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
#164화 하르페 공성전 (6)
서쪽과 동쪽에서 달려온 길드원들이 시간을 두고 하나둘씩 도착하기 시작했다.
“미안, 중간에 길이 막혀서.”
한참 달려온 방패전사가 표정을 굳히며 케르베로스에서 내렸다.
중간에 오면서 사장님께 이야기를 다 들은 모양이다.
케르베로스에서 내린 방패전사는 먼저 나르샤부터 살핀다.
평소에 티격태격해도 역시 나르샤부터 챙기는구나.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그저 미소 지었다.
“상황은?”
“뭐, 지금은 별일 없어요. 아까까지만 해도 좀 위험했는데 잘 넘어간 것 같아요.”
내 말에 주변을 살피던 방패전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사방을 살폈다.
대부분 물러가긴 했지만, 몇 명은 남아서 입맛만 다시는 분위기.
그렇지만, 덤벼들지는 못하고 내 눈치만 보고 있다.
어떻게 할 수 없는 강력함에 이성이 본능을 눌러 버린 모습이라고 해야 하나.
덤벼들면 죽는다.
그 사실이 차마 덤벼들 수 없는 선을 그어 버렸다.
“아이템이 드랍 되니, 전부 눈이 돌아갔네.”
남아 있는 몇 명의 사람들의 시선은 이쁜소녀에게 가 있었다.
그것도 이쁜소녀가 들고 있는 커다란 양손 무기인 던켈에.
몰랐다면 넘어갔겠지만, 이미 대회에서 선보였던 전적이 있어 눈이 돌아간 것 같다.
“어디 쪽 라인이에요?”
개인 몇 명이 이런 일을 벌이기에는 규모가 크다.
지금 다들 자기 쪽 길드를 찾아간다고 바쁜 그 와중에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작당을 해 이 정도로 블록을 쌓는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
“중간급 길드 몇 개가 모인 라인이 있는데 아마 그쪽 같다. 자세한 것은 사장님이 오시면 알아봐야지.”
운이 좋았는지 사람이 빨리 모였는지 모르겠지만.
지금도 이러면 앞으로 걸림돌이 될 것 같으니 미리 치워두는 것도 나쁘진 않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사장님도 도착하셨다.
“고생했다.”
“뭘요. 안 늦어서 다행이죠.”
그렇게 사장님과 몇 마디 말을 나누다 보니 북쪽에 있던 길드원들도 도착하기 시작했다.
케르베로스를 탄 사람들이 대부분 빠르게 도착한 반면 아닌 사람들은 아직도 달려오는 중이다.
재중이 형도 북쪽에서 제일 먼저 도착해 케르베로스에서 내렸으니까.
“이 새끼들 봐라. 재밌는 짓을 하네.”
오자마자 하는 소리가 우리에게 덤벼들 녀석들에 대한 말이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깔끔하게 다 잡아 죽이고 싶은데 상황이 이러니 지금은 무리다.”
저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니 공성만 아니었다면 당장 사람들을 끌고 갔을지도 모르겠네.
사장님은 주변을 둘러보면서 낙오자가 없는지 꼼꼼하게 체크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엉망이라 여기까지 오지 못하고 중간에 당했을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별다른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곤 바로 이야기를 꺼냈다.
“자자! 주목. 지금부터는 공성이다. 각 팀장들은 자기 팀 잘 이끌고. 우리 제외하고 전부 적이니까 언제든지 다른 팀을 도울 수 있도록 간격 배분 잘하고. 이상.”
우리가 모인 것처럼, 같은 길드 마크끼리 한곳에 모이기 시작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길드마다 어느 정도 다 떨어져 있어 아까처럼 과감하게 덤벼들지는 못할 것 같지만, 그래도 신경은 계속 써야겠지.
어느 정도 성벽 아래가 정리된 것이 보이자, 시선은 자연스럽게 성벽 위로 향했다.
“생각보다 쪽수가 많아.”
“그렇죠?”
재중이 형 역시, 그렇게 느낀 모양이었다.
길드 하나만으로 수성을 진행하는 것은 애초부터 말이 되지 않는 시스템이다.
마을이 아무리 작다고 해도 마찬가지.
거기다 하르페가 어디 산속에 있는 작은 마을도 아니고 백만 명이 넘는 사람이 수시로 이용하는 규모다.
한쪽 성벽 길이만 해도 최소 몇백 미터는 우습게 넘어가니까.
사장님이 난색을 표했던 것도 이 넓은 마을을 커버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고.
차라리 성벽이 굉장히 높다면 성벽을 이용해서 방어하면 되기에 좀 수월하겠지만.
하르페의 성벽은 그렇게 높지는 않다.
그러한 불리한 점들을 커버하기 위한 것이 연합이란 시스템이다.
다만, 아군을 너무 늘리면 나눠야 할 것이 많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이용을 안 하는 편이다.
유적지를 먹기 위해선 연합이 필요했지만, 하르페의 경우 온전히 우리의 손으로 얻었기에 굳이 연합할 이유가 없었고.
그런 우리와 정반대로 성벽엔 수많은 사람이 올라와 자리를 잡고 있다.
연합을 대체 얼마나 한 것인지 모르지만, 미리 수면 아래에서 준비를 많이 한 것 같네.
그렇게 성벽을 둘러보고 난 뒤 사장님과 재중이 형, 그리고 프로와 팀장급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뭔가 의논하기 시작했다.
“설레임, 단풍, 마피아…….”
“빅토리, 쌈꾼…….”
“법피, 최악…….”
들어보니 성벽을 체크하면서 길드 이름을 전부 외워온 모양이다.
“생각보다 너무 많은데?”
사장님이 팀장들에게서 얻은 정보를 합쳐보니 연합의 규모가 생각보다 훨씬 크다.
“쉽지 않겠네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으니 저렇게 대놓고 하르페를 먹었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다른 길드들도 성벽에 예상과 다른 규모의 대군이 있으니 섣불리 공성에 들어가지 않고 기다렸다.
우리가 수성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앞에서 맞아주길 기다릴 수도 있고, 이미 한 번 공성을 하면서 너덜해진 길드들도 적지 않아 더 이상 피해를 입지 않으려고 할 수도 있다.
이건 우리 때문이기도 하다.
성벽 방어를 하지 않아 온갖 길드가 성벽을 넘었으니까.
그렇게 개나 소나 다 성벽을 넘다 보니 충돌은 당연한 스토리고.
뜻하지 않게 개판이 되어 전력이 깎인 길드가 한둘이 아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두 번째는 더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만약, 일대일이거나 서너 개의 길드만 경합을 했어도 죽자고 달려들었을 텐데 지금은 그러기가 쉽지가 않다.
각자가 가진 노림수.
그게 아직은 나오지 않고 있다.
방법은 전부 다르겠지만, 하르페를 차지하겠다는 생각은 똑같으니까.
여러 상황과 분위기가 겹치면서 공성은 소극적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병력이 가득 찬 성벽이라…….
결국 개인이든 길드든 저곳을 뚫어야 한다는 소리다.
“뭐, 그렇다고 못 뚫을 정도는 아니지만. 자신 있지?”
날 보면서 환하게 웃는 재중이 형에게 그저 미소 지었다.
수성 진행 시 상대방이 어떤 식으로 나오면 곤란한지 우리가 제일 잘 안다.
아니, 우리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NPC의 고용 비용, 비율, 무장의 상태, 성벽의 취약점…….
이런 수성 시의 애로사항을 짚고 넘어가자면 끝도 없다.
우리가 그냥 하르페를 넘겨줬겠는가.
저렇게 숫자가 많다고 해도…….
그저 숫자가 많을 뿐이다.
특히 나에게는.
그때, 사장님이 의외의 말씀을 하셨다.
“흐음, 제국 길드라.”
“네?”
“연합을 하자는 구나.”
이렇게 급하게 연합 제의라.
의외네.
제국 길드에 대해 들어본 적은 없다.
완전 상위권이 아니면 개인 랭킹도 잘 안 보는 편이라.
개인 랭킹이 길드 랭킹과 맞는다는 보장도 없고.
“똥줄이 타나 보지.”
재중이 형이 옆에서 성벽 위를 바라보면서 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사장님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제국 말고도 지금 다섯 개 연합에서 제의를 받았다.”
“우리가 전력을 보존한 것을 아는군요.”
“어지간한 길드들은 다 알 거다. 아까 그 멍청이 같은 녀석들은 몰랐으니까 덤벼든 거고.”
우리가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 덤볐다는 소리다.
빠지기는커녕 이빨이 온전한 것도 모르고.
“본격적이네요.”
“암, 지금부터가 진짜 공성이지. 뒤에서 방관하던 길드도 서서히 움직일 거다. 퍼스트클래스 연합 때문에. 이대로 가면 성벽도 못 넘어보고 끝날 수도 있으니까.”
진짜로 움직이기 시작하나?
시간을 이대로 흘려보내면 공성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순간에 도달할 것이다.
그것 때문인지 사장님은 계속 시간을 재고 계신다.
최적의 시간을 찾기 위해서.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거예요?”
내 말에 사장님이 굳고 진지한 표정을 지으셨다.
“우린 더 기다린다.”
아직은 아니라는 소리인가.
그때, 큰 소란이 일면서 머뭇거리던 사람들이 일제히 성벽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뭐지?
갑자기 왜?
우리가 급하게 고개를 돌려 사장님을 바라봤는데 사장님도 어딘지 모르는 사람들과 바쁘게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음, 일이 재밌게 돌아가는구나.”
“왜 갑자기 저렇게 달려가요?”
“동쪽 성문이 지금 활짝 열렸어. 지금 그곳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여기도 소문이 퍼진 것 같고.”
그 말에 챠밍과 이쁜소녀도 깜짝 놀랐는지 사장님을 바라보고 물었다.
“네? 성문이 벌써 열렸어요?”
“동쪽 사람들 대박!”
이게 무슨…….
우리처럼 성벽 방어를 아예 안 했으면 또 몰라도 이건 너무 빠르다.
이제 겨우 진형을 유지하고 싸울까 고민하는 단계일 텐데…….
길드원 모두 의아한 표정으로 사장님을 보자 사장님이 말을 이었다.
“허허, 그게 퍼스트 클래스 연합 중 한 팀이 배신을 했다는구나. 성문을 그냥 활짝 열어버렸다고 하는데?”
“배신요?”
전혀 예상치 못한 배신이라는 말에 이쁜소녀의 눈이 동글동글하게 변했다.
성문을 그냥 열었다고?
사장님의 말에 나도 깜짝 놀라 남쪽 성문을 바라보니 성벽 위가 어수선한 것이 바로 보였다.
우왕좌왕하는 모습들, 심지어 몇몇 길드는 성벽에서 내려가기까지 했다.
견고했던 방어가 무너지는 것도 순식간이다.
배신이란 단 하나의 균열에 의해서.
“동쪽이 무너지니까 서, 남, 북쪽 모두 병력을 뒤로 물려야겠지. 한 곳이 뚫린 이상은 성벽을 더 지키고 있어 봐야 쓸모가 없으니까.”
사장님의 말에 모두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같았어도 바로 병력을 안으로 불러들였을 거다.
“그나저나 배신이라니…….”
방패전사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을 꺼냈다.
사장님은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는지 대답을 이었다.
“아마 분배 문제겠지. 혹은 하르페를 먹는 동안 트러블이 있었거나…….”
그리고 목소리를 더 낮추더니 의심이 간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혹은, 뒷거래겠지. 미리 약속되어 있던.”
뒷거래라.
서로의 이익이 맞으면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는 거래다.
특히 로스트 스카이에서는 더욱더.
예전 사냥터 거래 같은 일들도 마찬가지고.
사장님이 어딘가에 다시 연락을 하셨다.
그리고 연락을 마친 사장님이 계속 시간을 보셨다.
고민에 빠지신 듯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흠, 이번에 먹고 버티기만 하면 아슬아슬할 수 있는 시간대다…….”
“그럼?”
방패전사의 물음에 사장님이 말을 이었다.
“우리도 들어간다. 누가 판을 벌인 것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수선하지만 우리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겠지. 성벽을 끼지 못하면 퍼스트클래스 연합도 압도적으로 불리하니까. 금방 전세가 뒤집힐 거다.”
원래 작전과는 사뭇 다르지만,
작전이라는 것이 그때 사정마다 바뀌는 것이니.
바로 사장님을 필두로 성벽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방패전사, 슬이아빠, 수호 같은 라지쉴드를 든 인원이 앞을 막고 나가고 중간에 딜러, 완전히 가운데는 궁수와 마법사를. 그리고 후방에 다시 딜러와 방패진을 구성하는 식으로 앞뒤의 구성을 맞췄다.
일단 성벽은 무사통과.
지금 성벽을 지키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우리가 자의로 성벽을 비운 것이라면 이번엔 타의로 어쩔 수 없이 성벽을 비운 것이지만 둘 다 성벽이 비었다는 것은 동일했다.
“이제부터는 다 적이라고 생각해. 치고 들어올 것 같으면 바로 응수하고.”
재중이 형이 길드원들에게 전달하자 모두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금부터는 진짜 전쟁터다.
“절대 망설이지 마라. 망설이는 순간 길드원들이 죽는다. 그냥 내려쳐.”
재중이 형이 다시 강조하는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의 다른 길드 사람들도 마찬가지인지 서로 간격을 벌리고 조심스럽게 시가지로 들어섰다.
몇 개의 골목을 지나는데도 딱히 우리에게 덤벼들거나 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의외네요.”
“그러게.”
내 말에 방패전사가 굳은 표정으로 전방을 주시하면서 대답을 했다.
방패전사의 목소리가 경직된 것이 긴장되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전의 공성에서 교훈을 얻었나 보네.
미리 우리끼리 붙어봐야 남 좋은 일만 할 뿐이라고.
대부분 그런 생각을 하는지 전진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중앙 크리스털이 있는 광장 근처의 골목길에 들어서자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씨바! 쳐!”
“뭐해! 망설이지마! 다 죽여 버려!”
“비잖아! 빨리 들어가!”
“골목 쪽 누구야? 커버 안 해?”
“크리스털에 못 붙게 막아!”
“마법사들 광역 깔아!”
“2층 저격수 빨리 죽여!”
“방패병들 뭐해! 계속 밀리잖아!”
“누가 저 새끼 좀 잡아!”
웅성거리는 소리를 넘어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기합과 악에 받친 고함이 연이어 들린다.
2중, 3중, 4중에 가까운 바리케이드를 방패병들이 막고 그 뒤로 창병들이 찌르며, 마법사들의 힐과 광역기가 어지럽게 난무했다.
양손검을 들고 여기저기 미친 듯 휘두르는 건 예사고 거기다 눈먼 수백 대의 화살이 시야를 어지럽게 가렸다.
눈으로 보이는 모든 장소에서 사람들이 치고받고 싸우고 있었다.
우리가 고층에서 내려다보던 광경과 사뭇 다른 후끈한 열기와 광기가 느껴진다.
이거 더 이상 전진할 수가 없겠는데?
“어떻게? 뚫어요?”
블랙 아쿠아 블레이드라면 길 정도는 뚫을 수 있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다시 막아서겠지만,
지금 이 상황이 마지막이라면 굳이 기술을 아낄 필요도 없고.
챠밍에게도 고개를 돌리자 챠밍 역시 라미아 여왕의 마법을 쓸 생각이 있어 보였다.
재중이 형도 블랙 슈피스를 꺼내 들었다.
부가 효과 — 피해 전이.
글만 봐서는 효과를 몰랐는데 막상 붙어보니 저 창을 들고 있으면 나도 재중이 형을 이기기가 힘들다.
내가 치는 만큼 피해가 어느 정도 돌아오니까.
사방에서 여러 명이 덤비면?
거기다 항시 발동이라 어쩌면 광역기보다 더 무서울 수도 있고.
방패전사도 물의 방패를 꺼내 들었다.
이제 사장님의 말씀만 떨어지면 바로 진격이다.
“잠시만, 기다리던 녀석들이 온다.”
“네? 그게 무슨.”
“우리 동맹이 오니까 조금만 기다려.”
그 말을 끝내기 무섭게 우리가 있는 골목으로 눈에 익은 길드 마크를 가진 사람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거 농담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