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
#173화 순환 시스템 (1)
수정이 누나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모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절 모델로요?”
크게 놀라운 말은 아니다.
유혜선 팀장을 통해 모델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시간이 있었다면, 생각해봤겠지만 대회와 공성으로 그저 흘려보냈다.
이전에 재중이 형이 앞으로 그런 일들이 있을 것이라 미리 이야기한 적이 있어, 잠깐 놀란 것으로 그쳤다.
내가 전혀 모르는 내용을 제안 받는 것과 예상하고 있던 일을 제안 받는 것의 차이라고 해야 하나.
듣고 있던 재중이 형이 옆에서 말을 꺼냈다.
“전에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그때는 이쪽도 준비가 덜 되어 있기도 했고, 로스트 스카이 측에서도 아직 업데이트가 되지 않았거든.”
“그런가요?”
“그래, 그리고 이왕이면 네 몸값이 올랐을 때 이야기를 꺼내야 재밌는 이야기가 되지 않겠냐?”
그 말을 하면서 재중이 형이 웃었다.
지금처럼.
내 가치가 높아질 때를 기다렸다가 수정이 누나에게 서프라이즈로 보여주고 조건을 좋게 받아낸다 이건가?
형을 보면 항상 몇 수를 앞서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가 생각하지 않는 것까지도.
“뭐, 물론 지금쯤 되면 너한테 오는 광고 제의가 빗발칠 거니까. 우리가 먼저 손을 내미는 거지. 네 여유 시간은 유한한데 무한정 받을 수는 없으니까.”
역시 같이 플레이하는 형이 제일 잘 안다.
듣고 있던 수정이 누나가 나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플레이 시간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조정 할게. 대우는 아마 업계 최고가 될 거야.
“네? 진짜요?”
이건 의왼데?
아무리 로스트 스카이에서 이름이 좀 알려졌다지만, 모델이나 연예인도 아닌 내게 그 정도의 대우를?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수정이 누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아직 네 가치에 대해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 우리도 다양한 각도에서 알아봤어. 여기 있는 재중이 포함해서. 간단하게 말하면 그 정도는 투자해야 널 잡을 수 있다는 판단이 떨어졌거든.”
역시 허투루 하는 일이 하나도 없구나.
“이번에 아예 남성 브랜드 쪽은 분리해서 런칭할 예정이거든. 여성 브랜드라는 이미지가 강해서 지금 있는 브랜드로는 어필할 수 없으니까. 그 시작점에 널 세우겠다는 거야. 가상현실에서 확실한 인지도가 있는.”
“딴 나라 이야기 같네요.”
그저 게임 하나 할 뿐인데 곳곳에서 내게 손을 뻗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것도 최고의 보상을 약속하며.
“최고에겐 최고의 대우를 하는 것이 이쪽 업계의 룰이야. 그래야 서로의 가치가 올라가니까. 아주 세세한 사항까지 등급표가 다 매겨져 있어. 그게 몸값으로 직결되는 거고. 우리 승호는 거기서 AAA+.”
그러면서 수정이 누나가 의미심장하게 내게 한쪽 눈을 감고 윙크를 했다.
재중이 형도 그렇고 수정이 누나도 그렇고 누가 봐도 잘 어울리는 커플이다.
생각하는 것까지 닮아 있는.
“물론, 이건 네가 원해야만 진행될 이야기니까. 부담 안 가졌으면 좋겠어. 혹시나 안 될 시에는 옆에 대안도 앉아 있고.”
“난 꿩 대신 닭이야?”
재중이 형이 장난스럽게 수정이 누나를 보면서 웃었다.
“어머? 그랬어? 자기도 같이해야 하는데 승호가 있으면 더 좋겠다는 말이지.”
어쩐지.
재중이 형이 이런 일에 빠질 수는 없지.
“이래 봬도 이번엔 나도 투자자라서 열심히 해야 해.”
“네?”
“언제까지 게임만 하고 살 수는 없으니까. 몸이 나중까지 버텨주면 모르겠다만.”
벌써 노후 계획까지 잡은 건가?
뭐, 요즘은 십대부터 그런다고 하니 딱히 할 말은 없네.
챠밍이 원래 이런 쪽으로 일을 해서 그런지 그저 묵묵히 듣고 있다가 내가 이해를 못 하는 부분에서 조언을 해줬다.
나머지 자세한 이야기는 이후에 따로 만나서 다시 하기로 했다.
식사 자리에서 조건까지 들이밀면서 이야기하기에는 불편한 감이 있으니까.
어느덧 배가 꽉 찰 때까지 식사를 하고 난 뒤에 후식을 준비하며 쉬는 시간을 가지는 동안 사람들이 집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어쩐지 불안하다······.
다 모여서 거실에 있을 때는 괜찮았는데.
“선 식사, 후 구경이라니.”
방패전사의 그 말에 모두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두 번째 방에 설치된 블랙 코팅이 된 커스텀 VRS를 보더니 약속이나 한 듯 감탄을 흘렸다.
“이거, 대회 때 쓰던 거지? 확실히 우리 것하고는 크기가 다르네.”
“네, 안에 RTP 억제기도 있고······ 그 밖에는 대략 다 비슷해요. 아, 그리고 나중에 DS 본사에 다들 한번 들리라고 하던데. 괜찮아요?”
“뭐, 어렵진 않지. 우리도 측정한 지 오래돼서. 이게 한 번 측정할 때 돈이 한두 푼이 아니라 자주는 못 해.”
그랬던가?
난 갈 때마다 밥 먹듯이 해서 그냥 무상으로 되는 건 줄 알았더니.
“아마, 돈을 받지는 않을 거예요.”
정말 안 받겠지?
“그럼, 나도 한 번 가볼래요.”
연지가 손을 들더니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봤다.
한참 관심을 가질 나이기는 하다.
곧, 제한이 풀리던가?
해가 지나갔으니 아마 얼마 남지 않았을 거다.
“그래, 말해 둘게.”
“앗싸!”
저게 그렇게 좋을까.
챠밍과 이쁜소녀는 내 안방 문을 힐끔거리며 나를 다시 쳐다봤다.
“아, 들어가도 괜찮아.”
“정말요?”
이쁜소녀가 기대 가득한 표정이라 차마 말리지 못하고 방문을 열어줬다.
여자가 내 방에 들어가는 것은 처음이네.
눈치만 보고 있던 챠밍, 이쁜소녀, 나르샤, 연지 할 것 없이 우르르 모여서 내 방으로 들어갔다.
“우와, 깔끔하다.”
이쁜소녀가 둘러보더니 감탄을 했다.
음, 사실 깔끔하다기보다는 물건이 거의 없지.
괜히 민망하네.
뭔가 특별하게 꾸며두는 스타일이 아니다 보니 방이 좀 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기한 듯 여기저기 살펴보던 챠밍이 침대를 보더니 내게 고개를 돌렸다.
앉아 봐도 되냐고 물어보는 건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더니 손을 슬쩍 가져다 대고는 침대 끝에 살짝 걸터앉았다.
그러더니 뭔가 한껏 만족한 미소를 짓고는 손을 쓸어서 이불을 만져본다.
아이돌이 내 방에 들어와서 이러고 있으니 참 현실감 없네.
팬들이 보면 기겁할 상황인가?
부드럽게 이불을 쓸어 넘기는 모습이 한 장의 명화처럼 느껴진다.
이거 내 방 맞긴 하지?
누가 앉아 있느냐에 따라 이렇게 바뀌네.
이쁜소녀도 역시 따라서 앉아보더니 헤실헤실한 표정이다.
연지도 가서 앉아 풀썩거리면서 재밌다는 얼굴로 날 봤다.
오늘따라 내 침대에 왜 이렇게 관심이 많은지······.
나르샤는 그냥 잠시 둘러보고는 바로 나갔다.
나르샤까지 이랬으면 정말 충격 먹었으려나.
방에서 나가는 나르샤를 잠시 바라보다 다시 돌아보니 챠밍이 베개를 손으로 쓰다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그리곤 황급하게 손을 베개에서 떼더니 딴 곳을 바라봤다.
“아, 여기 먼지가.”
챠밍이 어색하게 쭈뼛거리며 그 말을 하더니 바로 방 밖으로 도망가듯 나가 버렸다.
······방금 그건 뭐지.
이쁜소녀도 이불에 얼굴을 파묻다가 고개를 들고 벌떡 일어나 뛰쳐나가고 혼자 남은 연지도 빠르게 내 방을 탈출했다.
하아······.
오늘 뭔가 힘든 하루가 될 것 같은데?
내 방 투어(?)를 마친 사람들이 다시 모여서 후식을 먹으며 나눈 이야기는 이 정도.
“휑하다.”
“뭔가 없다.”
“한 편으론 깔끔하다.”
“혼자 사는 집.”
“밥은 먹고 다니냐.”
“빨래가 쌓였다.”
그리고 냉장고에 인스턴트만 가득한 것을 보고 사모님이 인상을 찌푸리셨다는 것은 일단 넘어가자.
돈은 있는데 시간이 없고 음식 솜씨도 개차반이라 결국 남는 건 인스턴트다.
혹은 배달 음식.
“나중에 반찬 싸서 연지 편에 보내줄게.”
사모님이 보다 못해 그쪽으로 결론을 내신 모양이다.
확실히 살림하시는 분은 보는 눈이 다르네.
냉장고부터 열어보시다니.
“으음, 정말 괜찮은데요······.”
“우리 남편 잘 챙겨줘서 고마워서 그러는 거야. 부담 가지지 말고. 우리 아들 같아서 그래. 우린 연지만 있으니까.”
“네, 감사합니다.”
나중에 저렇게 챙겨주는 분하고 살아야 할 텐데.
사장님은 정말 복 받으신 것 같다.
그렇게 뒷정리까지 모두 도와주고 나서야 하나둘 돌아가기 시작했다.
사장님, 사모님이 먼저 가시고 재중이 형, 수정이 누나도 나갔다.
그 뒤로 방패전사, 나르샤도 내려갔고.
마지막으로.
“오늘 정말 고마워요.”
챠밍이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다음에 또 와도 돼요?”
잠시 망설이다가 수줍게 물어보는 모습에 그저 미소가 나왔다.
“매일 와도 돼.”
내 허락에 챠밍이 주변이 환해질 정도로 정말 밝은 미소를 지었다.
“네! 그럼, 다음에 또 올게요.”
이쁜소녀도 그 모습을 보더니 우리 집을 한 번 슥 둘러보고는 말했다.
“아쉽다······.”
“언제든 환영이니까 놀러 와.”
“네, 그럼 정말 내려갈게요. 나르샤 언니가 기다려요.”
같이 내려가 사람들이 가는 것을 보고 난 뒤 집에 들어오니 적막함만 가득했다.
우리 집이긴 한데.
평소와 다르네.
왠지 어색하고 공허하게 느껴지는 느낌이 익숙하진 않다.
사람의 온기라······.
곧 익숙해지겠지.
그렇게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 남은 물건을 정리하고 하루를 마무리 지었다.
***
언제 끝날지 모르는 들쑥날쑥한 점검 때문에 잠시 잠이 들었다가 점검이 끝난 지 거의 한 시간쯤 지나서 잠에서 깼다.
바로 재중이 형에게 연락해 보니 형도 접속을 하지 않았다.
<승호> 형, 깨우지 그랬어요?
<재중> 곤히 자는 것 같아서. 요즘 피곤한 일 많았잖아. 애들한테도 깨우지 말라고 해 놨다.
확실히 푹 자고 나니까 컨디션은 많이 올라왔다.
<재중> 업데이트 정말 많아. 한참 걸리니까 다 하면 들어와라.
<승호> 네, 들어가서 봐요.
점검이 끝나자 정말 많은 업데이트가 동시에 진행되었다.
업데이트를 시작한 지 한참이 지나도 끝나지 않는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대체 얼마나 많기에 아직도 업데이트를 하는 거지?
확인해 보니 업데이트를 시도하고 한참이 지나도 마무리가 되지 않아 홈페이지가 또다시 테러를 받고 있었다.
그 중에선 기대감으로 글을 올리는 사람도 많고, 반대로 기다린다고 지친다는 사람도 많았다.
지금 게시판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많이 어수선한 상태다.
일단 공지 내용부터 확인했다.
[ 공지사항 ]
▷ 몬스터 순환 시스템이 업데이트됩니다.
네임드를 포함한 모든 몬스터는 고유 영역을 벗어나서 이동할 수 있게 됩니다.
▷ 한 지역의 몬스터를 방치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되니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 이제 방어전 형식으로 유적지도 공격을 받습니다.
▷ 몬스터에게 공격받아 유적지 하르가 모두 소진되면 유적지 소유권을 잃습니다.
▷ 소유권이 사라지면 유적지의 물품 가격이 대폭 올라가거나 NPC들이 떠나가고, 혹은 일을 하지 않습니다.
▷ 소유권이 없는 유적지는 안전지대가 사라지며 무법지대로 변하고, 붉은색 아이디를 NPC가 공격하지 않아 모두 이용할 수 있습니다.
▷ 몬스터 레벨업 시스템이 추가됩니다.
▷ 몬스터도 서로를 죽이면서 레벨업을 합니다.
▷ 몬스터에게 플레이어가 죽을 시 몬스터의 레벨이 점차 추가되면서 등급에 맞게 스탯이 추가됩니다.
▷ 같은 몬스터라도 레벨이 높은 몬스터는 드랍 확률이 비약적으로 상승합니다.
▷ 유적지의 세금을 조절할 수 있도록 개선됩니다.
▷ 세금 조절 시 높을수록 NPC들이 폭동을 일으키거나 물건 가격이 대폭 상승합니다.
▷ 지상 탈 것 다섯 종류, 하늘 탈 것 스무 종류가 전 지역에 추가됩니다.
▷ 귀걸이 슬롯이 추가 오픈됩니다.
▷ 마을이나 도시에서 NPC를 통해 새로운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합니다.
▷ 의류 제작 시스템이 활성화됩니다. 모든 유저는 자신만의 디자인을 등록해서 판매할 수 있습니다.
▷ 다양한 업체에서 제공하는 의류가 마켓에 등록됩니다.
▷ 자세한 의류 제작 방법과 마켓 이용 방법은 홈페이지 게시판에서 확인하세요.
▷ 백오십 종류의 음식이 추가됩니다. 이제 다양한 맛을 로스트 스카이에서 느껴보세요.
▷ 데스 사이드, 피스트 블레이드, 레이피어, 해머, 철퇴, 석궁, 채찍 등 다양한 종류의 무기가 새로 추가됩니다.
▷ 검과 도의 분류가 좀 더 세분됩니다. 자세한 사항은 게시판을 확인해 주세요.
이게 대체 뭐야?
무슨 업데이트가 이렇게······.
무기부터 해서 날아다니는 몬스터, 순환 시스템까지 하면 완전히 다른 게임이 될지도 모르겠는데?
그러부터 한참을 더 기다린 후에 업데이트가 완료되어 접속을 시도했다.
< 로스트 스카이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 뇌파 확인.
> 주승호. 남성.
> 캐릭터명 주호. 레벨 52.
> 로딩 중······.
꼬박 하루 넘게 연장 점검을 하면서 들어온 게임 속은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하르페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복장이 상당히 많이 변해 있었다.
벌써 구매한 건가?
빠르기도 하네.
현대식 복장에 가까운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니까 여기가 게임인지 현실인지 모르겠다.
길드 건물로 가는 도중 보이는 상점들의 로고가 평소와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
모두 어디선가 한 번씩은 봤던 회사 로고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유명 회사들의 광고판이 걸려 있는 모습에 그저 웃음만 나왔다.
정말 본격적으로 뛰어들려는 모양이네.
사람들도 이런 모습이 신기한지 주변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런 사람들을 지나쳐 길드 건물로 들어오니 많은 길드원이 변한 시스템을 확인하는지 바쁜 모습이다.
“오빠, 오셨어요?”
“어서 오세요!”
챠밍, 이쁜소녀가 제일 먼저 날 보고는 인사를 했다.
“여! 왔냐?”
재중이 형도 날 보더니 인사를 하더니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지금 에띠앙 쪽 필드가 난리가 났다.”
에띠앙이면 검은 호수 쪽인데······.
“그게 무슨?”
“라미아 여왕이 지금 필드를 휩쓸고 다닌단다. 거기서 사냥하던 사람들,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죽었어. 지금 완전히 폭풍지대다.”
네임드가 멋대로 돌아다니다니······.
게임이 미쳐 날뛰네.
몬스터 순환 시스템.
시작부터 제대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