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122화 검은 호수의 여왕 (5)
전투로 혼란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물의 장벽에 닿은 라미아 궁수가 전기에 감전된 듯 부들부들거리다 장벽에서 떨어졌다.
거기에 보너스처럼 경직이 곁들어져 있었다.
이건……!
의외인데?
장벽의 대미지가 우리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나?
평범하고 안전하게 싸웠다면 한동안, 혹은 아예 몰랐을 확률이 높았다.
어지간한 기술로는 몹을 저 정도까지 밀어내지를 못하니까.
있다면 비월참이 적당하다.
몹이 장벽으로 붙는다면 근접 공격을 하는 입장에선 최악이다. 그러니, 벽으로 밀어낼 생각을 했겠는가.
방패전사도 대략적인 상황을 확인하고 이쁜소녀를 향해 엄지를 척 내세우자 쑥스러운지 바로 고개를 돌렸다.
이건 이쁜소녀가 일등 공신이네.
우리가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어스 퀘이크에 밀려 쓰러졌던 라미아 방패병과 궁수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쁜소녀가 시전한 어스 퀘이크 덕분에 방패병과 궁수의 라인이 완전히 갈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방패병들은 챠밍, 나르샤, 그리고 우리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둘러싸인 상태였다.
“챠밍님!”
“네! 다 됐어요!”
이쁜소녀가 돌발적으로 어스 퀘이크를 사용했을 때, 진영이 이렇게 될 것이라고 예상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참 전부터 시전 중인 마법이 있었다.
【 아이스 월! 】
새하얀 냉기가 호수의 얕은 물가를 타고 퍼지면서 일어나려던 방패병 셋을 동시에 얼려 버렸다.
“오래는 못 얼려요.”
평범한 상황이었다면 풀 차징한 아이스 월이 몹을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게 얼렸겠지만, 이곳은 속성 문제가 있어 오래 얼리진 못하는 모양이다.
“가죠.”
챠밍이 시간을 벌어주는 사이 나와 재중이 형, 방패전사, 그리고 이쁜소녀가 라미아 궁수들에게 한 명씩 달라붙었다.
방패병을 얼리고 있는 아이스 월이 풀리기 전에, 궁수부터 빠르게 처리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챠밍과 나르샤가 위험해질 테니까.
가까이에서 일어나려던 라미아 궁수에게 빠르게 달려들어 발로 턱을 강하게 올려 찼다.
다른 때 같았으면, 이런 식으로 공격을 하지 않았을 텐데, 대미지를 주는 장벽을 보고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또한, 파워 글러브와 오우거 벨트로 힘을 10이나 올려서 그런지 발차기 한 방으로도 라미아 궁수를 휘청거리게 만들 수 있었다.
생각보다 괜찮은데?
그동안의 사냥은 오직 대미지와 속도만 생각해서 무기 위주로 플레이를 했지만, 때에 따라서는 이런 공격 방법도 좋을 것 같다.
변칙적으로 상대방의 자세를 무너뜨릴 수 있으니까.
【 오우거 하트! 】
그 상태에서 빠르게 마력 악세로 스위칭하고 오우거 하트를 썼다.
이왕 할 거면 확실하게 한다.
전신에 활력이 차오르는 느낌과 함께 강력한 힘이 추가로 몸에 흐르기 시작했다.
마치 축구 선수가 프리킥을 차듯 달려들어 강하게 디딤발을 밟은 뒤 온몸의 탄력을 끌어모은 반대 발로 쓰러져 있는 라미아의 배를 아주 강력하게 걷어찼다.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라미아의 허리가 기역자로 꺾이면서 공중에 붕 뜨더니 그대로 검은 물의 장벽에 날아가 부딪쳤다.
캬아악!
몸을 타고 흐르는 대미지와 경직에 반항조차 못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바로 블러디아와 카스카라를 꺼내 라미아를 찍어 내렸다.
반항을 못 하는 몹을 죽이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으니까.
오우거 하트를 써서 줄어든 마력이 카스카라의 마력 흡수력과 자연 회복력에 힘입어 차곡차곡 차올랐다.
【 포이즌 웨폰! 】
마력이 돌아오자마자 바로 무기 인챈트를 시전해 몇 번 더 급소만 내려찍으니 라미아 궁수가 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다른 곳은?
무심코 뒤를 돌아보니 방패전사가 지금 상황에서는 가장 적응을 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라지 쉴드를 이용하여 라미아 궁수를 벽으로 밀어 붙였다.
유리한 위치를 잡자, 블러디아를 이용해 라미아의 옆구리를 집중적으로 공략하기 시작했다.
나라도 빠져나가지 못할 타이트하고 집요한 공격이었다.
장난 아니네.
마치 이곳은 방패전사를 위해 준비된 장소라고 생각할 정도로 기가 막히게 활용하고 있었다.
딜이 떨어지는 유저도 저런 식으로 싸우면 솔플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어디 보자…….
이쁜소녀는?
재중이 형이야 알아서 잘 할 것이고 이쁜소녀를 보니 던켈의 커다란 날에 몸의 체중을 실어 라미아 궁수를 벽으로 쳐내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벽에 부딪쳐 대미지를 입고 앞으로 쓰러지려고 하면 다시 던켈을 휘둘러서 다시 벽으로 밀어붙이는 것을 보니 이쪽도 걱정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아이스 월에서 풀려난 방패병들은 챠밍과 나르샤를 쫓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이미 내 뒤로 빠졌다.
“생각보다 아이스 월이 너무 빨리 풀렸어요.”
챠밍이 옆으로 돌아가면서 하는 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닙니다. 시간을 끌어주셔서 쉽게 했어요. 뒤를 부탁해요.”
내 말에 챠밍은 바로 우리 팀에게 힐을 나눠주고, 나르샤는 빨리 처리가 될 것 같은 곳부터 독 대미지를 입히기 시작했다.
말을 마친 나는 챠밍과 나르샤를 쫓아온 방패병들에게 바로 달려들었다.
방패병들과 가까워지기 직전 왼쪽으로 급하게 스텝을 밟아 몸을 빼냈다.
그것과 동시에 몸을 반 회전하면서 블러디아와 카스카라를 교차해 빠르게 휘둘렀다.
【 비월참! 】
정면으로 모여서 달려오던 라미아 방패병들의 코앞에서 비월참이 두 발 터지자 방패병들이 몸이 붕 뜨면서 벽으로 튕겨 날아갔다.
쓰라고 만들어놨으면 계속 써줘야지.
벽으로 밀려서 날아간 라미아 방패병들이 벽에 닿자마자 궁수가 그랬던 것처럼 비명을 지르면서 그 자리에서 자지러진다.
지금 이 장면을 영상으로 저장해 나중에 본다면 좀 이상한 그림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궁수들을 어느새 다 정리한 우리 팀원들이 남은 방패병들을 장벽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벽에 근접한 방패병들을 배틀 엑스로 두드릴 때마다 라미아들의 끔찍한 비명 소리가 지속적으로 터져나왔다.
살짝 표정을 찌푸린 챠밍은 포이즌 클라우드를 비명을 지르는 방패병들 쪽으로 시전했다.
잠시 후, 방패병들은 빛으로 변해 사라져 버렸다.
“흠, 라미아의 피가 생각보다 잘 나오네. 역시 이쪽부터가 진짜인가.”
재중이 형이 드랍된 템을 확인하면서 말했다.
“그래요?”
“어, 바깥쪽 보다 훨씬 낫네.”
물의 장벽을 기준으로 밖과 안의 시스템이 완전히 갈리는 모양이다.
“재밌어요.”
“벽이 생각보다 좋습니다.”
이쁜소녀와 방패전사가 각기 한마디씩 던졌다.
라미아를 벽으로 마음껏 쳐내면서 스트레스가 풀린 모습이다.
“신기하네요. 이런 시스템이라니.”
마치 일부러 이렇게 만들어놓은 것 같은 느낌까지 든다.
이런 벽을 활용해서 PK를 하면 어떻게 될까?
일종의 테마라고 해야 하나.
그런 의도가 곳곳에 숨겨져 있다.
그리고 의외로 쉽게 중앙까지 달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스 퀘이크, 아이스 월, 검은 장벽의 콤보가 생각보다 훨씬 좋다.
“PK 장소론 더없이 좋겠네요.”
“그렇지. 여기서는 싸움 양상 자체가 완전히 달라질 거다.”
나와 재중이 형 말에 다들 동감하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그동안 무기에만 의존했던 싸움 방식이 잡기나 밀치기, 꺾기 등 그동안 잘 쓰이지 않던 대미지가 적은 기술까지 가져다 써야 하는 방식으로 변할 것 같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그렇게 계속 벽을 바라보니 이상한 것이 보인다.
“형, 벽이 좀 이동한 것 같지 않아요?”
“글쎄? 난 잘 모르겠네.”
내가 민감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미묘하게 벽의 끝이 안 맞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어느 정도로 움직였는데?”
“우리가 가만히 서 있으면 몇 분 안에 죽을 정도요.”
내 말에 우리 팀이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요? 그럼 빨리 가요.”
이쁜소녀가 벽에 밀려서 죽고 싶지는 않은지 얼른 가자고 재촉한다.
“자리싸움을 아예 못 하겠습니다. 여기서는.”
방패전사의 말에 재중이 형도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다른 PK 방식에 자리까지 잡을 수 없다라…….
혼란의 연속인가?
확실히 의도된 느낌이 든다.
“일단, 이동하죠.”
내 말에 모두 자리를 정리하고 움직였다.
지금 알고 있는 정보가 나중에 어떻게 돌아올지 잘 모르겠지만 현재 할 수 있는 것은 계속 움직이는 것뿐이다.
***
“막혔습니다.”
방패전사가 골목을 돌고 난 뒤에 돌아보면서 말했다.
“또요?”
이쁜소녀가 질린 표정을 짓는다.
“이게 몇 번째죠?”
챠밍도 표정은 비슷하다.
“일곱 번째네. 막다른 골목만.”
나르샤가 정확하게 기억하는지 대답한다.
그것도 불만이 섞인 목소리로.
“난감하네.”
재중이 형도 어이가 없다는 듯 그저 웃어 버렸다.
“잠시 쉬죠.”
사실 몇 번이나 반복되는 미로에 서로 좀 민감해져 있다.
특히, 이렇게 압박받듯 자리를 계속 옮겨야 하는 상황에서는.
그리고 어디가 어딘지 전혀 알 수 없는 지금은 더 그렇다.
“역시 맵은 안 되는 걸까요.”
이쁜소녀가 몇 번 시도해 보다가 지도를 껐다.
우리도 처음엔 몰랐는데 어느 순간부터 맵이 전혀 적용되지 않았다.
미로라는 특성상 이게 맞긴 한데 불편한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운전하다가 차량 네비를 꺼버리고 지도 없이 먼 지역을 찾아가라는 것과 비슷하다.
계속 가다 보면 찾겠지 하고 쭉 가는 것도 처음이야 할 만하지 반복되면 힘들다.
“조금 지치네요.”
챠밍도 힘든 소리를 잘 안 하는데 이번엔 꽤 힘든 모양이다.
우리의 HP 관리를 현재 챠밍이 도맡아서 하고 있어서 그런지 더 피곤해 보인다.
우리야 마음대로 날뛰면 된다지만 논—타켓으로 정확하게 힐을 넣어주는 챠밍의 입장에서는 전체를 계속 살펴야 하니까.
본인도 몹들의 상태에 따라 계속 움직여야 하고 힐도 물약 소모가 최소한이 되도록 적절하게 넣어야 하고, 심지어 적재적소에 필요한 마법도 넣어가면서 공격도 해야 했다.
처음부터 전형적인 힐러를 했던 것도 아니라서 그런지 꽤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다.
혹시나 실수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고.
지금처럼 물약을 극한까지 아끼는 상황이 아니라면 부담이 덜할 텐데.
“좀 더 여유 있게 해도 괜찮아요.”
“그래도…….”
“한 번에 모든 것이 될 거라고 생각 안 해요. 여차하면 다시 돌아와도 되니까, 너무 부담 가지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오늘만 날인 것은 아니니까요. 지금 팀원 전부 그렇게 생각할 걸요?”
내가 주변을 돌아보자 모두 그렇다는 듯 눈을 마주쳤다.
“네, 고마워요. 마음이 좀 편해지네요.”
챠밍이 내 말을 충분히 이해한 듯 그제야 미소 짓는다.
휴, 챠밍은 어떻게 넘어간 것 같고…….
보고 있으면 은근히 아슬아슬한 구석이 있다.
남은 물약은 60 퍼센트 정도인가.
“다시 움직이죠.”
내 말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몹의 종류가 바뀌면 어느 정도 들어왔는지 가늠이라도 해볼 텐데, 던전형 필드라 그런지 구분이 힘드네.”
형 말대로 이런 던전형 필드는 층수가 없다.
던전과 다르게 보통은 중심부로 갈수록 더 강한, 이를테면 엘리트급의 몹이 나온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지금쯤 몹 패턴이 변했어야 한다.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다면 말이죠.”
“그래.”
막다른 골목을 돌아 나와 전에 가지 않았던 방향으로 길을 틀었다.
재중이 형이 말한 것이 효과가 있었나?
아니나 다를까.
두 번 정도 골목을 꺾자 전혀 다른 몹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사, 궁수, 방패병만 줄줄이 보다가 다른 몹이 나오자 힘든 것을 잊고 모두 환한 웃음을 지었다.
“빙고.”
“정말 나왔어요.”
“다행이네요.”
재중이 형, 이쁜소녀, 챠밍이 기쁨을 참지 못하고 한마디씩 했다.
‘라미아 마법사’
한 손에 푸른 구슬을 들고 있는데 아마 마법구 같은 것으로 보인다.
“돌아가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방패전사가 먼저 통로의 끝에 있는 라미아 마법사들을 보고 달려들 준비를 했다.
【 라이트 쉴드! 】
방패전사가 라이트 쉴드를 켜고 통로로 들어서자 멀리 있던 마법사들에게서 물기둥이 길게 쏘아지기 시작했다.
뭐지, 저건.
지금까지 봤던 마법과는 궤가 다르다.
단발로 된 구 형식의 마법이 아니라 마법사에게서 끊이지 않는 물기둥이 직선으로 날아와 방패전사의 방패를 강타했다.
“큭!”
방패전사가 방패로 막아서자 발이 끌리며 몸 전체가 뒤로 밀려나 버렸다.
한 번 막아보더니 방패를 접고 통로 밖으로 빠져 나왔다.
“어때요?”
“워터월드에서 물기둥 맞는 기분인데요? 방패로 막으면 괜찮은데, 직접 맞으면 아마 엄청 깎일 겁니다.”
일단 라이트 쉴드에 +7강 방패로 막은 상태에서도 피해가 제법 있어 보인다.
저런 마법은 검으로 쳐낼 수도 없고…….
어쩐다.
“흠, 돌파될 거 같아요?”
“멀리서는 몇 발씩 날아와도 막고 전진하고 다시 막다 보면 가능할 것 같은데……. 지척까지 다가간다면 모험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방패전사 혼자서는 돌파를 못 한다는 소리인가.
난감하네.
그렇게 계속 마법사들을 쳐다보다가 문득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방패전사님, 방패 여분 남는 것 있죠?”
“있긴 한데……. 같이 막으면서 가실 생각이라면 말리고 싶습니다. 라이트 쉴드가 없으면 버틸 수가 없어요.”
방패전사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뭐,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죠.”
내 말에 모두의 표정이 물음표로 물들어 간다.
“가죠. 마법사 잡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