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
#224화 통수와 통수 사이 (6)
“크크, 아 진짜 개그도 아니고.”
화련에게서 온 것을 보자마자 재중이 형이 한 말이다.
개그.
이걸 진심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100억?”
옆에서 방패전사도 눈을 부릅뜨고 화련이 부른 액수를 쳐다봤다.
“골 때리네. 이 여자.”
나르샤도 이번엔 놀란 표현을 드러냈다.
“진짜 100억요?”
아이템이나 돈에는 그다지 크게 관심이 없던 이쁜소녀도 100억이라는 돈에는 깜짝 놀란 모양이다.
그리고 챠밍은 아무 말도 없이 흔들리는 눈으로 나와 화련이 보낸 메일을 반복적으로 봤다.
100억이라면 누가 봐도 놀랄만한 액수다.
전에 내게 제의했던 10억과는 숫자 단위부터가 다르니까.
할 수 있는 것이 정말 많아지는 돈이기도 하고.
나도 아무리 지금 당장 돈을 잘 번다고 해도 이 정도 액수라면 충분히 흔들릴 만하다.
흐음, 이걸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사실, 관계를 떠나서 화련이 이 정도로 집착할 줄은 몰랐다.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화련이 제시한 액수가 거짓은 아닐 것이다.
이 여자의 행동과 지금까지 뿌려댄 돈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액수다.
“그냥 내질렀다고 보기엔 그럴 상황이 아니긴, 너무 아니지.”
방패전사도 같은 생각을 하는지 지금 상황을 입에 담았다.
“아마, 이번 쟁으로 네 가치를 확 올려 잡은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도 100억을 준다라……. 보통 여자가 아닌데? 한 번에 돈을 이렇게까지 쓸 수 있나?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방패전사가 그 말을 하면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저번이랑 이번까지 합치면 주호에게 엄청나게 당했으니까 이해는 가지만…….”
그 말을 하는 나르샤도 마찬가지로 굳은 표정이다.
아직까진 화련이 보내온 제시 하나뿐이지만, 이 계약이 성사된다면 역대급 이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바로 내가 다른 길드로 옮기는 그런 그림이.
“이 여자 봐라. 재밌게 노네.”
재중이 형도 이 발언을 그냥 무시하지 못하는 것도 액수가 커도 너무 컸다.
“단순히 흔들어 보려고 보낸 글은 아니겠죠?”
“아마, 이 여자 진심일 것 같은데?”
방패전사의 말에 재중이 형이 확답은 피했지만, 꽤 높은 확률로 맞을 거라는 식으로 대답을 했다.
재중이 형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거의 맞다는 소리군.
100억이라.
“넌 어떻게 생각하냐?”
재중이 형이 정말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날 보면서 물었다.
“형, 지금 이게 재밌어요?”
“어, 엄청. 화련 한 명뿐이지만 어쨌든 네 몸값이 100억이라는 수치가 나왔으니까.”
“이거 참.”
생각하기에 따라서 정말 저런 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내가 넘어가도 100억, 넘어가지 않아도 100억이라는 제안을 받은 것은 사실이니까.
“설마 연봉은 아니겠죠?”
“연봉 100억이면 난 바로 간다.”
재중이 형이 우스갯소리로 말하자 주변 분위기가 확 풀어졌다.
“진짜 갈 거예요?”
“아니, 농담이지 뭐.”
놀랬네.
이 형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
적으로 만나면 제일 무서운 사람이 재중이 형이 아닐까.
“아, 나도 100억짜리 제의를 누가 해줬으면 좋겠네. 바로…….”
방패전사도 농담을 하자 나르샤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찍어버렸다.
“컥.”
아프겠네.
그러곤 아무 일 없다는 듯 나르샤가 우릴 방긋 웃으면서 쳐다봤다.
저렇게는 되지 말아야 할 텐데…….
미리 애도를.
“그래서 생각은 어때?”
“으음…….”
내가 고민하는 듯 신음을 흘리자 모두의 시선이 내 입으로 모였다.
내 한 마디에 따라 앞으로의 상황이 확 바뀔 수도 있겠네.
“이야기를 들어볼 사람이 있어요.”
***
“날 불렀나?”
덩치 큰 형님 느낌의 폭군이 쫙 벌어진 어깨를 들이밀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저 정도 체형이면 현실에서도 한 덩치하시는 분일 건데.
로스트 스카이가 마냥 체형을 확 늘려주지는 않으니까.
거기다 착 가라앉은 눈빛도 혹시라도 마주치면 최대한 피해 다녀야 할 그런 분위기가 느껴졌다.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서요. 시간 괜찮나요?”
“아, 네가 부르면 뭐 언제든 오케이다.”
“그렇게 말해주시니 영광이네요.”
“그래, 뭐가 필요하지? 아, 그리고 우리가 먹은 모든 아이템은 네가 주겠다.”
……전부?
내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니지?
옆에 있던 우리 팀원들도 눈이 동그랗게 변해서 폭군을 바라봤다.
“뭐가 잘못됐나?”
“아, 뭐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되나요?”
“안 될 게 뭐가 있지?”
“확실히 안 될 것은 없죠. 그래도 길드원들이 싫어할 텐데.”
“그건 내가 알아서 한다. 그리고 우리 녀석들도 같은 마음이니까. 이번엔 정말 크게 신세 졌다.”
“화련을 넘겨준 것 말인가요?”
“그냥 이런 기회 자체를 준 것에 대한 보답이다. 스칼렛이 제안하기는 했어도 이 정도로 완벽한 기회를 만들어줄 수는 없지. 사실 어떻게든 한 방 먹이는 정도까지만 생각했는데 이번엔 완벽했다. 더할 나위 없이.”
그렇게 말하면서 폭군이 아주 만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입가가 완전히 올라갈 정도로.
정말 어지간히 시달렸던 모양이네.
이렇게 화통한 아저씨가 이렇게 할 정도라니.
“화련 밑에 있어 보셨죠?”
지금 물어보는 것은 폭군을 불러낸 핵심이다.
아무래도 당사자에게 물어보는 것이 제일 빠를 것 같으니까.
내 말에 폭군의 눈썹이 확 올라갔다.
아, 이 아저씨 인상 참 무섭네.
마치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은 것 같은 그런 사나운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그건 왜 묻지? 내가 로스트 스카이를 하면서 가장 후회하는 일 중 하나인데.”
그 정도인가?
하긴 지금 반응을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혹시 제가 화련에게 제안을 받았다고 하면 어떻게 생각하세요?”
“무조건 거절해라.”
폭군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처음엔 좋겠지. 평소 만져보기 힘든 액수의 돈을 눈앞에서 흔드니까. 랭커인 나조차도 그런 돈을 툭 하고 던져주면 혹할 수밖에 없어. 그게 가장 큰 실수였지만.”
“실례가 아니라면 얼마쯤?”
“10억.”
그냥 대놓고 이야기해 주시네.
그러고 보니 전에 내게 제안했던 것과 같은 액수군.
폭군을 나와 동급으로 생각했던 걸까……?
은근히 기분이 묘하네.
“그런데 노예나 다름없어진다.”
“노예인가요?”
“그래, 계약서에 걸린 노예. 그리고 그 뒤부터는 온갖 잔심부름에 욕설, 뺨을 때리는 건 예사지. 뭐 어차피 가상에서 맞아봐야 몸은 괜찮겠지만, 기분이 거지 같아져. 길드원 앞에서 모욕을 주는 것도 다반사다. 모두 다 보고 있는데 무릎 꿇으라고 하고 머리에 물건을 집어 던지지 않나, 심지어 친한 동료를 치라는 지시도 해. 그날 화련의 기분에 따라서 매번 기준이 바뀐다. 한 번도 일치했던 적이 없군. 그리고 또…….”
그러면서 한참을 주저리주저리 우리 앞에 화련의 행동들을 전부 알려줬다.
그 말을 듣는 챠밍과 이쁜소녀, 나르샤가 질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방패전사도 불편한지 인상을 찡그렸다.
이건 갑질의 끝을 보는 것 같네.
밑에 들어와서 일하라는 말이 정말 밑에서 개처럼 기라는 소리였구나.
100억이나 들어갔으니 대하는 것이 좀 다르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저 인성이 변할 거라는 생각하기 힘들다.
챠밍이나 이쁜소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에 물건을 집어 던져서 맞는다?
상상만 해도 짜증 나네.
이쯤 되니 돈이 문제가 아니다.
내가 돈이 없으면 또 모르겠는데 조금 빨리 벌겠다고 폭군처럼 시달릴 바에는 그냥 포기다.
“재고할 여지도 없네요. 들어보길 잘했어요.”
내가 재중이 형에게 말하자 재중이 형도 한숨을 쉬었다.
“완전 미친년이었군. 돈이 많으니 미친년이 된 건지…… 미친년이 돈 많은 집안에서 태어난 건지…….”
그 말에 모두가 동감하는 듯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근데 누구도 그 돈을 화련이 벌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네요?”
방패전사가 묻는데 재중이 형이 피식 웃었다.
“설마.”
하긴, 저런 정신으로 될 리가.
말아먹어도 벌써 말아먹었지.
그냥 집이 금을 떠나 다이아몬드일 것이다.
미친 짓을 해도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 등골 빨아먹는 그런 집안 말이지.
내가 메일을 열고 화련에게 온 글을 지우려고 할 때 재중이 형이 재밌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이렇게 보내봐.”
“어떻게요?”
“1000억 주면 생각해 본다고.”
“하하, 그것도 재밌겠네요.”
<주호> 1000억 부르면 생각해 봅니다. 참고로 연봉이요.
자, 과연 답변이 어떻게 오려나?
“그리고 이편이 더 나아요.”
모두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좀 뜬금없었나?
“생각해 보면 그냥 화련이 보일 때마다 터는 편이 더 많이 벌 것 같아서요. 걸어 다니는 ATM이잖아요. 돈이 필요하면 그때그때 털면 되죠.”
그리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굳이 힘들게 밑에서 일할 필요가 있나?
폭군과는 다르다.
돈이 필요하다면.
나는 터는 자가 될 것이니.
***
이번 쟁의 후속 조치는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었다.
워낙 압도적으로 밀어붙이다 보니 모든 길드의 피해가 심하지 않아 복구해 주는 정산이 쉽게 끝났다나?
지금도 한참 우리 길드 건물에서 각 길드의 주요 인사가 모여서 아이템과 영상을 돌려보면서 정산을 한다고 정신이 없다.
다른 때와 다르게 꽤 차분하게 진행이 되고는 있었다.
이른바 축제다.
엄청난 규모의 쟁이었음에도 피해 없이 이득만 가득한 쟁이었으니까.
보통은 피해복구 때문에 서로 더 가진다고 난리가 나겠지만 이번만은 경우가 다르다.
스칼렛은 흥얼거리면서 아이템을 정산한다고 정신이 없다.
유령이나 이슬두잔, 리더는 최대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가져가려고 노력 중이었으나, 대체로 차분한 분위기에서 정산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누구의 영상을 틀어봐도 내 활약이 압도적이기에 사장님이 큰 소리를 내면서 분배를 주도했다.
처음 약속했던 40%보다 더 받을 거라고 따로 언급을 주기도 했고.
아마 50% 선에서 정리가 될 거라고 이야기가 나왔다고 하니까.
거기다.
폭군의 길드에서 모든 아이템을 전부 모아 나에게 보내왔다.
사장님 말을 들어보니 자신들 피해복구는 신경도 안 쓰고 그냥 다 보내온 거다.
전량.
“정말 보냈네요.”
계약서에 적히고 그런 것이 아니라서 다른 마음을 품어버리면 피곤한 상황이 오는데 완전 깔끔하게 보내주었다.
인벤 하나가 꽉 찰 정도의 아이템이라…….
이번에 개인 창고가 미어터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저런 사람이 어쩌다, 쯧쯧.”
사장님이 잠시 안타까운지 혀를 찼다.
돈에 눈이 잠시 멀어서 지옥과 천당을 맛보고 왔으니.
어느 정도 정산이 끝나가자 스칼렛을 잠시 바라봤다가 사장님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이 말을 꺼내기 제일 괜찮은 시간대라.
“아, 사장님. 저 부탁이 있는데.”
“응? 뭐냐. 말해봐라.”
“제가 이번에 받을 보상 대신 물건 좀 구해다 주실 수 있어요?”
“어떤 물건? 어지간한 건 다 구할 수 있을 거다. 스칼렛도 있고.”
확실히 스칼렛을 통하면 좀 더 쉽게 구할 수 있겠지.
듣기로 상인들 쪽 큰 손들하고 커넥션이 있는 것 같으니까.
거기다 사장님이 중간에 조율해 주시면 충분하다.
그래서 이야기를 꺼낸 거다.
사장님과 스칼렛이 한 자리에 있는 지금.
“음, 네임드 무기요. 좀 구해다 주실 수 있어요? 이를테면 카스카라 같은.”
“그래, 얼마나? 너 이번에 받을 돈 생각보다 훨씬 많을 건데…….”
“전부요.”
내 말에 사장님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전부?”
“네, 전부요.”
내게 들어오는 돈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전부 다 구해서 이번에 펑펑 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