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
#149화 지금은 준비할 때 (1)
발코니로 통하는 유리문 안쪽으로는 연회장의 음악 소리가 바깥쪽에서는 서늘한 겨울 공기와 함께 말소리가 들려온다.
그 미묘한 공간에서 잠시 멈춰 있다가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순간,
남자의 말을 들은 챠밍에게서 바로 대답이 이어졌다.
“정말 관심 없어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단호한 대답.
평소의 단아한 목소리가 아니라 그냥 차디차고 냉랭한 목소리가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챠밍의 저런 목소리는 처음 들어본다.
완곡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길드 가입을 권유한 남자가 다시 말을 꺼냈다.
“최강이나 신화보다 훨씬 좋은 조건과 비전이 있습니다. 한 번 들어보시지 않겠습니까? 이쪽 길드로 말할 것 같으면…….”
다시 이어지는 남성의 말에 챠밍이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관심이 없어요. 그만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누차 이어지는 거절에도 같은 반응이 이어지자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챠밍이 발코니를 빠져나오기 위해 이쁜소녀의 손을 잡았다.
“가, 괜히 나왔나 봐.”
“응, 언니.”
이쁜소녀도 바로 챠밍의 손을 잡고 따라나섰다.
혹시라도 위험한 일이 발생한다면 바로 들어가려 했지만 우려했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에 자연스럽게 유리문을 열고 발코니로 들어서자 챠밍과 이쁜소녀가 살짝 놀라며 나를 바라보았다.
“승호 오빠?”
“늦는 것 같아 찾으러 왔어요.”
“마침 돌아가려던 참이었어요.”
나의 등장과 함께 지금껏 이야기하던 사내의 얼굴이 똥 씹은 표정으로 변해 버렸다.
“걱정돼서 오신 거예요?”
이쁜소녀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쳐다본다.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 늦었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챠밍과 이쁜소녀가 기분이 좋아 보이는지 방긋방긋 웃는다.
“잠깐.”
사내 중 뒤에 서 있던 청년의 갑작스런 말에 우리의 고개가 돌아갔다.
“무슨 일입니까. 볼일은 끝난 걸로 아는데.”
내가 앞으로 나서자 자연스레 챠밍과 이쁜소녀가 내 뒤편으로 돌아 들어갔다.
“용건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데리고 들어가는 건 예의가 아니지.”
“싫다는 사람 붙들고 있는 건 더 예의가 아닌 것 같은데? 그것도 건장한 남자 둘이 이런 발코니까지 따라와서.”
“어디서 이야기하던 그건 우리 자유 아닌가.”
자유 같은 소리 한다.
자유 타령하는 것들이 이렇게 사람을 붙들고 있나.
“거기다 남의 핵심 길드원을 이렇게 막무가내로 빼가려고 하는 건 예의인가요?”
“그건…….”
“전쟁하고 싶어서요? 길드가 어디십니까? 접속하면 친히 찾아가 드리죠.”
사내가 내 말에 찔리는 것이 있는지 곧장 입을 다물었다.
“이야기 끝난 것 같네요. 가죠.”
내가 앞장서자 챠밍과 이쁜소녀가 곧장 나를 따라서 발코니를 빠져나왔다.
둘을 데리고 테이블에 도착하자 재중이 형이 짐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어? 너무 안 와서 우리도 찾으러 가던 중이었는데.”
“뭐, 조금 이야기가 있었어요.”
“그래? 우린 이제 돌아가자. 할 만큼 했다.”
드디어 끝났네.
대회보다 대회 뒤풀이가 더 힘든 느낌이다.
***
밖으로 나오자 그쳤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빨리 안 움직이면 쌓이겠네요.”
눈 내리는 것을 보며 말을 하는 사이 방패전사가 차를 가지고 왔다.
“제가 데려다드리겠습니다.”
그 소리에 챠밍과 이쁜소녀가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나를 바라봤다.
난처한데…….
“이쪽은 2인승이라…….”
그 말에 두 사람은 방패전사의 차에 올라탔다.
나르샤도 올라타면서 우릴 보고 외쳤다.
“굿 나잇, 가이스!”
그러자 챠밍과 이쁜소녀도 외치기 시작했다.
“오늘 정말 고마워요!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오빠, 진짜, 진짜 감사해요! 다음에 또 봐요!”
마치 오늘 보고 못 볼 사람들처럼 창문 밖으로 열렬한 인사를 하면서 멀어지자 북적했던 주차장이 적막해졌다.
“형, 우리도 가죠.”
“아아, 우리 둘만 남아 있으니 완전 춥네.”
그 말과 함께 재중이 형의 차에 올라탔다.
잠시 후, 히터에서 흘러나오는 따스한 바람이 몸을 천천히 녹이기 시작했다.
“으, 좋다.”
“다들 잘 가겠죠?”
“어, 들어보니까 다들 멀지는 않던데?”
차가 조심스럽게 눈길 속으로 진입하자 그제야 잊고 있던 고글이 생각났다.
“아! 유혜선 팀장한테 돌려줘야 하는데 깜박했어요.”
“고글? 챠밍이 쓰고 간 거?”
“네.”
“뭐, 그거 핑계로 또 만나면 되지. 좋겠네.”
“하아,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챠밍이 은하였다니 참…….”
로스트 스카이 속에서 매번 챠밍이라고 부르다 보니까 이젠 귀에 익어서 은하가 너무 어색하게 들린다.
“다리 때문이라면 복귀하겠죠?”
“언젠지는 몰라도 돌아가긴 해야겠지. 우리처럼 한가한 백수는 아니니까.”
언젠가 돌아간다라…….
줄곧 같이하다가 누군가 한 명이라도 빠진다면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 될 것 같다.
“우리야 그게 일상이니 익숙해져야지.”
“그런가요.”
“아직은 멀었으니까. 그런 건 그때 가서 생각해.”
“그러죠.”
그래, 아직은 아니다.
“이쁜소녀도 그렇고, 참, 다들 예상치 못했어.”
“다들 가까워진 것 같기도 하고, 멀어진 것 같기도 하고. 미묘한 기분이네요.”
“현실의 삶이라…… 그래, 누군가는 유명할 수도 있고, 대단한 사람일 수도 있고, 돈이 굉장히 많을 수 있어. 반대의 경우도 있을 거야. 근데, 그걸 부담스럽게 생각하지는 마.”
사실 조금 부담스럽긴 했다.
그렇지 않은 척 했지만.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재중이 형이 계속 말을 이었다.
“다 게임 안에 들어가면 똑같은 한 사람이야. 같이 게임을 즐기고 같이 호흡하고. 특별할 건 없어. 너는 너, 나는 나, 챠밍은 챠밍, 이쁜소녀는 이쁜소녀.”
복잡하고 미묘한 생각을 하는 나에게 재중이 형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서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건 내 생각 속에 하나씩 자국을 남기며 새겨진다.
“근데, 아까 왜 그렇게 늦었냐?”
“아, 누가 챠밍하고 이쁜소녀를 스카우트하려고 하던데요.”
“이 정도 성적이면 안 들어오는 것이 이상하지.”
“아무래도 우리 경쟁 길드 쪽에서 작업 건 것 같아서 떠봤는데 아무 말도 못 하던데요.”
일부러 찾아간다고 했는데 거기에 반응했다는 것 자체가 경쟁 길드라는 소리다.
“이젠 뭐 상도덕 다 어기고 놀아보자는 건가…… 재밌네. 그렇게 나와 주면 오히려 고맙지. 그래서 어디 길드야?”
“그건 못 들었어요.”
“아쉽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여! 푹 쉬고, 내일부터는 또 전쟁 준비다. 알지?”
“알죠. 공성전.”
“우리가 대회 때문에 쉬는 동안 엄청 따라잡혔을 거야, 이제 바싹 쫄 생각이니까 각오해.
“네네, 쓸데없는 생각 안 할 테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눈치 빠르긴. 간다. 쉬어.”
재중이 형을 그렇게 보내고 집에 돌아와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누우니 여기저기서 연락이 들어온다.
이젠 개인적으로 전화번호를 다 주고받은 상황.
<종훈> 무사히 운송 완료. 다행히 가까웠음.
<승호> 고생했어요. 종훈이 형.
<종훈> 고생은 무슨, 수다에 질려서 힘들었지만. 와, 그 짧은 시간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하는지 미치는 줄…….
<승호> 그래요?
<종훈> 넌 상상도 못 할 거다. 진짜.
방패전사와 메시지를 끝내고 다음으로 넘기자 챠밍과 이쁜소녀의 메시지도 와 있었다.
<아라> 오빠, 집이에요?
<승호> 네, 도착해서 씻었어요.
<아라>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정말로요.
<승호> 내일부터는 씩씩하게 다시 시작해야죠.
<아라> 저기…… 존댓말 말구 다른 건 안 돼요?
말을 편하게 놓으란 소리지?
앞에 있을 땐 이야기하기 힘들었나?
문자로 하니까 말이 잘 나오는 모양이다.
<승호> 으음, 그래.
<아라> 좋아요!
<승호> 그래, 그럼 쉬고 내일 보자.
<아라> 네! 푹 주무세요.
이쁜소녀의 수신을 끝으로 챠밍의 메시지를 열었다.
<은하> 도착했어요?
<승호> 네, 챠밍 씨도 잘 도착했어요?
<은하> 네, 그런데 걸렸어요……. 저 어떻게 해요?
매니저한테 걸린 건가?
결국 틀켰구나.
이건 앞으로 지장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바로 메시지가 날아온다.
<은하> 사실 농담이에요.
<승호> 진짜인 줄 알고 정말 놀랐습니다.
<은하> ……근데 혹시 제가 불편해요?
<승호> 네?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은하> 근데, 왜 매번 높여 불러요? 저 은하 씨는 별론데…….
챠밍도 이쁜소녀와 같은 것을 바라나.
<승호> 아. 편하게 부르라는 말이죠?
<은하> 오빠잖아요. 존댓말 하면 좀 멀게 느껴져서.
<승호> 그래, 이게 편하면 이렇게 할게.
<은하> 들어줘서 고마워요. 오늘 있던 일들도 다 고맙고. 보람이 있네요.
<승호> 그래, 나도 그렇네. 은하도 이제 쉬고. 오늘 정말 고생했다.
<은하> 네, 오빠도 쉬세요. 내일 봐요.
그렇게 메시지를 하나하나 보내고 난 뒤 피로가 갑자기 밀려 들어와 생각할 틈도 없이 곧장 잠에 빠져들었다.
아마, 오늘 만난 사람들과 함께 굉장히 행복한 꿈을 꾸었으리라.
***
근처 둔 스마트폰이 울리는 진동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비비며 확인하니 돈이 입금되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내역이 있었다.
= 입금 1,786,000,000 =
10억 단위로 돈이 불어나니 솔직히 이게 돈인지 숫자인지 모르겠다.
실감이 안 난다는 말이 이런 거군.
단 이틀 만에 20억이라.
근데 왜 들어온 것은 18억도 안 되지?
<승호> 형, 혹시 일어났어요?
<재중> 어, 너 이제 일어났냐? 엄청 오래 자네.
<승호> 뭔가 굉장한 꿈을 꿔서요. 온몸이 식은땀이네요.
<재중> 대체 무슨 꿈을 꾸었는데? 그래서 용건은?
<승호> 상금 20억 아니었어요? 18억이 좀 안 되는데.
<재중> 아, 그거. 세금.
<승호> 네?
<재중> 세금 몰라? 나라에서 떼먹는 거.
<승호> 와, 상금도 세금을 떼 가요?
<재중> 이 나라가 어떤 나란데…… 없는 돈도 떼 가는 나라구만.
<승호> 하, 눈 뜨고 코 베인 기분이네요.
<재중> 너 상금 처음 타지? 나만 하겠냐. 내가 지금까지 떼인 돈 합치면…… 어휴.
말 안 해도 알겠다.
이유야 어쨌든 엄청 아깝네.
<재중> 그리고 공지 봤냐?
<승호> 아뇨, 아직.
분명히 업데이트한다고 들었는데.
<재중> 단체전은 취소됐더라.
<승호> 아, 한다고 했었죠. 완전 까먹고 있었네요.
<재중> 서버 연동 시스템이 계속 다운된다고 일단 당분간 취소라고 하던데 언제 할지 솔직히 모르겠다.
<승호> 그것까지 준비할 시간이 없었는데 잘 됐죠. 뭐.
지금 거기에 신경이 몰리게 되면 공성전은 안 봐도 뻔하다.
<재중> 아, 그리고 로리콘은 사장님하고 의논했는데 안 되겠다.
<승호> 사실 저도 좀 그랬어요.
<재중> 너는 왜?
<승호> 이쁜소녀가 싫어하잖아요. 다른 이유가 뭐 있나요.
<재중> 그게 제일 크긴 하겠네. 아이디를 지우고 새로 키워서라도 가입 안 되냐고 하던데 사장님이 좀 알아봤나 봐.
사장님이 알아봤다고 하는 것을 보면 뭔가가 있던 모양이네.
<재중> 전에 있던 길드에서도 문제가 많았나 보더라. 여자 문제로. 우리가 안고 갈 수 있는 놈이 아냐. 잘못하면 길드 전체가 그놈 때문에 욕먹을 수도 있겠더라.
<승호> 그건 안 되죠. 어떻게 쌓아둔 이미지인데.
또 하나 걱정되는 것은 혹시라도 그 녀석이 챠밍이 아이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떻게 반응할지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다.
<재중> 그런 놈은 원래 좀 집요해서 조건을 하나 달았다.
<승호> 뭔데요?
<재중> 너하고 열 번 싸워서 한 번이라도 이길 수 있으면 넣어준다고.
<승호> ……아, 진짜 왜 그래요.
<재중> 난 기회를 준 건데 그놈이 못 하면 적어도 귀찮게는 안 할 거 아냐.
<승호> 진짜 사악하다.
내가 로리콘에게 질 확률?
멀쩡히 길 가다가 갑자기 번개 맞을 확률하고 비슷하려나.
***
< 로스트 스카이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 뇌파 확인.
> 주승호. 남성.
> 캐릭터명 주호. 레벨 44.
> 로딩 중…….
점검이 끝남과 동시에 접속하니 50레벨이었던 이벤트 렙이 원래대로 돌아가 있었다.
《 이벤트 상품 선택권이 도착해 있습니다. 인벤을 확인해 주세요. 》
내게만 보이는 시스템 음에 따라 인벤을 확인하니 반짝이는 골드 티켓 세 장이 있었다.
『 스킬, 아이템 선택 카드 — 이벤트 전용 』
골드 티켓에는 별다른 설명은 없었다.
또한, 이미 무엇을 받을지 다 생각했기에 빠른 선택이 가능했다.
첫 번째 선택.
『 던켈 』
이유야 많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부실한 광역기를 보충할 만한 기술이 지금은 이것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뒤쳐진 사냥속도를 따라가기엔 광역기가 하나라도 더 필요하니까.
비월참은 범위가 너무 좁고.
멀티 샷은 내가 사용할 수 없고.
단점이 많다고는 해도 지금 이 정도의 광역기는 어디 가서도 구할 수가 없다.
그리고 공성전에서 다수를 상대로 단기전을 해야 할 경우도 배제할 수가 없어 던켈을 스위칭 무기로 가지고 가기로 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선택.
『 대쉬 』
『 백스탭 』
어쩌면 이 선택을 후회하게 될 지도 모른다.
값어치로 치면 블링크나 리플렉션 같은 고급 기술에 비해 너무도 쳐지니까.
혹은 오우거 하트나, 오우거 벨트 등에 비하면 가치가 없다.
블링크는 지력 올인이 아니면 쓰기 힘들 정도고, 리플렉션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인지 마공과 물공을 혼합한 사람들에게서 리플렉션을 볼 수가 없었다.
만약 리플렉션이 높은 확률로 터졌다면 대회 자체가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을지도.
거기다 마법사들의 회피와 반격, 탈출용으로 고려된 스킬이라 내게는 맞지도 않고.
뭐, 큰맘 먹고 두 개를 골라서 챠밍을 줘도 되겠지만 그건 내 발전이 없으니 제자리걸음이다.
그래서 고려한 것이 대쉬와 백스탭으로 재중이 형이 했던 것을 그대로 재현할 생각이다.
이것을 받기로 했을 때, 재중이 형은 내 밑천을 싹 털어 가냐며 웃긴 했었다.
그런 재중이 형은 오우거 벨트와 던켈을 가졌다.
역시 지금 사용할 수 있는 템 중에선 제일 강력하면서도 좋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아이템과 스킬 선택을 마치고 뒤로 미뤘던 공지사항까지 체크하면서 다시 로스트 스카이로 돌아왔다.
[ 공지사항 ]
▷ 격주 간격으로 공성전이 열립니다.
▷ 모든 서버, 필드에서 동시에 진행됩니다.
▷ 공성에 참여하는 길드는 반드시 1개 이상의 하르 원석을 소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공성전까지 앞으로 5일.
다시 시작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