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2
#322화 뼈의 무덤 (4)
분명히 봤다.
정말 찰나였지만 내 블레이드와 닿는 순간 데스나이트의 검날이 두 개로 변하는 것을.
아니, 두 개로 변한다기보다는 겹쳐 보이는 것에 가까웠다.
하나의 검날과 그 옆으로 투명한 검날이 다시 겹쳐지는 것 같은 모습.
그런데 내가 이걸 어디서 봤었지?
기억 속에 분명 비슷한 장면이 있었는데…….
데스 나이트와 몇 번 더 검격을 주고받다가 한 번 더 같은 공격을 받자 그제야 떠올랐다.
더블 샷.
분명 나르샤 누나가 이것과 유사한 스킬을 사용한다.
화살을 하나 쳐 냈음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화살이 겹쳐서 꽤 신선하게 느꼈던 스킬.
물론, 난이도로 치자면 이쪽이 월등히 높다.
이쪽은 바로 눈앞에서 스킬이 발동해 더블 샷과 달리 대처하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없다.
거기다 데스나이트의 민첩이 너무 높았다.
검을 휘두르는 속도 자체가 올 민첩을 찍은 나와 비슷할 정도로 빠르니 대처하기가 쉽지 않았다.
화살은 그나마 피하기라도 하지.
이건 검격을 파훼하면서 파고들어야 하니 난이도 면에서는 몇 배의 차이가 날 것이다.
숙제네.
숙제.
제대로 반격하지 못하면 데스 나이트를 잡기가 매우 어려워질 것이다.
현재 그걸 가장 몸소 느끼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전사 형이었다.
전사 형도 몇 번 데스 나이트와 맞붙고 난 뒤 바로 인상을 썼다.
“큭, 이 새끼 묘한 스킬을 쓰네요? 분명히 막았는데도 그냥 맞은 것처럼 대미지가 들어오네요.”
미스트 쉴드를 최적의 각도로 기울여서 데스 나이트의 대미지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있는데 그 와중에 그 더블 공격이 들어오자 전사 형이 난색을 표했다.
재중이 형도 눈치챘는지 하르 창으로 데스 나이트의 블레이드와 일부러 부딪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번 창격을 나누더니 묘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뒤로 빠져 버렸다.
“이놈 봐라?”
마치 신기한 장난감을 발견한 것 같은 표정.
그 표정에서 도전 욕구가 활활 타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식으로 대미지가 들어오면 물약으로도 못 버텨. 계속 이놈의 디버프가 걸리니까.”
저 이상한 스킬도 문제지만 지금 가장 큰 문제는 데스 나이트가 들고 있는 저 블레이드다.
피격을 당하면 디버프가 걸린다.
다른 말로 하면 현재 물약이 무쓸모라는 것이다.
아무리 물약을 많이 들고 다니면 뭐하겠는가.
사용할 수 없는데.
순수하게 ‘힐’에 기대서 데스나이트를 잡아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몇십 명이 달라붙어야 할지 상상이 불가능했다.
그것도 혼자서는 절대 못 버틴다.
탱커들은 대부분 힘과 체력 쪽에 투자를 많이 해서 민첩이 그렇게 높지가 않았다.
현재 유저들 스펙으로 데스나이트와 붙으면 백이면 백, 전부 속도에서 현저하게 밀릴 것이다.
거기다 전사 형만큼 스탯이 높은 탱커가 없기에 실력이 동일하다는 가정하에 탱커 몇 명이 번갈아가면서 차륜전을 펼쳐야 한다.
저 데스 나이트를 상대하려면.
거기에 붙는 힐러도 수십이 되어야 할 거고.
빨리 못 녹이면 이쪽이 먼저 나가떨어지기 때문에 딜러도 잔뜩 붙어야 한다.
그리고 데스 나이트의 갑주를 뚫으려면 최소 고강 하르 무기 정도는 있어야 한다.
문제는 저 공격만 해도 버겁기 그지없는데 중간에 들어오는 연격, 강격, 비월참 난사까지.
남겨진 스킬을 생각해 보면 아직 제대로 된 데스 나이트를 상대한 것 같은 기분도 들지 않았다.
전사 형이 느린 민첩으로 죽을상을 쓰면서 어글을 먹고 겨우 버티고 있었는데 갑자기 데스 나이트가 블레이드를 내리더니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다들 피해! 이 자식, 무작위 어글이야.”
재중이 형의 다급한 외침.
형 말처럼 한 번씩 제멋대로 어글이 튀는 것 같았다.
이런 예측이 안 되는 몬스터가 제일 까다롭다.
사라졌던 데스 나이트가 멀리서 화살을 재고 있던 나르샤 누나의 뒤에 나타나더니 검은 블레이드를 빠르게 내려쳤다.
깜짝 놀란 나르샤 누나가 바로 스킬을 썼다.
【 백스탭! 】
순간, 나르샤 누나의 신형이 미끄러지듯 뒤로 밀리면서 간발의 차로 데스 나이트의 검격을 피했다.
하지만 그대로 데스 나이트가 나르샤 누나를 쫓기 시작했다.
내가 알기로 나르샤 누나가 나와 민첩 수치만은 거의 비슷하다.
나르샤 누나도 거의 올 민첩에 가까우니까.
민첩으로 이어지는 단순 주력만 따지면 데스 나이트를 따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데스 나이트가 달려드는데도 나르샤 누나는 따라잡히지 않고 어떻게든 도망은 갔다.
다만 거리를 전혀 벌릴 수 없는 것이 문제.
거기다 더 큰 문제가 생겼다.
나르샤 누나를 쫓아가던 데스 나이트의 갑주에 묘한 보랏빛이 번쩍이더니 움직임이 엄청나게 빨라지기 시작했다.
“뭐야?”
마치 경주용 차가 부스터를 쓰고 급가속을 하듯 데스 나이트의 신형이 거침없이 빨라져 나르샤 누나와의 거리를 한순간에 좁혀 버렸다.
하…….
역시 숨겨둔 스킬이 더 있었어!
고민할 시간도 없이 바로 스킬을 썼다.
【 블링크! 】
이동은 데스 나이트와 나르샤 누나의 사이.
그리고 블링크를 써서 바뀐 시야에 보랏빛으로 변한 데스 나이트가 검은 블레이드를 내려치는 것이 보였다.
보통 방법으로는 쳐낼 수 없다.
몇 번 더 연습하면 할 수 있겠지만, 지금 그렇게 연습할 시간은 없다.
일단, 지금은 최대 파워로 버티는 것이다.
하르 블레이드와 카스카라를 동시에 교차하면서 데스 나이트가 내려치는 검을 올려쳤다.
【 강격! 】
캬각!
세 개의 블레이드가 한자리에서 격돌하자 쇠 갈리는 소리가 거칠게 나면서 순간 내 왼쪽 무릎이 풀썩 꿇렸다.
젠장, 힘에서 밀린다.
최대한 블레이드의 각도를 기울여서 힘을 해소했는데도 불구하고 더블 기술에 온전히 대미지가 다 들어오는지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저 이상한 보랏빛 때문에 워낙 속도가 높아져서 지금 내 민첩 스탯으로도 한 번 정도 막아내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어느새 내 뒤에서 창격이 날아들더니 데스 나이트의 이마를 노리고 찔러 들어갔다.
【 강격! 】
역시 빈틈을 노리고 있었구나.
내가 잠시나마 막아둔 상황에서 재중이 형의 강력한 찌르기가 데스 나이트의 이마에 거의 근접했다.
그런데 데스 나이트의 다른 한 손이 재중이 형의 하르 스피어의 창날을 그대로 잡아버렸다.
잠시 밀린다 싶던 데스 나이트가 손을 강하게 움켜쥐더니 이내 완전히 재중이 형의 하르 스피어를 멈춰 버렸다.
이마 바로 앞에서
그것도 큰 피해 없이.
“칫, 괴물 자식.”
이건 재중이 형도 깜짝 놀랐는지 급하게 하르 스피어를 빼내는 것과 동시에 반회전 시켜 데스 나이트의 옆얼굴을 후려쳤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손을 휘둘러 하르 스피어를 쳐내 버렸다.
“큭, 이 정도는 우습다 이거냐.”
나에 비해 재중이 형의 민첩 수치는 그렇게 높은 것이 아니었다.
그걸 그동안은 컨트롤로 커버하고 있었는데 데스 나이트가 묘한 보랏빛에 감기고는 더 빨라져서 지금은 그것도 힘들어 보였다.
아예 민첩 수치가 너무 차이가 나니까 컨트롤로 무마할 수준을 넘어버렸다.
그래도 데스 나이트의 시선을 잠시 돌릴 수 있어서 나르샤 누나를 살리기는 했다.
잠시 뒤, 무작위 어글이 풀리자 전사 형이 돌진을 사용해 데스 나이트에 다시 붙었다.
하지만 보랏빛으로 변한 뒤의 데스 나이트는 전사 형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었다.
아예 반격할 수 없으니까.
방패를 기울여 막는 것도 어느 정도지.
속도 차이가 이 정도로 나면 타이밍이 어긋나게 된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전사 형이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최대한 막아내곤 있는데 그것도 곧 한계에 달할 것 같았다.
또한, 디버프가 수시로 들어와, 챠밍의 힐도 한계가 보였다.
소녀 라미아를 소환해 얻는 지력과 하르 스태프의 스탯 때문에 힐량도 적은 것이 아닌데, 그것보다 더 많은 체력이 깎여 버리니 챠밍은 공격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오빠! 저도 한계요!”
마나 리커버리가 따라가지 못하는 마력 소모에 챠밍도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전사 형이 덜 깎이거나 힐이 더 붙거나.
그게 아니면 답이 없어 보였다.
전사 형이 못 버티면 결국 나나 재중이 형이 나서야 하는데 여기서 내가 나선다고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내 쪽은 체력이 약하기에 오랜 시간 몸빵하기도 힘들고.
재중이 형도 모자란 민첩을 최대한 컨트롤로 커버했지만 장시간의 탱은 힘들 것 같았다.
보다 못한 이쁜소녀가 해머를 들고 달려들었지만, 안 그래도 무거운 해머 때문인지 속도에서 현저히 밀려 별다른 공격을 성공 시키지 못 했다.
넷이 동시에 덤벼드는데도 이 모양이라니…….
우리 넷을 상대하면서 나르샤 누나의 화살을 피하는 여유까지 보여줬다.
전사 형은 데스 나이트가 두들기는 방패를 가까스로 들어 올리면서 외쳤다.
“대체 이 스킬은 언제 끝나는 거야!”
전사 형의 외침이 이해가 되는 것이 이전까지는 그래도 해볼 만은 했다.
그런데 보랏빛 이펙트의 스킬이 나오고 난 뒤로는 그냥 연신 밀리고만 있었다.
공속, 공격력 모두 올라가는 스킬이라…….
데스 나이트를 공격하다 말고 짐작 가는 것이 있어 열심히 빈틈을 공략 중이던 재중이 형에게 물었다.
“혹시 헤이스트 같은 걸까요?”
“맞아, 헤이스트. 이펙트가 좀 다르긴 한데. 같은 계열이겠지.”
“그럼 중간에 끝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가 사용하는 헤이스트는 체력과 마력을 동시에 소모한다.
잘 쓰면 최고의 스킬이지만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 최악의 스킬이 된다.
체력과 마력의 부담도 크다.
그런데 저 데스 나이트는 한참 동안 아무런 문제없이 저 스킬을 사용하고 있었다.
“보스급이면 체력하고 마력이 어마어마하겠지. 아마 우리가 죽기 전까진 저거 안 풀릴걸?”
재중이 형의 말에 전사 형의 표정이 확 죽어버렸다.
옆에서 열심히 해머를 내려치던 이쁜소녀도 마찬가지.
“그럼 어떻게 잡아요? 얘 너무 빨라요.”
나르샤 누나도 한숨을 쉬긴 마찬가지였다.
“하아, 어지간히 강해야지. 이 정도면 규격 외잖아. 공격이 전혀 안 통해.”
다만 챠밍은 실수하지 않기 위해 여전히 집중한다고 별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았지만 이건 그만큼 상황이 암울하다는 반증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플레이하는데 여유가 전혀 없었다.
챠밍과 전사 형의 분발에도 불구하고 전사 형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자 결국 두 손, 두 발을 들고 말았다.
“이거 더는 안 됩니다.”
전사 형의 항복 선언에 재중이 형이 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튀자. 여기서 더 해봐야 누구 하나 죽을 뿐이야.”
재중이 형도 동의하자 일제히 스킬을 사용해 전사 형을 마지막으로 모두 계단으로 도망 왔다.
적어도 계단까지만 가면 따라오지 않으니까.
예상대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도망가자 데스 나이트가 따라오려다 멈춰 서는 것이 보였다.
만약, 저놈이 여기서 멈추지 않고 따라왔다면?
“저놈 풀려나면 어떻게 될까요?”
“보나마자 재앙이겠지. 지금 수준으로는 절대 못 막아. 아니, 도망도 못 갈걸.”
단지 근접 몹일 뿐인데 걸리면 짤 없이 그냥 죽는다고 봐야 했다.
무슨 몬스터를 이렇게 무식하게 만들어놨지.
“3층부터 이 모양이라니 더 내려가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전사 형이 지쳤다는 듯 장비를 내려놓고 계단 중간에 눌러앉았다.
데스 나이트와 격돌한 지 얼마 안 됐지만, 고생은 전사 형이 제일 많이 했다.
“저놈이 하나이길 바래야지.”
재중이 형의 중얼거림에 모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올라가자. 전 길드원을 다 끌고 내려와서 잡던가 해야지. 원.”
재중이 형 말대로 민첩을 대폭 올려주는 뭔가가 있다던가 아니면 쪽수로 밀어붙이는 수밖에 안 보였다.
강화도 더 필요하고.
연습도 필요했다.
녀석의 더블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그런 연습이.
그것만 되면 어떻게든 해볼 수 있으려나?
바로 나르샤 누나를 바라봤다.
“누나, 저 좀 도와줄 수 있어요?”
내 말에 냐르샤 누나가 당연하다는 듯 웃어 보였다.
“말만 해. 도와줄게.”
내가 겪었던 것과 재중이 형이 조언해 준 것을 토대로 연습할 방법을 이야기했다.
“어렵진 않네. 그리고 너 말고도 다 해야겠는 걸?”
“……확실히 그러네요.”
할 일이 엄청 늘어나 버렸네.
그때, 이쁜소녀가 계단 아래를 보고 있다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기, 오빠. 계단으로 오면 안 쫓아오는 것 맞죠?”
“아마? 그런데 왜?”
“그게, 왠지 아닌 것 같아서요.”
이쁜소녀가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키자 모두 계단 아래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다 같이 외쳤다.
“전부 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