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265화 (265/1,404)

# 265

#265화 트로아 요새 (6)

악마형.

베네아를 넘어오기 전.

시작하는 섬의 마지막 퀘스트에서 이벤트 형식을 빌어 잠깐 등장한 것이 처음이었다.

그땐 도저히 막을 방법이 없어 전멸했던 이벤트.

물론, 악마형으로 변한 케르베로스의 몸이 붕괴되면서 어물쩍 넘어갔지만 당시엔 상당한 충격이었다.

한계를 넘는 움직임으로 대부분의 공격은 모두 막아낸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통하지 않는 적을 만났으니까.

당시 최고 스펙으로도 대미지가 너무 많이 들어와 도저히 상대할 수 없었던 기억.

그렇게 잊고 있었던 사실이 최근 업데이트를 통하여 떠올랐다.

앞으로 악마형이 등장할 것이라고.

그렇게 등장한 블러디 가고일.

덕분에 비공정을 타고 산맥을 넘어오면서 꽤 고생을 했었다.

이쪽 역시 추락 이벤트를 겪으면서 어찌어찌 넘어가 버렸고.

결론적으로 이때까지 악마형을 제대로 이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등장할 때마다 이벤트, 혹은 돌발 상황으로 넘어갔으니까.

그래서 이번에도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내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는 생각을 하는지 재중이 형이 갑작스럽게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이거 또 죽는 이벤트냐 ”

“그러게요.”

압도적.

아니, 그렇게 말하는 것조차 미안할 정도로 초월적인 공격력이었다.

성벽을 통째로 날려 버리다니.

내 스펙이 현재 최고라고 하지만 성벽을 날려 버리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어떻게 한다

한 번 붙어볼 순 있지만…….

과연 제대로 싸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주먹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 웃기는 일이 생길지도.

눈에서 나온 광선만 봐도 싸이클롭스의 스펙은 정상이 아니니까.

싸이클롭스도 부담스러운데 거기다가 오우거, 트롤, 골렘까지 함께라…….

정말 여기서 관을 짜겠는데.

그런 상황 속에서 전사 형은 저 녀석이 등장한 뒤 지금까지 미스트 쉴드를 계속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초긴장 모드에 들어가 있었다.

사실 결국, 전사 형이 중요하다.

저 무지막지한 녀석을 첫 번째로 막아야 하는 것은.

전사 형이 단 한 방이라도 버틴다면 새로운 상황을 만들 수 있을 것이고, 버티지 못한다면 그냥 악마형 케르베로스 시즌 2를 찍게 된다.

그런데 싸이클롭스가 등장하고 난 뒤에 의외의 일이 발생했다.

“오빠, 몬스터들이…….”

챠밍이 가리키는 곳엔 농성 중이던 몬스터들이 한껏 겁을 먹고 움츠려 있었다.

저 많은 몬스터가 겁을 먹어

우리가 엄청난 숫자를 잡았지만, 아직도 많은 몬스터가 요새 성벽을 따라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심지어 NPC의 방해를 이겨내며 성벽에 오른 몬스터들조차 하던 행동을 멈춘 채 몸을 떨고 있었다.

“우리가 지금 뭘 보는 거야 ”

나르샤 누나가 경악한 눈빛으로 말을 내뱉었다.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정신없이 달려들던 몬스터들이 지금은 순한 양만도 못 하게 변해 버렸으니까.

전사 형도 이건 예상 못 했는지 눈을 껌뻑이면서 말했다.

“여기 몬스터 역학 관계가 대체 어떻게 되어 있는 거지 ”

기존 판도를 뒤엎을 정도의 이상한 역학 관계.

그리고 그 중심에 싸이클롭스가 있었다.

“일단, 저 녀석이 같은 몬스터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은 확실하네.”

재중이 형이 결론을 내렸다.

이거 잘하면 괜찮은 그림이 나올 것도 같긴 한데…….

문제는 너무 수직 관계에 가까웠다.

이용하기도 힘들 정도로.

잠시 머릿속에 뭔가를 떠올렸다 바로 폐기했다.

지금 떠오른 가정이 올바르다면 가능하겠지만, 새 판을 짜기엔 정보가 너무나 부족했다.

“이제 어떻게 해요 ”

이쁜소녀가 신나게 휘두르던 포이즌 해머를 내려놓고 싸이클롭스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눈빛이 반짝반짝해

혹시…….

싸워보고 싶은 건가

“안 돼, 절대 안 돼!”

“흠…….”

이쁜소녀의 볼은 빨갛게 상기된 상태.

이쁜소녀는 몬스터들을 마음껏 후려치면서 텐션이 최고로 올라가 있었다.

버서커가 된 이쁜소녀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저건 안 되지.

반드시 싸워야 한다면 모르겠지만, 아직 좀 더 두고 봐야 했다.

그렇게 제자리에 멈춘 싸이클롭스를 계속 주시했다.

지금은 일단 온몸이 시뻘겋게 변한 상태로 산 중턱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이건 마치 달아오른 대포의 포신을 식히고 있는 모습 같은데

계속 살펴보니 커다란 외눈에서 광선을 날렸던 싸이클롭스의 몸에서 수증기와 비슷한 김이 올라오는 것이 저 기술도 쉽게 쓸 수 없는 것 같았다.

“지금이 기회라면 기회인데…….”

방패전사 형과 마찬가지로 재중이 형도 라이덴 미늘창을 살짝 들었다 말았다 하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다가가는 동안 다 식을 것 같습니다만.”

전사 형은 그런 재중이 형을 바로 말렸다.

“역시 그렇지 ”

“딱 죽기 좋습니다. 지금 달려가면.”

그 말에 재중이 형이 허탈하게 웃으면서 무기를 내려놓았다.

“자, 이쯤 하고 피하자. 저건 어떻게 안 돼. 지금은.”

재중이 형의 말에 우리도 무기를 접고 빠질 준비를 했다.

이 상태라면 싸이클롭스가 트로아 요새에 돌진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으니까.

괜히 끼어들어서 개죽음을 당하는 것은 사양이다.

뭔가 변수가 있다면 또 모를까.

그 사이 움직일 준비를 마쳤는지, 싸이클롭스가 산 중턱에서 한 발짝 무거운 걸음을 내디뎠다.

쿵.

무게가 느껴지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주변 땅이 동시에 흔들렸다.

마치 어스퀘이크를 쓸 때와 비슷하게.

이것은 오우거 로드와 차원 자체가 다른 몬스터다.

비교하는 것조차 미안할 정도로.

한 마리가 아닌 여러 마리의 오우거 로드가 있어야 싸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걸어오는데도 이러냐.”

재중이 형이 질렸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싸이클롭스의 외침에 주변 공기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찌릿한 느낌이 느껴지자마자 본능적으로 라이덴 블레이드의 날을 사용해 내 팔을 그었다.

광역 하울링의 범위가 장난 아니었다.

산 하나를 커버할 정도라니.

“다들 괜찮아요 ”

우리 팀 모두 이런 상황에 익숙해서인지 완전히 경직된 사람은 없었다.

다만, 나 외에는 조금씩 힘들어했다.

쭈뼛쭈뼛 몸을 못 가누기도 했고.

특히 체력이 낮은 챠밍과 나르샤가 심했다.

나르샤와 챠밍을 돌보려고 할 때, 이쁜소녀가 새된 음성으로 외쳤다.

“오빠, 몬스터들이 도망가요!”

시선을 돌리자 이쁜소녀 말대로 몬스터들이 사방팔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거 진짜 심각하네.

몬스터가 다른 몬스터에 쫄아서 도망가는 것은 처음 봤다.

그것도 다른 몬스터도 아닌 오우거 같은 몬스터들이.

“저거 잡으면 기여도 많이 주겠죠 ”

“트로아 요새를 통째로 살 만큼 아니, 트로아 요새의 NPC들이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트로아 요새가 함락당하는 걸 막아주면 그 정도는 줘야지.”

재중이 형이 그 말과 함께 피식 웃어버렸다.

지금은 현실로 만들기 어려운 이야기니까.

일단, 싸이클롭스는 현재 상황에선 규격 외다.

그에 맞는 적절한 수준의 무언가가 나오지 않는다면.

“성벽 안에서 버틸 생각이야 ”

경직의 여파를 전부 털어낸 나르샤 누나는 재중이 형에게 빠르게 다가가더니 물었다.

지금 길게 이야기나 나눌 시간이 없으니까.

이대로 싸이클롭스가 전진하면 당장 우리가 머물면서 사냥할 요새가 사라질 것이다.

“흠, 어쩐다……. 기여도를 사용하려면 어떻게든 트로아 요새는 건재해야 해. 하지만 아직 트로아 요새 내에서 어떤 움직임도 없으니까 지금은 지켜봐야 하나 차라리…….”

재중이 형은 성벽 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바깥쪽에서 상황을 보길 원하는 것 같았다.

“추가로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 기약이 없는 기여도 보다는 정보를 얻고 움직이는 편이 좋겠지.”

의견을 나눌 시간도 없어 지금은 그냥 재중이 형 말에 따르기로 했다.

“빠지죠.”

전사 형의 말을 시작으로 모두 트로아 요새에서 멀어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움직이려는 찰나, 무너진 성벽을 통해 누군가 홀로 걸어 나가는 것이 보였다.

“저 사람 누구 ”

후퇴하기 전 상황을 보던 나르샤가 성벽에서 나가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의아한 듯 물었다.

금색 마법 문양이 아름답게 수놓아진 길고 세련된 법복을 입고 있는 금발의 여인이 차분하게 한 발자국씩 발을 옮겼다.

그것도 싸이클롭스를 향해서.

“저, 저…….”

전사 형이 뭔가를 보더니 굉장히 놀란 듯 계속 그 여인을 가리켰다.

뭐지

전사 형은 뭔가 아는 것이 있나

“형, 왜 그래요 ”

내 물음에 전사 형이 다른 사람이 들리지 않게 작게 속삭였다.

“몸매가 죽이…….”

그 말을 하기 무섭게 나르샤 누나가 엄청난 속도로 점프해 무릎으로 전사 형의 옆구리를 찍어버렸다.

“크억!”

“다 들려!”

야차와도 같이 변한 나르샤 누나의 눈빛을 보고는 바로 눈을 돌려 버렸다.

죽었나

한 방에 쓰러져서 컥컥거리는 전사 형에게 명복을 빌었다.

그렇게 다시 바라본 여성은 전사 형이 그런 말을 할 만큼 확실히 특출난 매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건 단순히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몸 주변을 타고 흐르는 특이한 오라에서 더 두드러졌다.

금빛과 하얀빛의 오오라.

이제껏 NPC에서 저런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람에게서 저런 포스가 나올 수 있는가 싶기도 하고.

이국적이면서도 강렬했다.

혹, 다름 사람이 있을까 했지만 추가로 나온 NPC가 없었다.

그저 경비 NPC만이 요새 성벽 위에서 자리 잡고 있을 뿐.

아무리 그래도 혼자

저 싸이클롭스를

산을 타듯 걸어 내려오는 흑색의 기운을 뿜어내는 싸이클롭스와 백색이 오오라를 두르고 있는 여성이라…….

완벽하게 상반된 그림이 트로아 요새를 벗어나려던 우리의 발걸음을 자동적으로 멈추게 했다.

싸이클롭스가 산을 다 내려와 평지에 발을 내딛자 여성이 등에 메고 있던 자기 키만 한 스태프를 꺼내 들었다.

저건…….

트로아 요새의 상점에서 봤던 무기와 형색이 비슷한데

마치, 뼈를 깎아서 만든 것 같은 스태프는 하얗고 긴 중심부와 끝은 재질을 알 수 없는 금색의 태양 같은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스태프를 꺼내자마자 싸이클롭스를 향해 내밀더니 뭔가 알 수 없는 용어로 주문을 이어갔다.

그리고 주문이 이어지는 동안 여성의 몸 주위로 흰색과 금색의 마법진이 동시에 몸을 타고 돌아가기 시작했다.

빛이 모여드는 경건함

딱 그런 느낌의 마법들이 스태프의 태양 문양 끝으로 모여들자 주변의 공기가 뒤틀려 여성에게로 모여들었다.

그 흐름이 주변으로 점점 넓게 퍼지더니 우리가 있는 곳까지 영향을 주었다.

몸이 말려 들어갈 정도로 강력하게.

“굉장한 압력인데 ”

재중이 형이 순간 라이덴 미늘창을 바닥에 내려찍었다.

그리고 나도 무기를 바닥에 박아 넣고는 챠밍의 팔을 잡았다.

몸이 계속 여성 쪽으로 끌려갔으니까.

챠밍이 고개를 끄덕여서 고마움을 표시하고는 언제라도 쓸 수 있게 회복 마법을 준비했다.

이쁜소녀는 해머의 무게 때문인지 제자리에서 버텼고, 나르샤 누나는 전사 형이 붙들고 있으니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이젠 지켜보는 일뿐.

영창이 끝난 여성 NPC가 빛이 모여든 스태프를 높게 들었다가 내려치면서 마법을 시전했다.

『 모든 생명에게 축복을! 암흑의 존재에게 철퇴를! 』

【 썬 라이트! 】

스태프 앞으로 잔뜩 모여들었던 금색과 백색의 빛이 터지면서 주변을 온통 하얗게 물들었다.

순간 눈이 멀 정도로.

아니, 확실히 앞이 안 보였다.

그 순간 시스템음이 급하게 울려댔다.

《 근력이 10 상승합니다! 》

《 민첩이 10 상승합니다! 》

《 체력이 10 상승합니다! 》

《 지력이 10 상승합니다! 》

《 마력이 10 상승합니다! 》

《 신성력이 10 상승합니다! 》

《 HP가 모두 회복됩니다. 》

《 마력 회복 속도가 증가합니다. 》

《 무기에 태양의 힘이 깃듭니다. 》

《 모든 암흑기에 대한 저항이 상승합니다. 》

이게 대체 뭐야

너무 밝은 빛으로 시야가 잠시 멀어 있는 상태에서 귓가론 버프를 받는 시스템음이 계속 울렸다.

“……하, 대박이네.”

전사 형이 뭔가를 봤는지 그저 감탄을 연신 뱉어냈다.

시야가 전부 막힌 우리와 달리 아마 미스트 쉴드 뒤로 몸을 숨겨서 시야가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다 확인한 듯 우리에게 급하게 외쳤다.

“싸이클롭스가…… 도망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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