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84화 지하수로 (3)
방패전사 저 사람, 진짜 스케일이 남다르다.
네 마리, 다섯 마리까진 좋았다.
몹을 구석으로 밀어 넣는 것만 하면 마법이 알아서 녹여주니까.
한 마리씩 잡던 것도 나쁘지는 않는데 솔직히 말하면 많이 편하기도 하고.
열 마리도 어느 정도 힘겹게 하면 충분하다.
다만, 그 숫자가 15마리가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진짜 지옥이 시작된다.
바로 지금처럼.
“뭐해! 손이 놀잖아!”
“양손 다 바쁜 것 안 보여요?!”
재중이 형이 스파크 윙드 스피어를 강하게 풀로 휘두르면서 구석에서 튀어나오는 프로그맨을 다시 제자리로 처박아 넣는다.
그리고 나도 쉴 새 없이 아이스 소드와 카스카라로 결빙과 마나 흡수를 연달아하면서 몹이 못 움직이게 만들고 있다.
솔직히 아이스 소드를 이렇게 다시 꺼내 들지 몰랐는데 카스카라와 한 세트로 묶이니까 거의 무한 결빙이 가능해졌다.
아이스 소드도 결빙을 하려면 마력이 들어가는데 그걸 카스카라가 커버해주니까.
생존을 위한 블러디아와 카스카라.
순간 폭딜을 위한 플레임 소드와 카스카라.
그리고 몰이 시 몹들을 묶어두기 위한 아이스 소드와 카스카라의 합은 더없이 좋은 시너지를 내고 있다.
튀어나오는 프로그맨의 무릎과 발목, 허리를 내가 결빙시켜놓으면 바로 이쁜소녀가 나선다.
“소녀님!”
“네, 지금 들어가요!”
내 신호에 이쁜소녀가 리치가 긴 양손검을 아주 강한 풀 스윙으로 휘두르면서 튀어나오려던 네 마리를 한꺼번에 다시 구석으로 처박아 넣는다.
그리고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빠르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튀어나오는 족족 양손검으로 때론 밀고 때론 휘두르면서 몹을 예쁘게 모아준다.
어느 순간 어떤 몹이 튀어나올지 미리 감지라도 하는 것처럼 미리 앞에 대기해 한 마리도 못 튀어나오게 구겨 넣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방패전사는 구석에서 라이트 쉴드를 켜고 막다가 어글이 풀려서 몹들이 사방으로 튀어나가려고 하자 슬쩍 빠져나와서 카이트 쉴드를 강한 힘으로 휘두르고 밀쳐내 한쪽 라인을 완전히 틀어막아 버렸다.
방패전사가 저런 식으로 하지 않았으면 벌써 15마리 중 대다수가 풀려나갔을 거다.
그리고 어김없이 떨어지는 파이어 월에 프로그맨이 그대로 구이가 돼서 사라져간다.
경험치 바를 슬쩍 보니까 차이가 확 날 정도로 차오른 것이 보인다.
한 마리씩 컨 해가면서 깔짝깔짝 잡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경험치다.
“방 세 개라……. 살짝 위험했는데 계속할 거야?”
나르샤가 슬쩍 방패전사에게 가서 이야기한다.
아무리 방패에 라이트 쉴드를 입힌다고 해도 전신 부위 모두를 막아주는 것은 아니다.
그저 방패전사의 센스로 이리저리 위험한 곳만 빠르게 막아서 버티는 거니까.
모는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위험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음, 해보니까 할만은 한데? 솔직히 방 두 개는 너무 무난하잖아.”
“뭐, 그렇긴 하지만. 너 이번에 피 거의 바닥까지 갔거든? 안 될 것 같으면 두 방만 해.”
“여차하면 나한테 힐을 걸어도 되고. 너무 걱정하지는 마.”
“누가 걱정했다고 그러냐?”
그러면서 나르샤가 방패전사의 정강이를 깡 차고 돌아섰다.
“악! 저게.”
감도가 아주 낮춰져 있어서 현실처럼 아프지는 않겠지만 급소로 판정되는 부분은 상당히 느낌이 온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이 정도쯤 돼야 긴장이 좀 됩니다.”
내가 방패전사에게 물으니 전혀 문제없다는 듯 웃어 보인다.
“그럼 다시 가실까요?”
뭐, 방패전사만 괜찮다면야 말리고 싶은 마음이 없다.
오히려 환영이지.
***
“이러다가 컨 실력이 다 죽겠는데요.”
내 옆에서 윙드 스피어를 휘둘러 몹을 구석으로 처넣고 있던 재중이 형에게 말하니 형이 피식 웃는다.
그리고 구석에 박힌 프로그맨 위로 파이어 월이 쏟아진다.
“마냥 이런 식으로만 잡을 순 없을 테니까 지금을 즐겨둬.”
“썩 좋은 예고는 아니네요.”
“엘리트 이상은 결국 싸워서 잡아야 하니까.”
몰이도 가능한 선이 정해져 있다는 거다.
“지금도 지하수로에 우리만 잡고 있으니까 이렇게 할 수 있지……. 사람들이 한 방마다 가득 자리 잡고 있어봐라.”
“생각하기도 싫네요.”
“어, 내가 늘 말하지만.”
“사람이 없이 우리만 사냥하는 사냥터가 최고라는 거죠?”
내 말에 재중이 형이 미소 짓는다.
“잘 배웠네.”
다시 튀어나오는 프로그맨을 경직시키고 발로 처넣으니 파이어 월의 범위로 들어가서 통구이가 된다.
지금 제일 고생하는 건 다름 아닌 방패전사인데 여전히 방패전사는 즐거워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취향이 정말 남다른 것 같네요.”
“좋은 게 좋은 거지.”
재중이 형이 피식 웃으면서 드랍 템을 루팅하고 있으니 이쁜소녀가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보물 상자가 더 안 보여요.”
쭉 오면서 내심 기대하고 있던 이쁜소녀가 계속 찾는데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다.
“쉽게 나오진 않는가 봅니다. 거기다 열쇠도 쉽게 구할 수 없고.”
보물 상자가 잘 안 보이는 문제는 둘째 치더라도 열쇠도 그렇게 많은 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미믹이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보이면 일단 최대한 많이 잡아야겠는데…….
이건 길드원들한테 물어봐야 하려나.
“그러고 보니 오우거는 어떻게 됐어요?”
미믹은 보너스니까 좀 뒤로 미룰 수 있어도 오우거는 진짜 빨리 찾아야 한다.
“아직, 찾고는 있다고 하는데 쉽지 않네. 사냥터를 안쪽까지 파고들어야 하는데 아직은 무리지.”
“그건 아쉽네요.”
직접 써본 결과 현재 이보다 괜찮은 방어구는 없다.
한두 번 더 아이템이 변화하더라도 쭉 쓸 수 있는 그런 템.
네임드 템 아래로는 현재 알고 있는 가장 비싼 아이템이 될지도 모르니 남들보다 빨리 찾아서 좀 잡아놔야 한다.
“할 건 많은데 몸이 부족하네요.”
“중요한 것만 챙겨야지. 다 하려고 하면 몸이 남아나질 않아.”
그렇게 중간중간 보이는 일반 프로그맨들을 잡으면서 1층을 돌아다니다 보니 입구를 기준으로 삼십여 블록을 지나오자 지하수로 통로가 점점 넓어지면서 더 이상 프로그맨들이 보이지 않는다.
“계속 넓어지네요. 뭔가 나오긴 할 모양입니다.”
방패전사가 선두에서 다소 분위기가 이질적으로 변한 지하수로를 계속 살피고 있다.
“묘하게 분위기가 다른 것 같아요.”
챠밍도 분위기가 변해가는 것을 느끼는 모양이다.
조금 더 수로 자체가 짙어지고 깊어지는 것 같은 기분에 검을 쥔 손에 좀 더 긴장감이 맴돈다.
“수로 배치가 점점 복잡하게 바뀌어 갑니다. 이거 지도 없으면 길 잊어먹기 딱 좋겠는데요.”
방패전사가 지나가면서 몰이를 하면 어디쯤까지 몰고 와서 멈춰야 하는지 계속 확인 중이다.
지형을 보는 시선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우리에겐 그냥 길과 구석일 뿐이지만 방패전사에겐 최전선의 참호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좀 더 깊게 들어가다 보니 확연히 넓어진 중간 방에서 아까 전과는 전혀 다른 삼지창과 휘어진 검, 녹슨 활을 들고 있는 새로운 프로그맨들이 등장했다.
이름이 일꾼, 사냥꾼 등등 다양한데 그 뒤로 2m 크기의 덩치가 큰 투사가 거대한 검을 들고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다.
“쟤만 엄청 커요.”
이쁜소녀가 머리가 두 개는 더 큰 프로그맨 투사를 보더니 움찔한다.
“혹시 엘리트일까요?”
챠밍이 물어보는데 방패전사도 확신이 안 서는지 조금 망설인다.
“만약에 엘리트면 한참 잡아야 할 텐데 몰고 난 뒤에 버텨질지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몇 블록 넘게 달려오면서 방패전사가 프로그맨이란 프로그맨은 전부 몰고 다녔는데 저건 몰아질지 아닐지 아직 견적이 안 나온 모양이다.
“쫄이 너무 많아서 한 번 몰기는 해야 할 텐데.”
일반 몹이 12마리, 투사가 한 마리인데 그냥 달려들어서 바로 잡기에는 좀 부담스러운 숫자다.
“여기 말고 다른 길은요?”
“없죠. 아니면 처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건 무조건 잡아야 한다는 소리다.
“일단 몰겠습니다. 안되면 그때 방법을 찾죠.”
“잠시만요,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죠.”
내가 고생을 좀 해야겠지만.
***
“그럼, 주호님 믿고 갑니다.”
방패전사가 신호를 주고 곧장 달려나간다.
프로그맨 일꾼, 사냥꾼 등을 요리조리 피해 가면서 한 대씩 치고 지나가니까 프로그맨 머리 위로 독이 걸렸다는 이펙트가 걸린다.
온몸이 칼에 긁히고 삼지창에 찔리면서도 전진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활을 들고 있는 사냥꾼까지 한 대씩 다 치고 지나가니까 열 마리의 몹들이 우르르 방패전사의 꽁무니를 따라간다.
몹들 사이로 서 있던 엘리트 프로그맨 투사까지도.
넌 가면 안 되지.
【 매직 애로우! 】
카스카라를 들고 있던 손을 들어서 오랜만에 마법 영창을 했다.
내 손에서 뻗어져 나간 매직 애로우가 빛처럼 쭉 뻗어져 프로그맨 투사의 머리를 툭 치고 지나간다.
한 번 더.
다시 매직 애로우를 날려서 머리를 맞추자 그제야 고개를 돌려서 날 바라본다.
이게 방패전사와 짠 계획이다.
쫄은 전부 방패전사가 몰고 가고 엘리트만 나 혼자 맡는 그런 임무의 배분.
두 손에 든 카스카라와 블러디아를 꽉 쥐었다.
“고생해라. 빨리 끝내고 오마.”
“조심하세요.”
“최대한 빨리 올게요.”
내 옆으로 재중이 형, 챠밍, 이쁜소녀가 지나가면서 한 마디씩 건네고 간다.
그리고 나르샤가 고개를 살짝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하고 같이 달려간다.
옆을 지나가던 모든 사람을 완전히 무시하고 프로그맨 투사가 큰 양손대검을 들고 내게 쿵쾅거리면서 뛰어온다.
【 라이트 웨폰! 】
멀리서 달려오는 프로그맨 투사를 보고 바로 무기에 하얀빛을 입히자마자 프로그맨 투사 역시도 양손대검에 녹색 기운을 가득 채웠다.
쿵쿵거리면서 달려오던 프로그맨 투사가 왼쪽 어깨 위로 커다란 양손대검을 무겁게 들어 올리더니 달려오던 힘을 그대로 싣고는 곧장 아래로 내려친다.
아직 몇 미터 거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빠르게 내려쳐지는 양손대검에서 녹색 기운이 반달처럼 빠져나와 내게 엄청난 속도로 쏘아져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프로그맨 투사의 양손대검에서는 거짓말처럼 녹색 기운이 사라진 상태다.
미처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날아오는 녹색 반달 기운을 카스카라와 블러디아를 교차시켜서 아슬아슬하게 머리 위로 쳐냈다.
막는 것과 동시에 내 발이 바닥에 끌리면서 확 뒤로 밀려 나간다.
내려치는 힘에도 영향을 받는 건지 마치 양손대검을 그대로 막은 것 같은 타격이 그대로 전달되는 느낌이다.
쾅!
머리 위로 쳐올려진 반달 기운이 천장과 부딪치더니 마치 폭탄이 터진 것 같은 충격음을 내면서 주변을 뒤흔들었다.
“갑자기 뭐야?”
이쪽에서 폭탄 터진 소리가 나자 재중이 형이 급하게 외친다.
“그냥 이놈 좀 세요.”
“힘들면 도와줘?”
“아뇨, 혼자 해볼게요.”
이놈을 쓰러뜨리면 혹시 이 기술을 드랍 하는 건가?
만약에 나오면 앞으로 상대방 궁수들이 도망가는 건 확실하게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바라보니 다행스럽게도 라이트 웨폰과 비슷한 기운이 싹 사라져 있다.
아마 저 기술을 자주 쓸 수는 없는 모양이다.
그대로 달려드는 프로그맨 투사에게 나도 역시 뛰어들어서 달려들었다.
내가 접근하자 프로그맨이 입에서 이상한 녹색 가스 같은 것을 주변에 내뱉는데 범위가 꽤 넓기도 하고 이미 안으로 파고들다 보니 피하는 것이 불가능해서 일단 그대로 치고 들어갔다.
그리고 바로 걸리는 독 디버프.
녹색 안개 자체가 독인 모양.
챠밍은 저 멀리서 우리 팀과 몰이 중이라 내게 큐어를 해줄 여유가 없다.
다시 빠르게 내려치는 양손대검을 카스카라로 궤도만 슬쩍 바꿔서 밀어내고 블러디아로 투사의 허리를 가르고 지나갔다.
그러니 독 때문에 줄어들었던 HP가 다시 차오른다.
한 대 맞자 프로그맨 투사가 제자리서 로켓이 솟아오르듯 높이 점프를 하자 빠르게 뛰어서 바로 프로그맨 투사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내가 있었던 자리를 투사가 힘차게 내려찍는데 그와 함께 주변으로 퍼지는 충격파에 몸이 들썩인다.
혹시 몰라서 멀리 떨어졌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충격이 온다.
손발이 저릿저릿한 것이 느껴지는데 다시 투사가 달려든다.
다시 횡으로 휘둘러지는 대검의 궤적에 카스카라를 붙이다시피 밀어 넣어 옆으로 당기니 대검이 완전 엉뚱한 곳으로 날아간다.
이것을 할 때마다 힘이 흘러가는 실 같은 것이 보이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든다.
마치 다른 세상이 보이는 것 같이 느껴지는 그런 미묘한 감각이 카스카라를 타고 계속 흐른다.
동시에 블러디아를 당기듯 무릎을 긋고 이어서 카스카라를 당겨 다시 한 번 그었다.
엇나간 대검이 바닥에 박혔다가 다시 들리는데 그사이 다시 두 검을 한꺼번에 모아 무릎을 베어내면서 투사 뒤로 빠져들어 가 자세를 낮추고 돌면서 오금을 2연타로 베어냈다.
무릎 주위에 한 번에 6연타가 들어오자 프로그맨 투사의 움직임이 현저하게 느려진 것이 보인다.
뒤로 돌면서 대검을 횡으로 휘두르자 카스카라와 블러디아를 겹쳐 대검을 위로 올려친 다음 무릎을 2연타로 내려치고 옆으로 빠지면서 2연타, 다시 뒤로 돌아가 오금을 2연타로 갈랐다.
검이 두 개라는 이점.
하나로 빗겨내면서 동시에 파고들어 공격할 수 있고 여차하면 두 개로 동시에 빠르고 강하게 딜을 넣을 수 있다.
남들보다 월등히 빠른 딜 사이클이 돌아온다는 거다.
폭풍처럼 두 검을 몰아치면서 무릎을 계속 공략하자 투사가 결국 한쪽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췄다.
달려가 그대로 무릎을 밟고 어깨를 밟은 뒤 점프해 공중에서 체중을 싣고는 카스카라와 블러디아의 날을 세워 그대로 머리를 강하게 내려찍었다.
완벽한 크리티컬이 터지면서 투사가 몸을 부들부들 떤다.
자세가 완전히 무너져 두 무릎을 꿇고 있는 투사의 뒷덜미를 두 검으로 빠르게 그어대니 투사가 별 반항도 못 해보고 곧장 쓰러졌다.
이건 너무 빠른데…….
무심코 내 손에 들린 블러디아를 바라보았다.
너…….
단순히 HP만 채워주는 녀석이 아니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