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
#220화 통수와 통수 사이 (2)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드디어 행차하셨네. 그렇게 찾아도 못 찾았는데 말이야. 난 또 쫄아서 접은 줄 알았지.”
재중이 형이 비꼬듯 화련에게 말을 걸었다.
삼각 봉우리 이후로 화련이 안 보이기는 했다.
지배자 길드 사람들만 활동을 했지 정작 화련이 안 보였으니까.
뒤에서 수작질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그 어투에 화련의 눈썹이 확 올라갔다.
“진작 내 밑으로 들어왔으면 이런 일은 없었어.”
“그래서 이쪽도 포섭했나?”
재중이 형이 스칼렛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화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와 다르게 이야기가 잘 통하던데? 돈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러면서 재중이 형과 대화하던 화련이 날 확 째려봤다.
지금 어딜 야려?
내가 돈에 안 넘어갔다고 시위하는 건가?
재중이 형이 그 모습을 보더니 그저 피식 웃었다.
형이나 나나 돈 때문에 넘어갈 사람들은 아니니까.
뭐, 한 천억쯤 일시불로 질렀으면 생각이야 해봤겠지만.
“흐음, 잔챙이 길드 세 개랑 달 길드라…… 이 정도로 우릴 상대하려고 했냐?”
재중이 형 말대로 우리 쪽 피해가 이제 와 다르게 꽤 있겠지만, 그렇다고 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스칼렛이 연기하고 있다는 걸 나 외에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
<불멸> 챠밍, 주호 신호하면 큰 걸로 정면 바로 조져. 초장에 기세를 잡고 들어간다.
<챠밍> 알았어요.
<주호> ……아 진짜! 오더까지 내리면 그냥 말할 수밖에 없잖아요.
<불멸> 응?
<챠밍> 네? 무슨?
<주호> 아, 어색하게 나 쳐다보지 말고.
그 말에 날 쳐다보려던 재중이 형과 챠밍이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불멸> 대체 무슨 생각이냐?
<챠밍> 그냥 기다려요?
<주호> 챠밍은 일단 대기, 혹시 모르니까 제일 큰 걸로 장전해놓고. 형, 스칼렛 아무래도 배신 때린 게 아닌 것 같아요.
<불멸> 뭐?
<챠밍> 정말요?
<주호> 방금 귓말 왔는데 티 내지 말라고 하던데요. 우리 쪽에 화련이 심은 쁘락치 하나 있다고 하면서.
<불멸> 음, 우리 행적이 노출되니까, 아예 정보를 안 준 건가? 그렇다고 해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잔머리 굴리지 마. 너흰 끝났어.”
“길고 짧은 건 해봐야 알지.”
화련의 말에 재중이 형이 바로 대응했다.
티 내지 말라는 말을 정말 잘 지키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화련과 대화를 이어갔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내 밑으로 들어와. 너희는 정말 섭섭하지 않게 대우해줄 테니까.”
이 와중에도 포섭인가?
저 여자도 진짜 대단하긴 하다.
“대체 왜 이렇게 주호를 원하는 거냐? 이쯤 되면 포기할 때도 안 됐냐? 여자가 매달리면 보기 싫어.”
“누가 매달린다는 거야!”
화련이 고함을 지르자 사람들이 전부 어이없다는 눈으로 화련을 바라봤다.
심지어 같은 연합의 사람들까지.
어떤 사람은 한심하다는 표정까지 짓고 있었다.
뭐, 저 사람들도 눈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
“누구긴 너지.”
“이익! 독사! 당장 다 불러!”
화련이 옆에 있는 진한 회색의 머리를 한 단단한 체구의 사내에게 이야기하자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이디가 독사라…….
전에 봤을 때 지배자 길드 소속으로 랭킹에 들어 있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화련 바로 옆에서 보좌하는 모양이다.
갑자기 랭킹에 나타난 것을 봐선 지원을 엄청 받은 것 같은데…….
“용병이네.”
“용병요?”
“한 번씩 일 도와주는 애들이 있어. 돈만 주면 뭐든지 하는.”
“흐음, 그런가요?”
독사가 어디론가 연락하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화련 연합 주변에 수많은 로그인 빛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타난 길드 마크가 십여 개가 넘어갔다.
거의 다 생소한 길드 마크인데 어차피 관심이 없어서 어딘지는 모른다.
다만 길드마다 수는 적지만 여기저기서 많이 불러 모은 것은 확실히 알겠다.
“흐음, 이거 참. 처음부터 여기서 끝장을 볼 생각이었나?”
저런 식으로 대기하고 있다가 접속해서 나타나면 아무리 재중이 형이 정찰을 해도 알아낼 수가 없다.
우리가 예전에 더 많은 수를 잡기 위해 인원을 숨겨서 썼던 방법이기도 하고.
“우리를 제대로 보고 배웠군.”
재중이 형이 이번만은 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불멸> 여차하면 애들만 데리고 일자로 뚫고 나가자.
<주호> 가능할까요?
<불멸> 너하고 내가 선두에서 뚫으면 가능할 거야. 중간에 몇 명 떨어져 나가는 건 어쩔 수 없으려나. 스칼렛 이 여자 진짜…… 일을 하려면 제대로 하던가.
이거 참, 피곤해지겠네.
<스칼렛> 사실 저걸 기다렸어요.
응? 뭐지?
저걸 기다렸다고?
<스칼렛> 우리 쪽은 쁘락치를 잡아놔서 괜찮은데 그쪽은 제가 관여할 수 없는 문제라서요. 처음에 장소를 정하고 움직였을 때, 화련 쪽에서 움직여서 알았어요.
<불멸> 그거 하나 잡자고 지금 이 난리를 쳤어?
이젠 표정관리고 뭐고 할 것도 없다.
당장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니까.
<스칼렛> 아뇨, 모르니까 안 잡는 쪽으로 했어요. 사실 목표는 화련이기도 하고요. 저한테 포섭이 들어왔는데 어지간하면 자기가 드러나지 않고 일을 하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 화련이 나올 수 있도록 일을 만들었어요.
우리 쪽이 함정으로 들어와서 당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 이런 식으로 꼬시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저 엉덩이 무거운 화련이 나왔을 리는 없겠고.
그래도 일을 너무 크게 만들었는데?
<불멸> 그러니까 우리 쪽 쁘락치 때문에 우리가 아예 몰랐어야 했다는 거네. 사전에 약속 하나 없이.
<스칼렛> 그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사정 설명을 다 하고 싶은데 어디까지 문제가 있는지 몰라서. 아마 움직임이 전부 다 새어 나갔을 거예요.
<불멸> ……일단 오케이.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적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온 건 아니겠지?
<스칼렛> 그럼요. 절 뭘로 보시고.
뭘로 보는지 모르겠지만 재중이 형이 속으로 욕을 좀 하기는 했을 것 같은데…….
“스칼렛 씨, 이제 넘어오세요. 더 이상 그쪽에 안 있어도 된답니다. 끌어들인다고 수고했어요. 덕분에 재밌는 구경을 하게 됐네요.”
화련이 스칼렛에게 감사 인사와 함께 한껏 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미 다 이겼다고 생각하는 건가?
쪽수만 보면 확실히 그렇게 생각해도 될 만큼 차이가 나긴 한다.
“으음, 전 이쪽이 더 좋아서요. 미안하게 됐네요.”
스칼렛이 미소 지으면서 화련을 바라보자 화련의 표정이 확 굳어버렸다.
“이제 와서 그쪽에 붙는다는 소리야?”
화련 저 여자 자기 기분 좋을 때는 존댓말을 하더니 바로 반말을 해버리네.
역시 같이 갈만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아니, 처음부터 우린 이쪽이었다고. 아직도 이해가 안 돼? 머리가 그렇게 안 돌아가?”
“이익! 지금 장난해?!”
“장난 아닌데?”
스칼렛의 말에 화련의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변했다.
표정도 참 잘 바뀌지.
절대 화를 참고 사는 스타일은 아닌 모양이다.
주변에서 다 받아준다든지.
스칼렛의 말에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아로하도 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달 길드 사람들도 이제야 표정을 풀었고.
“설마 같은 길드 사람들까지 속인 건가?”
재중이 형이 그 모습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어떤 의미로 대단한 여자네요.”
우리말을 들었는지 스칼렛이 고개를 저었다.
“아로하, 쟤는 표정이 너무 잘 드러나서요.”
“쟤가?”
그 말에 재중이 형이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는데…….
스칼렛이야 자주 붙어 다니니 알겠지만 내가 보기엔 볼 때마다 표정이 똑같다.
알 수 없네, 정말.
우리 대화를 들은 아로하가 날 쳐다보더니 살짝 고개만 숙여 보였다.
……정말 모르겠어.
“이익! 날 두고 한눈을 팔아?!”
또 병이 도지셨군.
관심받는 것을 좋아하는 건지 원래 성격이 저런 건지…….
“더 늦으면 안 되겠어요. 슬슬 준비할게요.”
스칼렛이 시간을 확인하더니 우리에게 말했다.
준비라…….
아까 아무 대책 없이 적의 아가리로 들어오진 않는다고 했었는데 그건가 보네.
“저 방법은 화련만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서쪽과 동쪽 하늘에서 각기 다른 수많은 새떼가 날아들었다.
“소수 정예와 치맥을 이쪽으로 불렀나?”
길드 마크를 확인한 재중이 형이 하늘을 바라보면서 스칼렛에게 물었다.
“네, 아니. 부른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쪽으로 오도록 되어 있었어요.”
“하, 나중에 이야기 좀 하죠.”
“아! 거기다 더 있어요. 완전히 똑같은 방법으로.”
스칼렛이 어디론가 연락을 했더니 좀 전과 같이 우리 주변으로 수많은 로그인 빛줄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건…… 예전 화련 연합 사람들인가?”
폭군이라고 했던가?
사자의 갈기처럼 붉은색으로 머리를 길게 기른 아저씨와 수많은 길드원이 좁속했다.
막피 길드.
예전에 공성전할 때 화련이 죽고 난 뒤, 연합을 이끌었던 사람이었다.
“화련이 그 이후에 엄청나게 괴롭혔거든요. 자기 말대로 안 했다고. 사냥터를 뺏질 않나, 접속 못 하게 PK 걸고, 한때 정말 엉망이었어요.”
“아아, 안 들어도 알겠군.”
“엄청 짜증이 났겠네요.”
재중이 형과 내가 어이없는 눈으로 화련을 봤다.
편을 만들어도 모자랄 판에 일부러 괴롭혀서 떨어져 나가게 하다니.
그것도 한때 10위권 안에 들었던 랭커를.
화련, 저 여자 진짜 또라이였구나.
“그래서 기회를 준다고 했어요. 화련이 기어 나오는 오늘요.”
그 말대로 폭군이 찢어먹을 기세로 화련을 노려보고 있었다.
“빚은 바로 갚지.”
“어머? 천천히 갚아주세요, 저 기다리고 있을게요.”
스칼렛 이 여자도 진짜 요물이네.
다 잊혀진 길드를 포섭해오다니.
폭군에게 살랑거리며 눈웃음을 치는데 표정 변화가 이쪽은 너무 많아서 종잡을 수가 없다.
이득이 되면 누구라도 받아서 써먹을 수 있다는 건가.
거기다 이번엔 퍼스트클래스 연합에서 나섰다.
공성전 때 쪽수만 더럽게 많았던 그 연합.
공성에 실패하고 수가 확 줄었다고 듣기는 했는데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퍼스트클래스 연합의 연합장인 리더라는 사람이 우리를 보고 인사를 했다.
진한 주황색 커트에 키는 좀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내가 스칼렛을 바라보자 스칼렛이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웃어 보였다.
“저쪽 두 연합이 늪지대 사냥터 때문에 엄청 싸우고 있거든요. 아, 물론 잘 모르실 거예요. 최강 쪽은 사냥터 자체가 다르니까요. 그냥 자기들끼리 치고받는 중이었어요.”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소리인가요?”
“네, 퍼스트 클래스가 화련하고 적이니까 저희하고는 친구겠죠? 사실 이쪽이 포섭하기 더 쉬웠어요. 목적이 확실하니까요. 사냥터.”
이 여자, 우리에게 부족한 쪽수마저 확실하게 채워 놨다.
……정말 오늘 이 자리에서 화련을 완전히 박살 낼 생각이었구나.
화련이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이번에 또다시 털리게 되면 복구는 할지언정 패배만 하는 길드라는 이름표를 떼기 힘들어진다.
재기불능까지는 힘들더라도 날개는 완전히 꺾어버린다는 건가?
“왜 이렇게까지?”
솔직히 화련은 그냥 돈 많은 귀찮은 이웃 정도인데 스칼렛은 좀 다른 모양이다.
“화련이 자꾸 우리 손님들 영역까지 넘봐서요. 이것도 요청에 의한 거라고 생각해주세요. 끝나고 적지 않게 보상할게요. 여러 가지 의미로요. 저 아직 같이 가고 싶으니까 내치시면 안 돼요?”
이런, 이쪽에서 하려던 이야기를 먼저 해버렸네.
재중이 형이나 나나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는 것은 사양이다.
스칼렛이 그걸 미묘하게 파고들어서 고민을 하던 차였는데 이런 식으로 나오다니.
내가 재중이 형을 바라봤다.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던 재중이 형이 정말 무서운 눈초리로 스칼렛을 바라보다가 곧 표정을 풀었다.
심경 변화가 있었네.
“일단 생각해보지. 다만, 두 번은 없어.”
“어머? 역시 통이 크시네요. 쁘락치를 잡아내고 나면 이런 일은 다신 없을 거예요.”
“있으면 재미없을 거야.”
“네, 명심할게요.”
재중이 형과 스칼렛의 대화는 그걸로 끝이 났다.
이젠 마무리할 때인가?
스칼렛이 밥상 하나는 끝내주게 차려놨으니까.
숟가락만 들면 된다.
“가죠, 화련을 끝내러.”
내 말을 끝으로 로스트 스카이가 역사상 필드에서 최고로 많은 길드가 부딪히는 전쟁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