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308화 (306/1,404)

# 308

#308화 비가 내리면 (1)

얼마간의 검사가 끝나고 기계에서 나오던 빛이 사라지면서 은하가 의식이 깨어난 듯 눈꺼풀을 힘겹게 뜨면서 물었다.

검사가 끝나자, 기계에서 나오던 빛이 사라졌다.

검사가 꽤나 힘들게 느껴졌는지 은하는 힘겹다는 듯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끝난 건가요?”

“네, 잠시 누워 있어요. 검사가 막 끝나서 바로 일어나기 힘들 거예요. 마치, 게임을 오래한 느낌과 비슷하죠?”

“네, 좀 어지럽고 그래요.”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잠시만 눈을 감고 누워 있어요.”

“네…….”

그 말과 함께, 살짝 찡그렸던 인상이 펴졌다.

역시, 쉽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회복하는 시간을 가지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유혜선 팀장이 은하를 일으켜 세웠다.

“검사 결과는 다른 사람에게 알려드릴 수 없는데 괜찮겠어요? 정확한 수치는 본인에게만. 그리고 다른 분들에게는 대략적인 부분만 알려드릴 거예요.”

유혜선 팀장의 말에 잠시 생각을 하던 은하가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랬지만 검사나 회복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접근이 금지기에 은하가 회복을 하자 유혜선 팀장이 우리들을 불렀다.

“몸은 괜찮아요?”

내가 물어보자 은하가 아까보다 한결 편해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금 어지럽긴 하지만 지금은 괜찮아요.

“다행이야, 처음엔 좀 힘들 거야. 나도 그랬거든.”

다른 사람들은 조금은 어색한 기분과 묘한 감정이 들 수도 있겠지만, 자주 받다보면 점점 익숙해지고 편해지는 감정이 든다.

내가 그랬으니까.

은하가 유혜선 팀장을 보면서 물었다.

“팀장님이라고 부르면 되나요?”

“네, 그렇게 부르시면 돼요.”

“아까 말씀하신 대로 알려주시면 될 것 같아요.”

그 말에 유혜선 팀장이 검사지를 훑어보고는 나를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어떻게 같이 다니는 사람들이 다 이래요?”

저 말은 은하의 수치가 생각보다 상당히 높다는 말이겠지.

아라도 정확한 수치는 모르지만 굉장히 높은 것으로 알고 있다.

“으음,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음…….”

“무슨 문제라도?”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먼저, 재중 씨를 예를 들자면 고도의 훈련을 해서 RTP 평균치가 일반인보다 월등히 높아요. 처음부터 그렇진 않았는데 이건 훈련으로 만들었다고 해야 할까요? 본인이 원한다면 거의 500에 육박할 정도로 끌어낼 수 있을 거예요. 시간 오버 때문에 충분히 낼 수는 없겠지만.”

그 말에 옆에서 듣던 재중이 형이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500이면 지금 4세대 VRS에서는 거의 한계치나 마찬가지였다.

그걸 본인 의지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거겠지.

“원하면 끌어올렸다가 낮추는 것도 자유자재. 아마 모든 프로그래머가 원하는 이상향에 가깝겠죠. 저런 마인드 컨트롤은요.”

재중이 형이 자꾸 왜 그러냐는 식으로 웃어 보였다.

“이거 날 너무 띄워주는데? 이제 내가 좀 달라 보여?”

“본인이 잘나서 그러는 게 전혀 아니니까, 오해 금지.”

“쳇, 역시 그러냐.”

실망한 표정의 재중이 형의 말투에 다들 웃을 수밖에 없었다.

“설명을 하려면 필요해서요. 앞으로 승호 씨가 도달해야 할 지향점이기도 하고요. 사실 승호 씨는 RTP가 너무 천차만별이라…… 최고점과 최저점의 격차가 누구보다 커요. 최고점은 역대 최고 수준인데…… 아마 본인이 제일 힘들 거예요. 정말 누구보다도 처절한 연습이 필요한 사람이죠.”

“할 말이 없네요.”

요즘은 레벨 올리고 템 모으는 재미로 게임을 하고 있어서 마인드 컨트롤을 소홀히 했다.

유혜선 팀장도 그걸 딱 꼬집는 거겠지.

그 말을 들은 재중이 형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연습시켜주고 있으니까 그건 넘어가도록 해.”

“으음, 옆에 최고의 교본이 있긴 하네요. 둘 다 같이 놀고 있는 게 문제라면 문제라고 해야 하나요?”

이거 형하고 같이 혼나는 기분이네.

“직접 몸으로 뛰면서 익히는 게 제일 좋아. 자연스럽게. 이놈은 앉혀놓고 이론만 가리킨다고 어떻게 될 수준은 넘었으니까.”

“그렇다면야 뭐. 알아서 잘하시겠죠.”

“그래서 다음은?”

“아라 같은 경우는 기분파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 굳이 비교를 하자면요.”

그 말에 아라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기분파, 요?”

“응, 딱 기분파. 위기나 긴장 상태에서 거침없이 최고 속도로 확 올랐다가 금세 산만해지면서 차분하게 식어버려. 본인이 제일 잘 알지?”

“으음, 조금 그렇긴 했어요.”

“이쪽으론 승호 씨보다 상승 속도가 더 빨라요. 유례없을 정도로.”

나도 좀 기분파에 가까운데 아라도 그랬구나.

그러고 보니 처음에 다른 길드와 붙을 때도 금방 달아올라서 싸웠지.

“승호 씨만큼이나 도움이 필요하겠죠? 재중 씨?”

“아아, 알았어. 이쪽도 나름 신경 쓰고 있다고. 그리고 이런 특성도 꽤 괜찮아. 지금 하는 로스트 스카이에서는. 순간 확 달아올라야 할 때도 있으니까. ‘자, 싸우자! 5분 뒤에.’ 이런 건 안 먹혀.”

하긴 지금이야 적이 없는 상태로 우리끼리 사냥 중이라지만 언제 다른 유저들과 부딪칠지 모른다.

천천히 끌어올릴 여유는 없다.

“아라 같은 경우, 유지 시간을 길게 늘리는 훈련도 겸하고 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자연스럽게 따라 올라오는 경우라 괜찮아. 이쪽은.”

재중이 형도 신경 쓰고 있었구나.

그러고 보면 여유가 있든 없든 전투 상황에서 한 번도 아라가 빠진 적이 없었다.

그 말에 유혜선 팀장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은하 양 같은 경우는 평온한 호수 같은 느낌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 RTP도 꽤 높은데 일정 수준으로 유지가 잘 되는 편이에요. 이 정도로 유지가 되는 사람은 프로게이머 말고는 잘 없을 것 같은데…… 혹시 예전에 게임을 한 번이라도 해본 적 있어요?”

은하가 전혀 아니라고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한 번도 없어요.”

“음, 그럼 타고 났어요. 선천적으로. 평온함, 평정심. 차분함. 이런 단어면 유사하게 표현할 수 있겠네요. 아이돌을 안 했으면 프로게이머로 활동해도 될 정도로. RTP 수치가 낮은 상태에서는 누구나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는데 은하 양은 굉장히 높은 상태에서 유지하는 거라 차원이 달라요.”

“부러운 특성이네.”

재중이 형이 웃으면서 말했다.

프로게이머를 해도 된다라…….

그럼 수치가 굉장히 높다는 말이다.

“대략적으로 말하면 최고치는 아라 양이 높을 거예요. 평균치는 은하 양이 더 높고요. 그 이상은 본인들만 아는 걸로.”

유혜선 팀장의 말에 모두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종훈이 형과 나르샤 누나도 역시 검사를 마쳤다.

“두 분은 경험이 많으신가 봐요. 굉장히 안정적이네요. 수치도 3세대 한계는 넘으시고.”

3세대 한계면 4세대에서는 중간 정도 되려나?

정확한 수치는 모르지만 대략 그 정도로 알고 있다.

“종훈 씨가 탱커를 한다고 했어요?”

“하하, 미흡하나마 제가 맡고 있습니다.”

“그럼, 굉장히 어울리네요. 같은 수치를 굉장히 오래 유지를 하시는 걸 보면 앞으로도 좋은 결과 있으실 거예요. 그리고 나르샤 양은 혹시 운동하셨어요?”

“네, 양궁을 어릴 때 했어요.”

“아, 어쩐지. 집중력 쪽이 다른 수치에 비해 확 뛰더라고요. 순간적으로 팍, 하고 올라서 놀랐어요.”

유혜선 팀장의 말을 들어보면 왜 그렇게 활을 잘 쏘는지 알 수 있었다.

본인의 경험도 한몫하고 성향도 딱 맞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검사를 다 마치고 나니 바깥이 어두워져 있었다.

“오늘 감사합니다.”

“뭘요, 저야 오랜만에 데이터를 모아서 좋았는데요. 특히, 은하 양의 특성은 진짜 저희에게 필요한 데이터라…… 차세대 VRS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지 벌써 기대가 되네요.”

은하의 특성이 그렇게 중요한 건가?

“VRS라는 기기는 일정 수준의 RTP를 유지하는 기능이 엄청 중요하거든요. PV가 욕을 먹는 가장 큰 이유가 안정성이잖아요. 음, 화면이 일그러지면서 널뛰기를 한다고 보면 돼요. 게임을 하다가 화면이 끊기면 누구나 싫어하잖아요.”

“좀 그렇죠.”

당장 나조차도 원하는 대로 안 나오면 불편하니까.

“적용만 할 수 있다면 이번에 정말 혁신적으로 바꿀 수도 있을 거예요. PV가 아예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그러면서 은하에게 다가가더니 손을 덥석 잡았다.

“은하 양!”

“꺅! 네에?!”

너무 급작스럽게 잡아서 그런지 은하가 당황해서 그런지 비명이 새어 나왔다.

“다음에 또 올 수 있어요?”

유혜선 팀장의 저 눈빛.

소유욕이 흐르는 바로 그 눈빛이다.

은하도 한동안 시달리겠는데?

“아, 전…… 자주 외출하기가 힘들어서요. 매니저와 상의도 해야 하고. 회사에 소속되어 있어서 장담하기 힘들어요.”

그 말을 듣자마자 유혜선 팀장이 품에서 바로 명함을 꺼내서 은하의 손에 쥐여줬다.

“당연히 회사에 알려도 돼요. 꼭!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고 연락 주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네. 장담은 못 하겠지만 한 번 알아볼게요.”

“잘 되면 DS에서 많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거예요. 광고나 방송 쪽 모두요. 결코 시간 낭비라고 생각되지 않을 거랍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어드릴게요.”

바로 딜을 넣을 정도로 탐나는 건가?

뭔가 여기 온 목적하고는 크게 빗나간 것 같긴 한데…….

그렇게 검사를 다 마친 뒤, 지하 주차장으로 빠져나왔다.

“생각지 못한 엉뚱한 전개네.”

“그러게요.”

은하를 저토록 원할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생선을 낚기 위해 낚싯줄을 던졌는데 고래가 물고 올라온 격이라…….

종훈이 형의 차에 올라타던 은하를 보면서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은하가 그때 로스트 스카이를 하지 않고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영원히 몰랐을 수도 있었겠네.

사람 일이라는 것은 한 가지 우연한 일로 완전히 바뀐다고 하더니.

“일단 가자.”

종훈이 형이 운전해서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우리도 차에 올라탔다.

차가 지하주차장을 빠져나가자 밖은 비가 억수처럼 내리고 있었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폭우.

비 소식이 있었는데 지금인가?

차가 있으니 크게 상관이 없지만.

“마트 먼저 가요?”

“흐음, 뭐 우리야 괜찮다고 하더라도 은하가 힘들지 않겠냐? 물건 사러 다니는데 한참 혼자 차 안에 있어야 할 텐데. 그것도 불편할 거고. 비도 이렇게 오는데 말이지.”

“아무래도 그렇겠죠. 그럼, 일단 우리 집 먼저 들려요.”

“오케이.”

종훈이 형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승호> 종훈이 형, 집으로 먼저 갈게요.

<종훈> 마트 안 들리고?

<승호> 들렀다 가는 게 편하다네요. 운전 조심하시고요.

<종훈> 알았다. 가서 보자.

종훈이 형의 SUV가 집 방향으로 바로 진로를 바꿨다.

그리고 우리가 그 뒤를 따라갔다.

폭우 속을 헤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파트에 도착을 했다.

다만, 당황스럽게도 우산이 없었다.

“형, 차에 우산 없어요?”

“없지. 어지간하면 맞을 일이 없으니.”

지하주차장이 없는 오래된 아파트라 차에 내리면 입구까지 전부 뛰어가야 했다.

난감하네.

종훈이 형도 없다는 것을 보면 별다른 수가 없었다.

차 문을 열자 비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야! 차에 물 들어와. 얼른 닫고 내려.”

“형 저보다 차가 더 중요해요?”

“어, 당연하지!”

“아, 진짜. 그럼 가죠.”

재중이 형과 내가 비에 옷이 홀딱 젖으면서 입구로 뛰자 종훈이 형 쪽 SUV도 문이 열리면서 은하, 아라, 나르샤 누나가 뛰어나왔다.

“꺄! 뛰어요!”

“비가 옆으로 와요!”

“진짜 날씨 미쳤어!”

우리처럼 셋 다 비 맞은 생쥐처럼 홀딱 젖어서 아파트 입구에 뛰어들었다.

종훈이 형도 마찬가지로 뛰다가 홀딱 젖고.

“와, 무슨 비가 이렇게 오냐…….”

감탄과 어이없음.

그런 종훈이 형의 감상을 뒤로하고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의 에어컨 바람이 홀딱 젖은 옷을 차갑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나르샤 누나가 뭔가 생각났는지 말을 했는데 그 말 때문에 다들 얼어버렸다.

“이거 승호 혼자 뛰어갔다가 우산 가지고 나오면 되는 것 아니었어?”

“아…….”

“아……!”

“아……!”

동시에 아쉬움과 멍청함, 어이없음을 달래는 감탄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저 서로 바라보면서 킥킥대고 웃어댔다.

그렇게 집에 도착하자 일단 수건부터 하나씩 다 돌렸다.

“일단 은하는 집에 있고. 이런 날, 너 그렇게 마트에 나갔다가는 대형사고 난다.”

재중이 형의 말에 은하를 보니 머릿결이 촉촉하게 젖은 데다 집안의 불빛에 반사돼 마치 화보를 한 편 찍고 있는 비주얼이 나와 버렸다.

거기다 옷도 젖어서 문제고.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은하는 집에 놔두고 갈 생각이었다.

마트가 마비되는 것을 보고 싶으면 데려가도 되겠지만.

“일단 나하고 종훈이, 나르샤, 아라하고 다녀올게. 옷이야 어차피 또 젖을 거니까. 이대로 가야지.”

방금 뭐가 빠진 것 같은데?

“형, 저는요?”

“너 집에 은하 혼자 놔둘 생각이었냐? 집주인도 없이 혼자서 여기서 잘도 있겠네. 빨리 갔다 올 테니까 마른 옷이나 좀 준비해놔. 그럼 갔다 온다.”

“어? 어……?”

뭔가 말도 안 되는 상황으로 가고 있는 것 같은데…….

그때, 재중이 형이 한마디 했다.

역시 잘못된 거였어.

재중이 형이 정정하려는지 입을 열었다.

“야! 카드 내놔. 니가 쏜다며.”

그 말에 한숨을 쉬며 축축 젖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주었다.

“크크, 잘 쓰마.”

내가 건네준 카드를 눈을 번뜩하게 뜨고 챙겨갔다.

“제발 적당히 긁어주세요…….”

“돈도 많은 놈이 엄살은. 진짜 간다.”

나르샤 누나와 아라가 나가면서 손을 흔들었다.

“집 잘 보고 있어.”

“금방 올게요.”

그렇게 닫히는 현관문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대로 뻣뻣하게 고개를 돌려 축축하게 머리며, 옷이 젖은 은하를 바라봤다.

그리고 은하도 역시 날 바라보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어색함.

고요.

적막감.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안 떨어지는 입을 억지로 열어서 어색함을 깼다.

“아, 옷 줄게. 미안.”

“아! 괜찮아요!”

둘 다 어색한 몸짓을 해가면서 은하는 거실로 난 방으로 들어가 옷을 찾았다.

남자 옷을 입혀도 되나?

한 번도 이런 적이 없기도 하고 문제는 정말 남자 옷밖에 없었다.

뭘 입어도 크겠는데…….

일단 제일 무난한 티를 몇 개 들고 방 밖으로 나왔다.

거실엔 옷이 젖어 있어서 소파 앞에서 앉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은하가 보였다.

“아, 미안. 수건 깔아줄게, 그리고 이거 좀 크긴 한데 한 번 입어볼래?”

“네? 네. 그럼 입어볼게요.”

옷을 건네주기 위해 은하 앞까지 다가갔는데 순간 발이 미끄러졌다.

대체 뭐가?

순간적으로 머리에 드는 생각.

은하가 중간에 흘리고 간 물기가 바닥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과 아무 상관없이 이미 기울기 시작한 몸이 내 통제를 벗어나 완전히 앞으로 쏠려 넘어졌다.

“꺅!”

그리고 그대로 앞에 있던 은하를 소파에 눕히면서 그 위에 내 몸이 엎어지고 말았다.

은하가 바닥에 쓰러지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아, 미안.”

“아……!”

눈을 떠 보니 서로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은하의 얼굴과 내 얼굴이 가까이 있었다.

그리고 더 가까워질 수 없을 거리에서 은하의 당황한 눈과 그대로 마주쳤다.

그 순간 심장이 더할 수 없이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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