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2
#262화 트로아 요새 (3)
한때 곰이 둔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덩치가 크니까 당연히 느리겠지.’
실상은 그것이 아닌, 단순한 선입견에 불과했다.
덩치가 크다고 느리고 우둔한 법은 없다.
외향과 반대로 큰 근육에서 발산되는 민첩함과 강함.
그리고 그것은 오우거도 마찬가지였다.
“우어어!”
각 서버의 상황은 다르겠지만, 1서버 유저들은 새 지역이 열렸는데 아직도 터널 주변에서 맴돌아야 하는 것에 굉장히 답답하고 조급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상황과 사람의 감정이 만들어낸 몸짓.
릴레이 달리기.
민첩에 스탯 포인트 대부분을 투자한 랭커 유저가 몸을 최대한 가볍게 만든 상태에서 터널을 진입하는 부분부터 시작되는 영상이 게시판에 업로드되었다.
터널이 막혔다면 몹보다 빠르게 달려서 통과하면 되지 않느냐는 물음에서 나온 결론.
확실히 대부분의 스탯을 민첩에 투자한 유저라 일반 유저에 비해 빨랐다.
달리는 것에 오우거나 트롤 등을 사냥하는 유저들이 한 번씩 바라보긴 했지만, 큰 관심은 아니었다.
그렇게 얼마를 달렸을까 유저들이 점점 보이지 않고 몹이 우글거리는 구간이 되자 긴장감이 서서히 고조되었다.
주변에 사냥을 하면서 시선을 끌어줄 사람도 없어 정말 주력에 의존해서 무조건 내달려야 했다.
그렇게 시작된 질주.
정말 빨랐다.
민첩에 치중한 랭커가 얼마나 빨리 달릴 수 있는지 보여주는 표본 같은 모습이었으니까.
하지만 자신감으로 충만했던 랭커 유저는 달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표정이 흙색으로 변해 버렸다.
“……발, 뭐가 이렇게 빨라.”
다만.
오우거가 유저보다 더 빨랐을 뿐.
퍽!
몹을 이리저리 피해 가면서 달리던 랭커를 순식간에 따라잡더니 묵직한 주먹을 휘둘러 달리던 랭커 유저를 패대기쳐 버렸다.
단지 주먹에 스쳤을 뿐인데도 바닥에 나뒹굴게 하는 힘이었다.
딱 한 방.
그 한 번의 공격에 경직이 된 유저가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오우거의 먹이가 되어 빛으로 사라져 버렸다.
극 민첩.
좋다.
좋은데 다른 스탯이 받쳐줘야 빛을 발하는 빌드였다.
힘이 너무 낮거나, 체력이 낮거나 하면 민첩 수치만큼 성능이 나오지 않으니까.
그리고 한 대 맞으면 죽을 정도로 체력이 낮다.
이건 내가 극 민첩이라서 잘 아는 사항이다.
물론, 네임드 아이템들로 부족한 부분을 채운 나는 저 랭커와 확실히 다르긴 해도 기본 골자는 똑같았다.
그렇게 수백, 수천 번의 도전이 시작되었다.
각 서버마다 온갖 유저가 이 도전을 계속했다.
최초로 터널을 뚫는다고 특별한 상을 주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시도는 끝나지 않았다.
최초.
전 서버가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의 이름을 알릴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그렇게 유명해진다면 크게는 광고에서 기업의 스폰, 상위 길드의 관심 등 한 번쯤은 시도할 가치는 있었다.
이름값은 무시할 수 없으니까.
다만, 난이도가 너무 높아서 제대로 통과하는 유저가 없었다.
그렇게 우리를 제외한 다른 유저들은 스탯과 아이템의 부재로 터널 안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1서버를 제외한 나머지 서버에선 현재 이게 정석이었다.
물론, 여기서 사냥하는 것만으로도 파워글러브, 트롤 벨트 등이 떨어져 아직까지는 사냥터로 충분했고 사람들도 만족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다른 서버는 터널 내 사냥터 자리와 몹이 부족해 밀리고 밀리다 보면 언제가 되었든 터널을 자연스럽게 뚫고 나올 것이다.
그렇긴 해도 일단 다른 서버의 진행 상황은 우리에겐 큰 문제조차 되지 않았다.
물론 나중에 터널을 지나 트로아 요새를 발견하고 정보를 퍼뜨리는 쪽이라면 문제가 되겠지만, 아직 시간은 우리 편이었다.
그리고 서로 쉽게 정보를 내어줄 것 같지도 않으니까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었고.
우리의 관심사는 1서버.
다른 서버는 오우거와 트롤을 잡고 지나가면 된다지만, 1서버는 무려 오우거 로드가 지키고 있었다.
단 2일.
영상이 업로드되고, 대부분의 사람이 포기하기까지 걸린 시간.
그중 1서버가 제일 많이 시도를 했고 제일 많이 죽었다.
이제 유저들이 터널에 묶여 있는 이상.
우리가 조금 더 치고 나갈 수 있겠지.
그러기 위해선 울타리가 잘 있나 확인도 필요하고.
<주호> 오우거 로드가 좀 움직였네요.
안개화를 하고 터널로 진입했는데 오우거 로드가 전혀 다른 곳으로 이동해 있었다.
<불멸> 시도야 계속하겠지. 어떻게든 오우거 로드를 떨쳐내려고.
내가 생각하기엔 헛짓이다.
오우거 로드는 오우거보다 훨씬 빠르다.
주력이든 몸의 움직임이든.
지금 유저들 스탯으로는 절대 떼어놓고 도망갈 수 없다.
나조차도 겨우 따돌리는 수준인데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
굳이 한 명 넣자면 나르샤 누나 정도
그 외에는 모두 아웃이다.
<주호> 다시 옮겨놓을게요.
오우거 로드는 귀찮지만, 수시로 확인을 해야 했다.
혹시라도 이놈이 변덕을 부려 전혀 다른 곳으로 가면 지금까지 한 일들이 모두 물거품이 된다.
오우거 로드에 화살을 날리자 주변 오우거들이 모두 나를 돌아봤다.
그리고 고함을 지르는 오우거 로드와 함께 우르르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터널 중간쯤 적절한 위치를 잡은 뒤 바로 기술을 사용했다.
【 미스트 윙 하트! 】
그러자 지금껏 나를 죽일 것처럼 따라왔던 녀석들이 모두 제자리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멈췄다.
이제 당분간 안심이네.
조금만 더 수고해라.
오우거 로드.
<주호> 됐어요. 귀환할게요.
<불멸> 혹시 모르니까 조심해서 와라.
안개화로 오우거 로드와 오우거들 사이를 지나 반대편으로 넘어와서는 안개화를 풀고 달려나갔다.
그렇게 터널 밖으로 나오자마자 근처에서 대기하던 우리 팀을 찾았다.
“준비는요 ”
“뭐, 준비라고 할 것까지 있나.”
그러면서 바닥에 늘어놓은 초강력 갈고리들을 가리켰다.
“좋네요.”
딱 원하는 만큼 준비해 놓았다.
그때, 이쁜소녀가 초강력 갈고리와 나를 번갈아 보면서 쳐다보면서 망설이는 눈빛으로 말을 걸었다.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는 없잖아. 오우거 로드도 한계가 있어.”
내 말에 그나마 납득했는지 이쁜소녀가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지금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
있는 시간도 쪼개서 써야 할 판이라.
그리고 거인들의 대지를 폭넓게 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고.
지금부터 할 것은 사람들이 거인들의 대지로 넘어와서 사냥을 하고 있었다면 절대 할 수 없는 방법이다.
“사람들이 없어서 다행이에요.”
챠밍도 이미 계획을 들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딱 그런 계획이다.
사람들이 많을 때 하면 욕먹기 딱 좋은 그런 계획.
“챠밍, 오랜만에 운전대 한 번 잡아볼래 ”
내가 웃으면서 말을 하자 챠밍도 화답하듯 미소 지었다.
“네, 맡겨주세요.”
***
재중이 형의 설명과 요새 경비 NPC의 말을 종합해 생각해 봤다.
기여도.
좋게 이야기하자면 우리 요새를 위해 일 좀 빡세게 하라는 것을 듣기 좋게 포장한 말이다.
그래서 해줄 생각이다.
이왕 할 거라면 빡세도 완전 빡센 쪽으로.
“……항상 생각하지만 운영자가 널 보고 무슨 생각 할지 정말 궁금하다.”
전사 형이 뜬금없이 그런 이야기를 하자 그저 웃어버렸다.
나도 솔직히 모르겠다.
그냥 항상 모르는 것투성이고, 난 여전히 배우는 입장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발버둥 치는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확실히 운영자가 보면 또 기절하겠군.”
그런 말을 하면서도 재중이 형이 열심히 초강력 갈고리의 줄을 미스트 윙의 목에 묶기 시작했다.
한때 생각했던 적이 있다.
하늘을 나는 탈 것에 탑승을 하면 공격이 안 된다고.
그럼 타지만 않으면 공격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생각의 결과물이 바로 저것이다.
목줄.
“자, 그럼 모두 수고해주세요.”
내 말에 이쁜소녀가 미스트 윙을 타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전사 형도 마찬가지고.
내 쪽은 챠밍이 라이덴을 타고 상승했다.
어느 정도 올라가자 축 늘어져 있던 갈고리 줄이 일자로 세워졌다.
그리고 그 끝을 잡고 허리에 감았다.
나와 마찬가지로 재중이 형과 나르샤가 허리에 줄을 감더니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여기 오케이!”
그렇게 세 마리의 탈것이 모두 고도를 더 높이자 자연스럽게 허리에 밧줄을 감은 우리도 붕 뜨기 시작했다.
“번지 점프는 해봤어도 이건 또 처음이네 나름 스릴 있는걸.”
나르샤 누나가 그렇게 이야기하면서도 금방 균형을 잡더니 라이덴 석궁을 꺼내서 준비했다.
재중이 형도 재밌다는 듯 웃고는 바로 자세를 잡았다.
역시 둘 다 잘해.
나도 이번에 주운 9강 안개협곡 롱보우를 꺼냈다.
거인들의 대지는 기본적으로 높고 넓은 숲 지형이다.
경사가 많고, 큰 나무들이 시야를 가리면서 제대로 된 사냥터를 찾기 애매할 정도다.
뛰어다니면서 몹을 모는 것도 시야의 한계가 있고, 제대로 달릴 수 없는 문제까지 혼재했다.
지금같이 오우거와 비슷한 커다란 몬스터 한 마리, 한 마리에 집중하는 시스템으로 생각한다면…….
물론, 나쁘진 않을 것이다.
다만, 그 정도에 내가 만족을 못 한다는 것이 문제지.
하늘로 떠올라 세 방향으로 흩어지는 우리 팀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서로 멀어지자 라이덴을 타고 있는 챠밍에게 말했다.
“너무 안 내려가도 되니까 몹 근처로 가서 선회만 해줘.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네, 오빠. 그럼 출발할게요.”
챠밍이 라이덴을 끌고 출발하자 내 몸도 자연스럽게 매달려 날아갔다.
날아가던 것도 잠시, 챠밍이 급가속을 하더니 거칠게 꺾으면서 라이덴을 몰자 내 몸이 휘청거렸다.
생각보다 화끈하게 모네.
드라이브 본능이 여기서 나오는구나.
“아! 미안해요. 저기 오우거 발견해서요.”
“아냐, 괜찮아. 잘하고 있어.”
“네! 그럼, 오우거 위에서 선회할게요.”
챠밍이 발견한 오우거 위로 라이덴을 선회하자 내가 바로 협곡 롱보우로 조준했다.
흔들리는 라이덴과 그보다 더욱 흔들리는 밧줄에 매달려 활을 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진 않았다.
첫발은 오우거의 옆쪽을 살짝 스치며 땅에 박혔다.
꽤 난이도가 있네.
시야를 집중하면서 감각을 끌어올리자 바람의 방향, 몸의 흔들림, 손끝의 진동 등이 모두 한 점에 모여서 하나의 궤적을 이루어내었다.
그 순간 당겼던 활시위를 놓자 거짓말처럼 정확하게 화살이 오우거의 등판에 부딪쳤다가 튕겨 나왔다.
“쿠어!”
확실히 공격이 된다.
활이 주 무기가 아니라 손의 감각은 많이 떨어졌지만 단순히 멈춰 있던 몬스터를 맞추는 것은 할 수 있었다.
“진짜 한 번에 맞추시네요. 흔들려서 힘드실 건데.”
“한 번은 아니고 두 발 째야.”
“그래도요. 대단한 건 대단한 거예요. 전 절대 못 맞출 것 같아요.”
그렇게 내가 맞춘 것을 확인하자 챠밍은 바로 다음 장소로 라이덴을 움직였다.
그리고 우리가 이동하자 오우거가 하늘을 바라보면서 우리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역시 생각대로네.
그렇게 하늘에서 백여 마리의 오우거와 트롤, 골렘 등의 어그로를 끌었다.
몬스터들은 걸리적거리는 나무를 부러뜨리고 지나가기도 하고, 서로를 밀치면서 우릴 따라왔다.
백여 마리의 거대한 몬스터가 하늘을 바라보면서 고함을 지르는 광경이란.
“오빠! 비행시간 아슬아슬해요.”
“아, 내가 너무 집중했네. 미안.”
나와 달리 챠밍은 버틸 수 있는 시간대가 그리 길지 않았다.
“이쯤 하면 됐어. 바로 가자.”
“네, 그럼 갈게요.”
그 말과 함께 챠밍이 라이덴을 선회시켜 한쪽 방향으로 잡았다.
<주호> 지금 가는 중.
<불멸> 우리도 간다.
<방패전사> 이쪽도 가고 있음.
<주호> 저희 백 마리 좀 넘을 것 같은 데.
<불멸> 흐흐, 그것밖에 안 되냐
뭐지, 이형.
얼마나 끌고 왔길래.
<불멸> 남자가 이백 마리는 되어야지.
이백 마리나 몰았어
<주호> 졌네요.
<불멸> 크크, 형님이라 불러라.
하여간 저 형, 재주도 좋아.
어디 부락지 같은 곳이라도 발견한 건가
하지만 이 대화는 단 한 명의 말에 종결되어버렸다.
<나르샤> 다들 별로 못 몰았네. 난 삼백 마리 몰고 가.
나르샤 누나의 말에 화들짝 놀라버렸다.
그리고 재중이 형도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불멸> 끙, 어디 좋은데 찾았냐
<나르샤> 재수가 좋았어. 부락지 두 개 정도 터니까 나오네
<불멸> 하, 졌네.
재중이 형이 두 손 두 발을 들어버렸다.
이번 승부는 나르샤 누나가 완전히 이겼다.
역시.
몹몰이는 나르샤 누나가 최고네.
***
그렇게 모인 수백 마리의 몹을 이끌고 숲을 벗어나 트로아 요새로 향하자 근처의 땅이 쿵쾅거리며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우거를 포함한 거대한 몬스터들이 짓밟고 지나가는 모든 장소가 푹푹 패여서 엉망이 되어갔다.
마치 도로를 만들 듯 길을 쭉 내면서 달려오는 몬스터들의 행렬에 입이 벌어졌다.
저건 저것대로 장관이었다.
그와 함께 트로아 요새 쪽은 비상이 걸렸다.
기여도.
그래, 낮은 등급에서 기여도를 올릴 제대로 된 퀘스트를 안 준다면…….
내가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기여도를 잔뜩 받을 수 있는 그런 돌발 상황을.
그래서 준비했다.
일명.
강제 방어전.
얼마나 기여도를 뱉을지 한 번 두고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