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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217화 (217/1,404)

# 217

#217 일찍 나는 새가 많이 주워 먹는다. (4)

챠밍의 라이트닝 플레어가 길게 쭉 밀고 나간 자리가 원래라면 단단한 방어 라인이 있어야 하는 곳이지만, 지금은 한 명도 없었다.

정말 말 그대로 싹 녹여 버렸으니까.

그 덕분에 적들의 라인이 혼란스럽게 헝클어져 기습의 효과가 더욱 커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젠장, 사방에서!”

“파티 별로 빨리 자리 잡아!”

“이쪽 지원 좀 와!”

“여기도 부족하다니까!”

“이 새…….”

온통 적들이 외치는 소리들.

우리의 급습으로 대처할 장소도, 시간도 없었다.

그저 무방비하게 구덩이에서 나와 서로 진형을 짤 뿐.

하지만 라인 한 곳이 완전히 내려앉아 버리니 그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거기다 더 큰 문제는…….

<카이저> 구덩이에서 올라오지 못하게 틀어막아!

여기 지형이 움푹움푹 패인 구덩이라는 것.

새끼 지네가 돌아다니기 좋은 환경이지 사람들이 돌아다니기 좋은 환경은 절대 아니다.

그리고 새끼 지네를 잡기 위해 구덩이 사이로 내려갔던 사람들에게는 여기가 지옥이다.

우리가 훨씬 좋은 자리를 잡고 있으니까.

<카이저> 궁수, 법사들 전부 쏟아부어!

사장님의 오더가 떨어지자 나르샤를 비롯한 길드의 궁수들이 전부 활을 들어 올렸다.

【 멀티 샷! 】

【 멀티 샷! 】

【 멀티 샷! 】

【 파이어 월! 】

【 아이스 월! 】

그와 함께 수백 발의 화살이 형형색색 각종 무기 인챈트들로 치장하고 구덩이로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끄악!”

“방패 들어서 막아!”

“너무 많잖아!”

“젠장, 도망갈 곳이…….”

“일단 구덩이 속으로 피해!”

그러자 사람들이 구덩이의 구석으로 몸을 숨기면서 화살들을 피하기 시작했다.

흐음, 구덩이가 참호 역할도 하는 건가?

하지만 우리에겐 또 다른 병력이 있다.

지금은 모든 마법사의 대표적인 광역기라 할 수 있는 파이어 월과 아이스 월.

우리가 처음 얻었을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 많이 퍼졌다.

물론, 챠밍이 쓰는 것보다 훨씬 약하겠지만 사용하는 장소가 협소하고 피하기 힘든 곳이라면?

그런 곳에 파이어 월과 아이스 월이 잔뜩 깔리면?

마법사들이 스킬을 사용하자 구덩이에 가까스로 숨어서 한숨을 돌리던 적들에게서 비명이 쏟아져 나왔다.

“피할 수도 없잖아!”

“힐! 빨리! 힐러들 뭐해?”

“힐러가 죽었어!”

“어떻게 좀 해봐!”

개활지야 피할 곳이 많으니 어떻게든 돌아서 나가면 되지만 지금은 딱 반대다.

땅을 파고 들어간다면 또 모르겠는데 워낙 구덩이가 협소하기도 하고 그곳에서 뭉쳐서 사냥하고 있었던 터라 우리에게는 딱 좋은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선빵이 진리라…….

누가 만든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처음에 속절없이 당하던 적들도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정신을 차린 듯 공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시야가 좋지 않아서 그런지 화살이고 마법 공격이고 빗나가기 일쑤였다.

“기습이 제대로 통했네요.”

내가 딱히 전진해서 길을 뚫어주지 않아도 이미 지형 하나만으로 싸움이 반은 끝나 버렸다.

재중이 형이 이곳을 고집한 이유가 있구나.

달 길드와 두 곳을 나눠서 진행하기로 했는데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로 이곳을 선택했다.

사방에서 포위를 하고 공격을 하면 구덩이로 밀어 넣을 수 있는 지형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구덩이를 빠져나온 사람이 있었다.

방패를 든 사람이었는데, 뒷사람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앞에서 대미지를 받으며 집중포화를 버티고 섰다.

저렇게 버티고 있으면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다.

그저 발악에 불과한 행동이지만 그래도…….

“전사 형.”

“그래.”

방패전사가 앞으로 나서더니 바로 그 방패를 든 사람에게 뛰어들었다.

【 라이트 쉴드! 】

【 대쉬! 】

방패전사의 방패가 하얀빛으로 빛나더니 대쉬 효과와 함께 빛의 잔상을 남기며 앞으로 쭉 쇄도했다.

그리고 달려드는 가속과 파워 글러브의 힘, 대쉬의 돌진력이 더해진 방패를 강력하게 휘둘렀다.

폭죽이 터지는 효과음과 함께 앞에서 나와서 버티던 사람이 방패전사의 방패에 얻어맞아 그대로 다시 구덩이로 처박혀 굴러갔다.

들소가 전진해서 들이받는 것 같은 묵직한 돌격.

그 돌격 한 번에 튀어나오려던 사람들의 표정이 바로 시커멓게 죽어버렸다.

“오! 전사 쩌는데?”

재중이 형이 그 모습을 보더니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렇게 올라오려는 자들과 다시 처넣으려는 자들의 싸움이 시작됐다.

아무래도 화살과 광역 마법만으로는 모든 장소를 커버하기는 어렵다.

기본적인 HP와 물약이 있으니까.

얻어맞으면서 어떻게든 치고 나와 버리면 그다음은 우리가 나서야 한다.

<카이저> 근딜러들 포위망 좁히면서 밀어붙여!

압도적인 인원 차이 였다면 그냥 구덩이 안으로 들어가서 쓸어버리면 되는데 아직 숫자 차이가 그렇게 많이 나는 것이 아니니 사장님도 무리는 하지 않을 모양이다.

“우리 쪽만 잘 커버해. 다른 쪽은 알아서 잘할 거다. 다른 쪽에 너무 신경 쓰지 마.”

내가 계속 멀리 있는 다른 쪽도 한 번씩 흘깃흘깃 쳐다보자 재중이 형이 내게 말했다.

“그냥 전체적으로 시야가 잡혀서요. 뭐라고 해야 하나요.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그런 감각이라고 하면 이상할까요.”

“으음? 그러냐?”

재중이 형이 알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으며 앞을 가리켰다.

그래, 일단은 이쪽만 신경 쓰자.

우리 파티가 포위하는 곳은 6시 방향.

나르샤와 챠밍의 공격에 이어 사장님의 신호가 떨어지자 이쁜소녀가 앞으로 뛰쳐나갔다.

“저 다녀올게요!”

지상에서 이렇게 전투를 하는 것은 오랜만인가?

매번 수줍게 이야기하는 이쁜소녀도 전투 상황만 오면 사람이 변한다.

억누르고 있던 본성이 튀어나오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려나?

지금 저 상황이면 누구도 못 말리지.

【 헤이스트! 】

손잡이부터 거대한 양쪽 날까지 온통 하얀색으로 칠해진 윙 배틀 액스를 들고 헤이스트를 시전하더니 그대로 인벤에 넣어버렸다.

그러고는 이번엔 녹색 넝쿨이 잔뜩 감긴 포이즌 해머를 바로 꺼내 들었다.

재중이 형이 알려줬던 방법이네.

윙 배틀 액스 없이도 헤이스트를 쓰는.

【 포이즌 웨폰! 】

거기다 포이즌 웨폰을 시전하자 녹색 기운이 포이즌 해머에 계속 쌓여갔다.

【 대쉬! 】

방패전사가 보여주었던 그 모습이다.

가속에 가속을 붙이는.

거기다 이쁜소녀는 헤이스트까지 사용해 훨씬 빠른 상태이기도 하고.

헤이스트와 대쉬 효과까지 가속이 한 번에 급격하게 붙자 이쁜소녀가 악을 쓰더니 무거운 해머를 들고 있던 두 팔에 잔뜩 힘을 주었다.

그리고 묵직한 해머를 억지로 들어 올려 앞에서 버티고 있던 또 다른 탱커의 방패 위로 묵직하게 내려찍었다.

가속과 포이즌 해머의 무게를 더한 파워 글러브의 힘이 한곳에 집중되어 터지자 무시무시한 충격파와 굉음이 터져 나왔다.

쿠앙!

마치 포탄이 날아가 터지듯 엄청난 충격파를 일으키면서 방패를 든 적의 두 무릎을 그 자리에서 꿇려 버렸다.

그 공격에 온몸이 경직이 되었는지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들고 있던 방패까지 손에서 놓쳐서 옆으로 축 처졌다.

단 한 방에?

나 같이 급소를 치는 것도 아닌데 방패 위로 저런 공격이 가능한 건가?

거기다 포이즌 해머의 옵션으로 사방으로 독이 퍼지면서 주변에 있던 모든 적에게 독을 전이시키기 시작했다.

포이즌 웨폰의 영향을 받아서 세배나 강해진 상태로.

“악! 이게 뭐야?”

“큐어 빨리!”

“젠장, 또 마법이야?”

누군가가 포이즌 큐어로 바로 치료를 했는데 이쁜소녀가 포이즌 해머로 다시 내려치자 다시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물들어 버렸다.

“말도 안 돼.”

“큐어 빨리!”

“방금 치료해 줬잖아! 쿨타임 안 돼!”

“대체 뭐야, 저 기술은.”

이쁜소녀가 단독으로 나섰는데도 불구하고 구덩이 속이 난리가 났다.

지형과 관계없이 독성이 주변 사람들에게 전이 되는 스킬이라 숨어 있다고 해서 공격이 안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냥 주변에 있으면 마구잡이로 독이 퍼진다.

거기다 포이즌 해머로 내려칠 때마다 사방으로 독이 퍼지니까 포이즌 큐어로 어떻게 치료할 방법도 없어 보였다.

치료를 해주면 뭐하는가.

다시 때리면 또 걸리는데.

미쳤네. 저건.

걸어 다니는 무한 광역기라고 해야 표현이 맞는 걸까?

한방 한방이 모두 광역으로 들어가는데다가 해머의 공격력도 결코 적지 않다.

“와, 저거 개사기네.”

오죽하면 재중이 형이 이런 말을 할까.

“소녀 혼자서도 다 쓸어버리겠네……. 이거 늦게 가면 할 게 없겠는데? 해머 자체도 출혈보단 타격 쪽에 집중되어 있어서 갑옷이나 방패 위로 그냥 쳐도 크리티컬 대미지가 펑펑 터져. 그럼 독뎀이 사방으로 퍼지는 거고.”

“아, 그래서 방패 위로 내려쳤는데도…….”

“헤이스트와 대쉬에 파워 글러브면 뭐, 그냥 쳐도 꿇려 버렸겠지만 해머도 한몫했지. 그리고 저건 PVP뿐만 아니라 사냥에서도 넘사벽이겠는데? 앞으로 중형 몬스터 상대할 때 볼만하겠어.”

네임드 무기도 용도나 상황에 따라서 차이가 극심하네.

저런 것은 노멀 무기가 절대로 따라 할 수 없는 차이다.

포이즌 해머가 윙 배틀 액스와 겹친다고 경매 참가를 안 했었는데 진작 얻었으면 저 광경을 더 빨리 봤을지도.

“자! 우리도 가자. 소녀만 부자 되겠네. 나 차 할부금 아직 남았어!”

“인생은 한방이라면서요?”

“때론 휘어질 때도 있는 법.”

재중이 형 말대로 물약으로 가까스로 버티던 독으로 인해 적들이 하나둘 죽음의 빛으로 변해 사라져 갔다.

전부는 아니지만 그중 일부가 아이템을 토해놓고 죽기도 했고, 이건 전부 이쁜소녀의 몫이다.

“시간을 더 끌면 지원 올지도 모르니 가자.”

“아이템 먹으러 가는 것은 아니고요?”

“겸사겸사?”

재중이 형의 신호에 그동안 포위망을 만들어놓고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달려들었다.

챠밍, 나르샤, 이쁜소녀가 이미 방진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어둔 상태라 굳이 시간을 끌면서 기다릴 필요도 없어 보였다.

전투가 시작된 뒤 전투 상태를 풀려면 여기서 일정 거리를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도망가지 못하도록 포위를 하고 광역기를 쏟아부었다.

전처럼 한 명을 친다고 전부 공격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니까.

다른 말로 이제 저 사람들은 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소리다.

탈출기나 이동기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네.

우리 팀 사람들이었으면 불리했으면 어떻게든 탈출해서 벗어나 버렸을 것이다.

적어도 당분간은 이런 상황이 지속될 것으로 보였다.

아니면 운영자가 다시 패치를 하든지.

중간에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사람도 있었는데 아마도 로그아웃을 해버린 모양이다.

“저러면 그냥 죽여달라는 거지.”

저건 로그아웃이 된다고 해봤는데 망한 경우네.

가만히 서 있는 사람을 우리 길드 사람들이 죽이니 그 자리에 템이 툭 떨어졌다.

아이템 밭인가?

몬스터를 잡는 것보다 사람을 잡는 편이 더 짭짤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 안 되는데…….

이쪽이 파이가 훨씬 크긴 하네.

우리가 접근하는데도 구덩이 속에서 아직도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음? 혈검이라…….

진하고 검붉은 머리카락이 산발이 될 정도로 정말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다.

우리 길드 사람이 다수 붙었는데도 불구하고.

“저 사람은 꽤 하네요?”

“혈검? 뭐, 한때 랭킹 10위권 안에 들었으니까. 10위권 안이면 전부 한 가닥 한다고 보면 돼. 돈으로 완전 떡칠해도 안 되는 영역이다.”

“흐음, 그런가요.”

확실히 잘 싸운다.

어쩔 수 없이 줄 건 주더라도 큰 것은 전부 직격을 피하거나 쳐내는 듯, 그간 봐온 사람들과는 꽤 실력 차이가 있었다.

“너무 오래 끌면 이쪽도 귀찮아지는데.”

이곳은 화련 연합의 텃밭이라 여차하면 지원이 온다고 했던가?

이미 사방으로 지원요청을 했을 것이다.

포위를 한다고 귓말이 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으니까.

이게 현실과 다른 점이다.

언제든지 공간을 무시하고 연락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재중이 형이 혈검을 잡으러 나서려고 하자 내가 재중이 형을 잡았다.

“왜? 네가 하게?”

“시간 없다면서요. 빨리 해치우죠.”

“으음, 너 안목이 제법이구나? 저거 9강인 거 어떻게 알았어?”

“하하, 왠지 그럴 것 같아서요.”

죽인다고 바로 떨어지진 않겠지만 일단 확률이 있다.

“나오면 나도 알지?”

“네네, 양보한 것 잊지 않을게요.”

나오면이다.

나오면.

윙 블레이드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우리 길드 사람들도 어느 정도 치다가 혈검이 너무 잘 버티니까 흩어져서 다른 사람을 처리하는 쪽을 택했다.

같은 수고면 빨리 하나라도 더 잡고 템을 얻고 싶을 테니까.

내가 나서자 그나마 남아 있던 사람들도 다 혈검을 두고 가버렸다.

어쩔 수 없이 붙들고 있었나 보네.

이 사람도 PK를 어지간히 많이 한 모양이다.

적대관계를 떠나 그냥 기본적으로 아이디가 시뻘건 색이니까.

혈검이 날 보더니 피식 웃었다.

“랭킹 1위라…… 이거, 거물이 오셨구만.”

“서로 긴 이야기는 필요 없겠지?”

“크, 잔챙이들하고 싸우다 죽으면 쪽팔릴 뻔했는데 널 잡고 가면 그나마 체면치레는 하겠군.”

날 잡는다라…….

“한 번 해봐. 날 잡을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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