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127화 별들의 전장 (2)
VRS를 나와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난 뒤 소파에 털썩 누웠다.
“RTP가 높다고 다 되는 건 아니구나…….”
가상현실에 들어가면 감각을 증폭하는 비율이 현실보다 훨씬 높게 올라가게 된다.
사실 어쩔 땐, 무엇이든지 가능하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육체라는 현실의 굴레를 깔끔하게 제거해 그대로 반영하는 가상현실의 아바타가 있기 때문에.
가끔 리바운드가 오지만 예전처럼 심한 것도 아니고 잠시 어지러움을 느낄 때만 빼면 원하는 동작은 거의 다 구현해 준다.
그럼에도, 로스트 스카이에서 정해놓은 룰은 절대적이다.
간혹 색다른 방법을 써서 운영자들의 옆구리를 치긴 했지만 그건 변하지 않는다.
“스킬이라…….”
호수의 네임드를 상대하면서 스킬의 중요성이 몸에 확 와 닿는다.
민첩이 그렇게 높은데도 결국은 스킬에 발목이 잡혔다.
계속 머릿속에서 네임드가 쓰던 스킬들이 떠올랐다.
어떻게 하면 파훼할 수 있을지.
최소한의 피해로 공격하기 위한 경로가 떠오르고 지워지기를 반복한다.
“쉽지 않네.”
재중이 형은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신경 쓰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때 스마트폰이 울렸다.
<재중> 나왔냐?
<승호> 네, 바로 나오셨네요.
<재중> 사장님하고 간단하게 이야기를 좀 하고 나왔지.
<승호> 별말 없으세요?
<재중> 뭐, 딱히. 새 사냥터 찾은 것만으로도 지금은 만족하시더라.
사실 우리에게 닥친 가장 큰 문제가 경험치였는데 그게 어느 정도 해소는 될 것 같다.
미로 혹은 미로 안쪽까지도 사냥이 가능할 것 같으니까.
챠밍과 나르샤가 새 스킬을 익힌 것도 있고, 처음처럼 고생하지는 않겠지.
물약을 가지러 오가는 시간을 고려해도 경험치만 생각하면 이쪽이 낫다.
유적지를 먹었다면 베스트겠지만.
<재중> 곧 정기점검할 거다. 좀 쉬어. 이번에 점검 끝나고 나면 한동안 또 바쁠 거니까.
<승호> 네. 형도 쉬세요.
폰을 끄고 막상 침대에 누웠지만, 딱히 잠이 오지는 않는다.
이리저리 폰을 만지다 연락이 왔던 것을 확인하고 있었는데 유혜선 팀장의 연락이 눈에 보였다.
무슨 일이지.
요즘 수출 건으로 굉장히 바쁘다고 알고 있는데…….
평범한 일로 연락을 했을 것 같지는 않고.
바로 전화를 걸어보는데 신호만 간다.
조금 더, 기다리다 끊으려 하는 타이밍에 유혜선 팀장이 전화를 받았다.
<혜선> 오랜만이네요.
<승호> 목소리가 왜 그래요?
자신감 넘치던 목소리가 지금은 거의 파김치인데?
힘이 쫙 빠져서 흐늘거린다.
<혜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바빠서요. 죽을 것 같아요.
<승호> 휴가 내라는 소리도 못 하겠네요.
<혜선> 내도 안 받아줘요. 일감이 너무 밀려서. 저 빠지면 진짜 올 스톱 될지도 몰라요. 이번에 영국에 들어가는 VRS 컨버터가 불량…… 사장 놈이…… 마감 시일에…….
극한 직업이네.
내가 모르는 이야기지만 일단 꿋꿋하게 들어줬다.
뭔가 하소연할 곳이 필요해 보이는 목소리라.
전에 누가 옆에서 들어주기만 해도 충분히 도움이 된다는 소리를 들었기에 그대로 실천 중이다.
한참을 이야기하던 유혜선 팀장이 어느 정도 분이 풀렸는지 제정신을 차린 것 같다.
<혜선> 아! 사실, 알려 드릴 것이 있어요.
<승호> 뭐, 이상이라도?
<혜선> 아뇨, 조만간 지금 하시고 있는 로스트 스카이에서 큰 업데이트를 할 예정이에요. 어떻게 아냐고 물어보신다면 우리 회사도 이번에 기술 스태프로 참여를 해서요. 근데 문제가 좀 있어요.
<승호> 어떤 문제요?
<혜선> 대회 같은 게 열리면 나가실 거죠?
<승호> 음, 보상이 좋다면 아무래도 나가겠죠.
<혜선> 그럼, 주승호 씨가 상위권에 들어가면 문제가 생겨요.
<승호> 심각한 겁니까?
<혜선> 커스텀 VRS를 옮겨야 할지도 몰라요.
<승호> 네?
<혜선> 본선이 열리는 곳이 종합 미디어 센터 아트리움이거든요.
본선?
대체 뭘 하기에.
그냥 게임 안에서 해결하면 안 되는 건가?
<승호> 근데 제가 상위권에 들 거라고 확신하시는 겁니까?
<혜선> 네, 완전요.
정작 나도 확신이 없는데.
이쪽은 벌써 상위권에 올라간다고 확정 지은 것 같다.
<혜선> 그리고 드릴 것도 있고요. VRS에 있는 제어 시스템을 최소한으로 줄여서 만든 건데 고글 비슷한 형태예요. 조만간 들고 찾아갈게요. 언제가 편하세요?
<승호> 바쁘시면 그냥 택배로 주셔도 괜찮…….
<혜선> 안 돼요! 갈 거예요!
좀 전까지 바빠 죽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혜선> 아! 그게, 제가 가서 미세 조정도 해야 하고…….
뭐, 그런 거라면.
<승호> 바쁜데 일부러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PV에 가지 않은 것은 잘한 선택인 것 같다.
<혜선> 제가 책임지기로 했으니까요.
듣기 따라 참 미묘한 말이기는 한데 기분은 좋은 말이다.
누군가 계속 신경 써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
장을 보고 온 뒤 한숨 자고 일어났는데도 여전히 업데이트가 진행 중이다.
<승호> 형, 이거 왜 이렇게 오래 걸려요?
<재중> 방송 시스템 쪽이 문제라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고, 연장 들어갔다. 한숨 더 자라. 언제 끝날지 몰라.
<승호> 자고 일어나서 잠이 안 와요.
<재중> 나도 그래. 진짜, 점검을 제때 마치는 경우가 없다니까 이놈의 회사는.
그건 100퍼센트 동감이다.
이제껏 제시간에 점검을 마친 것이 손에 꼽을 정도다.
임시 점검, 연장 점검으로 이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라 사람들의 원성을 많이 샀는데 이번에도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그나마 VRS와 스마트폰에 연동되어 연락이 가능한 앱이 있어서 다행이지.
서로 연락이 안 된다면 진짜 고생이다.
<재중> 아, 그리고 당분간 니가 길드 마스터다.
<승호> 네? 그게 무슨……?
<재중> 너랑 나랑 둘 다 최강에서 빠지니까 무슨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고 계속 연락 오는데 시끄러워서 일단 내가 돌아가기로 했다.
확실히 전체 개인 랭킹 1, 2위가 동시에 빠져나가면 말이 안 나올 수가 없다.
게시판에서도 한바탕 난리가 나기도 했었고.
<재중> 사장님, 혼자 관리하기 벅차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그쪽은 날 보고 온 사람이 많으니 어쩔 수 없지. 뭐, 그렇게 됐으니까 알아두라고.
<승호> 제가 길드 마스터 하면 말아 먹을 것 같은데요?
<재중> 원래 너희끼리 잘 했잖아. 당분간 그쪽으로 인원 넣을 일 없으니까 신경 안 써도 돼.
<승호> 그렇다면야.
여차하면 방패전사에게 넘겨 버리면 된다.
<재중> 너, 방금 방패전사한테 넘기려고 생각했지?
귀신이네.
<승호> 하하, 설마요.
<재중> 길마는 잡고 있어야 해.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세금 같은 문제 때문이려나.
<재중> 방패전사가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승호> 네네, 이해했어요.
로스트 스카이는 생각 이상으로 길마에게 권력이 집중된 시스템이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있을 문제는 만들고 싶지 않은가 보다.
<승호> 그리고 업데이트 살펴봤는데 이건 완전히 통합 대회네요? 거기다가 본선은 아트리움까지 빌리고.
서버 대항전이라기보다는 그냥 하나의 큰 대회라고 해야 하나.
<재중> 이번에 작정했나 보다. 거기다 방송사 입김이 잔뜩 들어간 거지. 실제로 로스트 스카이가 방송하기 적합한 콘텐츠가 계속 나오는 것은 아니라서 아예 대회 식으로 따로 운영할 모양이다.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거지.
<승호> 그런가요?
<재중> 로스트 스카이 쪽이야 지들 콘텐츠를 계속 내보내 주면 땡큐지. 사람들이 늘어나니까. 방송사 쪽에서도 기존 다른 게임들 틀에 맞춰서 대전이나 단체 경기 형식으로 대회를 열 수 있어서 좋지. 일단, 사람이 많잖아. 스폰서도 잔뜩 붙을 거고 광고 수익이 장난 아니겠지.
<승호> 다 돈놀이네요.
<재중> 그래, 이 바닥은 다 돈이지. 돈이 안 됐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걸? 지금껏 방관하던 프로들도 상금 때문에 꽤 들어올 것 같다. 쉽지 않을 거야.
<승호> 아, 상금이…….
<재중> 내가 대회를 많이 해봤는데 이번이 역대 최고다. 내가 전에 있던 팀에서 뛰던 애들도 지금 몸이 달아올랐어. 전향하니 어쩌니 말이 많더라.
<승호> 이게 주기적으로 열리는 대회도 아니잖아요. 앞으로 더 열린다면 또 모르겠지만.
<재중> 그게 아니라 아예 이쪽 게이머로 들어올지도 모른다고. 이 대회는 그냥 시작일 뿐이야.
<승호> 으음. 프로면 계약 기간도 있고. 함부로 빠질 수 없지 않아요?
<재중> 지금 프로팀들에서도 그거 때문에 문제가 많다고 하던데 지켜봐야 해. 잘하면 엑소더스가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승호> 연봉을 포기하면서까지 달려들 정도인가요.
<재중> 그것도 상위 애들만 그렇지 밑에 애들은 그렇게 많이 받는 것도 아니고. 그만큼 돈이 돼. 로스트 스카이가. 너 몇 달간 통장에 쌓인 돈 생각해 봐라. 점점 파이가 커지는 중이니까.
이미 억 단위가 넘어간다.
단순하게 게임만 해서 얻은 돈이.
거기다가 지금도 매일 통장에 돈이 꽂히고 있다.
<승호> 으음, 부정은 못 하겠네요.
<재중> 서버가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서버로 가면 그 정도 뽑아낼 녀석들이 프로에 넘쳐나. RTP가 기본 350에서 400대를 오가니까. 좀 무리하면 450까지 끌어낼 녀석들도 있고.
<승호> 으음, 생각보다 높네요.
유혜선 팀장에게 들은 대한민국 평균치를 훨씬 상회하는 수치다.
<재중> 나처럼 3세대 때부터 RTP 억제기를 달고 프로 생활을 해서 경험도 풍부하고. 1:1을 밥 먹듯 몇 년간 해서 그쪽으로 완전히 특화됐다고 해야 하나.
<승호> 형 같은 사람들이 그렇게 많아요?
<재중> 뭐, 다 나 같으면 내가 우승하고 다녔겠냐. 그 정도는 아니고, 신경 쓰이는 녀석이 몇 있기는 하지. 그런 녀석들이 작심하고 덤비면 금세 판도가 변할 거다. 지금 랭킹은 랭킹도 아니야.
확실히 그렇게 될 것 같기도 하네.
재중이 형과 비슷한 사람들이 우르르 있다라…….
<재중> 거기다 너처럼 이제껏 못 하다가 4세대에 뛰어든 사람도 많을 거야. 아니면 높은 RTP를 가지고도 평범하게 사는 사람도 있을 거고.
<승호> 뭔가 마음이 복잡하네요. 그런 사람들은 두각을 드러내지 않나요?
<재중> RTP가 높다고 다 되는 건 아니지. 기본 자금이 있어야 무기도 강화하고 더 높은 사냥터에서 사냥을 하지. 지금 상위권은 거의 다 돈만 많은 쭉정이뿐이야. 내가 길드 인원을 다 안 채우는 이유도 그런 애들 때문이고.
RTP와 돈이 모두 만족해야 괴물이 된다는 건가?
<승호> 이번에 모집한 걸로는 안 됐나 보네요.
<재중> 아아, 눈에 차는 녀석들이 별로 없더라.
숨은 보석 찾기라…….
<재중> 너도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직 너무 투박해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더 다듬어야 해.
형의 입장에서 보면 나도 어디에선가 갑자기 툭 튀어나온 숨은 보석인 셈이다.
전혀 생각지도 않은 PC방 동생의 RTP가 미쳐 날뛰고 있으니 얼마나 황당했으려나.
<승호> 뭐, 지금이라도 할 수 있게 돼서 다행인 거죠.
유혜선 팀장에게 고마울 뿐이다.
지금 통장에 쌓이는 돈을 생각하면 언제 한 번 식사라도 대접해야 하려나.
<재중> 그래서 넌 나랑 앞으로 특훈이다. 그놈들 이겨 먹으려면.
왠지 폰 반대편에서 기묘한 열기가 느껴지는 것 같다.
<재중> 내가 키운 녀석이 최고라는 걸 보여줘야지.
***
< 로스트 스카이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 뇌파 확인.
> 주승호. 남성.
> 캐릭터명 주호. 레벨 44.
> 로딩 중…….
접속을 하면서 확인한 최종 업데이트 내용이다.
[ 공지사항 ]
▷ 서버 대항전이 업데이트됩니다.
▷ 참가를 원하는 유저는 홈페이지에서 등록이 가능합니다.
▷ 개인전, 단체전을 별도로 신청할 수 있으며, 중복 등록도 가능하며, 일정은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캐릭터마다 동일한 스탯을 지급하며, 분배는 자유입니다.
▷ 장비는 로스트 스카이에서 드랍된 대부분의 아이템을 포인트 점수 안에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아이템과 스킬 목록은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 예선은 무작위 추첨으로 서버별로 진행되며, 본선은 역삼동 종합 미디어 센터 아트리움에서 별도로 진행되니 홈페이지를 확인해 주세요.
▷ 개인전, 단체전 우승, 준우승 및 본선 진출 시 상품이 걸려 있으니 많은 참여 바랍니다.
▷ 이번 행사는 ZUN과 공식 협력 방송사와 함께합니다. 예선과 본선을 방송에서 함께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다행히, 검은 호수에서의 것들은 패치가 되지 않은 모양이다.
서버 대항전으로 바빠서 지나쳤는지도 모르겠고.
일단 지켜봐야 하나.
길드 건물로 들어가자 모두 업데이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왔냐?”
“네, 시끌벅적하네요.”
점검 이후엔 늘 이렇다.
접속한 길드원들이 길드와 개인 창고에 들렀다가 가는 편이니까.
안면이 있는 슬이아빠, 체리, 천둥, 해신, 아이꿍과 몇몇 길드원에게 눈인사를 했다.
반면에 이번에 새로 받은 길드원들은 전혀 모르겠네.
내 머리 위에는 최강이 아니라 신화 길드 마크가 있지만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라 우리가 길드 건물에 돌아다녀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쳤다.
“이번엔 좀 고생할지도 모르겠다.”
“네. 그렇죠?”
“제대로 통수야. 레벨과 장비를 이런 식으로 해놓다니.”
진짜 실력만 보는 대회.
아이템이나 레벨, 정보가 앞서나간다는 장점을 하나도 살릴 수 없다.
오직 컨트롤과 재능으로만 승부를 봐야 한다.
“숨겨져 있던 보석들이 날아오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