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
#146화 만남 (3)
‘아라’라고 불린 이쁜소녀가 난처한 얼굴로 우리를 봤다.
저 사람이 DS 회장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할아버지라니…….
DS 회장이라는 노인이 착 가라앉은 얼굴로 이쁜소녀를 계속 쳐다봤다.
“설마 했는데…….”
“죄송해요.”
“일어나라. 돌아가자.”
고개를 숙인 이쁜소녀의 어깨가 떨리면서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들어 보였다.
마치 우리와 처음 만났을 때 같이.
겨우 손을 내밀며 내 옷자락을 잡았을 때와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집안의 사정인가.
선뜻 끼어들기에는 알 수 없는 묘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 모습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발이 떨어진다.
DS 회장과 이쁜소녀의 사이로.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냥 본능적인 발걸음이다.
재중이 형이 날 막아서려고 했지만 그걸 제치고 그대로 움직였다.
그러자 DS 회장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본 DS 회장이 그대로 손을 올리자 마법이라도 걸린 듯 주변 사람들이 그대로 자리에서 멈춰 버렸다.
“가만히.”
손동작 하나로 사람들을 멈추게 만드는 카리스마라.
그런 매서운 눈길을 이쁜소녀가 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가 이쁜소녀의 앞에 서자 깜짝 놀란 이쁜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내 옷자락을 살짝 잡는 것이 느껴졌다.
막상 막아서고 보니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냥 이렇게 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본능적으로 외치는 것 같았으니까.
재중이 형도 이젠 모르겠다는 식으로 그저 팔짱만 끼고 있었다.
DS 회장이 이쁜소녀 대신 날 굳센 얼굴로 바라봤다.
“주승호라고 합니다.”
“자네, 이게 실례라는 것을 알고 있겠지?”
“네, 아마 그럴 겁니다.”
“흐음, 자네 재밌는 친구군.”
뭐가 재밌다는 건지…….
“유 팀장이 이야기한 친구가 이 친구던가.”
그 말에 유혜선 팀장이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숙였다.
나와 있을 땐 항상 편안한 모습을 보였던 유혜선 팀장도 지금은 사뭇 다른 행동을 보였다.
“네, 회장님.”
그 말에 DS 회장이 잠시 나를 보고 내 뒤에 있는 이쁜소녀를 보는 것 같더니 뭔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미묘하다.
노기?
슬픔?
안도?
후회?
뭐지 저 표정은.
나도 표정은 정말 잘 읽는다고 생각하는데 나이가 지긋하게 든 사람의 저런 표정은 너무 복합적으로 섞여 있어 읽기가 힘들다.
“그렇게 쳐다보는 건 실례야.”
“아…… 그렇군요.”
나와 시선이 마주친 DS 회장이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다시 처음에 봤던 무표정의 그런 굳은 얼굴로.
“내 앞을 막아선 용기는 봐줄 만하군.”
그럭저럭 넘어간 건가?
“하지만 두 번은 안 돼. 다음엔 예의를 차리게나. 집안일에 끼어드는 건.”
“…….”
말 한마디를 그냥 쉽게 넘어가진 않네.
저런 사람이 집안 어른으로 있으면 분위기가 어떨지 눈에 선하다.
“자네 덕분에 내 양가 놈의 썩은 얼굴을 봤으니 이번은 넘어가겠네.”
양가가 누구지?
그때 방패전사가 슬쩍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PV회장이 양 씨입니다.”
“아…….”
DS와 PV가 숙적 같은 관계라고 했지.
그러면 저런 호의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듣기로 PV와 시장을 양분하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역전했다고 유혜선 팀장에게 들은 적이 있다.
거기다 이번 대회에서 PV의 VRS가 중간에 멈춰 버렸으니.
안정성 문제가 또 불거지면 이번엔 오히려 점유율이 뒤집혀버릴지도 모른다.
“유 팀장.”
“네.”
“내 들은 게 많아. 4세대 VRS 밸런스 개발도 손수 했고. 거기다 주승호 군까지말야.”
“네.”
“그런데 어째서 내게 그런 이야기가 다 올라오지 않은 걸까. 내가 알기로는 전부 축소되거나 다른 이야기가 들려오던데 말이지.”
그 말에 DS 사장의 뒤에 서 있던 한 남자가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배불뚝이에 얼굴에 점이 크게 박혀 있는.
저 사람이 DS 코퍼레이션 사장인가?
유혜선 팀장 말에 따르면 지원을 하나도 안 해주는 짠돌이 중 짠돌이.
사장 아들이 있는 판매부처가 온갖 특혜를 다 받는다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오해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오해?”
DS 회장이 한 번 더 묻자.
“아닙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아주 큰 사과야. 먹기 좋은. 난 내 사과가 썩어가는 걸 보고 싶진 않아. 무슨 말인지 알겠냐.”
그 말에 DS 코퍼레이션 사장이 허리까지 숙이며 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했다.
“원래대로 돌려놔. 내가 보고 받는 것과 다른 이야기가 다시 들려오면 그 자리, 원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사장이라고 해봐야 회장한테는 손가락 하나면 누를 수 있는 자리인 모양이네.
딱 봐도 중간에 해 먹은 것이 많아 보인다.
저러니 유혜선 팀장이 그렇게 불만을 이야기했지.
사장 아들이 꿀은 다 먹는다고.
“유혜선 팀장의 직급 두 단계 더 올려주고, VRS 총괄 개발팀 다시 짜도록 해. 지원도 확실하게 해주고.”
“하지만 너무 파격적인…… 분명 여기저기서 불만이.”
“하지만? 내가 자네 아들 이야기까지 해야 하나? 응?”
“……조치하겠습니다.”
“두 번은 없어.”
우리와 이야기할 때보다 훨씬 굳은 얼굴로 사람들을 대한다.
드라마에서만 보던 회장님 포스인가.
“이거 참, 손님들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여줬군.”
이거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 할지…….
그리고 다시 날 바라봤다.
“자네에겐 해줄 것이 있지.”
해줄 것?
“계약금과는 별도로. 내가 지금 기분이 아주 좋아.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해보게나.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선에서는 다 들어주도록 하지.”
기분이 아주 좋은 사람의 표정이 저런가?
안 좋은 기분일 때는 또 어떤 표정일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보너스라…….
그걸 듣자마자 머릿속에서 뭔가가 바로 떠올랐다.
“이쁜소녀…… 아니, 아라를 당분간 그대로 두었으면 좋겠습니다.”
“뭐?”
“다시 말씀드릴까요?”
내 말에 DS 회장이 또 알 수 없는 깊은 표정을 짓는다.
“자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어떤 것들인지는 알고는 있는가?”
“뭐, 아마 대단한 거겠죠. 일반인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것들을 내게 쥐여 줄 수 있을 것이다.
“그걸 알고서도.”
“그러니까 그 정도라면 제 부탁도 충분히 들어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제 공은 상대방에게 넘어갔다.
지금 DS 회장에게 끌려가면 이쁜소녀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나를 더욱 부추긴다.
이렇게 해야 한다고.
이런 상황에 DS 회장이 내게 한 자루의 보검을 건네줬으니 난 그걸 휘두른다.
내가 바라는 대로.
“흑…….”
뒤에서 이쁜소녀가 떨리는 손으로 내 옷자락을 잡고 울먹이기 시작했다.
대체 뭐가 있기에 이 소녀를 이렇게 주눅 들게 만드는 건지.
이런 쪽 사람들은 좀 더 떳떳하게 사는 게 아니었나?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지금은 내가 하는 일이 맞다고 생각한다.
내 단호한 결정에 DS 회장이 굳은 얼굴로 이쁜소녀를 바라봤다.
“아라야.”
“네, 할아버지.”
“즐거우냐?”
“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느냐 이 말이다.”
그 말에 이쁜소녀가 이번엔 망설임 없이 대답을 했다.
“네.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 됐다.”
DS 회장이 또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더니 나와 내 주변을 한 번씩 둘러봤다.
“좋은 사람들을 옆에 뒀구나.”
이쁜소녀의 표정이 그제야 다시 피기 시작했다.
“네!”
“가자.”
그 말을 끝으로 DS 회장과 시커먼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혜선 팀장이 슬쩍 뒤를 바라보면서 엄지를 척 세워줬다.
잘 해결된 건가.
긴장됐던 기분이 갑자기 확 풀어진다.
슬쩍 몸을 움직이려는데 아직 내 옷깃을 잡고 있던 이쁜소녀가 깜짝 놀랐다.
“아! 죄송해요.”
그러고는 곧장 손을 놓았다.
“아, 괜찮습니다. 굉장한 할아버지를 두셨네요.”
“네…….”
“언젠가 편해지면 이야기해 주세요. 지금은 아닌 것 같으니까.”
“정말 고마워요. 다시는 못 보게 되는지 알고…….”
무리를 한 쪽은 챠밍이 아니라 오히려 이쪽인가?
“능구렁이 영감이네.”
재중이 형이 날 데리고 다른 사람들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떨어져서야 이야기를 꺼냈다.
“네?”
“이쁜소녀와 네가 친하다는 것을 알자마자 그 짧은 순간에 바로 계산기를 두들겼어. 너와 척을 지고 갈 것인지 네 부탁을 들어주고 잡을 것인지.”
“으음…….”
“네 몸값이 어쩌면 상상을 초월할지도 몰라. 5세대 VRS에서도 앞서려면 네 협력은 필수적이니까. 그래서 마지못해 들어주는 척 한 것일 수도 있어. 이쁜소녀가 네겐 인질이라고 해야 하나.”
나를 잡고, 이쁜소녀와 나의 의견을 들어줬다.
그렇게 단 한 수를 놓음으로써 원하는 것을 모두 이뤄냈다.
“회장이라는 자리 아무나 앉는 것은 아니네요.”
“독사 몇 마리는 속에 넣고 다니는 자리니까. 경쟁자들을 다 집어삼키고 올라간 사람이야. 먹히지 않으려면 조심해야지.”
그런가…….
그래도 내 결정에 후회 같은 것은 없다.
“뭐, 됐어요. 인질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요. 좋아하는 모습을 봤으면 됐죠.”
재중이 형이 내 말에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한다.
내 말에 긍정이라는 소리네.
이런 사람이니 형을 좋아한다.
챠밍과 나르샤가 어느새 이쁜소녀를 안고 조용히 다독이고 있다.
이쁜소녀는 웃으려고 노력 중이고.
이 여정의 끝이 어디로 가게 될지…….
지금은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지만.
저렇게 모여서 함께 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한다.
***
“음, 이왕 만났는데 제대로 인사도 못 했습니다.”
방패전사가 와인을 한 모금하더니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서로 이름도 모르네.”
재중이 형은 음식을 왕창 우물거리며 우리를 쳐다봤다.
저 사람은 진짜 이런 분위기에도 주눅 들지 않는구나,
엄청난 샹들리에와 조명, 비싸 보이는 조각과 미술품들, 화려한 장식들이 쭉 늘어진 화려한 테이블까지.
이런 연회장에서도 재중이 형은 그저 재중이 형이다.
제집처럼 편하게 웃으면서 저렇게 즐길 수 있다니 정말 모를 사람이야.
“뭐, 전 다 알다시피 불멸이죠. 스물일곱인데 나보다 나이 많은 분? 손?!”
그 말에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이런, 내가 연장자네. 꽤 슬픈데. 그럼 말 편하게 한다? 생각보다 답답해, 이거.”
“네, 편하게 하세요.”
“전 괜찮아요.”
챠밍과 이쁜소녀가 대표로 답변하자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눈앞에 음식에 집중했다.
“이름은 다들 알다시피 재중이고, 뭐, 특별히 궁금한 사람?”
그때 이쁜소녀가 손을 들었다.
이제 다 기분이 다 풀린 모양이다.
어느새 원래의 이쁜소녀로 돌아가 있다.
“그럼, 앞으로 뭐라고 불러야 해요?”
“으음…… 오빠?”
그 말에 이쁜소녀와 챠밍이 꺄르르, 웃는다.
“네, 재중 오빠.”
“저도 오빠라 부를게요.”
“그쪽이 편하시면요. 그렇게 할게요.”
이쁜소녀, 챠밍, 나르샤가 차례대로 대답했다.
“오, 좋네. 좋아. 매일 시커먼 놈들만 데리고 다니다가 지금은 천국이야.”
그 말에 한 번 더 웃음바다가 됐다.
저 잘생긴 얼굴로 저렇게 해버리니 원.
안 좋아할 사람이 없겠다.
그 뒤로 방패전사가 간단하게 자기를 소개했다.
“스물여섯이고, 종훈이라고 합니다. 그…… 저도 오, 오빠 소리 좀.”
그 말에 옆에 있던 나르샤가 바로 옆구리에 펀치를 날렸다.
“쿠엑!”
그 한 방으로 방패전사를 침묵하게 만들다니…… 그것에 이쁜소녀와 챠밍이 좋다고 웃어댔다.
저건 어쩔 수 없구나.
미리 명복을.
“스물여섯, 이름은 나르샤에요.
그때, 이쁜소녀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어? 이름이 나르샤예요?”
“응, 나 이름 그대로 써.”
“와, 부럽다.”
“한글이야, 마음에 들어서.”
이쁜소녀의 말에 나르샤가 살짝 미소를 짓는다.
“그럼, 누가 한국 분이세요?”
“아버지는 독일, 어머니는 한국. 아버지의 일 때문에 한국에 머물고 계시고.”
그 뒤로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와 방패전사와 소꿉친구라는 이야기까지 다 해줬다.
“그리고 보다시피 이쪽 감시하러 나왔답니다.”
“와, 언니 멋져요.”
이쁜소녀의 감탄 섞인 말에 나르샤가 브이를 해 보였다.
“그럼, 두 분 혹시 사귀시는 거예요?”
“아니. 그런 끔찍한 소리를.”
“전혀. 미치지 않고서야.”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답변이 방패전사와 나르샤에게서 먼저 나왔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던데.
대충 각이 나온다.
나 같으면 좋다고 사귀겠는데 사람 일은 참 알 수 없어 보인다.
“아까 들으셨겠지만 전 아라예요. 스무 살이고.”
그것만 말했을 뿐이지만,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도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음, 챠밍은 일단 넘어가자. 혹시라도 누가 들을 수 있으니까.”
“네, 고마워요, 재중 오빠.”
스물하나. 핑크하트의 메인보컬.
검색을 조금만 해도 프로필이 주르륵 나온다.
설명할 이유가 전혀 없다.
“모르는 놈이 하나 있지만 넘어가.”
재중이 형의 말에 다들 모두 웃기 시작했다.
아, 이거 평생 갈 것 같은데.
챠밍이 날 보면서 괜찮다는 듯 미소 지었다.
그래, 네가 착해서 다행이다.
그 뒤로 내가 소개를 하는데 다들 굉장히 궁금한 눈치로 날 보기 시작했다.
부담스럽네.
“으음, 그렇게 보셔도 전 특별한 것이 없어요.”
“이름이 승호 맞죠? 아까 들었어요.”
챠밍이 먼저 말을 꺼내자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주승호입니다. 23살이고. 대학생입니다. 휴학은 하긴 했지만.”
“그게 끝이야?”
재중이 형이 물어보자 딱히 할 말이 없다.
“없네요. 생각보다.”
정말 없네.
뭐지.
로스트 스카이만 빼고 나면 정말 평범하잖아.
“그럼 승호 씨도 오빠네요?”
“승호 오빠…… 엄청 이상하고 이상해요.”
챠밍과 이쁜소녀가 한마디씩 하면서 좋아한다.
“나한텐 동생이네.”
나르샤는 누님이고.
“네, 그렇게 되네요.”
ZUN사에서 준비한 사회가 열심히 떠드는 동안 그렇게 각자 소개를 하면서 식사를 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제법 흘러갔다.
“자, 이제 배도 채웠고…… 슬슬 줍줍 하러 가야겠다.”
“줍줍?”
재중이 형이 이상한 말을 꺼내자 다들 의아한 얼굴로 바라봤다.
“주변에 널린 애들 주우러 간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