는 것도 가능했다.
그래서 저런 복장이 나오겠지만.
얘는 걱정할 것이 없겠다.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는 모습이라서.
사탕 커플은 뭐, 항상 둘이서 사냥을 다녔고.
지금은 여성 쪽이 레벨을 근접하게 따라잡아서 곧 합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발키리 아주머니야 기본 이상을 해주시니 걱정 안 해도 되고.
이번에 떠나지 않은 것만 해도 감사해야 할 정도.
“떠났으면 어쩌나 했어요.”
“어머? 내가 왜?”
발키리 아주머니가 허리를 쭉 펴면서 날 바라봤다.
의아함을 가득 담은 채.
“아, 아뇨. 이번에 워낙 많이 사람이 떠나서요.”
“그래서 나도 떠난 줄 알았어? 한 번 데려왔으면 책임을 져야지. 그래, 안 그래?”
“……굉장히 무서운 말이네요.”
그러면서 주변을 둘러보는 시늉을 하자 발키리 아주머니가 장난스럽게 내 허리를 툭 건드리면서 미소 지으셨다.
아주머니가 아니라 편한 동네 누나 같네.
그런데 그때 의외의 말을 들었다.
“천상에서 나 포섭하려고 했다?”
“네?”
“말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천상에서 연락 오더라니까? 돈 들고.”
발키리 아주머니 표현은 돈이지만 아마도 스카우트 비용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솔직히 누구나 혹할 정도의 제안이었어. 요새 남편이 좀 힘들어하기도 하고. 나도 요즘 아이템 강화며 투자한다고 빠듯하기도 했고.”
역시 돈이었나.
아직 사정을 듣지 못해 몰랐는데 이제야 알게 되었다.
“대체 얼마나?”
내 말에 발키리 아주머니가 내 옆에 오더니 내 귓가에 대고 액수를 이야기해주셨다.
“예?!”
액수를 듣고 내가 깜짝 놀라자 주변 사람들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아, 아뇨. ……아니에요!”
그 말에 다들 싱겁다는 듯, 하던 일을 했다.
사람들이 돌아서자 발키리 아주머니에게 다시 말했다.
“진짜요?”
“응. 혹하지?”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요.”
해원, 이 인간이 미친 건가?
도대체 무슨 돈을 이런 식으로…….
발키리 아주머니가 그런 날 보더니 고민을 털어놓듯 말을 꺼냈다.
“그동안 친해진 애들도 제법 있었는데 많이 넘어갔더라.”
“그런가요…….”
발키리 아주머니는 늦게 들어온 경우였다.
현역 여대생처럼.
그래서 친해진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을 텐데 그중에서도 꽤 다수가 넘어간 모양이었다.
“뭐, 어쩌겠어. 갈 사람은 가야지.”
밝았던 표정에 그늘이 지자 속에서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하아, 해원.
이 새끼를 진짜 어쩌지.
현역 여대생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비슷한 경우라고 봐야 했고.
그런데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챠밍도 같은 말을 했다.
“오빠, 사실 저도 제의를 받았었어요.”
“너도?”
“네.”
“얼마나?”
“들으면 깜짝 놀라실걸요?”
챠밍이 액수를 이야기하자, 발키리 아주머니가 옆에서 화득짝 놀란 모습을 보였다.
“어머? 해원 이 새끼? 나보다 열 배는 더 쳐줬잖아?!”
마치, 본인 몸값이 낮아서 버럭한 것 같은 느낌…….
확실히 과도할 정도의 몸값을 불렀다.
열 배라…….
그만큼 챠밍을 높게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쁜소녀도 똑같이 손을 들었다.
“저도요.”
“너도?”
“네…….”
“괜찮아. 믿고 있으니까.”
내 말에 죄지은 것 마냥 챠밍 뒤에 숨어 있던 이쁜소녀가 고개를 불쑥 내밀고 수줍게 웃었다.
“헤헷.”
솔직히 돈에 움직일 애도 아니고.
무엇보다 이쁜소녀가 마음만 먹으면 해원을 역으로 보낼 수 있을 텐데…….
스카우트도 봐가면서 해야지.
전사 형이나 나르샤 누나도 마찬가지로 제의를 받았다는데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고 했다.
“일단, 다 찔러본 것 같긴 한데?”
“받고 좀 어이없었어.”
두 사람은 특별히 문제없을 거다.
애초에 우리 팀은 제안을 받아봐야 간에 기별도 안 갈 테니까.
해원이 진짜 한 재산 내줄 생각으로 덤비지 않는 이상에야…….
무리다.
그리고 돌아다니면서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대부분 같은 이야기가 나왔다.
해원 이 인간, 진짜 길드 전체를 사들일 생각이라도 한 건가?
돈으로 길드 유저를 빼가는 것은 욕먹기 딱 좋은 일이다.
특히 에이스는 더욱.
그건 그 길드와 전쟁을 하자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지금 해원이 하는 일이 그런 일이다.
우리에게 대놓고 도발을 하고 있었다.
일단, 원인을 알았으니 대책은 세워야겠는데?
발키리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끝낸 뒤, 우리 팀과 함께 재중이 형에게 가니 프로 형들과 이야기가 끝났는지 사장님과 길드 마스터 방에 따로 모여 있었다.
마침 잘됐네.
“형, 발키리 아주머니한테 들었는데.”
“아, 스카우트?”
“알고 있네요.”
“어, 우리 빼고 다 돌린 모양이더라. 남아 있는 사람들도 한 번씩 다 받았다네. 상도덕 없는 새끼.”
“네, 저도 들어보니까 그렇다고 하던데요.”
“사실 액수가 적지 않아. 사람마다 좀 차등이 있지만 예상을 훌쩍 넘어. 해원을 너무 얕봤나.”
그 말을 하면서도 재중이 형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여전히 짓고 있었다.
“형은 걱정도 안 돼요?”
“뭐가?”
“길드원 많이 빠졌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그때, 재중이 형의 의외의 말을 했다.
“딱 좋을 때. 큭큭.”
마치 홀가분하다는 그런 표정.
“네?”
“길드원 좀 쳐낼까 고민 중이었는데, 같이한 정도 있고, 마구잡이로 쳐내기도 힘들잖아. 초창기 멤버라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니까.”
애초 최강 길드는 오크 족장을 잡기 위해 만들어진 임시 길드나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스타팅 포인트도 서로 달라 원하는 사람들을 뽑기 힘들었고.
그러다 제우스 같은 녀석도 들어오게 된 거고.
초반에 치고 나가던 사람들을 잡아서 모아둔 거라 재중이 형이 원하는 엘리트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 제법 많았다.
그런 제우스가 떨어져 나가면서 비슷한 사람을 많이 데리고 나갔지만 남은 사람들과 차이는 그냥 남느냐 제우스를 선택했느냐만 다를 뿐.
질적으로 크게 좋아진 면은 없었다.
재중이 형과 우리 팀이 있어 최강 길드가 그렇게 유명세를 얻은 것이지, 우리가 없었다면 상위에 이름을 붙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간 알면서도 개편을 못 한 것은 길드를 나가라고 하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는 점이다.
지금 재중이 형이 말하는 것은 그 어려운 일을 해원이 해결해줬다는 건가?
“난 솔직히 고마워.”
“그 정도인가요?”
“어, 싫은 소리 안 했으니까. 뭐, 스카우트 받고 간 사람 입장에서는 돈도 많이 받았을 거고.”
“어이없지만 서로 이득 봤다는 거죠?”
정말 듣기에 따라서는 서로 얻은 것만 있었다.
“당장 쪽수에서 밀리겠지만, 이대로 계속 끌고 가면 언젠가는 뒤집어졌을 거다.”
예전에 재중이 형이 그랬던가.
우린 그저 그렇게 웃고 즐기는 친목 길드가 아니라고.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요?”
“이왕 이렇게 된 것 판을 좀 더 키울 거야.”
“에?”
재중이 형 말에 우리 팀 모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판을 키워?
“아예 싹 빼내 갈 때까지 버텨보자.”
“……형, 진심으로?”
“어, 난 진심인데?”
진짜, 이 형도 막 나가는구나.
혹시나 누가 들을까 싶어, 방문을 열고 주변을 살펴보기까지 했다.
그만큼 지금 발언은 위험한 발언이었다.
“발키리 아주머니나 현역 여대생처럼 나중에 들어온 사람들은요?”
“아, 그런 사람들은 당연히 지켜야지.”
“휴, 막 하자는 줄 알았죠.”
“야! 넌 보석이랑 돌멩이랑 구분도 못하냐? 당연한 걸 가지고 그래.”
그렇게 재중이 형과 사장님이 나가도 상관없는 사람과 꼭 붙들고 있어야 하는 사람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정말 잔인한 일이겠지만.
“형, 근데 실력이 모자란 데 끝까지 남으면요?”
“당연히 챙겨야지. 그 많은 돈의 유혹에도 안 넘어가면 그만큼 신조가 있다는 거니까. 모자란 실력이야 가르치면 돼.”
역시 판단하는 기준이 있구나.
재중이 형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우리를 한번 슥 둘러봤다.
그리고 선언하듯 묵직한 말을 꺼내놓았다.
“이번에 물갈이가 되면.”
“되면요?”
“바로 우리도 스카우트 들어간다. 진짜배기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