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66화 본대륙 (2)
오랜만에 정말로 푹 잤다.
예상 업데이트 시간까지 거의 20시간이 남다 보니 마트에 가서 장도 보고 밀린 빨래도 처리했다.
“너무 게임만 했지.”
공식 VRS 사용 제한 시간은 하루 16시간.
예전에 재중이 형을 보고 저런 폐인 생활을 할 수 없을 거라고 단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지금 그 패턴을 그대로 따라 하고 있는 중이다.
먹고 자고 게임하고, 다시 먹고 자고 게임하고.
이건 시체도 아니고 거의 하루에 20시간 이상을 누워만 있으니까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산책도 중간중간 조금씩 해줘야 몸이 굳지 않을 것 같다.
조금 시간이 남아서 홈페이지를 확인하니 점검이 끝나길 기다리는 사람들로 게시판이 북적이는 중이다.
―확실히 1서버는 1서버네. 빠르다 진짜.
―우리 서버는 왜 업데이트 안 함?
―잊혀진 고성 깨야지 하는 모양.
―아놔. 우리 서버 랭커들 뭐하냐? 일해라.
―니들이 해라, 쯧쯧 그지 근성 노노.
―케르베로스 한번 잡아보려다 완전 박살 나서 나왔는데 벌써 깬 놈들은 대체 뭐 하는 놈들이지? 우리도 작은 길드 아닌데 거긴 완전 굇수들만 사나?
―소문에 현으로 몇천씩 꽂아야 한다던데?
―그 돈 있으면 그냥 차를 사겠다.
―그래서 너님이 못 깨는 거야.
―내가 그 길드 길드원인데 딱 랭킹 100위까지만 받는다.
―웃기시네, 검색하니 너 랭킹 십만 등인데?
―이제 기존 아이템 다 팔아야 하나요?
―네임드 꼭 잡아야 새 지역 넘어갈 수 있나요?
―선착장 생긴다니까 접속하면 바로 가봐야겠음.
1서버뿐만 아니라 다른 서버 유저들끼리도 의견이 엄청 갈리면서 대부분 새 지역에 대한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있는 중이다.
사실 우리도 새 지역에 대한 것은 하나도 아는 것이 없어서 말이지.
20시간의 긴 업데이트로 점검이 끝날 줄 알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잠시 서버를 열었다가 뭐가 잘못됐는지 몰라도 캐릭터 확인에서 도저히 넘어가지 않아 나와 보니 연장 점검이란다.
게시판은 거의 폭동 수준으로 글이 올라가고 있고 게임사는 죄송하다는 사과 글이 서버가 터진 지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올라왔다.
그렇게 시작된 점검의 퍼레이드.
VRS와 연동된 로스트 스카이의 길드원이나 친구들끼리 연락이 가능한 어플에 접속해 보니 모두 점검이 끝나길 기다리는 중이다.
얼마 전 업데이트 된 오직 채팅과 알람만 가능한 어플이다.
길드에 들었다고 해도 폰 번호나 이름 같은 개인 정보는 일절 알려지지 않고 계정에 등록된 아이디로만 연락이 가능하다.
게임만 하길 원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라서 너무 사생활적인 부분은 건들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기도 하고.
―형, 또 시작인데요.
<불멸> 미치겠네. 알람까지 맞춰놓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젠 잠도 안 와.
―일단 기다려보죠. 열리면 바로 알려드릴게요.
재중이 형도 비슷한 시간대에 일어나서 준비 중이었는데 들쑥날쑥한 점검 때문에 망했다.
그렇게 도합 4시간에 걸친 긴 기다림 속에 겨우 서버가 정상화되었다.
<방패전사> 서버 열렸어요.
―봤어요. 접속할게요.
<챠밍> 들어가서 봬요.
<이쁜소녀> 저도 들어가요.
―형, 지금 들어가요.
<불멸> 어, 확인했다. 좀 이따가 보자.
< 로스트 스카이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 뇌파 확인.
> 주승호. 남성.
> 캐릭터명 주호. 레벨 22.
> 로딩 중…….
플레임 소드의 폭발적인 딜과 파티원들의 전체적인 무기 수준이 올라간 덕분에 렙업도 많이 하고 마지막에 케르베로스를 잡으면서 또 1이 올라가서 지금 22까지 올랐다.
필리언 서버에서 1만 등 안으로 이제야 들어간 상태다.
1만 등이라고 하면 굉장히 뒤로 처져 있는 것 같지만 사실 필리언 서버의 150만 명 중에 1만 등이면 상위 1& 안쪽쯤 된다.
한참 늦게 시작해서 이 정도 따라잡았으면 선방한 셈인가? 이제야 상위 그룹하고 같은 출발선에 선 기분이 든다.
<불멸> 일단 다 선착장으로 모이세요.
접속하자마자 재중이 형에게서 연락이 왔다.
길드 창을 열어보니 길드원 대부분이 접속을 해서 들어와 있는 상태다.
역시 선두 그룹은 선두 그룹이네. 전에 있던 신화 길드와는 접속률부터가 심하게 차이 난다.
―길드원들한테는 어떻게 하죠? 아까도 채팅방에서 의견이 꽤 갈리던데.
솔직히 전체 길드 챗은 그다지 보고 싶지는 않다. 정말 오가는 대화가 삭막하기 그지없어서 쳐다보고 있으면 이게 무슨 회의를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농담 같은 것은 일절 찾아볼 수 없다.
서로 개인적으로는 하긴 하겠지만 당장 보기에는 그런 분위기다.
<불멸> 선착장 일단 가보고. 배가 어떤 식으로 운영되는지 알아야 다음 수를 내지.
재중이 형도 우리와 있을 때만 장난을 치지 길드 챗으로 가면 거의 사무적인 말투고. 사장님도 그러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고 해야 하나.
* * *
[ 공지사항 ]
* 사망 시 경험치가 하락하도록 수정합니다.
* 물에 잠수할 경우 HP가 계속 내려갑니다. 깊이가 깊을수록 더 많은 양의 HP가 감소합니다.
* * *
새로 공지가 떠서 확인해 보니 점검이 늦은 이유가 보인다. 여러 가지를 더 수정한 모양.
공지를 확인하고 지도를 여니 전체 맵이 엄청나게 확장되어 있다.
지금 있는 섬이 1의 크기라고 하면 새로 검은 안개로 블라인드 되어 있는 새 지역은 100이 넘어갈 정도로 차이가 난다.
내가 접속하고 챠밍과 이쁜소녀, 방패전사, 나르샤가 거의 동시에 옆에서 나타났다.
“다들 오셨네요. 출발하죠.”
“바로 선착장으로 가요?”
“네, 조금만 늦으면 엄청나게 붐빌 거 같으니까 바로 출발하죠.”
챠밍의 물음에 곧장 대답해 주고 다 같이 피난민 마을을 빠져나와 헬하운드를 불러냈다.
마음 같아서는 케르베로스를 불러내서 자랑을 좀 하고 싶은데 그 정도로 철이 없진 않지.
아마 케르베로스를 꺼냈다가는 어마어마한 인파에 둘러싸일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헬하운드를 타고 미니맵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한참을 달려나가다 보니 주변으로 온갖 종류의 늑대를 타고 선착장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잔뜩 보인다.
거의 수백 명에서 천 명은 넘어 보인다.
“이거 늦으면 정말 오도 가도 못 하겠는데요.”
방패전사가 옆에서 달리면서 질린다는 표정을 짓는다.
반면에 사람들이 우리가 탄 헬하운드를 흘깃흘깃 쳐다보는 것이 부러움 반, 놀라움 반이다.
당연하게도 헬하운드가 빠르기 때문에 순식간에 수백 마리가 넘어가는 늑대들을 추월하면서 선착장으로 내달렸다.
일반 승용차들 사이에서 우리만 스포츠카를 타고 달리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확실히 명차가 다르긴 다르네요.”
방패전사가 차(?)부심을 잔뜩 부리는 모습에 모두 그저 웃어 보였다.
앞으로 맵이 한도 끝도 없이 넓어질 건데 정말 탈것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벌써 한 발자국 앞을 달리고 있는 셈이고.
그렇게 사람들을 따돌리고 섬의 최북단의 새로 열린 지역에 도착했다.
여기 도착해서야 진짜 우리가 있던 곳이 섬이었구나 하는 것이 실감이 난다.
멀리 쭉 펼쳐진 대해에 파도들이 물결치고 있고 몇몇 돛의 모양과 크기가 다른 배들이 돌을 깔아 만든 선안에 닿아서 닻을 내리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주변을 살펴보니 재중이 형네는 이미 도착해서 선착장의 뱃사람들에게서 정보를 얻고 있는 중이다.
진짜 빠르네.
바로 재중이 형 옆으로 다가갔다. 좀만 지체하면 이제 정말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엉망이 될지도 모른다.
“형, 어때요?”
“일단, 배가 세 종류네.”
“뭐가 다른 거예요?”
“일단 정면에 보이는 제일 큰 소형 카락. 저건 2주일에 한 번 오고 가는 정기선이고 물어보니 정말 2주 후에 출발하더라.”
“2주일이나 걸려요?”
이건 예상을 확 엎는 전개인데? 2주일이나 걸릴 것 같으면 우리가 그렇게 고생해가면서 차이를 벌릴 이유도 없었는데…….
내 실망한 모습에 재중이 형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는다.
“그리고 왼편 부두에 따로 떨어져서 있는 소형 캐러벨, 정식 복장을 입고 있는 선원들한테 물어보니 한 시간 뒤에 출발 가능하고.”
“그럼?”
“그래, 저게 우리가 타고 갈 배다. 케르베로스를 잡고 나온 아이템 중에 갈기털 있었지? 그게 증표더라. 말 걸어보면 퀘스트가 갱신되는데 갈기털이 바로 목록으로 들어가.”
“다행이네요. 꼼짝없이 2주나 기다려야 하는지 알았는데.”
내가 하던 걱정을 챠밍, 이쁜소녀, 방패전사, 나르샤도 똑같이 했는데 다들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안을 따라 오른쪽으로 한참 멀리 코그선들 보이지?”
“네, 저건 엄청 작네요.”
캐러벨과 카락보다 선적할 자리 자체가 적다. 많이 태울 수도 없을 것 같은데.
“저건, 그냥 타면 바로 가.”
뭐지? 조건이 없는 건가?
“흠, 그럼 대체 우리가 타고 가는 배하고 뭐가 다른 거죠?”
“요금이 바가지. 거기다가 수상하기도 하고. 생각해 봐. 우리가 그 고생을 하면서 케르베로스를 잡아야 탈 수 있는 배가 버젓이 있는데 똑같이 갈 수 있는 배? 고작 돈 좀 더 낸다고? 말이 되는 거 같아?”
“확실히 수상하네요.”
방패전사가 듣고 있다가 한마디 한다. 이건 누가 봐도 이상해 보인다.
문제는 이게 수상하다는 것을 우리 밖에는 아무도 모른다는 거다.
챠밍이 곧장 생각을 정리하더니 말을 꺼내 조목조목 집어준다.
“다른 사람들에게 카락은 정기선, 캐러벨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못 타는 배, 코그선은 돈만 내면 갈 수 있는 배로 보이겠네요.”
챠밍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늑대를 탄 천여 명이 훨씬 넘어가는 무리들이 우르르 선착장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재중이 형이 선착장으로 다가오는 수많은 사람을 보고 우리들을 돌아보면서 물어본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이 뭔지 알아요?”
“불구경하고 싸움 구경요.”
형의 질문에 이쁜소녀가 아는 내용이라 곧장 대답했다.
“정답을 맞췄으니 재밌는 구경 좀 시켜드릴게요.”
재중이 형이 몰려드는 사람들을 다시 쳐다보니 모두의 시선이 저절로 돌아간다.
우리야 타고 갈 배가 정해져 있으니 상관없지만 사람들이 선원들과 대화를 해보면 바로 알게 될 것이다.
당장 타고 갈 수 있는 사람이 적다는 걸.
대충 알겠네. 재중이 형이 뭘 생각하는지.
“뭔지 알겠네요.”
재중이 형이 내 말에 음흉하게 웃어 보인다.
“갈 거지?”
“저 빼놓고 가려고 했어요?”
내 말에 재중이 형이 재밌다는 듯 웃는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으로 같이 가자는 표시를 준다.
“가자.”
“다녀올게요.”
나와 재중이 형이 눈을 맞추고는 아직 코크선 근처로 가지 못한 사람들 사이로 숨어 들어갔다.
몇몇의 눈치 빠른 사람들이 코크선으로 가더니 곧장 자기 길드 사람들을 몰래 불러서 타려고 하자 재중이 형을 바라봤다.
“어?! 저놈들 코크선 타고 가려고 하네.”
재중이 형이 먼저 사람들 사이에서 크게 외치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코크선 쪽으로 돌아간다.
“몇 자리 없어! 빨리 안 가면 못 타!”
나도 역시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서 선동을 하기 시작했다.
몇 명만 벌써 타고 날라 버리면 곤란하지.
아니나 다를까 코크선들 앞으로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가기 시작했다.
천여 명의 사람들이 떼로 몰려가는 모습이란 장관이 아닐 수 없네.
순식간에 코크선 중 한 대에 올라타려던 사람들을 에워싸듯 인파가 들이닥쳤다.
“야! 이건 우리가 탄다. 꺼져.”
“죽고 싶으면 들어와. 안 빠져?”
“너희나 빠져. 앞으로 게임하기 싫어?”
“이 새끼들 안 물러서? 우리가 누군지 몰라?”
누군지 어찌 알겠냐만.
“저기도 몰래 타려고 한다. 막아!”
재중이 형의 외침에 사람들이 엄청나게 웅성거리면서 어떻게든 서로 못 타게 몸으로 밀치다가 결국 사달이 났다.
수십 명의 아이디가 주황색으로 변하더니 몇 명이 죽었는지 곧장 붉은색으로 변하자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다 죽여!”
마치 흰 도화지에 주황과 붉은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순식간에 퍼져 나간다.
“슬슬 위험하네, 이제 빠지자.”
“가죠.”
재중이 형이 옆으로 슬쩍 다가오더니 고갯짓으로 빠지자는 표시를 준다.
“이게 정말 될지는 몰랐네요.”
“서로 단 한 치도 양보할 마음이 없으니까. 욕심에 조금만 불을 질러주면 저렇게 되는 거다.”
정말 사람들 욕심이란 게 무섭구나 싶다. 어떻게든 먼저 배를 타려고 칼부림도 마다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아직 싸움이 안 난 사람들 사이로 빠져나와 우리 팀과 사장님 네가 모여 있는 외곽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얼빠진 모습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뭘 하시나 했더니 아예 불을 지르시고 오셨네요.”
방패전사가 우리를 보면서 그저 웃는다.
“가기 전에 애들 경험치나 좀 낮춰주고 가려고요. 저대로 몇 명만 빨리 타고 날라 버리면 싸움이 안 날 것 같으니까 좀 끼어들었죠. 겸사겸사 원수지간도 좀 만들어 주고.”
어차피 다 잠정적인 우리 적이니까. 기회가 있을 때 한 번 눌러주면 좋지.
우리가 일일이 손을 쓰지 않아도 되고. 이런 기회는 잘 없다.
내 말에 재중이 형도 고개를 끄덕인다.
이런 쪽으로는 정말 죽이 잘 맞는다니까.
“팝콘이 있었으면 정말 좋았을 것 같네요.”
다시 바라본 선착장은 수많은 사람이 이미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모를 정도로 뒤엉켜서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