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80화 화제의 중심에서 (5)
사신 길드와 어떤 일면식도 없는데 뜬금없이 연합이라…….
재중이 형도 이건 미처 생각 못 했는지 어느새 팔짱을 풀고 고민에 빠진 모습이다.
“생각지도 못한 패를 들고 오셔서 좀 난감하네요.”
“뭐,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실 문제는 아닙니다. 저흰 실력 있는 그쪽 분들하고 인연을 맺고 싶으니까요. 신흥 강자 아닙니까. 저희도 사실 어제 깜짝 놀랐습니다. 그냥 놀랐다는 말로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요.”
우리 때문에 랭킹이 밀린 사람들이 어떨까 궁금했는데 반나절도 안 돼서 알게 되네.
아주 충격적이었다는 말이겠지.
“뭐, 단순히 인연만 맺자고 말씀하시는 건 아닐 테고…… 이야기를 들어는 보죠. 여긴 자리가 별로니 저쪽에서.”
재중이 형이 가리킨 곳에 바다를 바라보면서 운치 있게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벤치가 있다.
대화 자체는 별로 운치 있진 않겠지만.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악마가 괜찮다는 듯 먼저 앞장선다.
“이야기가 길어질 수도 있으니 잠시 할 거하고 기다리고 있어. 너무 멀리는 가지 말고. 아주 길어지진 않을 거다.”
“거절 안 하시네요?”
“일단 이야기만 들어보는 거지. 지금 돌아가는 상황 파악도 좀 할 겸. 저렇게 뜬금없이 연합하자고 할 놈들이 아니야. 두 수 세 수 앞을 내다보고 노는 놈들이라서.”
“나중에 알려주세요. 우리는 조합 건물 옆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말을 마친 재중이 형도 멀리 있는 벤치로 갔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요?”
이쁜소녀가 궁금해하는데 나도 딱히 이런 건 아는 게 없어서 대답해줄 게 없다.
“혹시 아는 거 없으세요?”
이런 건 대체로 방패전사가 잘 아는 편이라 혹시나 해서 물어봤는데 생각에 잠겨 있던 방패전사가 입을 열었다.
“사신 길드 내부 사정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 길드에게 연합 제의를 할 생각은 전혀 없었을 겁니다. 사실 우리 길드 최고 랭킹이라고 해봐야 불멸 님이 22위였으니까요. 사신 길드가 보기엔 그냥 그저 그런 길드였을 겁니다. 어쩌면 길드 이름조차 기억 못 할 정도였을지도 모르죠.”
“그러다가 우리가 랭킹을 하루 만에 확 뒤집어 버리니까 궁금해졌다? 그렇다고 해도 저런 식으로 보자마자 연합을 하자고 하나요?”
“모르니까요. 우리가 어떤 식으로 폭렙을 했는지 모르니까 다가온 겁니다. 보통 이럴 경우 경계를 하면서 힘으로 누르거나 친하게 지내거나 둘 중 하나거든요. 아니면 아예 모른 체한다던가.”
“힘으로 누르기에는 우리를 너무 모르고, 모른 체하자니 찝찝하고 결국 친하게 지내는 방법밖에는 없는 거네요.”
“네, 결론만 보면 그렇게 되는 거죠. 저쪽 입장에서는 우리와 친하게 지내도 손해 볼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요. 당장은.”
“친하게 지내면서 정보를 좀 캐보겠다?”
“뭐, 그렇겠죠. 자신들과 한 라인을 타면 앞으로 이득이 어떻게 있다 하면서 설득하고 있을 겁니다. 자신들의 길드 규모를 내세우면서요. 이 바닥에서는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일단 간을 보러왔다는 거네요.”
솔직히 정보도 우리가 월등히 많고 전체 규모야 좀 쳐지겠지만 에이스 라인은 우리 쪽이 훨씬 견고하다.
이미 선점하고 치고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 지금 이 연합 제의는 결코 달갑지 않은 일이다.
점프하려는데 발에 거머리가 잔뜩 달라붙는 것 같은 찝찝함이 느껴진다.
“아마 불멸 님은 우리보다 이런 것들을 훨씬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딱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내가 말하지 않았음에도 방패전사가 내 의중을 알아채고는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해 준다.
하긴, 재중이 형이 어떤 사람인데.
잡아먹으면 잡아먹지 잡힐 사람은 절대 아니지.
아마 지금도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떻게 이걸 홀라당 벗겨 먹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사자의 입속에 머리를 집어넣은 것도 모르고 열심히 설명하고 있을 악마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오려고 한다.
“우린 아이템 정비나 좀 하고 있죠. 제가 지금 인벤이 엉망이라서요.”
내 말에 모두 각자 인벤을 정리하고 아이템이나 스킬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번쩍!!
《 강화에 성공하셨습니다!! 》
『 +4 블러디아 / 출혈 13 (9+4) 타격 9 (5+4)
민첩+1, 체력 흡수+1 』
4강까지 해놓고 손에 블러디아를 쥐었다 폈다 한다.
길이는 카스카라와 비슷하고 검신 자체에 붉은 기운이 약하게 맴돌고 가드 부분이 붉은 날개처럼 펼쳐져 있는 것이 특징인 장검이다.
“이번에도 파랗고 붉은 검이에요.”
이쁜소녀가 지나가듯 말해주는데 생각해 보니 틀린 말이 아니다.
전엔 플레임 소드와 아이스 소드를 애용했으니까.
지금은 둘 다 완전히 인벤 속에 잠들어 있는 중이다.
중첩 자체만 보면 팔기가 애매하긴 한데 장기전을 생각하면 무조건 블러디아의 압승이라 앞으로 블러디아와 카스카라가 주 무기가 될 거다.
중첩도 중요하긴 한데 피흡, 마흡 옵션들과 비교하면 좀 쳐지는 감이 있다.
플레임 소드를 팔면 꽤 큰돈이 나올 것이고 바로 재투자할 수 있을 건데 아직은 그 정도로 돈이 필요한 일도 없고.
단기전에선 분명 쓸 만하니 인벤에 모셔두고 천천히 생각해봐야겠네.
무심코 무기들을 번갈아 봤더니 무슨 소드 콜렉터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벌써 번갈아 쓸 무기가 네 종류나 되니까.
그나저나 이거 시선이 꽤 따가운데…….
“쟤들 왜 아까부터 계속 쳐다보죠?”
사신 길드 애들이 멀리서 계속 우리를 흘깃흘깃 쳐다보고 있다.
“아마 우리 템 때문일 겁니다. 완전히 다르잖아요. 구성 자체가. 전부 처음 보는 거니까 눈이 돌아가겠죠.”
“음, 뭐 그럴 수도 있겠네요.”
계속 흘깃흘깃 보면서 아이템들을 눈에 새겨두려고 하는 것이 보인다.
그렇게 백날 봐도 블러디아와 카스카라는 절대 못 구할 건데 미리 애도를.
아마 어떻게 구하는지 알아내려면 한참이나 골머리 썩혀야 할 거다.
“거기다가 우리 랭킹도 있고요.”
그러고 보니 여기 있는 사람들이 필리언 서버에서 전체 랭킹 1∼6위까지 전부 차지하고 있다.
한 길드에 랭커가 한 명 있으면 잘 나가는 길드로 쳐주는데 이건 대놓고 6명이나 있으니.
쟤들 입장에서는 우리가 연예인급이라고 봐도 괜찮지 않을까?
정리를 마치고 잠시 기다리니 재중이 형이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왔다.
“어떻게 됐어요?”
“뭐, 그냥 알고 지내는 사이 정도?”
“걱정했던 길로는 안 가서 다행이네요.”
“우리가 뭐 아쉬워서. 쟤들이 아쉽지. 안 그래도 할 게 넘쳐나는데 쓸데없이 일 만드는 건 사양이다. 저쪽에서도 그냥 선을 좀 놓고 가는 게 목적인 것 같았으니 우리가 먼저 손 내밀 필요는 없어. 우리에게 빨대 꽂을 목적이면 더더욱 필요 없지.”
역시 단호하시네.
“이 바닥에서 제일 무서운 게 뭔지 아냐?”
“글쎄요?”
갑자기 왠 뜬금없는 질문이지?
“힘이 있는데 이상한 신념을 가진 또라이들.”
“흠, 그런가요?”
“어, 그런 놈들이 제일 짜증 나. 지들이 뭔가 되는지 알고 마음대로 휘두르는 놈들. 악마 저놈이 딱 그런 스타일이고.”
왜 갑자기 이상한 말을 꺼내나 했는데 악마 때문에 그런 모양이다.
“반대로 제일 허망한 게 신념은 있는데 힘이 없는 거고. 신념도 없고 힘도 없으면 그냥 그런대로 흘러가겠지.”
“그럼 전요?”
“넌 힘도 신념도 키워나가는 단계지 뭐.”
“왠지 신랄하네요.”
“그냥 그 정도가 딱 좋은 거야. 괜히 오지랖 부린답시고 오만 데 들쑤시고 다니면 답도 없어. 넌 천천히 하나씩 만들어 가면 된다. 내 역할은 니가 이상한데 안 빠지게 도와주는 정도지.”
전에 말한 최고가 되는 게 어떠냐고 물어본 것과 비슷한 건가…….
멘탈 케어 쯤 되겠네.
“넌 그만한 힘을 내포하고 있으니까 네가 어떤 신념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서버 전체가 들썩일 수도 있어. 어제 바닷길 막는다고 잠시 놀았던 거 기억나지? 그게 오래 지속됐으면? 넌 서버 전체의 운명을 들었다 놓았다 한 셈이 되는 거다.”
확실히 독한 마음을 먹었으면 정기선까지 터뜨리고 완전히 해적 놀이를 했어도 됐다.
그럼 진짜 서버 전체가 아수라장이 됐을 거다.
반대로 지금 해적선과 크라켄을 잡을 마음을 먹고 나니 바닷길이 확 열리면서 서버가 전체적으로 물 흐르듯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바닷길 사건들은 좋은 교보재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제가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서 서버 전체의 흐름이 바뀔 수도 있다는 거네요.”
내 마음가짐이라…….
대체 난 어떤 마음으로 이 게임을 하고 있는 거지?
나도 모르게 깊게 생각에 빠져들었다.
미래를 결정할 중요한 기로에 서서.
***
“사람들이 꽤 많이 늘었네요.”
보급을 위해 베네아 상점들을 돌아다니다 보니 간간이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한결같이 우리를 보고 놀라거나 이상하게 쳐다보거나 아님 와서 말을 걸고 가거나 그러는 중이고.
“정말 주목받네요.”
“네 머리 위에 있는 간판이 좋아서지.”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네요.”
마치 만점짜리 수능 성적표를 머리 위에 딱 붙이고 다니는 기분이다.
“주목 더 받기 전에 우린 할 걸 해야지.”
“정보가 좀 들어왔어요?”
“어, 베네아에 지하수로 던전이 있다네. 오픈형이고.”
“그렇다면 네임드도?”
“빙고.”
“발견했데요? 몇 마리나?”
“아니, 단층인지 복층인지 네임드가 얼마나 있는지조차 아직 몰라. 그래도 대부분 던전에 네임드가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결국 우리가 들어가 봐야지.”
재중이 형의 말에 이쁜소녀, 챠밍, 방패전사, 나르샤가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인다.
“새로운 네임드라 기대 돼요.”
“재밌겠어요. 수로 같은 것은 처음인데. 외국 영화에 나오는 수로 같이 생겼을까요?”
“준비할 게 많겠습니다. 지하면 특히.”
“도시 아래라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보급은 문제없을 것 같아요.”
재중이 형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베네아 도시에 있는 던전부터 점령부터 해볼까요? 이 던전이 앞으로 우리 여정의 이정표가 되어줄 겁니다.”
“가요!”
이쁜소녀의 기대가 섞인 외침에 모두가 웃어 보였다.
본대륙에서의 첫 던전인가?
그래, 이제부터가 본무대의 진정한 시작이다.
“띠링! 띠링!”
그때 갑자기 편지가 왔다는 시스템 음이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
“편지가 막 날아와요.”
이쁜소녀가 우편함을 확인하더니 금세 기겁한다.
“벌써 200개가 넘었어요.”
이쁜소녀 뿐만 아니라 방패전사, 나르샤, 챠밍, 재중이 형, 내 우편함까지 미친 듯이 편지가 날아왔다는 시스템 음이 계속 울려댄다.
“귓속말도 똑같아요.”
챠밍이 알림이 뜨는 채팅창을 켜고 역시 놀란 토끼 눈을 한다.
채팅창을 보니 정신없이 생판 모르는 아이디들에게서 글이 막 날아온다.
메일을 몇 개 살펴본 방패전사가 짚이는 곳이 있는지 곧장 홈페이지를 띄우고 게시판부터 확인했다.
“역시…….”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챠밍이 궁금한지 곧장 방패전사에게 물었다.
“지금 우리가 크라켄 잡던 영상 올라갔습니다. 현재 게시판 폭주 상태고요.”
방패전사의 말에 이제야 알겠다는 듯 우리 팀 모두 서로 눈을 마주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드디어 올 게 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