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96화 빛이 머무는 곳, 유적지 (4)
“미믹!”
“오우거!”
챠밍과 이쁜소녀의 짧고 청아한 외침.
정말 잡고 싶은데 도저히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어 손가락만 빨던 그 몬스터들이 드디어 온다.
“무조건 오우거부터 잡죠.”
방패전사도 파워글러브가 눈에 아른거리는지 벌써 정신을 놓아버린 것 같다.
“전에는 한 마리밖에 못 잡았으니까. 이번은 다르지.”
재중이 형도 눈빛을 불태우고 있다.
반드시 잡겠다는 그런 각오가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다.
“미믹도 놓칠 수 없어요.”
나르샤는 미믹 쪽에 더 관심이 가는 모양이다.
여러 스킬이 나올지 모르는 보물상자를 열 수 있으니까.
이미 방패전사가 그 덕을 독특히 보고 있다.
“둘 다 중요하지만 최대한 많이 잡아야죠.”
길드 포인트로 1등을 먹고, 개인 순위에서도 상위권에 있어야 이번 방어전이 의미가 있다.
모자란 하르 조각을 한 번에 모을 수 있는 기회다.
거기다 이번이 전과 다른 것은 경험.
우리만 경험했다는 그 작은 차이.
그 차이가 이번 방어전의 성과를 결정할 것이다.
어떤 식으로 방어전을 치를 것인지 상의를 하다 보니 배가 어느새 베네아 부둣가에 도착했다.
근처에는 바다에서 급히 회항한 배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어 보인다.
“진짜 배가 많긴 많네요.”
수백 척이 넘는 배가 한 번에 부둣가로 들어와 버리니까 배를 댈 자리가 너무 부족해 꼭 부둣가가 아니더라도 근처의 해안에 배를 대고 난 뒤 헤엄쳐서 도시로 들어가는 사람들도 보였다.
겨우 배를 대서 부둣가에 내리니 사람들이 몇몇 NPC에게 붙어 방어전에 대해서 묻는다고 주변이 인산인해다.
좌판을 열어놨던 사람들도 하나둘 자리를 걷고 일어나 그 행렬에 참여하는 중이고.
거기다 주변 거리에 사람들이 일제히 접속하는지 여기저기서 로그인으로 인한 빛기둥이 솟아났다가 사라진다.
“서버의 축제네요. 채팅 창이 아주 난리가 났습니다.”
방패전사가 채팅창을 끌어와서 보고 있으니 우리도 다 확인하기 시작했다.
항상 물건 사고파는 글이 계속 올라오곤 하는데 지금은 다르다.
채팅창에 글을 쓰면 1초도 지나지 않아서 위로 사라져 버릴 정도로 채팅창이 요동치는 중이다.
―베네아 방어전이 뭐죠?
―나도 모름. 처음 듣는데.
―성벽에 가봐라. NPC들이 퀘스트 줌. 베네아에 달려드는 몬스터 잡으면 된단다.
―NPC한테 물어보니까 길드 보상하고 개인 보상으로 하르 조각 준단다.
―하르 조각 지금 진짜 비싸던데. 보상 좋네.
―오, 정보 감사.
―여기 저주받은 숲인데 몬스터들 미쳤음. 사람들 무시하고 다 베네아 쪽으로 달리기 시작함. 트렌트, 드라이어드 같은 나무들도 때로 뭉쳐서 간다.
―거기도 그럼? 필드에서도 난리 났음. 우리 쌩까고 전부 베네아 방향으로 몰려간다.
―으아, 오우거 발견. 미쳤다. 진짜 크네. 밟히면 최소 사망각. 3m는 되어 보이는데?
―트롤에 골렘도 우르르 간다. 이것들도 엄청 크다.
―킬러비, 호넷 같은 벌들도 우르르 가는 중. 쏘이면 죽겠다. 사마귀처럼 생긴 맨티스도 따라가고.
―언데드들도 우르르 몰려감. 쟤들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거지? 근처에 언데드 사냥터 있음?
―못 보던 몬스터가 진짜 많음.
―아씨, 괜히 쳤다가 다굴 당해서 마을로 도망 옴.
―나도 일단 베네아로 귀환 탔음. 자리고 뭐고 의미가 없다. 몹이 있어야 잡지.
―지금 필리언 서버 사람들 접속한다고 마을 안도 난리 났음.
―우리 길드 애들도 접속률 장난 아니다. 쉬던 애들 다 들어왔다.
―이거 저녁 시간대라 어지간한 애들 다 들어올 것 같은데.
―지금 베네아 성벽에 올라가 봐라. 몬스터들 끝이 안 보이게 모여 있다.
―성벽에 그만 좀 올라와라. 자리 없거든?
―우리도 지금 올라와서 보는데 최소 몇천은 넘어 보이는데? 곧 만 단위 간다.
―내려가서 싸우다 다굴 당하면 최소 사망.
―무식한 놈. 성벽 끼고 싸워야지. 미쳤다고 내려가냐.
―그래도 내려가야 템도 좀 주워 먹지 않음?
―자살은 혼자 하자.
―우리도 숫자 많지 않나? 서버 애들 다 접속하면 만 단위는 가볍게 넘을 것 같은데.
―십만 예상 중.
―에이, 필리언 서버 애들이 몇 명인데 최소 오십만 예상한다.
“게시판도 난리입니다.”
방패전사가 게시판을 끌어와서 보다가 상황을 한 마디로 압축한다.
채팅창, 게시판 할 것 없이 지금은 베네아 방어전으로 이야기만 가득한 상태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나?
평소 이 시간대에 접속하지 않던 사람들까지 모두 접속을 하면서 베네아 거리가 완전히 막혀버린 상태다.
“마치 월드컵 거리 응원 나온 것 같습니다.”
방패전사가 이 와중에 그런 소리를 하는데 전혀 다르지 않다.
일단 인파 속으로 들어가면 오갈 수 없는 딱 그런 상황.
한참 사람들을 밀어가면서 외곽으로 빠지니까 그나마 움직일 수 있어 겨우 사장님이 이끄는 우리 길드 사람들과 외곽에서 만났다.
“바로는 못 가겠는데요?”
재중이 형도 어이없어하는 중이다.
“일단 방어전 메시지를 듣자마자 필요한 것부터 준비했다.”
사장님도 한 번 겪어봐서인지 이번엔 준비를 철저하게 한 모양이다.
“압축 노란 물약도 가져왔지.”
“압축 노란 물약요?”
처음 듣는데?
“우리 길드 공적치가 오르니까 연금술사가 개방해 주더구나. 효과는 두 배. 가격은…….”
사장님이 차마 말을 못 하고 뜸을 들이신다.
“가격은요?”
“열 배.”
그 말에 우리 팀의 표정이 다 굳는다.
정말 비싸다는 말이다.
길 가면서 500원짜리를 계속 바닥에 던지는 것과 비슷할 정도의 효율이라고 해야 하나.
“장난 아니네요.”
재중이 형조차 놀랄 정도의 쓰레기 효율.
“그래서 안 쓸 거냐?”
“아뇨, 당연히 써야죠. 효율이 쓰레기라도 단기전에서 두 배 효과면 감사하죠.”
이쯤 되면 돈이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라지 쉴드와 보우는 전의 경험을 토대로 준비한 모양이다.
물약을 좀 덜 채우더라도 이것이 있고 없고가 장기전의 향방을 가늠할 것이다.
“발목 안 잡으려면 이 정도 준비는 해야지.”
방어전 때 우리만 남아서 싸웠으니까 이번에는 최대한 버티겠다는 각오가 보인다.
다들 장비가 좋아져서 그때처럼 바로 나가떨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
“우리가 이번에 인원이 반으로 줄었으니까 길드 보상 1등을 먹으려면 고생 좀 해야겠다.”
“알고 있어요.”
우리가 장비가 좋아졌듯 다른 상위 길드들도 본 대륙으로 넘어와 돈질을 하면서 장비가 상당히 좋아진 상태다.
거기에 우리 인원은 다른 길드의 1/4 수준.
이번에 확실하게 우위를 점한다는 보장이 없다.
내가 뒤를 돌아보자 방패전사, 챠밍, 이쁜소녀, 나르샤가 모두 각오를 다지고 고개를 끄덕인다.
길드 랭킹 1위라…….
고작 1/4의 인원으로 전체 1위를 하려면 정말 죽을힘을 다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모두 개인 인벤에 물약을 꽉꽉 눌러 담고 성벽을 향해 갈 준비를 마쳤다.
“넌 방패랑 활은 필요 없을 거니까 차라리 물약을 더 담아.”
재중이 형이 내게 말해주는데 이미 뺐다.
“첨부터 넣지도 않았죠. 형도 필요 없잖아요.”
피차 마찬가지.
재중이 형과 바라보면서 서로 웃었다.
“더없이 좋은 무대가 될 거다. 우리 길드를 알리기에. 그리고 너라는 녀석을 알리기에.”
“딱히 더 유명해지고 싶지는 않네요.”
내 말에 재중이 형이 피식 웃는다.
과연 그렇게 될까 하는 그런 눈빛으로.
***
우여곡절 끝에 긴 줄을 따라 겨우 성벽까지 도달했다.
여기까지 오는데 무려 1시간이나 걸렸으니 더 말을 해서 뭐하겠는가.
베네아에서 저주받은 숲까지 탈 것으로 달려도 30분인데.
교통체증도 이 정도면 욕 나오는 수준이다.
《 베네아 방어전에 참여하시겠습니까? 》
성벽에 도달하자 역시나 뜨는 시스템 알림에 모두 참여하는 것으로 확인을 하니 성벽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활성화되면서 그대로 성벽 위로 올라갔다.
“와! 사람들 대박. 진짜 많아요.”
“정말 끝이 안 보이네요.”
성벽 위로 올라가 주변을 둘러보자 이쁜소녀는 깜짝 놀란 표정을. 챠밍은 자그마한 감탄을 내비친다.
전에는 성벽 밖의 몬스터 부대를 보고 놀랐다면 이번엔 전혀 다르다.
동서를 가르는 성벽을 따라 수많은 길드마크가 도열하듯 쫙 늘어져서 성벽 위를 가득 메우고 있다.
“이거, 장난 아닌데요?”
방패전사마저 엄청난 인원에 잠시 눌린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 베네아 방어전이 시작됩니다. 》
“드디어 시작이네요.”
어딘지 모를 길드들 사이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난 뒤에 조금 더 기다리니 방어진이 시작한다는 시스템 알림이 들리고 몬스터들이 성벽을 향해 일제히 달려오기 시작했다.
웅장함.
그 한 마디로 차마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몬스터 군단의 진격에 성벽까지 울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 박력에 놀란 건지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벽이 방어한다고 해도 저 정도 수의 압도적인 몬스터에 겁이 안 나는 사람은 절대 없다.
우리도 전에 그랬으니까.
그나마 지금은 주변에 사람들이 빽빽하게 많으니까 동요가 적을 뿐이다.
“전보다 훨씬 많은 것 같아요.”
챠밍이 눈대중으로 살피다가 숫자가 월등히 많아 보여서 의아해한다.
“확실히 전보다 몇 배는 많아 보이긴 하네요. 우리 쪽도 이번엔 숫자가 많으니 괜찮을 겁니다.”
우리가 늘어난 만큼 저쪽도 숫자가 늘어난 모양이다.
“시작은 활부터.”
사장님의 오더가 전부 전해지자 우리 길드원 중 대다수가 라지 보우를 꺼내 들었다.
적당히 강화가 되어 있어서 그렇게 딜이 좋다고는 못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백배 낫다.
“뭐지? 저 길드는?”
“활을 꺼내 드는데?”
“어? 최강이다!”
“랭킹 1위가 있는 길드 맞지?”
성벽 밖의 몬스터에게 가 있던 시선이 우리가 활을 꺼내 들고 성벽의 끝 쪽으로 나란히 서자 그제야 우리를 알아보고 많은 길드와 유저가 섞여 있는 난잡했던 상황 속에서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역시, 1위 길드는 다르네. 준비성 봐라.”
“왜 우리는 저런 생각을 못 했지?”
“활 여분 있는 사람? 빨리 빌려줘!”
저 말에 뭔가 속이 찔리는 기분이다.
우리도 1회차 때엔 전혀 생각도 못 했으니까.
이래서 경험이 중요한 거다.
어느 정도 몬스터 군단이 달려오자 사장님의 신호가 들려온다.
“쏴!”
멀리 날려 보내기 위해 라지 보우를 위로 들어 올려 라이트 웨폰을 입히고 풀 차징한 화살을 쏴 올렸다.
이것도 나르샤가 모두에게 가르쳐준 방법이다.
멀리 날릴 수 있을뿐더러 화살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박히는 대미지가 상당하다고.
그 말대로 우리 길드원의 손을 떠난 화살이 포물선을 그리며 하늘 높게 올라갔다가 빠르게 하강하면서 최전방에서 뛰어오던 몬스터들의 몸에 내리꽂히니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몇몇 몬스터가 나뒹굴기 시작했다.
바로 옆에서 우리가 쏘는 모습을 보고는 곧장 다른 유저들은 어설픈 폼으로 활을 높게 들어 올려 하늘로 화살을 쏘아댔다.
그게 신호가 된 듯 전 성벽에 파도타기 하듯 전달되면서 수백 발이 넘는 화살 비가 하늘로 일제히 쏴 올려졌다.
마치 영화에서나 볼 것 같은 하늘을 빽빽하게 채운 화살 비에 왠지 압도되는 기분이 든다.
네임드 활도 제법 있는지 중간중간 파랗고 붉고 노란 화살들도 다수 날아가 수많은 몬스터를 바닥에 구르게 했다.
우리끼리 쐈을 때와는 사뭇 다른 상황.
그 장엄한 화살 비의 세례에 전율이 인다.
몬스터 군단의 전열이 화살 비에 뒤집히듯 엎어지자 그 뒤를 따라 달리던 몬스터들도 같이 엉켜서 엉망이 됐다.
도미노가 무너지듯 우르르 무너지는 광경에 성벽 위에서 엄청난 함성이 성벽을 울리듯 퍼져 나왔다.
수많은 몬스터의 포스에 눌렸던 사람들이 이제야 긴장이 해소된 것 같아 보인다.
“시작이 괜찮네. 아무리 죽어도 되는 게임이라지만 이렇게 쫄면 이길 것도 못 이기니까.”
재중이 형이 옆에서 상황이 괜찮다는 말을 해준다.
실제로 커다란 전쟁에 참여한 것 같은 그런 긴장된 모습이 모두에게서 보였는데 지금은 다들 즐기는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다.
이어서 마법사들도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강한 공격을 성벽 밖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 파이어 월! 】
【 아이스 월! 】
의외로 멀리 있는 곳에서도 누군가 파이어 월과 아이스 월을 쓰는 모습이 보인다.
“이제 우리만 쓰는 마법이란 것은 없지. 케르베로스를 잡기 시작했으니까.”
재중이 형은 올 것이 왔다는 그런 얼굴이다.
파이어 월이 태우고, 아이스 월이 얼리고 그 위로 수백 발의 화살 비와 각종 화려한 불, 얼음, 전기 등 단일 마법들의 이펙트에 눈이 부실 정도다.
“일단 길드 랭킹은 선방했네요.”
“아, 그렇지. 생각보다 많이 처지지는 않네.”
수천 개가 넘어가는 길드 중에 100위 안에 일단 이름은 올리고 있다.
“라지 보우를 들고 온 것이 주효했지.”
아직 성벽에서 몹이 올라오지 못해 다른 길드의 근거리들은 손가락만 빨고 있는 반면에 우리는 상당수가 원거리로 변해서 화살을 쏘고 있으니까.
인원의 부족을 임시방편으로 잘 메운 셈이다.
그렇게 많은 마법과 화살 비가 쏟아지는 대도 불구하고 결국 성벽에 몬스터들이 달라붙었다.
그것도 중형급 몬스터가.
오우거가 성벽을 어깨로 차징하자 성벽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으앗! 이게 뭐야.”
“미친, 오우거.”
“아무 곳이나 붙잡아!”
우리야 이미 알고 있어서 성벽의 난간에서 떨어진 곳으로 미리 옮겨온 상태지만 이걸 까맣게 모르던 사람들이 성벽 난간에서 공격을 하다가 오우거가 만들어낸 지진에 자세를 못 잡고 그대로 성벽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무 준비 없이 성벽 아래로 떨어진 사람들의 최후는 안 봐도 뻔하다.
각종 몬스터 사이에서 이리저리 치이다가 순식간에 HP가 바닥나 빛으로 변해 사라져 버렸다.
그 모습에 사람들이 서로 난간에서 멀어지려고 밀치다가 난리가 났다.
그렇게 주변에서 서로 밀어내고 욕하고 난리인데도 내 관심은 오직 하나다.
오우거.
오우거를 보는 내 눈이 더할 나위 없이 빛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왔구나. 파워글러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