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
#221화 통수와 통수 사이 (3)
확실히 큰 그림만 보면 지금이 가장 좋다.
이 정도로 그림을 그리고 움직일 수 있다니, 스칼렛 저 여자도 보통은 아니네.
판을 짜는 능력이 재중이 형이나 수호, 최종병기 형들을 뺨치는 수준이다.
내가 재중이 형을 바라보자 재중이 형이 눈을 가늘게 뜨면서 스칼렛에게 잠시 시선을 주곤 고개를 돌렸다.
“교훈이 됐으려나? 돌다리도 여러 번 두드리고 건너야 해. 우리만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니.”
“네, 이런 식으로 휘둘리는 것은 좋지 않죠.”
“스칼렛 저 여자가 재밌게 해주네, 여러모로.”
말은 재밌다고 하지만 표정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더없이 냉정한 표정으로.
이런 모습은 좀처럼 볼 수 없었는데 스칼렛이 잠자는 용을 좀 건든 모양이다.
정말 제대로 하면 어떻게 변할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사람을.
뭐,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만 일단은 지금 전투에 신경 써야 한다.
원래라면 꽤 긴 게릴라전이 될 것으로 생각했던 화련 연합과의 싸움이 스칼렛의 큰 그림으로 그냥 단판 승부로 변해 버렸다.
여기서 지면 바로 낭떠러지다.
“그림이야 어쨌든 여기서 지면 앞으로 쭉 밀린다. 정신 바싹 차리고 가자.”
“네, 저도 제대로 해볼 생각이에요.”
“막상 섞이면 누가 누구와 싸우는지도 모를 거다. 뒤 조심하고.”
재중이 형 말대로 바로 뒤의 절벽이 있는 필드에 모인 사람만 해도 이미 천 단위를 넘어섰다.
공중전도 그렇지만, 새삼 이 게임에 사람이 많다는 것을 이럴 때마다 실감하게 된다.
또한, 내가 알기로 필드에서 이 정도의 수가 한 번에 붙는 것은 공성전 이후로 처음일 것이다.
공성전이야 경험치와 드랍률 보정이라도 되지 지금은 그냥 죽으면 끝이다.
“죽으면 정말 놀려줄 거다.”
“마찬가지네요.”
하늘에서 소수 정예와 치맥 길드가 떨어져 내리면 그때부터는 진짜 난전이다.
한 치의 방심도 허용되지 않는.
그리고 정면을 바라보니 화련과 스칼렛이 서로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성격이 강한 여자가 둘이라…….
아마 그 둘이 이 난전의 시작을 알리리라.
“이익, 스칼렛 너!”
화련이 더 없을 정도로 발갛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제대로 통수를 당해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화련 당신은 모르겠지만, 나도 돈이라면 꽤 많아. 그리고 당신 너무 욕심이 과했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거든.”
“뭐라고?”
“그러게 왜 상인들 영역까지 넘봐? 그것만 아니었어도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걸?”
“하, 돈만 밝히는 그 버러지 같은 것들? 고작 게임 하면서 뭐가 그리 잘 났다고 나대는지. 별것도 아닌 것들이.”
그 말에 이번엔 스칼렛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고작인 게임에서 어디 한 번 개처럼 맞아봐야 정신을 차리겠네.”
“이익, 너 죽여 버릴 거야!”
둘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었다.
한쪽은 속이는 걸로.
다른 한쪽은 속는 걸로.
“독사, 저년 잡아!”
그 말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독사가 롱 블레이드를 꺼내 들고 빠르게 앞으로 튀어나왔다.
생각보다 빠른데?
화련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아무런 응답 없이 그냥 바로 실행에 옮겼다.
랭커인 만큼 확실히 스탯이 높아 치고 나오는 속도도 굉장히 빨랐다.
스칼렛이 반응할 수 없을 만큼.
너무 순간적인 돌격에 스칼렛이 움찔하는 사이 롱 블레이드가 스칼렛을 베기 위해 빠르게 휘둘러졌다.
깡!
“안 되지.”
그런데 예측이나 한 듯 스칼렛의 뒤에서 칼이라는 남자가 훨씬 빠른 속도로 튀어나와 독사의 롱 블레이드를 막아냈다.
푸른 헤어를 휘날리는 칼이라는 저 남자, 마법사인지 알았는데 검사였나?
매번 스칼렛 뒤쪽에서 로브만 입고 시립해 있어서 마법사로 착각을 했었다.
“……흠.”
독사는 칼이 저지한 자신의 무기를 보더니 그대로 칼날을 타고 흘리면서 앞으로 쭉 밀어냈다.
그러자 무게 중심이 바뀌며, 칼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 다시 롱 블레이드를 떼어내 회전시키면서 화련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지시받은 상황은 무조건 지킨다는 건가?
앞에 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칼을 무시하듯 밀어내며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깡!
또다시 울리는 쇳소리.
이번엔 하얀빛이 나는 머리칼을 휘날리면서 아로하가 블레이드를 휘둘러 독사의 롱 블레이드를 막아냈다.
그 찰나의 경직에 칼이 롱 소드를 이용해 독사의 목을 찔러 들어갔다.
블레이드와 다르게 찌르기에도 적합한 롱 소드는 한 점을 빠르게 노리기엔 딱 맞았다.
순식간에 파고드는 롱 소드를 가볍게 피한 독사는 스탭을 밟으며 뒤로 빠졌다.
짧은 공방이 일단락되자 아로하와 칼은 스칼렛의 앞을 단단하게 막아섰다.
마치 이 이상은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듯.
독사가 기습이 실패하자 눈썹을 찡그렸다.
사실, 아로하가 스칼렛을 지키기로 한 순간부터 독사는 스칼렛을 건들 수 없을 것이다.
칼이라는 사람도 굉장히 능숙해 보이고.
오히려 누구보다 빨리 스칼렛의 앞을 막아섰으니까.
“고마워.”
“뒤로 빠지시죠. 이제부터는 제가 맡겠습니다.”
호리호리한 체구였지만, 그만큼 날렵하게 느껴지는 몸으로 스칼렛의 앞을 막아섰다.
“저 친구 꽤 하네.”
재중이 형조차 놀람을 표시할 정도로 좀 전의 반응은 좋았다.
그리고 깡도 있어 보이고.
그 둘의 접전을 시작으로 양쪽 연합의 기세가 잔뜩 달아올랐다.
선제공격은 완전히 실패.
그리고 그사이 화련은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도망가는 게 진짜 잽싸네요.”
“뒤에서 지휘하는 스타일일 거야. 흠, 사람들 사이로 숨으면 골치 아픈데.”
화련이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사라지자 독사도 라인을 끌어모아 바리케이드를 쳤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 서로가 칼날을 앞으로 들이밀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쳐!”
“밀어붙여!”
“쓸어버려!”
“한 놈도 남기지 마!”
대격돌.
라인을 잡고 있던 수백의 사람이 서로에게 검을 들이밀면서 공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하늘 위로 화살이 솟구쳐 오르고 각종 마법들 사방에서 튀어나왔다.
애초에 라인 자체가 섞이고 섞이다 보니 현재 상황이 엉망진창이다.
우리 길드와 달 길드는 절벽을 뒤로하고 버티고 있었고, 그걸 화련 연합이 감싸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화련 연합의 우축을 다시 퍼스트 클래스 연합과 막피 길드가 밀어붙였다.
화련 연합 후방 외곽은 소수 정예와 치맥이 공중에서 탈것을 타고 내려와 공격을 시작했다.
얼핏 보면 우리와 달 길드가 둘러싸인 모양새지만, 공중에서 바라보면 동쪽만 빼고는 우리 연합이 화련 연합을 둘러싼 그림이 나올 것이다.
“좋게 말하면 포위, 나쁘게 말하면 각개 격파당하기 딱 좋은 진형이지. 서로 연계가 안 되니까.”
재중이 형도 어느새 윙 배틀 액스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이번엔 배틀 액스인가?
“지금부터는 정말 난전이다. 방패전사, 이쁜소녀는 챠밍과 나르샤를 보호하면서 움직여, 나르샤와 챠밍은 지원 확실하게 하고.”
그리고 몸을 감싸는 하얀 빛.
【 헤이스트! 】
처음부터 강하게 나가는 건가?
민첩 수치가 적어도 10 이상은 올라간다.
다른 말로 남들보다 훨씬 빠름 움직임을 가져갈 수 있다는 소리고.
컨트롤이 좋은 재중이 형이 헤이스트를 사용하면 그때부터는 상대방 입장에서 재앙이다.
“배틀 액스가 나아. 대놓고 막 찍어내리려면.”
그 말과 함께 윙 배틀 액스를 기존의 움직임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휘두르면서 몰려드는 적들의 방어구를 찍어 내렸다.
그러자 마치 폭탄이 터진 것처럼 세 명의 유저가 튕겨 나가 버렸다.
“우왁! 뭐야!”
“무슨 배틀 액스가 이렇게 빨라!”
좁은 공간에서도 몸의 밸런스와 힘을 한 점에 모아 타격을 하는 모습이 경이롭게 보였다.
속도가 올라감에도 한 치의 오차 없이 방어구의 약한 부분을 타격하는 솜씨는 보통의 단련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쁜소녀도 헤이스트를 쓴 뒤 무기를 포이즌 해머로 바꾸고 재중이 형의 옆에 섰다.
이쁜소녀는 재중이 형처럼 순간적인 조작으로 정교하게 치는 것이 아니라 온몸의 회전력을 실어 바람이 갈라질 정도로 강하게 휘둘렀다.
그러자 재중이 형을 치기 위해 덤벼들던 사람들이 이쁜소녀의 공격에 맞아 사방으로 밀려났다.
무기로 막든, 방어구로 막든.
지금 이쁜소녀는 하나의 포탄이나 마찬가지다.
가는 길을 모조리 씹어 먹으면서 지나가는 탱크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애초에 스피드나 파워, 그 어떤 부분도 화련 연합의 유저들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거기다가 포이즌 해머의 독 전이가 퍼지면서 또다시 전열이 난리가 났다.
걸어 다니는 무한 광역기에 일대가 전부 녹색으로 물들어 버렸다.
“독 풀어!”
“빨리 큐어!”
“젠장! 다시 걸린다!”
“저거 어떻게 좀 해봐!”
어느 정도 독이 다 걸렸다고 생각한 듯 이쁜소녀가 던켈로 무기를 바꾸더니 그 자리에서 최강의 광역기를 내려찍었다.
【 어스 퀘이크! 】
지진과 함께 사방으로 돌이 비산하면서 뭉쳐 있던 수많은 유저를 쳐내 버렸다.
마치 유성이 떨어진 듯 바닥에 크레이터가 생기고 그 주변의 유저들이 엎어져서 신음을 흘렸다.
아마 지금 이쁜소녀의 스탯이면 어지간하면 다 경직일 것이다.
【 블링크! 】
그리고 재중이 형과 이쁜소녀가 만들어준 공간으로 챠밍이 나타나더니 미리 차징한 라이덴의 기술을 시전했다.
【 라이트닝 노바! 】
사방으로 퍼지는 전기 다발이 어스퀘이크로 엎어져 있던 사람들을 다시 지지기 시작했다.
“으악! 안 돼!”
“뭐야! 이 스킬! 너무 강해! 물약이 못 따라가!”
“힐! 빨리!”
어스퀘이크의 영향으로 쓰러져 있던 사람들이 외쳐보지만, 이미 늦었다.
시전자의 주변으로 퍼지는 마법은 시전자의 목숨을 담보로 잡는 스킬이니 만큼 대미지만큼은 정말 강하다.
일반 방출 마법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이건 어스 퀘이크만큼이나 강력한 최상위의 마법이다.
심지어 공중에서 쓸 수 있기도 하고.
그리고 챠밍의 지력은 로브와 서클렛, 소녀 라미아, 라미아의 심장 등으로 현재 미쳐 있는 중이다.
그만큼 우주돌파가 가능할 정도의 추가 대미지가 나온다.
어지간한 유저들은 한 방에 녹일 만큼.
현재 있는 노란 물약으로는 절대 라이트닝 노바의 딜을 못 따라간다.
그냥 터지면 재앙이다.
걸어 다니는 핵폭탄이나 마찬가지.
한 번에 수십이 죽고 난 뒤 챠밍 혼자 서 있는 공터로 화살과 마법 공격이 집중되자 챠밍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기술을 시전했다.
【 블링크! 】
“저 돌아왔어요!”
챠밍이 우리 뒤로 다시 돌아오자 나르샤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말을 하고 나갔어야지.”
“오빠들이 말한 강한 것을 준비했는데 지금이 기회 같아서…….”
“다음엔 말하고 나가!”
“응, 언니.”
“어쨌든 잘했어. 재들 봐라 쫄았다.”
단순히 챠밍이 몇 명을 죽인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순식간에 녹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으니 접근하는 유저가 있을 턱이 없다.
그래서 챠밍에게 멀리서 마법과 화살만을 날린 것이고 그걸 블링크로 죄다 피해 버리고 귀환했다.
“그런 나도 가볼까?”
【 멀티 샷! 】
나르샤가 라이덴 석궁으로 멀티 샷을 날리자 뇌전이 씌워진 십수 발의 화살이 슬글슬금 다가오던 사람들에게 꽂혔다.
“끄악!”
“피해!”
기본적으로 속성이 걸리는 라이덴 석궁 덕에 마력을 최대한 아끼면서 매번 수십 명의 몫을 혼자 한다.
거기다 민첩도 워낙 높아서 화살 수와 재장전 속도가 끔찍할 정도로 빨랐다.
챠밍과는 또 다른 일인 포탑의 활약에 같은 길드원들도 혀를 내둘렀다.
“너희 파티는 괴수들만 있냐…… 무슨 광역 딜이…….”
최종병기가 보면서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수호도 정면을 미스트 쉴드로 막는다고 말은 안 했지만, 한 번씩 흘깃흘깃 쳐다보는 것을 봐서는 꽤 놀란 모양이다.
전에는 너무 압도적이라 이 정도로 스킬을 안 꺼내 써도 됐다.
반면에 지금은 가진 모든 것을 꺼내놓아야 한다.
기세를 잡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이 전열을 무너뜨리면서 스킬을 써대는 동안 꿋꿋하게 심장들을 돌렸다.
모자란 마력은 챠밍과 이쁜소녀에게 날아오는 마법과 속성 화살을 카스카라로 튕겨 내면서 채워 넣었다.
마력을 다 채운 뒤 마지막 과정.
【 라이덴 하트! 】
그와 함께 초강력 갈고리를 꺼내자 밧줄 전체에 강력한 전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저도 다녀올게요.”
전부터 구상하던 것이 있다.
제일 앞쪽에 튀어나온 한 남자에게 갈고리를 던져 걸치니 전기 감전과 함께 부르르 떨면서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죄다 내 근처에서 떨어졌다.
“……또 주호야?”
“어휴, 저 사기 캐릭 이번에 또 뭐 하려고.”
어째 내 주변은 한산하군.
다른 곳들은 지금 수십의 사람이 칼을 맞대면서 접전 중인데 유독 우리 근처만 텅 비어 있었다.
일단, 내게 맞아서 쓰러진 남자의 옆으로 가서 초강력 갈고리를 남자의 허리에 감았다.
“뭐 하는 거야?”
밧줄에 허리를 감긴 남자가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자 마주 보면서 씨익, 웃어줬다.
뭐하긴.
제대로 놀아보려고 그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