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44화 밟지 않으면 밟히는 곳 (18)
방패전사와 나르샤도 결국 따라나서기로 했다. 따로 이유는 묻지 않았는데 본인들이 괜찮다니까 걱정 안 하기로 했다.
어차피 신화 길드 사냥터는 다 아니까 솔직히 나 혼자서도 치고 빠지면서 한 명씩 보내버리면 얼마든지 죽여서 마을로 보내버릴 수도 있다.
여차하면 우리 팀 사람들도 있고.
다만 이렇게 해서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시간은 우리가 가진 아이템들과 아르 등을 처분하면서 기다리는 시간 정도까지가 마감 기한이고, 이 안에 전부 마무리 지어지려나?
적어도 넘어가기 전까지는 공중분해 되는 걸 보고 싶은데…….
그래서 준비한 것이 있다.
마을 외곽. 정말 외곽 중의 외곽이라 아무도 안 오는 곳. 거기다 건물 뒤로 숨겨진 곳이라서 은밀하게 이야기하기에는 이곳만 한 곳도 없다.
굳이 더 은밀하게 하려면 서로 귓말을 나누는 편이 났겠지만 그래서는 일이 빠르게 진행이 안 되니까.
“안녕하세요. 이렇게 보는 건 두 번째네요.”
“용건은? 우리가 편하게 인사나 나눌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지금 내 앞에는 전에 챠밍에게 장창을 집어 던졌던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가 앞에 우두커니 서서 나를 노려보는 중이다. 헤어도 회색의 장발이라.
얼굴에 칼자국 하나만 있었으면 정말 밖에서는 말도 못 걸 정도로 강한 인상을 풍기는 사람이다.
지금 보니 정말 한 인상한다. 말투도 엄청 거칠고.
“제가 어지간히 싫으신가 보네요.”
“너 때문에 그간 준비해둔 것들을 전부 바닥에 버리게 생겼는데 좋은 소리가 나올 것 같냐? 지금 이렇게 나온 것만으로도 진짜 많이 참고 있는 줄 알아. 본론이나 말해. 어설프게 입 나불대지 말고.”
“기분이 별로이신 것 같으니 짧게 본론부터 가죠. 신화 길드 잡고 싶지 않은가요?”
“너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냐?”
그러면서 이를 으드득 간다. 쳐다보는 눈빛만으로 이미 사람 하나 잡겠네.
방패전사가 전해 준 말로는 신화 길드를 박살 내고 싶은데 단 하나, 오직 나 하나 때문에 그걸 꺼린다고 한다. 건드려봐야 내가 나서면 잡을 방법이 없으니까.
마법은 쳐내서 반사시켜 공격해, 화살은 몇 발을 날리든 죄다 쳐내버려, 방패는 쳐내고 뛰어넘어가서 죽이고, 단검, 장검, 양손검 어떤 무기로도 손도 못 대는데 상대를 하고 싶을까?
쪽수로도 도저히 해결이 안 되는 인간이 하나 딱 버티고 있으니까 욕만 하면서 그저 지켜만 본단다.
괜히 건드렸다가 이번엔 진짜 해체 위기까지 갈지도 모른다나.
방패전사도 이런 건 어디서 그렇게 잘 알아내서 오는지 모르겠다. 1서버로 옮겨도 이런 정보력이 나오려나? 그건 좀 아쉬울지도 모르겠네. 인맥이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쉽게 가죠. 제 머리 위에 보이시나요?”
그제야 내 머리 위를 확인해 보는 회색 헤어 사내, 백골이 눈에 이채를 띄기 시작했다.
이름이 백골이라니. 전에 봤을 때도 그렇지만…… 이 사람은 진짜 주변 신경 안 쓰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이름을 짓고 얼굴도 험악하게 만들었다.
“길드 표시가? 길드에서 나왔냐?”
“네, 아시겠지만 길드 탈퇴하면 일주일은 같은 길드에 재가입 불가능한 건 아시죠?”
“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제가 좀 꼴 보기 싫은 인간들이 있거든요. 그래서 손 좀 빌리고 싶은데요?”
“너무 솔직한 것 아냐? 보통은 빙빙 둘러서 다른 소리만 하는데.”
백골의 험악했던 표정이 슬슬 풀리는 것처럼 보인다.
척하면 척, 저렇게 머리를 써가면서 길드를 숨기고 뒤에서 장난 칠 정도라면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이미 다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된다.
아니면 진짜 머리는 다른 곳에 있으니 못 알아듣고 다시 물어보려나.
뭐 일단은 당첨인 모양.
“신화 길드를 좀 건들고 싶은데 우리 손을 빌리고 싶다? 왜지? 너 혼자서도 충분하지 않나? 그리고 이게 함정이 아니라고 어떻게 장담하지? 신화 길드를 잡다가 네가 갑자기 난입이라도 하면 우리가 상당히 곤란해지는데 이걸 믿으라고? 특히, 너 외에도 그 푸른 머리 여자. 그런 마법을 갈겨대면서 안쪽으로 숨어버리면 정말 짜증 나는데.”
이런, 괜한 의심을 사버리면 곤란하지. 이쪽도 꽤나 바쁘니까. 그렇다고 데리고 와서 보여주긴 좀 그렇고.
“저희가 확실히 참전 안 한다는 보장이 있어야 움직이겠다는 말로 들리네요.”
“바로 알아들으니 이야기는 편하겠네. 확신이 필요해. 어차피 우리도 신화 길드에 받아낼 빚이 많으니까.”
뭐, 나는 어쩌지를 못하니까 제외겠지만 신화 길드 자체는 잡아먹을 수 있다 이거네.
솔직히 내가 빠지면 신화 길드는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켈베로스 길드를 못 이긴다. 애초에 전력비도 안 맞고, 개개인 실력도 꽤 차이 나니까.
길마도 멍청한 것이 내가 없으면 못 이긴다는 것도 모르나? 인맥이 이성을 막아버린 건가 싶기도 하고. 뭐, 그 인맥 때문에 쫄딱 망하는 건 보고 가야겠다.
“일단, 제 팀이 전부 켈베로스 길드에 가입하도록 하죠. 저희가 길드를 나가지 않는 이상은 공격당할 일은 없겠죠? 거기에 신화 길드를 칠 시간 동안만 저희는 잠시 나가 있는 걸로 하죠. 마음 같아서는 같이 껴서 좀 치고 싶긴 한데…… 괜히 의심 살 짓은 하고 싶지 않네요.”
그러면서 살짝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우리가 습격하는 시간을 알려주는 건? 아니면 갑자기 접속해서 길드를 풀고 난입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테냐.”
거참, 의심 정말 많은 사람이네. 우리가 참가 안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 아님, 피해를 줄이려고 그러나.
“길드 목록을 보고 저희가 접속해서 길드를 풀면 바로 빼시면 되지 않습니까. 전 이번 한 번으로 끝낼 생각이 없습니다. 앞으로 삼일 안에 적어도 스무 번 이상은 박살 내 주셨으면 좋겠거든요. 그러려면 당연히 길드를 풀면 안 되겠죠?”
“뭐 때문에 그렇게까지 신화 길드를 싫어하게 됐는지 모르겠는데. 한때 한솥밥 먹던 사람들 아닌가?”
백골이 이제는 꽤 풀린 표정으로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물어온다. 자기네들 입장에서는 이 말도 안 되는 딜이 어이가 없겠지.
“길드 사람들이 싫은 건 아닌데요, 그냥 제 돈 떼먹은 인간이 윗대가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어서요. 자꾸 귀찮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고. 전 그런 건 못 참아서요.”
“흠, 그래?”
“한 가지 더 약속해 드려도 되나요?”
“뭐, 우리에게 좋은 거라면.”
“삼일 안에 해체 각까지 나오게 해주시면 저희가 가진 네임드 무기와 방어구 전부 켈베로스 길드에 팔아드리죠. 물론 가격은 제대로 쳐 주셔야 합니다.”
“음. 그건 좀 확실히 당기는데? 이전까지 했던 다른 어떤 말보다 그게 더 끌리네. 가격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1서버 기준으로 가죠? 아무래도 거기가 거래가 활발하니까요. 다른 서버는 매물도 잘 없지 않나요?”
“거기 기준이면 좀 비싼데.”
“뭐, 삼일 안으로 완전히 해체 시켜주시면 10% 할인해드리죠. 30명 기준으로 스무 번을 탈탈 털어버리는 정도면 뭐, 아쉽지만 그냥 좀 더 비싸게 팔 겁니다. 그 이하로는 그냥 다른 곳에 경매로 넘기기로 하죠. 경매로도 엄청 나올 겁니다. 저 진짜 많이 양보해드리는 거라는 거 아시겠죠?”
“하! 그건 의욕이 막 솟는데?”
지금 네임드 무기가 쉽게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세트로 잔뜩 넘기는 일 자체는 아예 없다. 지금 네임드 무기들은 돈을 막 얹혀줘도 못 산다. 그런데 한 길드에 많아 봐야 한 개도 없는 것을 이렇게 다 넘긴다?
이건 엄청난 미끼다. 안 물 수가 없다.
백골의 저 표정을 봐라. 저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
거기다가 제한 없이 털다 보면 쌓이는 템도 만만찮을 터.
“지금부터 딱 72시간 안에 해체 못 시키면 아예 디씨는 없는 걸로 하지. 이건 자존심 문제니까.”
그러면서 주먹을 불끈 쥔다.
“뭐, 잘 부탁드립니다. 제 손으로 끝내고 싶긴 한데 시간이 좀 없어서요.”
나 혼자 열심히 치는 것도 괜찮은데 나를 피해 도망 다니면 며칠 안으로는 답이 없다. 이럴 때는 다수가 다수를 먹어 치우는 편이 훨씬 낫지. 거기다 아주 이를 벅벅 갈고 있으니까.
“연락은? 그리고 끝나고 확실하게 네임드를 건넨다는 보장은?”
“음, 저희가 접속 종료하고 두 시간마다 한 번씩 다시 접속해서 상황을 보는 걸로 하죠. 자러 가기 전엔 미리 말씀드리죠. 아주 탈탈 털어주시죠. 그리고 사이트에 미리 물건을 3일 이후로 해서 올려놓겠습니다. 확실히 처리해 주시면 거래 완료만 누르면 되도록요.”
“그 정도면 됐군.”
“뭐, 신화 길드를 삼일 동안 탈탈 털면 엄청나게 떨어질 건데 그것만 해도 충분히 이득 아닙니까? 저희 아이템은 보너스라고 생각하시죠.”
“보너스가 더 크니 문제지. 아무튼 알겠습니다. 지금부터는 고객님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걸로. 아니면 정말 끝까지 따라다니면서 게임 못하게 만들 겁니다.”
적이었다가 고객으로 변하니 바로 존댓말로 변하는데? 태도 변화가 엄청나네. 이로써 승낙인가.
“좋으실 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내가 악수를 청하자 백골이 가볍게 받아주고 곧장 자리를 떴다. 바로 귓말을 날리는 것으로 봐서는 벌써 시작된 모양이고.
내가 나서서 바로 털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이럴 때 써먹어야지. 굳이 내 손을 더럽히지 않더라도. 우리 팀끼리 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는 문제도 있고.
어차피 네임드는 서버를 넘어가면 어떻게든 팔아먹어야 하니까 이런 식으로 미끼로 쓰는 것이 최선이다.
그 덕분에 의욕을 활활 불태워드린 것 같으니. 거기다가 털면서 떨어지는 것도 상당할 테고, 전에 싸워서 진 템들은 순식간에 복구가 될 거다.
그렇게 커진 켈베로스 길드는 어차피 내 알바도 아니고. 아르쉴라에서 커지든 말든 이제 내 관심 밖이다.
방패전사에게 바로 귓말을 넣었다.
―잘된 것 같네요.
<방패전사> 그게 정말 됩니까? 넘어왔어요?
―네, 삼일 동안 아주 피바람이 불 겁니다.
<방패전사> 잘하면 진짜 넘어가기 전에 해체될지도 모르겠네요.
―뭐, 그렇게까지 안 돼도 켈베로스 길드가 여기 남아 있으면 언젠간 해체되겠죠. 자기들 건든 길드를 그냥 놔둘 놈들이 아니던데요? 백골 눈빛을 직접 한 번 보셨어야 했어요. 살벌하네요.
<방패전사> 계속 털리다 보면 길드 탈퇴하는 애들도 늘어날 거고 그럼 유지가 불가능하겠죠. 아, 길마랑 그 여자 표정을 보고 가야 속이 시원할 것 같은데요.
―마지막 날 영상 통화라도 해보죠. 뭐. 재밌겠네요. 그것도.
***
켈베로스 길드의 백골과 만난 뒤 정확히 70시간 뒤.
주제를 모르고 처음에 맞상대한 것부터 시작해서 계속 삐걱거리더니 몇 번의 쟁 끝에 외성 2구역의 사냥터를 통째로 뺏겨 버렸다.
그 후, 보이는 족족 칼질당하니 마을에서 나오지도 못한 상태로 이틀이란 시간이 지나갔고.
끈끈할 것 같았던 신화 길드원들의 대거 이탈을 시작으로 결국 운영진과 일부의 길드원만을 남기고 버티기에 들어갔다가 켈베로스 길드에서 길드 마크 안 떼면 앞으로 무한 척살에 들어간다고 하니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해체되고 말았다.
“진짜로 했네요?”
챠밍이 얼굴 가득 놀라운 표정을 짓는다.
“그러게요. 멀쩡한 길드 하나를 저렇게 해체 시킬 수 있다니. 그런데 저 정도 되는 켈베로스 길드가 주호 님 한 명 때문에 못 움직이고 있던 것이 더 놀랍네요.”
방패전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꼬시다.”
이쁜소녀도 즐거워한다. 속이 후련하지 않으려나.
그것과는 별개로.
“덕분에 한참 할인해줘야 할 판이네요.”
내가 작은 한숨을 쉰다. 저것도 다 돈인데.
“그러네요. 정말 할 줄은 몰랐는데.”
방패전사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이다.
해체 시킨 것만 보면 좋은데 받을 돈이 줄어드니까.
“해체했으면 좋은 거죠.”
나르샤가 딱 정리를 끝내준다.
확실히 기뻐할 일이군.
다들 서로 바라보면서 환하게 웃는다. 우리 손으로 했든 남들 손을 빌렸든 어쨌든 목표 한 바를 끝내고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게 됐다.
“그럼, 영상 통화를 연결해 볼까요?!”
방패전사가 웃으면서 연결을 한다.
인맥질의 마무리를 볼 시간인가?
이건 팝콘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렇게 머리 위에 길드 마크가 사라져 초라해진 전 길마와 부길마 여자의 똥 씹은 듯한 표정을 감상하면서 아르쉴라 서버에서의 장정을 마무리 지었다.