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
#166화 하르페 공성전 (8)
블랙 아쿠아 캐논은 무한이 아니다.
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그렇기에, ‘기선 제압’이 필요한 것이다.
마력이 꽉 차 있을 때, 한 번 정도 쓸 수 있는 필살기에 가까운 스킬이니까.
그리고 어스 퀘이크처럼 사용하는 순간 내 HP도 왕창 깎여 나간다.
아직 쓸 수 있는 사람은 나와 챠밍, 둘 뿐이라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필살기에 가까운 스킬들은 모두 HP를 소모하는 것 같다.
대충 3/4 정도 날아갔나?
얼핏 살펴도 체력이 엄청나게 줄어들어 있다.
치고 빠질 자리가 있다면 아무렇지 않게 사용했겠지만, 이렇게 건물 안에서 사용하는 것은 모험이나 마찬가지다.
모험을 성공시키려면 단 한 번에 기세를 꺾어 접근할 생각조차 갖지 못하게 한 뒤, 물약이나 힐로 빠르게 회복을 하는 수밖에 없다.
내 HP가 빠져나간 것을 확인했는지 방패전사가 들릴 듯 말 듯 말을 하면서 내 앞으로 나서서 든든하게 앞을 지켰다.
“회복해.”
“고마워요.”
이런 모험이 가능한 것은 믿을 수 있는 동료가 든든하게 버티고 있어서다.
회복과 동시에 블러디아로 무기를 교체했다.
난전에 들어가면 아무래도 블러디아가 훨씬 유리하니까.
재중이 형과 이쁜소녀도 입구에 자리를 잡고 섰다.
“조금만 시간 끌면 바로 본대가 지원 올 거다. 그럼, 앞뒤로 싸 먹을 수 있어.”
블랙 아쿠아 캐논에 기가 질렸던 적들도 우리가 별다른 반응이 없자 그제야 눈치를 보면서 하나둘 입구를 넘어오기 시작했다.
“두 번째가 없다는 것을 알았나 보네.”
블랙 아쿠아 캐논뿐만 아니라 어스 퀘이크도 쿨이 돌아오려면 시간이 필요해 지금은 그냥 몸으로 막는 수밖에 없었다.
재중이 형은 이곳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각오를 보이며 블랙 슈피스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람들이 건물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온다, 방패전사는 이쁜소녀와 중앙. 난 좌측, 넌 우측 맡아.”
“네!”
이쁜소녀의 긴장된 외침을 시작으로 전투가 시작됐다.
전투를 벌이기에 넓은 장소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수가 적은 우리에겐 장점으로 다가왔다.
이쁜소녀와 방패전사가 단단히 적들의 공격을 커버하자, 단단한 라인이 형성되었다.
재중이 형은 걱정할 필요가 없고.
나 역시 라지 쉴드를 들고 돌진한 남자와 부딪쳤다.
오우거 하트와 파워글러브, 오우거 벨트에서 나오는 묵직한 힘을 싣고 라지 쉴드를 내려치자 포탄이 터지는 것처럼 울려퍼졌다.
그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사람들의 고개가 내게 집중된다.
“큭! 무슨 힘이!”
라지 쉴드를 들고 돌진하면 내가 밀릴 줄 알았던 사내는 역으로 자신이 밀리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라지 쉴드를 힘겹게 잡고 있는 그 찰나,
자세를 낮춰 카스카라로 하단부를 강하게 내려쳤다.
“어? 이게 왜?”
라지 쉴드의 단점.
면적이 넓어 방어가 좋다는 장점이 있지만…….
힘과 무게중심이 틀어진다면?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방패연의 모습처럼 변한다.
방패전사가 수시로 힘과 무게 중심을 컨트롤 하는 것이 이런 단점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순간적으로 노출된 사내의 머리를 공격하니, 라지 쉴드를 떨어뜨리며 쓰려졌다.
높은 힘과 민첩 덕분에 몸은 생각하던 대로 자유롭게 움직였다.
반면에 HP는 계속 내려가는 중이고.
바로바로 빨아들이지 않으면 위험할지도 모르겠는데.
체력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밸런스가 맞지 않아 힘에 휘둘리는 느낌이다.
모자란 HP는 블러디아로 사내를 푹푹 내려찍으며 빠르게 충당했다.
뒤로 돌아와 공격할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허망한 듯 날 바라봤다.
한참 버티라고 앞에 보낸 사람이 몇 초도 안 돼서 녹아버렸으니까.
“야! 주호 먼저 쳐!”
그 외침에 중앙과 왼쪽으로 치우쳤던 병력이 바로 내게로 몰렸다.
라지 쉴드 두 명에.
뒤로는 창병 셋.
그 뒤로는 다시 마법사와 궁수까지.
아주 골고루 왔네.
나에게 대체 몇 명이나 붙는 건지 모르겠네.
라지 쉴드를 앞에 두고 그 사이에 창을 길게 빼 든 창병들의 블록.
블랙 아쿠아 캐논을 사용할 수 있었다면, 싹 밀어버렸겠지만…….
묘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 창병들에게 접근을 시작했다.
내가 조금씩 접근하자 타고 넘어오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방어를 시작했다.
조금씩 접근하다 순간적으로 창이나 방패를 밟고 넘어가려 했는데…….
내 영상을 어디서 다 찾아본 모양이다.
뭐, 그렇다고 못 넘어갈 건 아니고.
해본 적은 없지만, 상상하는 이상의 것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오른편에 있는 벽을 바라봤다.
건물 안이라 가속을 내기는 힘들지만.
스킬이라면.
가능하다.
그리고 그 스킬을 내가 제대로 제어할 수 있다면…….
벽으로 등을 보이자 사람들이 멀뚱멀뚱한 표정을 지었다.
싸우려다 말고 대체 뭘 하는가 하는 그런 표정.
【 백스탭! 】
분명 몸은 제로 점이지만 스킬을 쓰자 순식간에 몸이 뒤로 밀리면서 가속이 붙었다.
그 상태로 몸을 회전하면서 점프를 해 벽을 아슬아슬하게 박찼다.
자칫 바닥으로 떨어지거나 벽에 강하게 부딪칠 확률이 높은 자세와 방향으로 다시 기술을 사용했다.
【 대쉬! 】
그러자 마치 벽이 바닥이 된 것처럼 몸이 빠르게 벽을 타면서 이중 가속이 붙었다.
그리고 벽을 탄 질주가 이어졌다.
“어어?! 미친.”
“벽을 타?”
“어?! 마법사!”
“뒤에 다 튀어!”
이미 늦었어.
한순간에 도착했으니까.
마법사와 궁수들이 몰려있는 곳으로.
궁수들이 급하게 화살을 쐈지만, 가속이 붙은 상태라 날 맞추지 못하고 애꿎은 벽에 맞고 튕겨 나왔다.
마법 역시 조준이 느려 전혀 엉뚱한 곳에 가서 터졌고.
그나마 효과를 본 것이.
【 아쿠아 캐논! 】
국민 마법이 다 되어가네.
어지간한 길드는 다 쓰는 모양이다.
물줄기가 쏘아지자 바로 인챈트를 걸었다.
【 아쿠아 웨폰! 】
그리고 벽을 타고 달리며 아쿠아 웨폰이 입혀진 블러디아로 빗겨 치자 물줄기가 그대로 꺾여 버렸다.
“말도 안 돼.”
마법사들과 궁수들이 깜짝 놀라 외쳤다.
말이 된다.
이러려고 아쿠아 웨폰 위주로 스킬을 세팅 했으니까.
같은 계열로 마법을 막으면 대미지가 현저히 줄어든다.
그것을 이용해 가볍게 빗겨 칠 수 있는 것이다.
대회에서도 일부러 아쿠아 웨폰을 세팅했는데 정작 마법사를 한 명도 못 만났지.
그렇게 마법을 튕겨 내고 궁수와 마법사 사이에 벽을 박차고 뛰어들었다.
낮은 체력에 천 방어구인 마법사들은 내가 달라붙자 어쩔 줄 몰랐다.
챠밍처럼 블링크가 있으면 또 몰라도.
이속이 내 절반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마법사들은 지금의 내게 그냥 밥일 뿐이다.
몬스터보다 더 잡기 쉬운.
남자 마법사든 여자 마법사든 이 상황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양 떼 사이에 들어간 늑대처럼 블러디아와 카스카라를 엄청난 속도로 빠르게 휘둘러 순식간에 마법사 네 명의 목을 그었다.
마법도 척척 빗겨 치는 내 모습에 그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하나둘 빛으로 사라져 버렸다.
낮은 체력과 방어력 덕분에 빠르게 정리가 되었다.
그 사이, 궁수 셋이 살기 위해 입구 쪽으로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야! 어디가!”
방패병들이 외쳤지만, 저건 본능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하나.
입구로 달려나가던 궁수들은 누군가에게 막혀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오면서 나뒹굴었다.
“큭! 뭐야!”
“뭐긴, 니들 적이지.”
사장님이 궁수 옆구리를 걷어차면서 길드원들을 잔뜩 달고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오셨네요.”
“아, 생각보다 골목 처리가 늦었어. 건물로 타격조가 달려드는 것은 봤는데 인원을 뺄 수가 없잖아. 미안하다.”
“늦진 않았어요.”
“바로 정리하지.”
사장님이 신호하자 궁수들은 바로 길드원들에게 걸려 빛으로 변했고 남은 방패병과 창병도 조금 더 버티다가 역시 빛으로 사라졌다.
방패전사와 이쁜소녀, 그리고 재중이 형이 맡고 있던 곳 역시 정리가 끝났다.
블랙 슈피스 저거 탐나네.
광역기를 몸에 두르고 다니는 것 같은 무기니까.
내가 블랙 슈피스를 쳐다보니 재중이 형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왜?”
“그냥 부러워서요.”
“니가 쓸래?”
“에이, 맘에 없는 소릴.”
“눈치도 빠르네. 하산해.”
재중이 형이 피식 웃었다.
뭐, 그냥 좋아 보일 뿐.
나는 검이 편하니까.
떨어진 아이템의 루팅을 마치고 곧장 사장님에게 사정을 들었다.
“아직 퍼스트클래스 쪽이 밀려. 우리가 라인 하나 정도를 잡긴 했는데 그래도 수가 너무 많아. 장기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시간 내에 전세를 뒤집기에는 좀 부족한 것 같다.”
“어차피 여기 한 곳으로는 안 될 것 같긴 했어요.”
신화, 최강, 전설, 달 길드가 합쳐진 라인도 수가 적은 것은 아니지만 적들의 수는 우리보다 몇 배는 된다.
그것도 양쪽 다.
이기는 방법이 있다면 블랙 아쿠아 캐논, 아쿠아 토네이도, 어스 퀘이크를 무한으로 쓰는 정도?
내가 그 말을 했더니 사장님이 그저 웃는다.
어쩌나.
그때, 재중이 형이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차라리 머리를 칠까?”
머리라고 하면…….
“화련요?”
“어, 화련이 있는 지배자 길드.”
듣고 있던 사장님도 고개를 끄덕이신다.
“흠, 나쁘지 않아. 지금 같은 사정에서는.”
심지어 수호와 최종병기도 그 의견에 동의하는 모습이다.
“괜찮죠. 우리가 앞서는 것은 현재 양보단 질이니까요.”
“지형을 좀 봤으면 좋겠네요. 한 번 정도 기회를 만들면……. 어설프게 아랫것들 조져봐야 답도 안 나오는데 머리를 치면 확실히 전력이 분산될 수 있죠. 일단, 화련을 공성에서 쫓아내면 지휘가 엉망진창이 될 겁니다.”
지금 싸우는 길드는 우리가 알 만한 길드가 아니다.
다른 말로 주 전력이 아니라는 소리고.
시간 낭비라는 거다.
사장님이 급하게 전설과 스칼렛에게 연락을 넣었다.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결론이 난 듯 우리에게 말을 꺼냈다.
“만장일치다. 머리를 친다.”
그대로 일부 병력만 건물에 남겨 놓고 곧장 다시 외곽으로 빠졌다.
* * * * *
“듣자마자 발 빠른 애들을 돌렸어요. 지금 북쪽에 지배자 길드가 있어요.”
스칼렛이 사장님의 연락을 받고 바로 움직인 모양이다.
진짜 정보력 하나는 좋은데?
“다른 길드는?”
재중이 형이 움직일 준비를 하면서 물었다.
지배자 외에도 주력으로 막피, 소수정예, 질주, 치맥, 무적, 파괴 길드 등 더 있으니까.
지금 퍼스트클래스 연합을 치는 쪽은 주력이 아니다.
우리가 잡아먹긴 했지만, 여전히 수적으로 불리하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해서 지배자를 치는 편이 좋다.
그때 뭔가가 떠올랐다.
“……굳이 다 잡을 필요 있나요?”
“응?”
“화련만 잡으면 되는 거죠?”
“아아, 뭐 그렇지. 화련 주위에 많은 사람이 포진되어 쉽지 않겠지만. 잡는다면 일이 쉬워지지. 일단, 죽이기만 하면 지휘고 뭐고 전부 엉망이 될 거다.”
“으음……. 될 것 같기도 하고. 전에 했던 거라 한 번 해볼까 해서요.”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들어보자.”
“그게 뭐냐면…….”
* * * * *
전설과 스칼렛을 비롯한 우리 길드원까지 모두 대기하게 하고 나와 우리 팀만 외곽으로 빠져 빠르게 움직였다.
우리 팀이야 케르베로스가 있지만 저쪽은 아니니까.
괜히 데리고 다녀봐야 속도만 느려진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크게 도는 것이 다소 시간이 걸렸지만, 아직까지 지배자 연합 주력이 움직였다는 소식은 없었다.
스칼렛이 길드원을 퍼뜨려서 알뜰하게 정보를 보내오고 있으니까.
“참, 그 여자 탐나네.”
재중이 형의 인재 욕심이 또 발동했다.
“누구한테 넘어올 사람 같아 보이진 않던데요?”
“뭐, 기다려보자. 사람 일은 모르니.”
그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겨우 원하는 위치에 도착했다.
돌아서 온다고 시간을 꽤 소비하긴 했지만 지금까진 괜찮다.
멀리 지배자 연합의 진형이 보이기 시작했다.
멀리 있지만, 길드 마크가 있어 구분하기는 쉽다.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조금 떨어진 건물의 3층으로 올라갔다.
창문으로 내려다보니 진형이 아직까진 움직이지 않고 대기하고 있었다.
중앙에 화련이 있는 지배자 길드도.
“챠밍, 그럼 부탁해.”
“네.”
일단.
【 오우거 하트! 】
힘을 올리고.
케르베로스를 소환해서 올라탔다.
거기다가.
【 매직 애로우! 】
챠밍이 한 발씩 쏘는 마법을 카스카라로 쳐내면서 마력을 빠르게 채우기 시작했다.
편법이지만 뭐 어떤가.
필요하면 써야지.
방패전사는 혹시 모를 방해를 방지하기 위해 계단 쪽에 가 있고 나르샤는 옆에서 계속 조언을 해줬다.
이 정도 거리가 있을 때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쁜소녀와 재중이 형은 밖에 나가 있었다.
내가 사용하면 회수해야 해서.
나르샤의 지도로 원하는 곳과 완전히 반대편으로 연습을 몇 번 해보고는 확신을 가졌다.
이건 된다.
“그럼, 갑니다.”
어쩌면 이건 돈 지랄일 수 있다.
데스 위버를 꺼내서 그 위에 화살 대신 전리품 스파크 소드를 올렸다.
【 검은 가시! 】
그대로 검은 가시를 쓰자 데스 위버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살 대신 활시위에 올린 스파크 소드 위로 검은 가시가 덮이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얼마짜리 화살이지…….
“호흡 조절 잘 하고. 거리가 있으니 자세는…….”
나르샤는 말과 함께 손으로 하나하나 체크해 주었다.
거기다 내 감각.
몇 번의 연습으로 어느 각도와 힘이면 가능한지 몸이 기억한다.
분명 화련은 아이템에 많은 돈 지랄을 했을 것이 뻔하니, 어지간한 공격력으로 한 번에 보내지 못할 수 있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아예 무기를 날려보자고.
안 통하면 뭐…….
다른 것을 또 생각해야지.
잡념을 하나씩 머릿속에서 날리며 주위가 적막으로 조용해지는 느낌이 올 때까지 멀리서 지시를 내리고 있는 화련의 머리만 주시했다.
그와 동시에 활시위가 비명을 지르고 검은 가시가 완벽하게 풀 차징 되었을 때,
손가락을 놓았다.
그렇게 대기를 찢으며 날아가는 검은 스파크의 검이 잔상을 남기며 쭉쭉 날아갔다.
쏜살같이 날아간 검은 가시가 터져나가면서 엄청난 충격파가 뒤를 잇더니 조금 전까지 지시를 내리던 화련은 검은 가시의 효과로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사정없이 튕겨져 날아갔다.
“꺅!”
“뭐야!”
폭탄이 터지듯 화련이 바닥을 거칠게 나뒹굴자 주변에서 비명과 웅성거리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꺄! 대박.”
“화련이 한 방에 날아갔어요.”
“진짜 잡았네.”
“미친 새끼.”
어느새 올라온 이쁜소녀와 챠밍, 방패전사, 재중이 형이 입을 쩍 벌리고 날 보며 환호했다.
“이거면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