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7
#317화 이상한 제안 (3)
아라의 할아버지가 던진 급작스러운 말에 순간 주변의 공기가 멈춘 듯 얼어붙었다.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던 질문.
예상조차 하지 않았던 질문에 나는 물론이고 아라 역시 화들짝 놀라 자신의 할아버지를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봤다.
“허허, 왜? 내가 너무 어려운 질문을 했나?”
“아닙니다.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셔서.”
“흐음…….”
아라의 할아버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와 아라를 번갈아 보시곤 무언가 생각하는 듯 그냥 눈을 감으셨다.
침묵.
말을 하기엔 애매한 상황이라 일단 기다리기로 했다.
확살한 의도를 모르는 상황에서 자칫 말실수가 나올 우려가 있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그러다 다시 눈을 뜨시고는 말을 이으셨다.
“생각했던 것과 반응이 좀 다르군. 나도 감이 많이 떨어졌어. 일단 알았네.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좋아. 난처하게 했다면 자네가 이해하게나.”
“괜찮습니다.”
불편할 수도 있었던 분위기가 그렇게 겨우 넘어갔다.
아라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재중이 형은 흥미롭다는 눈빛을 보내다 김이 샜다는 듯 시선을 돌려 버렸다.
갑자기 피곤해지네.
***
“오빠, 오늘 와주셔서 고마워요.”
“아냐, 한 번은 와봤어야 했으니까. 그나저나 집 정말 크네.”
고작 몇 명이 살기에는 너무나 커다란 저택과 정원에 혀를 내둘렀다.
“아, 저는 여기 안 살아요.”
“아버지하고 어머니는 여기 계셔?”
“두 분 모두 요즘 해외에 계세요. 업무 때문에 급한 일이 생기셔서.”
“그런가?”
“일 년에 반 이상은 나가 계세요. 해외 사업부 때문에…….”
거기까지만 말하고는 아라도 말을 아꼈다.
“보통은 혼자 지내?”
“네, 지금은요.”
“용케 혼자 사는 걸 허락하셨네? 보통 회장님이라고 하면 굉장히 보수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 으음, 할아버진 반대에요. 나이 먹고 집에 붙어 있으면 민폐라고 친척들도 다 쫓아냈어요.”
“생각과 많이 다르네.”
“그렇죠?”
그런 말을 하면서 재중이 형과 아라와 함께 저택을 빠져나왔다.
다시 올 일이 있으려나…….
아마도 특별한 일이 있지 않다면 마지막으로 보는 광경이겠지.
아라가 차에 먼저 올라타자 주변 풍경을 눈에 새기고는 재중이 형의 차에 올라탔다.
재중이 형이 뒷자리에 앉은 아라를 보면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뒷자리가 좀 좁아. 좀만 참아. 금방 데려다줄게.”
“아! 괜찮아요. 저 작아서 딱 맞아요.”
그렇게 말하며 아라가 뒷자리의 시트에 파묻히듯 앉자 재중이 형이 그저 웃어 보였다.
저택을 빠져나와 시내를 한참 가로질러 아라가 사는 곳에 도착했다.
아라가 사는 곳 역시 평범한 주택은 아니었다.
큰 담벼락과 호화 저택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는 동네에 있었으니까.
역시 그혼자 살게는 안 두는구나.
집 앞에 들어서 차량에서 내린 후에 아라가 꾸벅 인사를 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너도 잘 들어가고.”
“저야 집이 코앞이잖아요. 가는 것 보고 들어갈게요.”
“그래, 다음에 보자.”
차가 다시 움직이자 아라가 작게 멀어져 갔다.
“역시 재벌은 재벌이네.”
“그러게요.”
재중이 형의 짧은 멘트.
그 한 마디에 모든 감탄이 다 묻어났다.
“난 언제 저런 곳에 사나.”
재중이 형이 한숨을 쉬자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 형, 돈도 많으면서.
“없으니까 물어보는 건데 너, 아라 어떻게 생각해?”
그걸 지금 물어볼 줄은 몰랐는데……?
“아, 진짜! 형까지 왜 그래요.”
“그냥 궁금해서 그래. 너 완전히 연예 고자잖아.”
“……아니거든요.”
“그럼, 너 이제까지 사귄 사람 누구 있는지 한 번 대보던가.”
“…….”
“거봐, 내가 네 나이였으면 이미 아들, 딸 낳고 잘 살았어.”
“그거 말이 좀 안 되는 건 알죠?”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래서 어때?”
“모르겠네요. 솔직히 그런 식으로 깊게 생각한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문득 뭔가 떠올랐다.
비 오는 날 집안에서 있었던 일들이.
이게 지금 왜 떠오르지…….
촉촉하게 젖은 옷.
가깝게 닿아있던 뜨거운 숨결.
좀 전까지 그 상황에 있었던 것처럼 생생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 너 얼굴이 빨개졌는데?”
“아니거든요.”
“이거 봐라? 억제기에 불까지 들어왔어?”
내 손목에 있는 억제기의 라이트가 붉은색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는 재중이 형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앗!, 하는 마음에 바로 억제기를 뒤로 숨기고는 차 바깥을 바라봤다.
“장난이었는데 수상하네?”
“하아, 그만두죠.”
재중이 형이 계속 놀려대는 것을 애써 무시하면서 마음을 가라 앉혔다.
한동안 마음을 누르자 억제기에 불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요즘 정말 왜 이러는 걸까?
***
< 로스트 스카이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 뇌파 확인.
> 주승호. 남성.
> 캐릭터명 주호. 레벨 87.
> 로딩 중…….
오버 된 썬더볼트를 잡으면서 2레벨이 올랐다.
경험치가 더 될 것 같았는데…….
지금 레벨이 너무 높기도 하고, 폭풍 지대 아래에서 더 이상은 얻을 것이 없어 보였다.
아이템도 그렇고.
욕심나는 게 있다면 네임드의 심장 정도겠지만.
오버를 해야 나올 확률이 있는 아이템을 얻으려면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다.
잡는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유저나 몬스터를 희생해서 오버시키는 과정까지 너무 번거롭고 귀찮음을 동반했다.
솔직히 이제 가능할지도 의문이었다.
원래 못 잡는 네임드가 레벨이 오르고 장비가 좋아지면 잡을 수 있는 네임드로 변하니까.
그럼 오버가 되기 전에 먼저 잡히게 된다.
그리고 딱히 오버 된 네임드에 목을 멜 필요가 없는 것이 로가슈 왕성의 보물 창고를 쓸 수 있다면 어떻게든 얻을 수가 있었다.
물론, 그만큼의 퀘스트를 진행하거나 혹은 다른 방법을 찾아내야겠지만.
어떻게 다시 들어갈 방법이 없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주변을 바라봤다.
칼바람 둥지의 광장.
공성전이 끝나면서 유저들의 발길이 닿자 주변이 북적이고 있었다.
중간 보급 기지.
딱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다수의 스탄과 브링어가 칼바람 둥지의 외곽에 잔뜩 세워져 있고 물약을 보급하거나 아이템을 사고팔면서 분주한 모습을 보였다.
어떤 비공정은 로가슈 왕국 방향을 가리키면서 사람들을 모집했고, 또 다른 비공정은 유저들을 한참 쏟아놓고 난 뒤에 다시 트로아 요새를 향해 발을 돌렸다.
그중 꽤 많은 수의 스탄이 우리 쪽 표식을 하고 있었다.
확실히 공성전을 이겼다는 증거였다.
생각보다 많은 스탄과 브링어를 포획해서 그런지 수송할 배가 넘쳐나는 모양이었다.
“여! 왔냐?”
멍하게 그 광경을 보던 내게 재중이 형이 다가와 어깨를 쳤다.
“방금요.”
“어때? 보기 좋지?”
“그러네요.”
“스탄하고 브링어가 많이 들어와서 수송 쪽으로 좀 돌리기로 했다. 그냥 다 파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거기에 대해서는 딱히 더 할 말이 없었다.
사장님이 적절하게 판단했을 것이다.
적어도 손해 보면서 장사하실 분은 아니지.
“브링어는 알아서 나누고, 스탄은 대부분 네 몫이다. 어차피 그거 다 네가 떨어뜨리기도 했고. 반대하는 사람도 없었거든. 있었으면 내가 자근자근 밟아주려고 했는데.”
“그런가요?”
“어, 지들이 무슨 수로 반대하겠냐. 너 아니었으면 이기지도 못했을 텐데. 솔직히 이번엔 나도 좀 질렸어. 서버에 돈이 많이 도는지는 알고는 있었는데 저렇게 작정하고 덤벼들 줄이야. 생각보다 애들이 저력이 있더라고.”
“좀 그렇게 보이긴 했어요.”
“뭐 뜯어먹을 게 있다고 그렇게 우르르 나왔는지. 그래서 몇 대 같아?”
“글쎄요…….”
재중이 형이 씨익 웃으면서 내 몫으로 배정된 반파된 스탄 수를 알려주었다.
“스탄만 63대.”
“63대요?”
내가 그렇게 많이 떨어뜨렸던가?
정신없이 비공정 사이를 뛰어다니며 떨어뜨리긴 했는데 이 정도 숫자라고는 생각도 못 했네.
어느 순간이 지나고부터는 잘 생각도 안 나고.
잘 생각해 보니 중간에 추락한 다른 길드장들한테 욕을 좀 많이 듣기는 했다.
“저장된 영상 보고 파악했는데 완전히 맞추지는 못했다, 몇 개는 소실돼서 못 찾아.”
정확히는 내가 떨어뜨린 것이 아닌 썬더볼트가 떨어뜨린 것이지만.
그리고 이미 충분히 많다.
중간에 소실됐다면 아마 다른 길드가 채갔거나 중간에서 증발했겠지만 사장님이 봐도 못 찾는 것을 굳이 내가 고민해 봐야 답이 안 나온다.
“그 정도는 됐어요. 그래도 엄청 많네요. 63대라니.”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쯤 되려나.
수리비를 제하고 팔 때 깎이는 돈까지 감안하더라도 대당 몇 천은 가볍게 넘지 않을까?
단순히 상점에 꼬라박는 돈이 그 정도고, 사람들에게 그대로 되팔면 훨씬 많은 돈이 나올 것이다.
“당분간 돈 걱정은 없겠네요.”
“가격 그대로는 못 받겠지. 뭐 숫자가 이 정도면 그건 커버하고도 남겠지만.”
“그게 어디에요.”
“일단, 사장님한테 가서 인수 받고. 후아, 좋겠네. 그 숫자면 대체 얼마야.”
재중이 형이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면서 장난스럽게 날 바라봤다.
저건 강렬한 열망의 표시다.
“아, 진짜. 알았어요. 한턱 쏘면 되죠?”
“흐흐, 역시 우리 주호는 눈치가 빠르다니까.”
고양이가 생선을 그냥 지나칠 순 없는 노릇이라.
“킹크랩 한 번 가자?”
“그거 비싸지 않아요?”
“에이, 이제 나보다 부자일 건데.”
“하아, 일단 한 번 보고요.”
“오케이! 좋아!”
이미 확정이나 된 것처럼 기쁜 마음으로 재중이 형이 뛰어다녔다.
이 형도 진짜 못 말리겠다.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일단 광산부터 파고들어야지. 리치도 잡아야 하고.”
리치가 있었지.
“그리고 로가슈 왕성 쪽, 퀘스트 끝나면 애들 사방팔방 퍼져 나올 거야. 그때도 대비해야 해.”
“전용 사낭터가 큰 힘이네요.”
“우리 입장에선 최고지. 당분간 견제를 덜 받으니까. 다른 사냥터가 또 찾아지면 그땐 모르겠네. 맵이 빠르게 풀리지 않으면 어느 순간부터는 사냥터가 맞물리겠지. 아마 이번엔 꽤 골치 아플 거다. 그 전에 할 게 많아. 길드도 더 불려야 하고.”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사장님이 계신 칼바람 둥지에 있는 길드 건물로 들어갔다.
“오, 왔냐.”
“푹 쉬셨어요?”
들어가자마자 사장님이 반겨주었다.
그 옆에는 스칼렛과 이슬두잔이 서 있었고.
아마 이번 공성전의 정산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 같았다.
비공정 인계를 위해 기다리던 사장님이 내게 와서 바로 63대의 스탄을 넘겨주었다.
“진짜 많네요.”
“허허, 많지 많아. 내 생전 이렇게 많은 비공정 수는 처음 봤구나.”
“대신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바로 비공정 중에 한 대를 빼서 사장님에게 돌려드렸다.
“이건 감사 표시입니다.”
그걸 받고는 잠시 고민하던 사장님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인벤으로 집어넣었다.
“흠흠, 안 받는다고는 하지 않으마. 이놈이 꽤 비싸서 말이지.”
남은 것은 62대인가.
이걸 다 수리하고 맡겨두려면 또 귀찮아지겠네.
물론, 돈 덩어리들이라 그런 마음이 사치이긴 하지만.
그때, 이슬두잔과 남은 정산을 두고 의논 중이던 스칼렛이 날 바라봤다.
“고마워요. 덕분에 이번에 재미를 많이 봤네요. 거기다 만약 졌으면 꼼짝없이 다 날릴 판이었거든요.”
“우리 길드만으로는 불가능했을 겁니다. 오히려 우리가 감사하죠.”
그렇게 오가는 훈훈한 덕담이 끝나자 스칼렛이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 스탄 62대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일단, 스탄 자체는 내 소유다.
그래서 아직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것 같았다.
어떤 이야기를 해두었든 내가 상점에 그대로 집어넣는다고 하면 그걸로 끝이니까.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아마 물어보고자 하는 것은 누구에게 팔 것이냐가 될 텐데.
혹시 경매를 원하는 건가?
아님…….
“처분을 어떻게 할지 물어보시는 거죠?”
“네, 그 정도 숫자면 할 수 있는 것이 정말 많거든요.”
할 수 있는 것?
대체 무슨 생각이지?
내가 생각을 한다고 대답이 없자, 스칼렛이 그냥 주저 없이 말을 했다.
“그것 전부 제게 파실 수 있어요?”
“전부?”
“네, 전부.”
몇 대도 아닌 전부를?
내 의아해하는 표정을 재밌다는 듯 바라본 스칼렛이 순간 믿지 못할 액수를 불렀다.
“……드릴게요. 일시불로.”
음? 내가 잘 못 들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