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113화 누가 우리의 적인가? (8)
악마가 우리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라…….
일단, 사장님이나 재중이 형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어서 최대한 말을 아꼈다.
이런 쪽으로는 아무래도 나보다 3세대를 경험한 사람들이 훨씬 경험이 풍부하니까.
“거참, 할 말 있으면 아까 하지 뒷북이 심하네.”
“아까 악마가 입을 열기도 전에 형이 머리를 날렸잖아요. 기억 안 나요?”
“아아, 그랬던가?”
재중이 형이 내 말을 듣더니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때는 입을 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던데? 상황을 파악해 보니까 이건 아니다 싶었겠지. 원래 급한 놈이 먼저 손을 내밀거든.”
재중이 형 말대로 우리가 쟁을 정리하는 동안 꽤 긴 공백이 있었다.
그 정도의 시간이면 돌아가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제우스와 이야기를 나눠볼 정도의 딱 그런 시간.
사장님이 현재 상황을 정리하고는 말을 꺼내셨다.
“제우스가 정말 빠지기로 했나 보구나. 악마가 바로 두 손 드는 것을 보니까.”
확실히 제우스가 빠져 버린다면 사신 길드 단독으로는 이 쟁을 오랫동안 끌고 갈 수 없다.
둘이 함께해도 싸움이 될까 말까인데.
“사장님, 이제 마무리하시죠.”
재중이 형이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하긴, 이번에 생각보다 많이 싸웠지. 길드원들 피로도 장난 아니고.”
사장님 말대로 길드원 숫자가 적다 보니 모두 접속 시간 내내 긴장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우리 숫자로는 로테를 돌릴 수가 없으니까.
싸운 사람이 다시 싸우고 또 싸우고 하다 보면 재미는 둘째 치고 일단 지친다.
“길게 갔으면 우리도 꽤 힘들었을 겁니다.”
재중이 형 역시, 동조하는 말을 했다.
쟁이 걸린 상황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나나 재중이 형, 우리 팀은 접속 시간 동안엔 무조건 강행군이다.
심지어 VRS를 나가서도 대기를 타야 할지도 모르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신이 물고 늘어진다 해도 절대 지지 않을 확신이 있다.
다만, 그때부터는 진짜 귀찮음과 피로의 싸움이다.
“그럼 악마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한 번 들어보자꾸나.”
***
“오랜만이네?”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도발이라면 그만두지?”
“거참, 딱딱하네. 그리고 큰소리칠 입장은 아니지 않나?”
악마가 재중이 형의 말에 부들부들 떠는 것 같이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사람 속 긁어놓는 건 진짜 재중이 형이 최강이다.
“어디,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했을까?”
하르페에 있는 우리 길드 건물 1층 응접실에 악마가 찾아와 앉아 있었다.
적대 상태를 반영하는 붉은색 아이디를 가진 악마가 적진 한가운데 포위당하듯 앉아 있는 것도 참 이색적인 그림이라고 해야 하나?
적대 상태인 길드원은 언제든지 어디에서나 죽일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길드 건물에 와 있다는 것은 그만큼 상황이 악마에게 불리하다는 의미다.
“길드장하고 이야기하고 싶다.”
악마의 그 말에 재중이 형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아무 말하지 않고 뒤로 물러섰다.
어차피 누구와 이야기하든지 결과는 똑같을 텐데…….
뭐, 악마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네.
우리가 현실에서 서로 술 한잔 기울이는 사이라고는 생각도 못 하는 것 같으니까.
사장님이 앞으로 나서자 악마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길마님, 거두절미하고 이번 한 번만 넘어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흠,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이쪽도 손해를 많이 봤으니까요. 그동안 누군가 시비를 계속 거는 탓에 사냥부터 시작해서 길드원 모집도 제대로 못하고, 거기다 유적지 관리만 해도 시간이 걸리는데 지금 올 스톱입니다. 얼마나 피해가 심각한지 아십니까?”
“죄송합니다. 사실 저희도 제우스가 유혹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피해를 드리게 됐습니다.”
본의 아니게?
듣고 있으려니 어이가 없어 재중이 형을 바라봤더니 재중이 형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흔든다.
<주호> 그냥 죽일까요?
<불멸> 일단 보고 있어 봐. 나도 지금 죽이고 싶은데 참는 중. 사장님하고 이야기 중이니까.
“우리가 아는 이야기하고 전혀 다릅니다만? 사신 쪽에서 제우스를 끌어들여서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건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상당히 이야기가 와전된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 쪽은 저기 있는 주호님 정도만 스카우트하려고 했던 것뿐입니다. 오히려 제우스가 최강 길드를 박살 내니 어쩌니 하면서 설쳤죠. 이쪽에서는 과하다는 입장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가 먼저 동맹 제의도 했지 않습니까.”
말은 진짜 번지르르하게 잘하네.
모르는 사람이 들었으면 진짜 혹해서 넘어갔을 수도 있겠다.
“처음 붙었을 때 나타나면서 했던 말들하고는 많이 다릅니다만? 우리를 둘러싸고 이 숫자가 안 보이냐고 자랑하시던데.”
“그건…….”
“뭐, 됐습니다. 이유야 어찌 됐든 그쪽에서 먼저 우리를 친 것은 사실이고, 그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를 듣자고 지금 여기 앉아 있는 것도 아니고.”
사장님 말대로 이유야 어찌 됐든, 지금은 쟁이 일어났고 우리가 이기고 있으니 무슨 말을 해도 악마에게 답은 없다.
“이쪽도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죠. 해체하시죠. 시간은 이틀 드리겠습니다. 게시판에 사과문도 올려주시면 좋겠습니다만 힘들다면 굳이 안 하셔도 됩니다.”
사장님의 단호한 말을 듣던 악마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건 어떠십니까? 이번 한 번만 신경 써주시면 우리 쪽에서 최강 길드의 피해를 어느 정도 보전해 드리도록 하죠. 거기다 우리가 앞으로 도와드릴 일이 적지 않을 겁니다.”
“도와줄 일이라면?”
“뭐, 길드를 운영하다 보면 평판 때문에 손대기 힘든 그런 일들 있지 않습니까. 누굴 좀 몰래 쳐야 한다든지, 사냥터를 뺐는다던지 하는 것들요. 그것 외에도 도움 드릴 일이 많을 겁니다. 그러니까 서로 이쯤에서 좋게 끝을 봅시다. 최강 길드만 모르는 척 살짝 빠져주시면 됩니다.”
악마의 말에 사장님이 살짝 생각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흠, 우리가 빠진다고 해도 이쪽에 가담한 길드가 적지 않습니다만.”
“그쪽은 우리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어차피 최강 길드만 빠져주면 나머진 오합지졸이니까요. 말 나오지 않도록 우리가 잘 처리하도록 하죠. 지금은 우르르 몰려 있어도 어차피 다 패배자들이니까요. 조금만 겁주면 마치 없었던 것처럼 사라질 겁니다.”
<주호> 하, 진짜 나쁜 새끼네요.
<불멸> 그렇지?
<주호> 네, 어떻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가 없는지…….
아까부터 계속 마음에 걸렸던 것인데, 계속 조건을 말할 뿐이지 결코 한 번이라도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를 않는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덮겠다고 끝까지 흥정만 할 뿐.
“악마님, 착각하시는 부분이 있는데 지금 이쪽엔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신 측에 당한 수많은 길드가 함께 하고 있죠. 그런데 우리가 돈이나 약속을 받고 떨어져 나가면 우리 입장은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보신 겁니까?”
“그건…….”
“그리고 애초에 협상할 상대를 잘못 골랐습니다. 차라리 우리 쪽에 모인 길드의 사람들을 모아놓고 사과라도 하셨다면 좋게 끝날 수 있던 문제인데…… 악마님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래.
사장님이 말씀하신 저 부분이 가장 크다.
악마는 전혀 미안하지 않다.
지금까지 해온 그 모든 것이.
자기가 당하는 순간에도 전혀.
어떻게 그 한마디를 뱉는 것이 저렇게 힘들까.
미안하다는 그 한마디가.
“다들 나오시죠.”
사장님이 2층 복도로 향하는 계단을 올려다보면서 말을 하자 계단을 통해 한 명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각양각색의 길드 마크를 달고 있는 십여 명의 남녀가 계단 난간에 서서 말조차 하지 않고 악마를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모두 우리 측에 가담한 길드들의 대표들이다.
그리고 악마의 말을 모두 듣고 남은 감정은 오직 분노뿐이다.
그 모습을 본 악마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아까부터 오합지졸이라느니, 패배자라느니 온갖 좋지 않은 소리를 다 했는데 그 소리를 길드의 대표들이 전부 들어버렸다.
“이게 무슨…….”
“잘 보셨습니까? 이 사람들이 사신이 해체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만약, 악마가 조금만 다르게 행동했다면 한 푼조차 들이지 않고 저 사람들을 돌려보낼 수도 있었을 텐데…….
아무리 게임 속이라지만, 그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다.
말 한마디에 울고 웃을 수 있는.
악마는 저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쳤다.
그리고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
“결국, 해체 수순을 밟네요.”
“아아, 돈으로 해결할 단계는 지났지.”
삼일이라는 시간이 더 흘렀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버티던 사신 길드가 사방에서 죄어오는 압박을 견디지 못해 이탈자가 하나둘 나오더니 어느 기점을 지나자 순식간에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사냥터 없이 시간을 허비했으며 장비도 계속 떨어뜨리다 보니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진 것이다.
쟁을 좋아해서 버티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계속 지는 싸움만 하게 되면 누구라도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전 사신 출신이라는 타이틀.
이걸 앞에 달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른 곳에서 좋은 소리를 듣긴 힘들 것이다.
“악마는요?”
“잠적.”
“그런가요?”
“그래, 그 아이디로 더 활동하기는 힘드니까.”
이미 게시판엔 악마가 그간 해온 행적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올라와 있었다.
베스트 게시물에 뽑힐 정도로 열성적인 관심을 받으면서.
전 사신 길드였던 사람들의 폭로와 제보까지 이어져 사신 길드가 며칠 동안 아주 가루가 되도록 까이기도 했고.
힘이 있어야 패악질도 할 수 있지 힘이 없어진 지금은 온갖 길드로부터 보복을 당하면서 제대로 된 운영조차 힘든 실정이다.
그에 반해 제우스는 소리소문없이 사라져 버렸다.
최강 길드에서 떨어져나간 길드라는 것을 빼면 애초에 주목도가 있던 길드가 아니었던 것도 있고 활동 자체가 거의 없었으니까.
그리고 제우스가 데리고 있던 인원들도 공중으로 붕 떠 버렸다.
예전에 우리 길드에서 있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제우스가 돈으로 끌어들인 사람까지 모두.
돈을 주는 물주가 사라지자 곧장 다른 길드를 찾아서 전전하고 있다고 한다.
“쓸 만한 사람들은 없어요?”
“있긴 했는데…… 과거가 화려해서 패스. 원래 사신 출신이었던 애들은 그냥 악마랑 성향이 비슷해. 나중에 들어간 애들은 전 길드 배신하고 들어간 애들도 많고. 제우스 쪽은 말할 필요도 없지.”
제우스 길드에는 우리 길드에서 빠져나간 사람들이 많다.
그 사람들은 이유 불문하고 무조건 제외다.
검은 잉크 위에서 놀다 보니 온몸이 잉크 자국으로 가득한 셈인가…….
제우스 때를 생각해 보면 이제는 좀 골라가면서 받아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사장님이 공개 모집 한 번 할 거야. 그것과 별개로 스카우트도 따로 하고.”
“앞으로 바쁘겠네요.”
정말 이제는 몸집을 좀 불려야 한다.
언제까지 우리끼리 이렇게 버틸 수 없는 노릇이니까.
이번 쟁으로 확실하게 알았다.
쪽수가 진리라는 것을.
소수의 엘리트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쪽수가 돼야 싸움이 된다.
그리고 이번에 얻은 장비도 빨리 처분해야 한다.
풀리는 템이 많아져서 값어치가 내려갈 때가 됐으니까.
일단, 길드원들에게 좀 더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장비를 공급하고 남는 것은 경매로 돌릴 생각이다.
“거기다 새 유적지도 찾아야 하는데 손이 몇 개라도 모자라겠네요.”
“그래, 그래서 말인데…….”
재중이 형이 할 말이 있는지 잠시 뜸을 들였다.
뭐지?
“너만 괜찮다면 앞으로 1진과 2진으로 나눌 생각이다.”
길드를 나눠?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금 길드는 사장님에게 맡기고 우리는 새 길드를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